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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에 작동되는 심리적 알고리즘이나 잘못 또는 교훈을 보여주는 관점을 찾기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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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안의 쓴 물을 치료하라!
주제 : 쓴물, 치료, 격려, 회복
성경 : 출 15:22-27
예배 :
장소 :
시간 :
※ 여기 제공되는 내용은 오직 본문에 관한 설명과 주해를 중심한 것입니다. 적용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내용은 본인이 만들어 채워야 합니다. 또한 ‘*’ 표시가 있는 문단은 내용의 핵심적인 주제이거나 또는 추천 인사이트입니다.
※ 본문의 구조 및 특성 : 이 부분의 내용은 본문의 특성이나 문맥상의 위치 또는 전체적인 배경 등의 전이해를 위한 것입니다. 참고 이해 정도로 보시되, 필요시 설교 본문 중에 설명 자료로 쓸 수도 있습니다. - 본문의 사건은 이스라엘이 광야 여정에서 경험한 첫번째 상황이 실패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 실패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 이 본문이 그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가르침이다. 곧, 물의 치유는 상황의 치유가 아니라 사람의 치유이다. 그래서 구조적으로 ‘여정의 출발점에서 여정의 최고점으로’, ‘쓴 물에서 단물로’, ‘백성들의 불만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라는 교차구조를 지니고 있다. - 본문 2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품성을 선언하는 문장인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내용은 그 문장의 강조 용법(뒤의 참고 참조)이나, 또는 치료의 대상이 물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문의 여정은 사실상 우리네 신앙생활의 여정을 축소주의적으로 기록하여 그 구조를 보여주는 교훈이다. 더욱이 그 구조와 과정의 끝이 ‘엘림’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 본문은 특별히 우리 신앙생활의 내면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적용점을 가지고 읽는 것이 유익하다. - 본문 27절은 문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독립 문장으로 보인다. 또한 그곳에 물 샘 열둘이 있고,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다는 설명도 무언가 상징적으로 보인다. 그 다음 기록인 16:1을 그냥 그곳 엘림을 떠나서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언가 따로 있는 것이다. - 본문에서 쓴 물을 달게 하는 나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나무라든지, 또는 홍해에서 마라까지의 사흘길이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인 사흘에 대한 예표라든지 하는 것은 연결점의 근거를 비약시키는 알레고리적 왜곡에 불과하다. 비슷한 수나 비슷한 용어만 나오면 모든 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오류는 말씀의 본질도 아니고 정확한 말씀을 전해야 할 사명에 대한 배신 행위이기도 하다. |
Structure A. 홍해에서 마라로 : 피할 수 없는 내 안의 쓴 물 (22-24절)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B. 치료하는 여호와 : 쓴 물을 달게 하는 치료법 (25-26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C. 마라에서 엘림으로 : 다시 맛보는 단 물 (27절)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
Introduction
* - 오늘 본문의 직전에는 홍해의 장엄한 승리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가 갈라지고, 애굽 군사들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눈으로 보고, 그리고 기쁨에 들떠 찬양하였습니다. 그 찬양이 오늘 우리의 본문 바로 앞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에서 꽤나 유명하게 알려진 고대의 찬양인 모세의 노래와 미리암의 찬양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승리의 감동에 들떠 찬양한 것이 딱 사흘 되었습니다. 사흘이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은 한 오아시스에 이릅니다. 그들이 뜨거운 광야의 태양빛 아래서 사흘을 행군하다가 만난 그 오아시스는 얼마나 많은 기대를 주는 오아시스였겠습니까? 그런데, 그 오아시스는 모양은 오아시스인데, 물은 쓴 물이었습니다.
홍해의 승리를 경험한지 사흘이 되지 않아 만나게 된 쓴 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곧바로 원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 이르러 쓴 물을 만나게 되는 이 여정은 바로 우리들의 믿음의 여정과 같은 것이어서 오늘 본문 안에서 우리가 다시 돌아보아야 할 중요한 단계들과 과정들이 있습니다.
1st DT A. 홍해에서 마라로 : 피할 수 없는 내 안의 쓴 물 (22-24절)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
Explanation
* - 마라의 물은 광물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고, 소금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쓴 맛이 나는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24절, 백성들에게서 이번에도 쓴 뿌리가 또 나왔습니다. 백성은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백성은 쓴 물이라는 환경 앞에서 자기 안의 쓴 물을 내어 보입니다.
마라의 쓴 물이 백성 안의 쓴 물을 드러내게 만들었습니다!
➔ 홍해의 승리에서 마라의 쓴 물로!
바로 이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전개입니다.
쓴 물은 내 안에 있는 쓴 뿌리와 같습니다.
작심삼일이라고, 은혜를 경험한지 삼 일 밖에 안되어 쓴 뿌리를 또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이전에 해결되지 못한 내 안의 쓴 물 때문입니다.
과거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불평과 원망이 몸에 배인 까닭이며, 자유민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러한 쓴 뿌리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Illustration
- 그것이 무엇이든 해결되거나 극복하지 못한 환경은 내 안의 쓴 물로 남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받은 학대는... 종종... 그런 쓴 물이 됩니다.
부모로부터 들은 무시의 말들은 종종 아이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로 남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아이는 그 안에 쓴 물을 담고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커서 어른이 되어서도 언젠가 불쑥 튀어나오는 쓴 물이 됩니다.
- 이런 모든 상처의 언저리에 무엇이 있습니까?
해결을 보지 못하고 그냥 억눌러 놓은 과정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쓴 물은 조금만 힘들어지면, 마치 몸이 피곤해지면, 면역력이 떨어져 내 안에 들어와 있던 바이러스가 활동해버리는 것처럼,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쓴 물이 다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이 힘이 빠지고, 의욕을 잃는 것처럼, 내 안의 쓴 물이 흘러나오면 나의 영혼은 힘이 빠지고 의욕을 잃어 신앙생활이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Application
- 내 안의 쓴 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극복할 수 없어 보이고, 좌절감을 주는, 그런 환경들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정적으로 만들고, 어둡게 만듭니다.
* - 이 사건은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다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인도하여 가는 과정에 ‘수르’ 광야를 만납니다. 수르란 이름은 그 본디 뜻이 ‘장벽’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하여 대단한 승리를 맛보고 이제 새 출발을 하는데, ‘장벽’이라는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능력을 체험하고, 다시 시작해 보려 하는데, 그때 맨 먼저 나타나는 것이 ‘장벽’이라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경험하고, 찬송으로 기운을 되찾는 것 같지만, 그러나 금새 우리는 좌절을 맛보고, 험한 인생길에서 지칠 때면 다시 고개를 드는 나의 쓴 물.....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감정은 나의 쓴 물이 되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가, 나도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불쑥불쑥 튀어나오고는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은 은혜도 다 쏟아버리게 만들고, 신앙을 타성적으로 만들며, 더 이상 소망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내 안의 쓴 물입니다.
- 쓴 물은 단순히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쓴 물들은 무엇입니까?
진짜 쓴 물은 무엇입니까?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나를 쓴 맛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일단, 그것이 있음을 인정합시다!
내게 그 쓴 물이 있습니다!
이전에 극복되지 못한 것이 쓴 물로 남습니다. 그것을 치료합시다!
상처의 쓴 물을 두고 일하면, 자신과 다른 이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깁니다.
이제 그것을 끄집어내어 해결해야 합니다.
내 안의 쓴 물을 그냥 놔둘 수는 없습니다.
Transition
내 안의 쓴 물은 치료되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지 25-26절을 함께 읽으며 찾아봅시다.
2nd DT B. 치료하는 여호와 : 쓴 물을 달게 하는 치료법 (25-26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
Explanation
-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쓴 물을 달게 만드시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쓴 물 자체를 달게 만드셨습니다!
쓴 물을 버리고 다른 곳의 단물로 가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바로, 나무를 가리켜 물에 던지게 하셨습니다.
소금기를 중화시키는 일종의 보리수가 있다는 고대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법도와 율례 앞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치료를 경험할 수 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다!”
* - 여기에 매우 중요한 말씀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물을 치료하는 여호와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분명히 하나님이 치료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문제 상황인 물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법도와 율례 앞에 순종하는 것이 당시는 하나님의 치료를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치료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문제 상황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상황에 대한 해결책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의 치료로 보는 이유가 바로 이 까닭입니다.
* - 그러면, 율법을 완성하고 은혜로 살아가는 오늘날, 당시 법도와 율례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안의 쓴 물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모세가 던졌던 것 같이 우리도 내 안의 쓴 물을 치료하기 위하여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의 나무 지팡이였습니다.
26절을 다시 보십시오.
- 너희가 내 말을 잘 순종한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
혹시 이 구절에서 왜 그냥 ‘모든 질병’이라 하시지 않고,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이라고 제한적인 것처럼 말씀하시는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또한, 쓴 물을 해결해 주시고는, 일견 뜬금없이 애굽의 질병에 관한 말씀이 왜 나오는지도 말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문맥과 상관없이 그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내용만 관심 갖지만, 이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던진 나무를 보고, 모세의 손에 들려주었던 나무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행하셨던 질병의 이적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쓴 물도 치료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될 것이라는 교훈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 이 사실은 다음의 한 가지를 더 비교해보면 분명해집니다.
출애굽기 17:5에는 여기 본문에서와 비슷한 상황으로 므리바에서 물이 없을 때에, 백성이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시는데, 또한 모세가 ‘나일 강을 치던' 바로 그 ‘(나무) 지팡이'를 쓰도록 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역시 물을 다스리던데 쓰이던 모세의 지팡이를 다시 사용하게 하심으로 이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기 위하여 모세의 지팡이를 보라 함입니다.
➜ 그러니, 모세가 마라의 쓴 물에 던진 나무는, 아니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던지게 하신 나무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보고, 자신들을 말씀으로 인도하던 모세의 나무 지팡이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잊지 말고 어떤 경우에라도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시려 하신 조치인 셈입니다.
Illustration
-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실제로 이런 받아들임이 없다면, 내 안의 쓴 물은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주님의 치료와 회복케 하심을 경험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해 보았습니까?
내 안의 쓴 물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말씀을 통한 회복을 구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이 온전한 치료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쓴 물을 치료하지 않으면, 언제나 어두운 인생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Application
-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은 그들을 질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재앙으로부터 지키는 계명들이 어떤 것들인가 보십시오.
예로, 매춘 금지령은 성병에서 보호해 줍니다.
건강을 지키고, 병에서 예방하는 차원의 계명! 그것이 바로 말씀의 기능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은 치료를 위한 방법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 무엇인가 불쑥불쑥 내 안의 쓴 물이 나올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십시오.
또한 말씀으로 자신을 구원하셨던 시간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 우리는 주님과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니 그 말씀 앞으로 나아가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치료와 회복케 하심을 경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엎드려 보았습니까?
이 과정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아직 진정한 은혜의 세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선다면, 주님이 내 안의 쓴 물을 달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이끄는 나무 지팡이를 던져 주실 것입니다.
내 안의 쓰디쓴 그 물은 그때 비로소 단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은혜의 사람이 됩니다.
Transition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치료를 경험하고 나면, 어떤 여정이 다가옵니까? 홍해에서 마라로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치료를 경험하고 엘림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27절을 잘 읽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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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rd DT C. 마라에서 엘림으로 : 다시 맛보는 단 물 (27절)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
Explanation
- 사실 본문 27절, 엘림에 이르렀다는 이 이야기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던 구절입니다.
본문에서 전후 사정과 관계없이 느닷없이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데다가 그냥 한 구절 말씀만 뚝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광야 여정의 한 기록일까요?
그러면, 이런 기록이 어떤 의미가 있길래 특별히 기록되을까요?
* - 그 해답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거쳐서, 엘림에 이르렀다,
홍해에서 마라로, 그리고 마라에서 엘림으로!
이것은 하나의 단위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 이것은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싸이클 곡선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그리고 금방 좌절하며 실패하지만, 그것을 치료받고 가게 되는 곳은 오아시스와 같은 곳, 엘림입니다.
마라의 쓴 물에서 엘림의 낙원으로!
일반적인 환경에서도 샘 열둘은 정말 보기 힘든 환경입니다. 게다가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습니다. 사막에서 이런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나 낙원같은 환경입니다.
종려나무 70그루가 있으면... 쉴 곳이 있습니다. 40도를 넘는 광야의 땡볕에서...풍성한 그늘 아래 쉴 수가 있으며, 마른 목을 축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래서 엘림의 이야기로 맺음합니다.
마라에서 치료를 경험한다면 엘림에 이를 수 있습니다.
- 이 마라의 쓴 물! 이것은 두 가지 양면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마라 = ➀ מָרָה 마라 < מַר 마르 = 쓰다 < 씀 ➁ 그러나 < יָרָה 야라 = 가르치다, 보여주다, 신탁을 보여주다, cf. מֹרֶה(모레 = 점을 받는 곳) ① ➔ 쓴 물은 하나님의 뜻을 잘 보여주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② ➔ 쓴 물은 신앙의 배움을 가르쳐 줍니다. |
우리 안의 쓴 물은 종종 그것의 회복을 통해서 우리를 안식하게 만듭니다.
Illustration
- 예를 들어,
중한 상처, 또는 중한 병이 걸렸다가 나았다고 합시다. 그럼, 우리는 기쁨과 안도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복된 상처는 그 병에 대한 면역을 가졌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계급장입니다.
- 저는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오래전 군목으로 있을 때, 예하 부대를 군종사병과 함께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제가 타고 오던 차량의 앞부분에서 ‘따따따따’하는 금속성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중간에 있는 다른 예하 부대 수송부에 들어가서 차량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제 차를 도크 위에 올려놓은 수송관이 이리저리 살피더니 하부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다가 갑자기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이것 좀 보십시오!”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오른쪽 앞바퀴를 조이고 있는 나사 네 개가 모두 풀어져서 손으로 건드리니까 그냥 모두 땅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비포장 도로를 워낙 많이 다닌 터인지 그렇게 풀려져 있었습니다.
수송관이 이랬습니다.
“목사님,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 했습니다. 이러고 어떻게 아직도 살아계세요?”
저는 그 뒤로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이제 민간인이 된 제가 달포 전인가 제 차를 정비하러 정비코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떤 분이 자기 차 앞부분에서 ‘따따따따’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조사해 달라는데, 정비기사가 하부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두 사람에게 일러주었습니다. 혹시 앞바퀴 너트가 풀린 것 아닌지 좀 살펴보라고...
그래서 정비사가 앞바퀴 커버를 열어보니... 결과는 그 운전자도 역시 저같이 죽을 뻔 했더라는 것입니다.
➜ 제 이전의 위험했던 경험이 다른 위험한 사람을 구한 것입니다.
- 상처가 없다면 제일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가 회복되었다면, 그것은 적어도 그 문제에만큼은 대응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믿음은 베테랑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는 영적인 엘림의 자리입니다.
Application
- 이스라엘 백성이 엘림에서 여유롭고 평안하게 쉴 수 있었듯, 내 안의 쓴 물이 치료되었다면, 우리는 그 문제에만큼은 여유롭고 평안함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 - 그래서 우리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도달하게 되는 곳은 엘림인데, 이 엘림이란 상수리나무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그 본뜻은 ‘능력(자)’라는 뜻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러니 엘림은 능력의 나무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쓴 물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바로 거기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장소인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마라에서 엘림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라는 우리 인생의 쓰디쓴 경험을 드러내지만,
그러나, 마라는 또한 우리로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대응능력을 길러주는 훈련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5절은 하나님이 마라의 쓴 물을 치료하시고는, 그들 앞에 법도와 율례를 주어 시험하신 것이라고...
이 시험이라는 히브리어에는 ‘입증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쓴 물을 고쳐서 이제 그 문제에 대응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 쓴 물은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열은....우리를 땀나게도 하며 지치게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을의 잘 익은 열매를 내기도 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 마라의 쓴 물, 내 안의 쓴 물을 치료하십시오!
내 안에 쓴 물이 생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료했는지 못했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내 안의 쓴 물을 치료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여전히, 또 다시 반복해서 쓴 물을 내어 인생을 씁쓸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치료했다면,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안식에 이르게 됩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변하여 좋은 것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엘림같은 하늘나라의 맛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단 물이 필요한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요, 격려입니다.
이것을 종종 얻어야만 광야 생활을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 대하여 희망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내가 쓴 물을 내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단물을 준비하십니다.
➔ 하나님은 여러분의 메달, 학위 혹은 졸업장이 아니라 당신의 상처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Conclusion
- 내가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유기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 하박국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 참고 : 이 부분은 해당 성경 본문과 관련된 추가 이해나, 또는 설교 본문의 방향을 보강하거나, 또는 다른 방향의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내용을 중심으로 설교의 초점이나 방향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 - 22절의 ‘사흘길’은 그 무엇보다 모세가 바로 앞에서 출애굽을 해야겠다는 명분으로 제시한 ‘사흘길’을 겨냥하는 암시이다. 그 사흘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제시한 시간과 거리이므로, 본문에서 지적하는 바는 바로 이스라엘이 그 사흘길을 거쳐서 보여준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 원망하는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 25절의 ‘한 나무’가 어떠한 나무인가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내용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라는 말인데, 이 표현이 이 사건의 궁극적인 방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곧 여기 ‘가리키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יָרָה 야라’의 사역형인데, 이 동사에서 바로 ‘율법’ 곧 ‘토라’(תּוֹרָה)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공급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을 ‘가리켜주는’ 하나님의 율법인 것이다! - 26절의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문장은 본문 그대로 옮기면, ‘(바로) 나 여호와가 너희의 치료자임이기 때문이라’라는 뜻으로 히브리식으로는 강조 문장에 해당한다. - 엘림 : אֵילִם < אַיִל(아일, 기둥이라는 의미에서 지도자, 숫양, 상수리나무 등을 가리킴)의 복수 < אוּל(울), ‘능력자’ - 엘림은 마라에서 10여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마라로부터 그리 먼 거리에 있는 장소가 아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교훈 중 하나는, 이스라엘이 자신 앞에 있는 장애물을 보게 되는 그 환경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지를 보여주는 시험의 도구라는 점이다. 바로 옆에 낙원과 같은 오아시스가 있지만, 이스라엘은 그 시험의 과정을 거쳐서 그곳에 이르러야 비로소 하나님이 시험을 통해서 주시는 연단과 신앙의 배움이 축적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 여정에서 이러한 일들은 수시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
※ 본문 살피기 : 이번 주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시작하여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서 처음 겪게 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게 되는 문제 환경에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와 그러한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인도해 주셨는지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음의 질문들을 통하여 본문을 미리 살펴보시지요. - 본문의 앞에는 어떠한 사건에 대한 찬양들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 광야에서 사흘길을 행군한 후에 이스라엘이 이른 곳은 어디였습니까? - 그곳의 물은 어떠하였습니까? - 26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때에 당하지 않을 질병이 정확히 어떠한 질병이라 합니까? - 또한 치료하는 여호와께서 치료하시는 대상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 이스라엘이 마라의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경험을 한 후에 도달한 곳은 어디였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