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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시집 원고-바람과의 동행
ㅁ 시인의 말
요즘 방하착(放下着)에 대한 집념
무정세월 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라, 어언간에 인생 산수(傘壽)를 맞이한다. 그동안 12권의 시집을 상재하면서 많은 사물과 대화하면서 인생의 정점(頂点)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뇌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들은 코로나라는 특이한 괴질(怪疾)에 의해서 팬데믹현상으로 서로 만남이 부자유스러워 혼자서 생활하는 기간이 길어졌다. 이러한 연유로 소재나 주제가 그 영역에서 머물기도 했으나 조용한 사유(思惟)의 시간도 가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자의 소요유와 선사들의 방하착 등에 접근하면서 나름대로 짧은 소희를 투영해본 것이 오늘의 집념이다. 어쩔 수 없이 산수의 인생연륜은 무소유 등에서 이미지를 창출하게 되는 가보다.
어줍잖은 요즘의 지각에서 안분지족의 일단을 충만하면서 이제 시업(詩業)도 서서히 정리해야겠다. 그동안 건강하게 시를 창작할 수 있었던 투지와 열정에 감사를 느낄 뿐이다.
2023년 봄에
聽松 金 松 培
1. 적막한 예행(간지)
어느 시인의 토굴
푸른 꿈이 풍상(風霜)에 무너지기도 했었어
망망대해를 달리고 싶었던 조각배의 꿈은
지독한 험난의 장애물이 겹겹이 쳐져 있었어
그러나 그런 고난에서도 별이 되고 싶었어
영혼들이 불면의 밤을 환히 밝히고 있었어
버려진 노숙자가 될거나
아니면 첩첩산중 산승(山僧)이 될거나
방랑자의 갈피는 언제나 정화를 못하지
어느 날, 문득 전신을 휘감는
어느 선각자의 발자국을 따라 나났지
아아, 그 길은 험하고 너무 멀었어
준령(峻嶺)을 넘고 단애(斷崖)를 지나면서도
너와 동거할 오두막집이라도 지어야지
그러나 영혼과 함께 영원히 안주할
토굴 하나를 파고 있었어.
(2020. 한국시협 <시인의 주소>)
적막한 예행
이른 새벽부터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암흑에서 탄생한 환희의 노래인가
아니다, 애교의 추파인가
며칠 후 그들의 짝짓기가 끝난 뒤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
한 해를 홀로 다시
깊은 명상에 잠겨야 하는
적막의 예행(豫行)인가
여름 지나면 우리에겐 성숙을 넘어
서글픈 추성(秋聲)이 들리겠지
한생을 모질게 불렀던 비가(悲歌)
퇴색한 애환의 그 껍질만 모아서
황량한 칠흑의 세계로 돌아가겠지
황혼의 그림자가 영혼을 손짓하는데
먼 길 떠나는 여행에서도 환생의 꿈을
허공에 무한으로 날려 보내겠지.
(2021. 8. 중앙대문학)제12호
산새 한 마리 문득
안개 자욱한 철조망 너머
통일 염원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오늘도 망원경으로 동태를 살핀다
요란하던 확성기 소리는 사라졌지만
능선 흩날리는 애타는 소리만 희미할 뿐
안경을 고쳐 끼고 시야를 확대해도
가시거리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구나
문득, 흰 구름 따라 휙-
산새 한 마리 북쪽으로 날아간다
아, 자유롭다.
요즘 세상은
요즘 세상이 왜 시끄러운가
서민들 민생이 어떠하고
국가의 안보가 어떻고
열강들과의 외교가 그렇고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지난 날 아니 지금도 때로는
촛불부대와 태극기부대가 대치하고
여의도 선량들은 어르렁거리기만 하는데-
오늘도 일식인가,
어인 일인지 해살이 엷어지고 있다
캄캄해지려는 요즘 세상은
지금도 소음(騷音)만 가득하다.
(이상 2편 2022. 11. ᄒᆞᆫ올문학)
오랜만의 외출
오랜만에 외출하려고 대문을 나섰다
3월 봄 햇살은 이토록 따숩지만
어쩐 일인지 내 가슴은 쌀쌀하다
먼 산 위에 덜 녹은 눈 때문일까
겨울 외투 옷깃으로 움추린 채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 걸음으로
동네 주변 개천길을 걷는다
청둥오리 한 쌍 물그림자를 일으키며
지금도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갓길에 이미 피었어야 할 개나리는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남녘에는 벌써 꽃소식이 훈훈한데
오늘 이 바깥세상은 낯설기만 하다
어디선가 또 어둠처럼 번지는 정령들
아, 지구여, 인류여, 싸늘한 고통이여
자연과 인간이 감내해야 할 시련이여
확진자, 사망자 아침 방송을 떠올리며
외출을 포기하고 돌아와 대문을 닫는다.
(2021. 4. 한국시협 사화집)
소라 빈껍데기
버려진 소라 껍데기 하나
모두 떠나버린 황량한 모래밭에서
긴 한숨에 잠겨 있습니다
깊은 바닷속 젊은 노래는
이미 잊은 지 오래
그래도 아직 그 가락을 기다립니다
멀리 파도소리, 갈매기 울음
아니 어디론가 달리는 쾌속선 고동이
지금도 귀에 아슴아슴합니다
이제라도 귀를 크게 열고
그토록 듣고팠던 떠난 자들의 애환이
겨울바다를 조용히 흔들고 있습니다.
다시 입춘첩
부산 청룡사 주지 능지스님이
입춘첩(立春帖)을 보내셨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상형문자로
다른 시구(詩句)는 해서체(楷書體)로
중심 주제는 전서체(篆書體)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입춘을 합장하고 있다
어렵다. 한자 실력이 짧은 나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어물쩡거린다
앞산에는 이미 춘색(春色)이 완연하다
그 향기에는 상형문자, 해서체, 전서체의
암호 같은 메시지, 무현금(無絃琴)
영혼의 울림으로 전해진다
입춘대길 건양다경(建陽多慶)
시골집 대문에 녹아있는 정감의 기원이
지금도 달작지근한 햇살로 전신에 스며든다
홀연히 범종소리가 먼 산사에서 들려온다.
(이상3편 2020. 여름호 [여기])
바람 일기
봄 개울가 산들바람이
아직 눈뜨지 못한 연약한 갈대잎을
소곤소곤 흔들어 깨우고 있네요
지난 엄동 매서운 기세가
헐벗은 나무 잔가지들을
쌩쌩 위태롭게 위협하더니만
둥실 떠있는 뭉게구름과
따수운 손짓으로
진달래 꽃대궁은
스스로 온몸 흔들어
생명의 환희를 전해 주네요
나에게 아니 온 누리에.
(2020. 한국시원사화집 제1호)
봄 볕
봄볕 한 자락
잔잔한 호수에 내려 앉아
겨우내 얼었던 속마음
찰랑찰랑 엷게 속삭인다
풀꽃은 풀꽃대로
새들은 새들대로
새 생명의 환희로 넘치는 봄날
저 푸른 하늘을 보아라
새봄의 합창이 들리는가
새싹들 쏘옥 쏙 따사로운 향기가
온 누리에 사랑으로 울려 퍼지면
이제 막 틔운 싱그런 꽃망울
우리 영혼까지 맑게 토닥인다.
(2020.7. 서울지하철 게시)
화색(和色)이 감돌 때쯤
빈농(貧農)의 아들은 서러웠다
꾀죄죄한 몰골에 절망의 세월은
운명을 탓하면서 처절한 인내를 요구했다
뼈마디마디 깊숙이 찬바람이 몰아치고
가슴 밑바닥까지 밀어닥치는 성난 파도
그 아픔도 눈물도 잘도 참아 왔구나
80여 성상을 일그러진 표정에도
노욕(老慾)을 떨쳐낸 안분지족(安分知足)
이제사 찌푸러졌던 주름살이 펴지고
화기(和氣)가 만면(滿面)에 넘치는데
또 무엇을 덧칠하여 면상(面相)을 바꿀 것인가
가난이 유죄였던 한으로 남아서
불면으로 헝클어져 만신창이가 된 상흔을
순리대로 말끔히 지우면서 살아온 한생애
만인에게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리라
아슬아슬했던 위기의 절벽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어느듯
자적(自適)의 면목(面目)으로 정화되고 있었다.
(한국시협 사화집 2022<나의 얼굴.)
여름을 꿈꾸며
여름 나무는 겨울을 꿈꾸지 않는다
고향 뒷산으로 보송보송 피어오르던
솜털 같은 구름은 여름이 마냥 좋았지만
어데 계절의 섭리는 그렇게
내 맘처럼 되는 일 있더냐
겨울나무는 헐벗은 자의 이미지만 한 짐 진 채
막연하게 여름을 꿈꾸고 있다
심연 가득 가난으로 채워진 자의 눈물 비우며
어쩔 수 없는 상징 몇 개만 구름으로 띄우고
윤사월 설영근 청보리는 싫어, 싫어
또다시 꿈꾼다, 허망의 행렬이 어지럽고
담쟁이 무성한 담장 너머 장미꽃을 꿈꾼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못가진 자에게는
순환의 법리도 저 멀리 비켜가고
한 알 잘 익은 석류를 예비하면서
여름 나무는 그래도 겨울을 꿈꾸지 않는다.
고향 뒷산 전설로 남아있는 구름처럼
어디 순리를 거역할 수 있는 일이더냐
태풍이 오리라는 예감의 여름 기상도 위에
꿈은 그냥 꿈으로서 흐를 뿐이다.
어떤 대화
한 점 여린 바람에도
눈물짓는 꽃이거늘
오밤중 저 별들 마냥
흔들림에 길들여졌을까
하도 많은 설움 비바람에 섞여
꽃은 떨어지기 위해 꽃잎을 피우고
밤마다 그리던 환희의 눈짓으로
별은 속삭이기 위해 어둠을 흔든다
되돌려 놓기 어려운 우리네 삶이여
늘 취한 채 끊임없이 쏟아내는 허물
낯선 골목에 버리며, 또 버리지만
흐느낌만 가득 쌓이는데
꽃은 별이 되고, 별은 꽃이 된 채
한 점 바람에도 눈물 훔치고
다시 일어서는 애잔한 꽃잎이거늘
그립다, 빈 들판 홀로 내리는 별빛이거늘.
(이상2편 2020. 6. [문예사조] 초대시)
해바라기의 독백
가을 청명한 창공을 응시하면서
무엇인가 골돌히 잠기는 나를 닮았나
태양의 열기를 가슴 가득 담아
끝내 삭이지 못한 외로움을
푸른 바람으로 녹여내고 있는가
무한으로 칫닫는 열망들은 잠시
그의 뜨거운 빛을 따라 고개 돌린다
--나는 더 높이 날고 싶다
날아서 우주를 안고 싶다
오늘도 그를 향한 둥근 샛노란 미소를
훨훨 더욱 가까이 날려 보내지만
사랑의 응답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산들바람에 꽃대궁은 흔들리지도 않아
코스모스 이웃에서 홀로 고개 숙인다
오늘도 화려한 자태로 그에게 다가가지만
지순한 둥근 사랑 영원히 이룰 수 없네.
(2020. 한국시협 사화집)
창문을 열면
방안에서 답답함을 삭이다가
창문을 활짝 열면
낙엽이 우수수 휘날린다
계절은 벌써 만추(晩秋)라
가을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창문을 닫아 버렸다
낙엽들은 다시 우우 나뭇가지에 몰려 앉는다
열면 흩어지고 닫으면 몰려와서
저들끼리 수군수군 무엇인가 법석이다
잠시 후 창문을 열었더니
한 떼의 낙엽들이 우루루 방안으로 날아와서
책상 위에 가지런히 눕거나 앉아 있다
바람 한 줄기 휙 지나가면서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속삭이더니
무수한 언어로 방안을 가득 채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내 가슴에, 머리에, 온몸에
아니 오감(五感)으로 쓸어 담았다
어느 날 그것들은 모두 미지의 이미지로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2020. 한국시원 사화집-제1집)
서울역에서
부산에서 상경하는 친구를 기다린다
현대식 시설로 잘 정돈된 대합실에는
떠나는 사람들과 찾아오는 사람들
그 행렬의 애환 속에서는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데
내 친구는 아직도 도착 하질 않는다
다시 KTX 시간표를 확인한다
아뿔사, 잘못 저장된 시간의 개념
어, 벌써 치매인가, 아니 건망증이겠지
‘오랜 기다림은 아름다운 약속이다’
오래 전 내 싯귀(詩句)를 되뇌이면서
얼마의 기다림 끝에 그의 손을 잡는다
우리는 옛 서울역사를 방문했다
우아하게 치장된 문화공간은 한가하다
옛날 무작정 상경해서 처음 본 서울
무한의 공포와 용기가 온몸에 전율했는데
친구여, 저 추억의 소리가 들리느냐
그는 부산역에서 나는 서울역에서
지금도 무궁화, 새마을호가 울리는 기적을.
(2021.9. 한국시협 사화집 [역])
요즘의 근황
지구촌의 무서운 팬데믹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짜증스럽기도 하다
가족도, 친구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세상
무료하면서도 두렵기도 하다
아아, 이 위난은 어제 끝날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TV에서 트롯 열풍이 불었다
정동원 군이 부른 <보리고개>는
내 어릴 적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무우밥, 쑥버무리, 송귀떡, 나물죽.....
쌀 한 톨 없는 긴 춘삼월이었다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이 코로나의 무서운 시간에서도
그 음감(音感)에 잠시 매혹하지만
어쩐지 내 어머니의 한숨과 통곡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2021. 9. 합천문학 29호)
네온싸인 간판따라
퇴근 시간에 동료를 불러내어
과장, 부장을 안주로 얼큰해졌다
빨리 집에 가자면서 지하철로 급히 나선다
벌써 호프집 네온 간판이 반짝인다.
참새 방앗간의 마력(魔力)이었다
무작정 문을 밀고 들어섰다
어허, 이미 빈자리가 없고
담배 연기만 자욱한 채 소란스럽다
QR 코드를 찍고 체온을 확인한 후에
겨우 구석진 자리를 잡았다
500CC 한 잔씩 후룩후룩 마시면서
좀 전에 못다한 과장부장 안주를 또 씹는다
이것 봐, 그냥 빨리 집에 가서 쉬고
내일 가쁜하게 출근해야지 쯧쯧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가
어어, 방역지침에 맞춰 쫓겨나야 할 시간
이놈의 세상, 어어, 주기(酒氣)가 오른다.
흥겨운 인생 노년의 즐거움
우리 문단에는 애주가 3인이 있다
수원의 임병호, 양평의 정성수
그리고 서울의 나를 손가락에 꼽는다
요즘은 정순영이 합세하여
문단 주류(酒流) 4인방이 되었다
우리는 술이 어느 정도 거나해지면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이 어떠하고
장진주(將進酒)가 그러하고
두보의 주채심상 하처유(酒債尋常何處有),
소동파의 시를 낚는 갈고리를 더듬거리지만
정성수는 늑막염이 나아서 청하 한 병만 마시고
임병호는 무슨 수술 후에 아예 금주행(禁酒行)이고
남아 있는 둘만이라도 가끔 한 잔씩 나눈다
술은 백약의 장(長)이라는 옛말을 외치면서
주호(酒豪)나 주선(酒仙)이 된 양
술잔 부딪는 소리에 서로 위안하는 주석(酒席)이
흥겹게 인생의 노년을 메꾸고 있었다.
(이상 3편 2022. 청시 26집)
금강산 가는 뱃길
동해항에서 부웅 뱃고동이 울린다
참으로 기적처럼 열린 금강산 뱃길
민족 분단선을 넘어 북쪽으로 간다
어둠에 휩싸인 동해의 물결
저 멀리 집어등이 가끔 반짝이는데
문득 유성(流星) 한 무리가
갑판 위를 날은다
생전에 갈 수 없었던 금강산
그러나 쏟아지는 별빛 위로
북쪽 동포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동족상쟁의 비극을 치유하는
남북 왕래는 이루어져야 하리
밤새도록 달려온 장전항
설레이던 심정 가라앉히고
새벽 금강산 절경에 혼을 잃었네.
금강산 구룡연에서
관폭정에 올라서면
구룡폭포,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장관이 펼쳐진다
우레 소리 천지를 진동하며
쏟아지는 물보라
장중한 유곡(幽谷)의 대연주
백옥(白玉) 구룡연에서
속진(俗塵)을 닦아내고
정갈한 몸으로 하늘과 교감하는가
구슬알들이 한없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비단폭
오늘도 회개하지 못한 인간들은
이곳에서 깊게 속죄하노니
펑펑 분노의 함성으로 참회하노니
아아, 이곳을 품은 금강산이여
어서 통일을 이루면 어떠하리.
금강산 만물상에서
이산가족의 한(恨)
2.생사의 행간에서 =간지
그들의 기원
--‘코로나 19’에 대한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
혼자 격리된 좁은 방안에서
우왕좌왕 갑자기
손바닥 흥건한 진땀을 훔치며
창밖 푸른 하늘을 응시한다
이제사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가
어렴풋이 짐작하는 몰골
지나온 삶의 흔적들이
방안 가득 빙빙 돌면서
이제사 죽음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
깊게깊게 느껴보는 심기(心氣)
무서운 바이러스가 이 지구를 흔들고
온 인류를 위험지대로 내모는 아아,
답답하다, 애간장이 탄다
이렇게 지구의 종말도 도래(到來)하는가
--방역수칙을 잘 지키세요
--마스크를 꼭 착용하세요
오늘도 조간 뉴스에는
확진이 얼마, 격리가 얼마, 사망이 얼마
저 멀리 저승의 애잔한 신음도 희미하다
언제 이 환란(患亂)은 끝이 날 것인가
초조하기만 한 희망 한소끔
창가에 기대선 채 아아, 오늘도
청량한 바람 한 줄기를 쏘이고 싶다.
(2020. 봄. 동방문학)
바람과의 동행
한강 선유도엘 갔다
가볍게 산책을 할 요량으로
바람과 구름과 동행했다
입구 화단에서 만난 꽃
늦가을 햇살에 대궁만 흔들리고 있다
이제 벌 나비도 제집으로 돌아갔는지
형체도 그 소리도 사라졌다
윙윙거리며 채취하면서 남겨진
화분(花粉)으로 씨앗들이 여물어 가는데
아무도 예전의 희노애락을 생각지 않는다
아늑하게 흐르는 한강물이
오늘은 어쩐지 더욱 한가롭다
문득, 옛말 무자서(無字書)가 생각났다
보이는 부분은 선명한데
지워져 숨겨진 뒷모습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시다
한강 물구비와 선유도 바람이 어우러지는 숲에서는
가을나무들이 단풍잎 팻말을 들고 섰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저 글귀
저승과 이승의 갈림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하직(下直)에 대하여
요즘 들어서 문상(問喪)을 가는 일이 많아졌다
절친(切親)이 이승을 하직한 장례식장에는
모두들 조의(弔意)만 표하고 나갔는지
상주들만 썰렁하게 조문(弔問)을 받고 있다
할 일 못다 이룬 채 훌쩍 떠나버린 그의 영정은
그래도 웃음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생사의 행간에서 진한 눈물로 정을 나눈다
내일이면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변할 육신
지옥이냐 극락이냐 따져볼 겨를도 없이
납골당 유골함에서 그는 잠들어 있겠지
잘 가시오. 사고팔고(四苦八苦)의 고통을
훌훌 벗어던지고 영원한 안식을 구하겠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하직의 슬픈 섭리
마지막 곡성(哭聲)이 저 하늘 높이 울려 퍼진다.
(2021. 11. 120호 문예비전)
촛불을 켜며
잠 설친 이른 새벽
촛불을 밝힌다
전등불보다 아늑하다
낮에 못다 읽은 시집을 뒤적이거나
그동안 멀리 달아났던 체험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으는 일에서부터
하루를 시작 한다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내 가슴에 울렁거리는 아련한 연민
왜 일까. 흥건한 눈물보따리가
펼쳐지는 이 어둠의 시간이,
그 공간이,
멀리 사라진 아픔의 행간에서
촛불을 켜놓고
아직도 아슴푸레 들려오는
지난 날 방황의 일기를 적어 본다.
촛불은 눈물을 왜 흘리나
그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꽃들에 둘러싸인 그는
아직도 화사한 생전의 모습으로
양초의 불빛으로 위로를 받으며
우리들 문상객을 맞고 있었다
그는 이승을 떠나기 전에도
생에 대한 절망을 혼자 등짐진 채
방황하며 살아왔을까
갑자기 촛불이 흔들린다
지금까지 잘도 참아온 회한에
이제는 참회의 눈물까지 주루룩 흘리고 있다
날이 밝으면 한 줌 연기로 사라질 운명의 적막
밤새도록 그를 위한 마지막 흐느낌
제 한 몸 태워 저승으로 인도할 침정(沈靜)
영좌(靈座)에 마지막 차려진 술잔 옆에서
체념의 촛농만 쌓고 있었다.
모두에게 기원을 전한다
생일상에 꽂혀 해피 버스데이 투유를 받던 나
결혼식장에서도 축하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어느 날엔 누구를 떠나보내는 장송곡이 들리고
또 교회, 성당, 절에서는 추모의 기도가
나와 함께 이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나는 지금 성자(聖者)인가
모든 이들에게 축하하고 감사하는
기원을 모두에게 나눈다
황홀하게 켜졌다가 홀연히 꺼져가는 나
인간들의 운명은 생사고락을
예비할 수 없는 대장정이다
언젠가는 광화문 광장에서
분노로 변한 적도 있었지
그것이 하나의 불행과 행운의
두 깃발로 이 세상을 어지럽혔지만
한 사내는 환희로 나를 높이 쳐들고
저들의 승리를 환호하고
그 앞에서는 울분을 토하는 한 무리가
목이 쉰 채로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생명들에게 용서와 기도를 전할 뿐이다.
(이상 3편 심상 2022. 3.)
26.낭만주의자의 우수,
--이창년 시인 생각
--형님, 언제 만나서 식사라도 해요.
대상포진을 앓으면서 보행이 만만찮고
주량도 많이 줄고 출행이 약간 불편해서 글쎄-
고향 합천 대선배님과 교유는
80년대 초 보리수시낭송회로 거슬런다
황금찬 최은하 선생 등 원로 시인들과
시를 이야기하고 술과 담론을 즐기던
우리 시단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미워할 수 없는 사람아’를 부르짖으며
동료 후배들과 어울리던 시인
서울문학에서 미스 최실장을 만나고
한맥문학에서 김진희 회장과 만나고
‘이한세상’에서 변사또를 만나서
“한 잔 빨자, 한 잔 빨자”
큰 형님의 인자한 목소리는 지금도 쟁쟁한데
시인통신, 소문난집, 순풍에 돛달고, 시가연
인사동 골목골목 술집을 다 헤매어도
그의 흔적은 지금 천천히 지워지고 있다
“너를 사랑할 시간은 더욱 많지 않구나”
아아, 이제 사랑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세상
극락의 평원에서 천주(天酒)를 즐기면서
이승에서 풀지 못한 시름 모두 잊어소서.
[2021. 8, 한맥문학]
문학의 금자탑
--채수영 시인를 추모함
나는 그를 채(蔡) 박사로 불렀다
그의 해박한 문학적 지식은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보고였다.
그는 문학 이론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 문학의 금자탑이었다.
나는 그와 <응시동인>에서 함께 했다
내 시에 대한 해설도 써 주고
그의 많은 저서들도 기증 받았다
그는 평소에 문학 교수들도 생소한
『문학거리론』 『문학생택학』 『색채의식 연구』 『문학창조론』 등
명저(名著) 이론서로 이 세상 후학들에게 자양을
제공했던 문학박사이며 교수 시인이었다
그의 활달한 표정과 명쾌한 언술은
언제나 명징(明澄)한 이론으로 감응시켰고
문사원에선 명 강의로 감동을 주었던
그의 정감의 목소리는 다시 들을 수가 없구나
사랑하는 채수영 시인이여!
이제 모든 아픔 다 거두고 편히 쉬소서
틈나거든 그곳에서도 가여운 영혼들을 달래소서.
(2022. 채수영 1주기 추모)
26. 연기로 사라진 영혼
-2021년 6월 6일 오후 8시, 이효녕 별세
일산 백병원 장레식장 몇 호실-
청천벽력이었다
카톡으로 울려 퍼진 부음-
참으로 산다는 것이 허망하구나
문단에서 시 친구, 술친구로 나눈 30여년
떠난다는 인사도 없이
무엇이 그리 바빠서 훌쩍 혼자 먼길 가나
그의 인자한 인품과 시우(詩友)들과의 정감
그는 ‘서정문학회’를 창립해서
우리 시문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자신의 작품활동에도 심혈을 쏟았으나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진정한 선비였다
이제 육신은 불가마에서 바스라지고
비록 한 줄기 연기로 사라져
한 장의 만가(輓歌)도 없이 지워지는 이름이여
그 아픔 그 고뇌 모두 잊으시고
영원을 향하는 저 영롱한 무지개 따라
훨훨 극락의 안식처로 영혼을 옮기시오
곡(哭)! 이효녕 시인.
27.병에 대한 여운 . 1
시인 친구의 문병을 갔다
손을 꼭 잡은 채 몇 마디 위로를 하고
빠른 괘유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며칠 후 끝내 회복 못한 친구의 부음이
카톡을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조문을 하고 조시를 읽었다
연기 한 줄기로 그의 영혼은 사라지고
육신은 한 줌의 뼈 조각으로 남았다
그의 영육을 동시에 침투한 불치의 병
주치의의 암 몇 기라는 진단을 받아
절개 수술로 치유의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이제는 불귀(不歸)의 먼 길을 떠났다
아침부터 또 앵앵앵 엠블런스 소리가 요란하다
또 어떤 친구 하나 응급실에서 정밀 진단을 받고
입원실에 누워 생사고락을 되새겨 보는데
찌푸린 간호사가 내민 채혈(採血) 쪽지
아, 저승의 하얀 꿈길로 안내하고 있었다.
(2022. 11. 한국시협 사화집)
28.병에 대한 여운 . 2
급히 응급실로 들어갔다가
몇 시간 만에 나왔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정신이 멍멍한 상태로
입원실에 누워 있었다
팔뚝에는 주렁주렁 주사바늘을 매달았고
간호사들이 연신 왔다갔다 하면서
체온을 재고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아아, 하마터면 죽을 뻔 했는가
사람 목숨이 한순간에 결판나는
아, 갑자기 너무 아찔하고 어지럽다
옆 병상에서는 고통을 참지 못하는
신음이 병실 가득 울려 퍼진다
우리 인간들은 왜 병고(病苦)에 시달릴까
무슨 까닭으로 운명을 바꾸려는 그 고통
글쎄,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해야지-
담배 끊고 술도 끊고 또 무엇도........
그래, 그리하면 인생의 낙(樂)은 무엇으로 찾는가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
친구의 유행가 한 자락이 떠오른다
무척 낭만적인 그도 몹쓸 중병을 앓다가
한 많은 한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29.병에 대한 여운 . 3
재진(再診)을 위해 대학병원엘 갔다
어찌 이리 아픈 사람들이 많을까
병자(病者)들이 접수표를 들고 와글거린다
채혈을 하고 혈압을 재고
담당 의사의 치료를 기다린다
어떤 이는 휠췌어를 탄 채 불안하기만 하고
또 어떤 이는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향하는데
새파랗게 질린 가족들이 뒤따르고 있다
병에 걸려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안다는
속담이 왜 이렇게 간절함을 느끼게 하는지-
처방전을 받아들고 약국에 들렸다
약봉지를 들고 나서면서 쳐다본 병원 건물
저 높은 건물 안 저 많은 병실에는
오늘도 환우(患友)들의 기원이 넘치겠지
빠른 쾌유(快瘉)를 비는 가족들도 보인다
어디에도 무병장수는 없는 것인가
병마(病魔)여, 연약한 인간 생명을 노리지 말라
우리들 영육(靈肉)이 두려워하는 그 고통
그럼에도 하늘은 맑고 더 푸르고 아아,
이제 치유의 기쁨이 빨리 찾아오는가 보다.
(현대문예 2023. 가을호)
병에 대한 여운 . 4
달력에 빨간 볼펜으로 날짜를 표시해 놓았다
오늘은 병원 가는 날이다
혈압이 얼마일까, 혈당은?
그러니까 미리미리 예방 차원에서
음식도 조심하고 행동도
그리고 술 담배는 다 끊었겠지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나
이승 떠날 날만 헤아리고 있는가
오늘은 정상입니다
계속해서 조심하시고 3개월 후에 다시 봐요
아니, 의사 선생님-/정상인데 3개월 후에 또 와요
어허, 환자님-/연세도 많으시고 몸도 허약하니
예방차원에서 계속 진료하고 약도 드시고-
인생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점지되었다지만
그래요, 떠나는 날까지만이라도 또 뵈어요.
--
병에 대한 여운 . 5
여보게 술이나 한 잔하고 가시게
무엇이 그리 바빠서 훌연히 떠나시나
주어진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야 할 나이에
아니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을 이 시대에
그냥 가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쩌나
주변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카톡으로 부음(訃音)을 받았으나
그냥 조의(弔意)만 문자로 보낸다
평소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퉤, 퉤, 이놈의 세상이 어떻고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생사가 어떻고
어쨌거나 아프지 말게
치매다, 중풍이다, 무슨 암이다
나이 들면 침노하는 병균도 많은가 봐
어이 친구여, 우리 술이나 한 잔 하세.
시간이 무겁다
-여보세요. 아빠, 별탈 없으시죠
별탈 없냐고 그래, 그래-
딸에게서 오랜만에 문안전화가 왔다
코로나로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까
많이 걱정스러운가 보다
-그래. 너희들도 괜찮지
서로 오가지도 못하고 불안해서
전화로,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 받는다
동네 작은 볼일도 마스크를 챙기고
거리두기로 쉬엄쉬엄 걸아가야 한다
이 무슨 위난인가, 환란인가
지구촌이 팬대믹 현상으로
친구 만남도 가족 행사도 없어졌다
삭막한 거리에도 춘삼월은 왔지만
오늘도 확진자들을 돌보는 천사들은
가슴이 차가웁다, 시간이 무겁다
주어진 삶의 넓이는 오로지 기도뿐이다.
(현대문예 2023. 가을호)
저승에도 술이 있나
알콜 중독, 술병(酒病)으로 타계한 친구
살아있는 친구 몇이 문상을 갔다
지금도 술이 덜 깬 듯 화사한 얼굴로
우리들을 맞이하는 영정 앞에
가득 채운 술잔을 올리면서 명복을 빈다
우리들은 술 때문에 먼저 간 친구 앞에서
다시 술판을 벌인다
--그래 술을 좀 작작 마셔야지
누구나 술의 해독에 대해서 말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까지 와서 過飮이다
저승에도 술은 있을까
愛酒家 그의 영혼을 위해
소주 몇 병을 관속에 넣어 보내야지
--不如生前一杯酒라
살아생전에 한 잔 술보다야 못하리라.
거울 속에서 . 1
아침마다 거울을 본다
말끔하게 세수한 내 얼굴이
오늘은 낯이 설다, 왜 일까
어제보다 더 훌쭉해진 몰골에
눈도 게슴츠레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디서 본 듯도 한, 친숙하게 지냈기도 한
홍안(紅顔)의 그 환했던 모습은
어인 일인지 보이지 않고
온몸이 많이 핼쑥해진 채
핏기어린 눈망울만 굴리고 있다
아, 무정한 세월 탓이겠지
80 성상(星霜)을 아슬아슬하게 살아온
그의 한생에서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는
절망의 눈물과 아픔이 이젠 허망으로 남았거늘
아무리 쓰다듬고 손질해도
“새첩다”던 내 본래의 얼굴은 없었다.
* 새첩다 : 예쁘다의 방언
거울 속에서 . 2
오늘은 외출을 하기 위해서
면도를 하고 옷매무시를 바로 한 채
거울 앞에 서서 빗질을 한다
어제보다 더 쭈그러진 내 얼굴은
텁수룩하던 턱수염은 밀어 없앴지만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은
하, 세월 탓만은 아닐 게다
문득 저 뒤편에 누군가 어른거린다
소복을 차려입은 어머니와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내가 서 있었다
어머니는 무엇인가 근심스런 표정이고
나는 무슨 일인지 무척 불안한 모습이다
어머니는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을
가난이란 이유로 열어주지 못한 심정
나는 그 속맘을 원망하지 않고 내 갈 길을
꾸준히 헛되지 않게 살아왔으나
패기 넘치던, 아니 밝은 태양을 향하던,
진정으로 환한 모습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한 조각 흉상(凶狀)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상 2편, 2022. 가을 문예사조 사화집)
거울 속에서 . 3
아침부터 거울 속에 들어가서
회한(悔恨)의 시간을 갖는다
살아오면서 못다 갚은 사죄의 길
살아가면서 못다 했던 용서의 길
지금쯤에서 눈물로 후회하는가
훌훌 털어버려
우중충 찌푸린 몰골부터 활짝 펴
살아오면서 무슨 여한(餘恨)이 남아
잔뜩 움켜쥔 채 못다 풀은 영욕(榮辱)들
얼비치는 저 염라대왕의 칼날
아아, 이제 참회의 길은 없는 것인가
아침부터 우울한 얼굴을 말끔히 딱기 위해
깊은 묵도(黙禱)에 들어갔는가
살아가는 일들이 깊은 후회로
줄줄이 헝클어진 채 엉켜 있어서
오늘 거울 표면은 어쩐 일인지
이방인의 모습으로 멀뚱히 서 있었다.
거울 속에서 . 4
스스로 자문(自問)하고 있다
남은 여생(餘生)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아무런 의미 없이 세월만 소비할 것인가
주름살만 늘어가는 몰골은 측은하다
얄팍한 잔꾀로 남을 수렁에 빠트리지는 않았나
중상모략으로 남의 인격을 실추시키지는 않았나
짧다면 짧은 한생에서
나만을 위한 독선(獨善)은 없었나
남을 까닭 없이 업신여기거나
금방 탄로날 감언이설로 속임수를 써지 않았나
이제사 거울 속에서 갈피를 못잡고
허둥지둥 가슴을 쓰다듬는 연약한 모습
잘못이 있다면 성찰하고 사죄하고
더럽혀진 행주 맑은 물에 헹구듯이
틀어내야지, 훌훌 틀어버리고
저 대자연의 청순한 공기를 맘껏 마셔야지
그래, 인생 살아가는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버리고 비우면서 남아 있는 시간 보내야지.
(이상 2편 한국시학 2022. 겨울호)
연리지(連理枝)는
온몸 뒤엉키는 한생은 사랑이었다
아주 영원히,
태어난 가문(家門)은 다르지만
서로가 헤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도 쭉쭉 뻗어서 꽃피우고
자식 열매까지 영글었다
우리의 각별한 사이도
풍상(風霜)에 빛바래고
어쩔 수 없이 섭리(攝理)를 따라
영원할 수는 없었다.
불사춘에 대한
3. 화두-허심과 무심
성철 스님, 법정 스님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이
나란히 앉아 묵언으로 계시다
아마도 해인사 퇴설당인 것 같다
두 스님은 어떤 화두에 몰입했을까
바깥에는 화창한 봄 날씨다
허공 흰구름 지나간 자리에
산새들 지저귐이 둥실 떠 있다
가진 것도 가질 것도 없다
허심(虛心)이냐 무심(無心)이냐
물은 물이 아니고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바람 한 줄기 서서히 지나가면
구름도 그를 따라 허허롭게 흘러간다
챙겨 간직할 것도 없다
탐욕도 지워버린 허황한 산사에서
고즈넉한 햇살로 영육(靈肉)을 쓰다듬고 있다.
(2021. 11. 문예비전)
소요유(逍遙遊)에 대하여
장자는 왜 붕(鵬)새 한 마리
구만리 장천(長天)을 날게 하였을까
아무 걸림 없는 창공을 유영하면서
무애(无涯)한 경지에 도달토록 했을까
세상은 우리들의 삶을 아프게
때로는 분노로 치솟는 분수가 된다
붕새는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
무위자연의 무한한 삶을 허공에
유유자적으로 광명의 빛을 뿌리지만
여기 심약한 텃새 한 마리는
방향감각을 멈춘 지 오래
아득히 멀어지는 열망의 꿈은
오늘도 자승(自乘)의 울타리를 두른다.
( 2022. 9. 창조문예)
무소유에 대하여
한세상 살아가면서
불필요한 것은 갖지 말아라
가나하다고 부를 탐하지 말아라
법정스님은
버리고 비우는 지혜로운 삶을
실천하셨다
아, 짧은 한생애에서 과연
썩은 쓰레기 같은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무심하게 쳐다본 공중에는
모두 버리고 비운 맑은 영혼 하나
공(空)의 무념무상의 향기로
허망의 얼룩을 지우기 위해
그의 잠언을 새기면서
그를 닮아야 한다고 손짓하고 있다.
( 2022. 9. 창조문예)
무자서(無字書)에 대하여
지난 밤 달빛이
하얀 편지를 보내왔다
흰 종이에 씌어진 글씨를
읽을 수가 없는 것은 웬일인가
창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어둠 가르는 곡조로 노래하지만
잘 들리지 않고 희미하게 멀어진다
백지장에 정성스레 써 내려간
깊은 사연을 알아챌 수가 없구나
하얗게 감춰진 영혼의 노래
그것을 읽어내기에는
내 엷은 시야에선 너무 어렵구나
보이지 않는 진실을 눈치 채기에는
평생이 걸려도 모자랄 것이다
바람에 휩쓸려 간 회한의 음율이
불투명하게 무언으로 알려주는
약한자의 절망 같은 흐느낌이었나
가녀리게 손사래치는 달빛의 전언
몸짓으로 풀어야 할 해법이었다.
(2022. 합천문학)
무현금(無絃琴)에 대하여
청산 솔밭 계곡 반석 위에 누워
송림 사이로 얼비치는 하늘을 응시한다
청명한 대기에는 가끔 구름이 지나가고
어느 새 내 심지는 둥둥 구름 속에 묻힌다
신선한 공기에 살짝 졸음이 온다
비몽사몽인가, 산새가 솔밭 사이를
무엇을 찾아 헤매듯 유영하는데
산속 계곡물은 또 무엇을 속삭이는가
갑자기 밀려온 저 감응-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맑게 노래하는 영혼의 소리
그 선율들이 아직도
나를 침잠시키고 있는데-.
(이상 2022년 서대문문학)
사무사(思無邪)에 대하여
논어 위정(爲政) 편에서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 3백편의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악한 생각은 하나도 없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이 시 3백편은 시경에 실린 305편
전체에 담겨진 주옥같은 경구(警句)이다
공자님은 교과서로 삼으셨나보다
어느 날 황금찬 시인께서 말하셨다
우리 5천만 동포가 모두 시인이었으면 좋겠다
도둑놈도 없고, 사기꾼도, 깡패도 없을테니까
아니, 골육상쟁의 전쟁도 없겠지
아아, 대자연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겠지
한낱 실낱같은 노시인의 여망이다
이러하듯 시는 인생의 성찰이다
시를 공부하면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도리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공자님도 위대한 시를 통해서
인간들의 계도에 힘쓰셨나보다.
(2022. 문예사조 사화집)
방하착(放下着)에 대하여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왜 그렇게 집착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껴안고 지냈던 슬픔과 원망
눈물로 얼룩진 세월의 무게
거기에서 몸부림치면서 울분을 터트렸던
하 많은 어리석은 갈등과 번뇌
이제서야 겨우 말끔히 지워버리고
홀가분하게 마음을 정리한다
“마음을 비워라. 집착을 내려놓아라”
선승 조주선사가 탁발승 엄양존자에게
내린 가르침이 오늘따라 새롭구나
본래 재물도 가진 것이 없고
저 높은 곳을 향한 욕망도 단념했던
한생의 일장춘몽에서 깨어났지
한결 전신이 가뿐하게 살아간다.
(2023. 2. 창조문예)
착득거(着得去)에 대하여
다시 조주선사는 말씀하신다
네 어깨애에 무겁게 짊어진 욕망과 집착
참으로 어리석게도 여기까지 안고 왔구나
옛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도 모르느냐
온몸을 감싸 안고 휘청이며 살아온
번뇌, 갈등, 원망, 손익, 정의와 과오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거라
천지가 공(空)이니라
만물이 허(虛)이니라
허공중에 육신이 고통으로 떠돌기 전에
네가 가진 오욕칠정(五慾七情)
거기에 포함된 유무형의 가치를
남김없이 가지고 떠나거라
아, 번거롭기만 했던 한생에서
오늘 따라 더욱 찬연한 햇살 받으며
선사의 가르침은 영육(靈肉)을 가볍게 하리니.
(2023. 2. 창조문예)
무하유(無何有)에 대하여
이 세상 천지에 아무 것도 없다는데
어째서 무엇인가 있다고 우기느냐
내가 가진 것 모두 탈탈 털어 버리고
허름한 빈 마음의 껍질만 남았는데
아직도 한 구석에 뭔가가 지워지지 않았다네
장자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 있단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있지 않은 곳,
아무 것도, 어떤 것도 없는 곳
우리 인간들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향
유토피아(Utopia), 이런 곳이 어디에 있을까
현실적으로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곳
무위자연(無爲自然) 생사와 시비가 없는
참으로 행복한 곳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제라도 훌훌 벗어버리고
장자처럼 그곳을 찾아서 떠나자
얄팍한 지혜나, 입신출세나 욕망을
내던지고 오로지 도가(道家)의 생을 살다간
현인(賢人)들과 함께 한생을 마무리하자.
(문학과창작 2023. 여름호)
경지경(更之更)에 대하여
조선조 때 유생들의 시문을 채점하면서
상중하로 점수를 매기고
맨 꼴지를 경지경이라고 했다
기생들이 남정네들의 정력을 평가할 때도
이 채점 기준을 적용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상
그 다음이 중, 하로 난도질을 한다
여기에도 들지 못하는 중생들이
오늘도 거리를 헤매고 있다
더러는 실패한 인생을 원망하면서
세상을 하직하는 일도 있었다
화류계에서 낙방한 경지경을
이 시대의 낙오자에게도 적용하는
처참한 형태의 현실이여
오늘도 서울역 지하도에서는
화려한 자본주의에 경멸당한 노숙자들이
쓴 소주잔을 훌쩍이고 있었다.
(문학과창작 2023. 여름호)
불학시(不學詩)에 대하여
공자께서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이야기 할 것이 없느니라”
(不學詩 無以言)
그 아들은 시를 공부하였으며 다시
“너는 예를 배우지 않으면 남 앞에 설 수가 없느니라”
(不學禮 無以立)
공자께서는 비록 자식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과외수업을 하지 않은 군자라-
또한 공자 가라사대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하느니라”
(多識於鳥獸草木之名)
한 편의 시 속에는 만물의 이치를 모두 알게 한다
그러하니 백성들이여 이제부터라도
시를 배워서 세상 물정과 인간의 도리를 배웁시다-
고전 『論語』에서 공자는
시에 관한 담론으로 인격체를 개선하려 했을까
시는 인간들의 근본인 사랑이기 때문이리라.
(2023. 가을 중앙대문학)
상고대
제 몸 청청하던 기상 모두 떠나보내고
어휴 춥다 움추린 가지마다
된서리 엉겨 눈꽃을 피웠구나
한 서린 겨울나무의 눈물인가
저 산 너머로 멀어진 계절의 여운
오로지 햇볕만 의지하는
산야에서 떨고 있을 중생들-
불사춘
너는 아직도 1
너는 아직도
눈물이 많았던 지난날을
다시 회상하면서
그 날의 원망을 잊지 못하느냐
아니다. 지금은 희망 넘치는 노래
그 음률에 젖고 젖어
노후를 보내고 있다네
우리쩍 사람들은 모두 겪은 일이지
못 먹고 못 입고 못 살아서
못 배운 그 시절은 나만의 운명이더냐
이 좋은 세상에서
잠시 흘렸던 눈물은 말끔히 닦아내고
한숨 돌리면서 이승 떠날 날만 기다리지
안 그런가, 친구여.
너는 아직도 2
너는 지금
망팔(望八)을 넘어 망구(望九)에 이르면서도
이 풍진(風塵) 세상의 허물들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가
아서라. 차라리 돌아가서
김용임 가수의 “훨훨훨”이나 부르랴
사랑도, 미움도, 탐욕도 모두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아보지 않겠나
오욕칠정(五慾七情) 무슨 소용이랴
너는 아직도
너의 뇌리(腦裏)에 꿈틀거리는 낡은 허세(虛勢)
버리지 못하는 욕망은 지금이라도
나옹선사의 청산가(靑山歌)를 불러보랴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버려라 훨훨 벗어 버려라 훨훨사랑도 미움도 버려라 벗어라 훨훨훨아 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라 하네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너는 아직도 3
퇴근길 봄볕은 온 천지가 따사로운데
가난한 시인의 주머니에는 찬바람만 분다
참새,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어이, 아줌마- 여기 쇠주 1병이요-
흘깃 쳐다보곤 대꾸가 없다
아줌마, 아가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이모, 언니야, 그때서야 술상이 차려진다
몇 잔 들이켰더니 아하
주머니만 차가운 게 아니라 가슴도 차갑다
시인아, 시인아 너무 고독해 마라
이태백의 경지에는 못가지만
실컷 마시고 취해서 외로움을 비켜가리라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무엇이냐
흥얼거리며 비틀비틀 어둠길을 걸어가면
이제사 더운 주기(酒氣)가 가슴을 데운다.
개성에 와서 1.
개성은 열 개(開)와 성(城), 성문이 열린다는데 나는 운 좋게도 성문 열린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개성공단에는 우리 기업과 인력들이 상근(常勤)하고 있지만 평상인으로서는 출입이 금지된 곳. 같은 민족인데도 어쩐 일인지 모두가 낯설고 어색하다.
금강산 가본 일 말고 북한땅은 처음 밟는다. 회색빛 시내는 조용하다. 가끔 우리가 지나는 차를 숨어서 쳐다보는 애들이 보이지만 모두가 무덤덤하다. 높이 솟아 펄럭이는 인공기 너머 멀리 보이는 송악산도 무심하게 흰 구름만 안고 앉아 있었다.
고려 천년의 고도 지금은 무표정의 사람들이 옛 역사도 잊은 채.
개성에 와서 2
멀리 송악산을 바라보며 문득 김삿갓의 「개성축객시」(開城逐客詩)가 떠오른다. 열개자 성성자, 성문을 연다는 마을에서 왜 찾아온 손님을 내쫒느냐는 야유의 시이다. 또한 송악산, 소나무송자에 메부리악자, 나무가 무성할 텐데 왜 불땔 나무가 없느냐, 이 황혼에 찾아와 하룻밤 묶어가기를 이 핑계 저 핑게로 거절하는 주인을 욕하는 시이다.
김삿갓이 전국을 방랑하면서 이곳 개성에서의 고약한 인심을 꼬집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인심은커녕 서로 대화마저 불가능한 凍土의 땅-여기에 오늘 나는 당시의 심경과 오늘의 거리 풍경을 비교하고 있었다.
옛 송도에서 술 한 잔을
언젠가 한국문협 문학기행으로
설레인 북한땅 개성을 방문했다
선죽교와 박연폭포를 돌아보았으나
포은 정몽주의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고
송도삼절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북한 음식이 거나하게 차려진 식당에서
3$짜리 대동강맥주 두 병을 사서
우리 테이블 인사들과 나누어 마셨다
여행에는 술이 있어야 제격이지--
누군가 떠들기만 했지 한 병 사는 이는 없었다
박연폭포 폭포수 아래 돗자리 깔고
서 화담 선생도 모셔다가 황진이와 대작(對酌),
옛 송도의 정취를 듬뿍 나누고 싶다
대한민국의 시인이 북한땅 개성에 와서
어찌 일잔(一盞) 아니 마시고 그냥 돌아가리.
[2020. 11. 문학공간]
개성 박연폭포에 와서
분단 몇 년 만에 나선 개성 여행길
우리 공장 들어와서 북한 동포 도움 주고
이젠 통일로 가는 길이 빠르겠구나
민둥산을 돌아돌아
마주한 박연폭포
송도(松都)삼절(三絶)은 어디 갔나
몇 백년을 한으로 펑펑 쏟은 눈물
그 흐르는 화음은 예대로인 채
불변의 강산에 전설로 남아있다
황진이 누님이여,
서화담 선생을 모셔와 그날의 흥취를
노래하소서. 사랑을 나누소서.
폭포여,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개성 선죽교에 와서
이방원의 철퇴소리와 포은 선생의 비명이 아직도 들린다. 검붉은 혈흔(血痕)이 길손을 붙들고 한이 맺힌 충절의 노래 ‘단심가(丹心歌)’를 들려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황해북도 개성시 선죽동-한석봉의 글씨로 새긴 빗돌 ‘善竹橋’-어머니의 말씀대로 까마귀 싸우는 골에는 백로가 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또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리’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도 아예 듣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아아, 이젠 전설로, 역사로 남았으나 분단선 저 너머로 다시 찾아갈 수 없는 슬픔만 풀풀 날리는데.
피맛골에서
늦가을 오후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찬 기운 살짝 머금은 바람도
마지막 남은 나뭇잎을 흔들고 있다
홑 바바리 옷깃을 높이 세우고
인사동 지나 피맛골로 어슬렁거린다
‘바람이 분다 ...이제 살아야 한다!’
폴 발레리는 그의 시 [해변의 묘지 6]에서
미친 듯이 절규하고 있다
‘비가 온다 ...나는 다시 사랑해야 한다’
다시 허영자 시인은 그의 수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은
종로 1가 지하 ‘소문난집’에 홀로 앉아서
지친 육신과 혼돈스런 영혼을 위해서
노을이 기울 때까지 취하도록 마셔야 한다.
4.참새 방앗간을 그냥(간지)
어느 주유소에서
오래전 심상해변시인학교 백사장에서는
열사와 시를 합성시키는 행사가 열렸다
갈매기의 끼륵끼륵 합창에 따라
시를 얘기하고 노래하는 열정은
너울너울 파도에 잠시 띄워두고
바삐 돌아온 시인들은 주유소를 찾았다
酒有所 ⟹ → →
따라가다 보면 바닷가 소나무 밑에 차려진
낭만이 주렁주렁 넘실대는 주점이 있었다
벌써 애주가 시인 몇은 거나한 시담으로
좌중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다
-술 한 잔 입에 못 대는 자가 시를 어떻게 써?
-사랑도 한 번 못해본 자가 무슨 시인이야?
왁자찌끌한 취담(醉談)에는 그들의 진실이 있는가
음주를 위한 변명이 시인들의 특징인가
파도가 모래톱을 훑으면서 속삭인다
술 마시게 하는 이 세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아, 술과 사랑과 눈물은 영원한 시제이니까
아마도 그들은 내일도 주유소를 찾을 것이다.
(2020. 합천문학 28호)
연고전 열리는 날
어디서 누구랑 일잔(一盞)했는지
얼굴이 붉으스레 상기되어 있다
어지러운 세상을 호기(豪氣)로만 살 수 없었는지
또 한 잔 한잔 하다가 취기(醉氣)가 돌았다
“이 세상에 술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해가 뜨면 소주 해가 져도 맥주
아니야, 아니야 막걸리가 최고야“
신촌 연세로에서 연고전이 열리는 날엔
어김없이 벌어지는 떼창의 곡조가
더욱 공감하는 밤바람을 안주로
혼자서 홀짝거리다가 어슬렁어슬렁
어둠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다. 만약 이 세상에 술이 없었다면
삭막한 심중으로 몰려오는 거친 파도를
무엇으로 감당할 수 있으랴
주신(酒神)이여, 금준미주(金樽美酒)는 말고
텁텁한 탁배기 한 잔이면 족할진저.
畵中有詩의 실행
--박도원 화백 개인전에 붙여
대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언제나 청정감 깃든 온화한 화폭에
떨리는 붓으로 인생을 담는다
스스로 버릴 수 없던 궤적의 흔적들
색감 짙게 恨을 풀어
불망의 美를 창조한다
‘靑山 빛을 만나다’
그 빛의 행방은 긴 그리움을 남겨둔 채
한 떨기 곱게 꽃송이로 피어나고
다시 한 자락의 선율, 詩로 태어나는
아, 그는 우리 앞에 우뚝 선 畵仙이었나
보라, 알알이 맺혀 뿜어 올리는
그 섬세한 순수의 정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인상파의 魔力
화려하게 다가오는 색채의 황홀경이다
畵中有詩, 詩中有畵-
‘그림은 말없는 시다.
시는 말없는 재능을 가진 그림이다(호라티우스)’
그는 畵筆을 잡는 순간
詩와 동행하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그의 畫法은 곧 詩法이다
그가 만난 ‘청산의 빛’은 온누리에 퍼져
자연과 인간이 함께 빛날 수 있는 光明으로
우리들 가슴 깊이 밝게 비춰주기를
아아, 캔버스에 활짝 피어나는 생명이기를-
(2020. 5. 박도원화백 개인전 도록)
주유시담
--술 詩 1
술꾼들이 모여 거나해지면
주유시담(酒遊詩談)이 길어 진다
그냥 히히덕거리거나 음담패설(淫談悖說)
보다는 상당히 진취적이고 건설적이다
옛날 아버지 밥상에는 언제나 반주(飯酒)가 있었고
요즘 나는 친우들을 만나야 일잔(一盞) 땡긴다
얼마 전에는 문단 주류(酒流) 삼인방이 모였다
만났다하면 술집으로 직행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에 한 사람이 입원하고
코로나19로 인한 만남이 뜸해진 후로는
주회(酒會)가 열리지 못해서
가끔 반주로 혼술을 마시고 있다
술은 입을 경쾌하게 하고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칸트의 주장을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백(李白)이나 백거이(白居易)처럼
즐길 수는 없지만 음주 후에 쓰는 시가
가장 전개가 선명하고 명민하면서
명징한 주제가 기승전결(起承轉結)을 장식한다
이러한 연유로 술 詩를 쓴다
아벼지의 술시부름
--술 詩 2
아버지와 형이 뒷골 다락논에서 피사리를 하다가
출출했는지 나에게 술심부름 시켰다
아랫마을 주막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사들고
논뚝길로 돌아오다가
‘대체 술은 무슨 맛으로 먹지?’
궁금했던 나는 주전자 꼭지에 입대고 꿀컥꿀컥-
어허, 온몸이 빙빙 돌아가다가 끝내 길바닥에
쓸어져 잠들고 말았다
술심부름간 애가 오지 않아 찾아나선 아버지
웬걸, 이놈이 취했구나, 취했어
엎혀서 집에 돌아온 나는 다음날 깨어났다고 한다
그때 나이 일곱 살?-
무애 양주동 박사의 『문주반생기』에는
동내 쪼무래기들 글 가르치는 월사금으로
술 한 됫박씩 받아서 마셨는데
그 나이 세 살이라나?
술놀음 흉내
--술 詩 3
읍내 세무서에서 술조사(그때는 술친다고 했다)가 나왔다
누군가의 귀뜸으로 울엄니가 혼비백산이다
울 엄니가 정성스레 술밥 찌고 누룩 섞어
아랫목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를 쯤
형이 술독을 지게에 지고 가서 뒷산 숲속에 감추었다
면소재지 술도가의 술이 팔리지 않아서
각 동내마다 밀주(密酒)를 단속한다는 것이다
당시 농촌에서는 농주(農酒)나 제주(祭酒)로
즐기곤 했는데 들키면 큰일 난다
술독은 압수당하고 벌금을 물어야 한다
우리 철부지 조무래기 몇몇은 몰래
숨겨둔 술독에 빨대를 꽂아 빨아 삼키면
달작지근한 맛에 술기가 얼굴에 발그레하다
‘야, 이놈! 방자야, 주안상을 다시 차리렸다’
우리들은 어른들 흉내의 술놀음 하다가
어둑해질 무렵 비틀비틀 뒷산을 내려오곤 했었다.
(이상 한국시학 2020 가을호)
주전자전에 대한
--술 詩 4
아버지 밥상에는 언제나 반주(飯酒)가 있었다
선주후면(先酒後麵)의 예를 지켰을까
소반 독상(獨床)일 때에는 단잔(單盞)으로 끝나지만
겸상일 때에는 첨잔(添盞)의 권주(勸酒)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오늘은 중대한 대사를 의논해야 한다
장성한 내 가형(家兄) 혼사를 결정했는지
다시 술상이 가득 차려지고 웃음소리가 들린다
사랑방에서 장죽 터는 소리가 끝나서야
나도 큰절로 문안인사를 올렸다
‘그래그래, 너도 한 잔 하렴--
이 기쁜 날 아니 마시고 뭐하리‘
--주전자전(酒傳子傳).
그렇게 전승된 주법(酒法)은 아직도
혈관을 돌고돌아 생기를 넘치게 하는데.
할머니 기제일에
--술 詩 5
오늘은 큰댁 할머니 기제일(忌祭日-제삿날)이다
가내 대소제절이 다 모여 참사(參祀)한다
정성껏 진설된 젯상(祭床)에 지방을 향해
장손이 잔(초헌)을 올리고 재배를 한다
이 때 제주(祭酒)는 술독에서 용수로 떠낸 청주다
‘유 세차.... 현조비유인 남평문씨....상 향
(維 歲次.... 顯祖妣孺人 南平文氏...尙 饗)‘
독축(讀祝)이 끝나면 다시 재배를 한다
이어서 아헌, 종헌, 밥을 올린다.
첨작 등의 제레가 끝나면 철상하고
이제부터 음복이다.
할머니 혼령이 드신 술, 퇴주를 모아
제관들이 나누어 마시는 절차다
여기에서는 화기애애한 집안의 우정뿐만 아니라
그동안 쌓였던 집안간의 불만도 터진다
음복술에 취해서 사소한 다툼이 있기도 했다
주로 종토(宗土)에 관한 재산 언쟁이었다.
(이상 시원 2020. 가을호)
혼술에 대한 미련
--술 詩 6
별 다른 행사가 없는 날에는
혼술(혼자 술마심)을 마다하지 않는다
-혼자 마시지 않는다, 집에서 먹지 않는다
옛날 자주 찌끌이던 음주 작심(作心)이
울적하다, 답답하다는 핑계로
지금 서서히 무너지면서 혼자서도 즐긴다
그대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하면
주저하지 않고 내 심정을 경청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인생이란, 사랑이란 무엇이냐는 등
결론적으로 시는 무엇이다라는
나름대로의 정의가 모아지면
스산하던 영혼도 가을 하늘처럼 맑게 개인다
어쩌면 그대의 비밀스런 마법이
나의 서글픈 심중의 고통을
한 잔 한 잔속에 풀어 희석시키는가
어제는 친구가 죽어 슬퍼서 한 잔
오늘은 옛 여인 전화가 와서 또 한 잔
내일도 비틀거리던 허무가 사라져서
일배 일배 부일배(一杯一杯 復一杯).
( 2020. 문학메카)
술시의 울분
--술 詩 7
퇴근할 때쯤이면 술시(酒時)가 다가온다
대로변 노상 리어카 대폿집에 앉아서
참새 한 마리 지글지글 꾸어 놓고
막걸리 한 대포로 출출하던 허기를 때운다
얼큰해지면 에이, 씨팔. 정치가 어떻고
좀 더 취하면 육두문자로 상관을 안주로 씹는다
직무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가
밤 이슥토록 핏대가 달아 오른다
아아, 이 맛이여. 이 세상에 술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고뇌와 울분은 하늘로 치솟아
에이, 씨팔씨팔- 더러운 이놈의 세상
퇴근 후 한 잔으로 억눌렸던 심신을 달랜다
휴우- 휴우- 쌓였던 한숨 길게 내쉬며
어둠 속 별들과 함께 비틀비틀
아침에 떠났던 골목길로 동행하고 있다.
( 2020. 문학메카)
주신 바카스여
--술 詩 8
후두둑 낙엽 지는 소리인가 했더니
초가을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어찌나 삶이 서글프거나 팍팍해지는 오후
코로나19 가시적 거리두기로
모임 행사도 연기되어 갈 곳도 없어졌다
누구를 불러 소주라도 한 잔 나누면 좋으련만
에라 모르겠다. 동네 슈퍼에서 소주 두 병 사다가
멸치 몇 마리와 고추장, 김치를 안주 삼아
혼자서 홀작홀짝 혼술로 잠시 달랜다
--혼자서 무슨 맛으로 술을 마시냐?
아니 이태백도 월하독작(月下獨酌)이렸다
그는 시성(詩聖)답게 달빛 아래 마셨지만
나는 주선(酒仙)이 못되어 방중독작(房中獨酌)
가을비에 젖은 고독의 망령이 다시
꿀컥꿀컥 취기를 재촉하고 있다
‘집술은 안 마셔, 혼술도 안 마셔’
평소의 작심이 무너지는 비 오는 오후
아아, 주신(酒神) 바카스여
술 없이 못산다는 요즘 이 일을 어째야 좋소.
주법을 잊었나
--술 詩 9
수원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퇴근 후 다른 약속 없으면 한 잔하게 오라는 것
멀어서 못가- 끝나고 집에 오면 자정-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중얼중얼 변명
-어이, 친구여, 5대 酒法도 벌써 잊었어?
遠近不問-멀거나 가깝거나 불문임
淸濁不問-청주나 탁주나 구분치 않음
外現不問-외상이냐 현찰이냐 따지지 않음
晝夜不問-밤낮을 가리지 않음
老少不問-노인이나 젊은이나 상관없음
이봐 그리운 술친구(酒友)여,
홍콩에서 막걸리 한 잔 땡기자면
비행기를 타고라도 가야지
여기 수원이 뭘 멀다고 핑계야
늦지 않게 빨리 와- 기다릴께-
--??
(이상 한국작가 겨울호)
주님과의 유정한 대화
--술 詩 10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선 겸손해진다
평소에 내뱉지 못한 원대한 소망이나
자질구레한 독백까지도
그와 마주하면 기함(氣焰)을 토하는 버릇이 있다
그의 근엄한 위력일까, 계시일까
그는 언제나 유정(有情)한 모습으로 나를 대한다
어떤 일로 북받쳐 오르는 눈물이나
열변으로 변명을 해도 그저 암묵(暗黙)으로
--자, 술잔이나 받어
그렇게 가볍게 세상을 살면 안 돼--
용기가 부족하거나 주눅이 들 때면
그를 찾아가서 허심탄회한 대담을 한다
주(酒)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나는
그런 날은 허물없는 주님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행운아가 된다.
(이상 2020 문예사조 사화집)
고주망태의 변
--술 詩 11
매일 반주로 한 잔씩 마시는 것은 건강에 좋대
어디가 좋은 대?
우선 혈액순환이 잘 되어 화색(和色)이 창연하고
수구러드렸던 용기가 용암으로 솟는다
그래서 매일 한 잔씩 찌끄리는 편이지만
한 친구는 주야장장(晝夜長長) 대취(大醉)
어떤 날은 무박(無泊)으로 퍼 마시다가
새벽녘에 고주망태가 되어 엠블란스에 실려갔다
그는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우리 주당 몇이 모여 그의 무덤에 비석을 세웠다
--고 주망태지묘(故 酒亡太之墓)
생전의 주정(酒情)이 못내 그리워서
그의 석물(石物) 앞에 술 한 잔 부어 놓고
그의 주혼(酒魂)을 위로하면서
우리들도 산그늘이 밀려올 때까지
왁자찌끌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주도유단(酒道有段)
--술 詩 12
조지훈 시인의 수상집 『시인의 눈』에 보면
음주에도 무릇 18의 단계가 있다고 했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不酒) 에서부터
술로 인해서 이 세상을 떠난 사람(廢酒)까지
우리 주당(酒黨)들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
그리고 주정(酒酊)과 주격(酒格)에 따라서
그 주도(酒道)의 급수가 매겨진다.
나는 어디쯤에 해당할까
술을 좋아하지만 돈이 아까워 혼자 마시는 은주(隱酒),
무순 잇속을 따져서 마시는 상주(商酒)도 아니요
술의 진경을 배우는 학주(學酒-酒卒)에서
주도(酒徒), 주객(酒客), 주호(酒豪), 주광(酒狂),
이어서 주선(酒仙), 주현(酒賢), 주성(酒聖)
제일 높게 마지막 도달한 직급이 주종(酒宗)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열반주로 술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나는 아마도 술의 진미를 맛보려는 애주가인가보다
마신 듯, 안 마신 듯, 취한 듯, 취하지 아니한 듯
아직도 주선이나 주종의 위치까지는 요원하기만 하다.
(이상 [청시 24집], 2020)
초음 교습(初飮敎習)
--술 詩 13
자고로 술 마시는 일은 그래
무릇 어른들 앞에서 배워야 해
그래야 올바른 주법을 알 수 있느니라
두 손으로 정성스레 받은 술잔은
고개를 돌려 소리나지 않게 마시느니라
수능시험 끝낸 아들과 모처럼
모래내시장 난전 순대국집에 앉아
소주 한 병과 머릿고기 한 접시 앞에 놓고
그동안의 적조했던 소통을 풀어
고전의 주법을 전수(傳授)하고 있었다
두 손 정성으로, 고개 돌려서
소리나지 않게, 그렇지-
오래전 아버지 앞에서 익힌 주법으로
부자(父子)의 정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음주문화에 스며든 정신을 깨우치는
아름다운 정경을 실천하는 자리라
지금도 취중(醉中)에도 진담(眞談)이 되살아나는
오오, 화기어린 술잔이여.
건배사의 변천
--술 詩 14
충무로에는 존경하는 주우(酒友)들이 모였다
우선 간략한 수인사(修人事)가 끝나면
맥주와 소주를 적정비율로 말아서(혹은 비벼서)
한 순배 돌아가면서 권주(勸酒) 겸한 건배사를 한다
대체로 ‘위하여(건강을, 발전을)’를 선창하면
-진달래-진실로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변사또-변함없는 사랑으로 또 만나자
-사이다-사랑으로 이 한 몸 다바쳐
-재개발-재미있고 개성있게 발전적으로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후창을 외치면서 술잔을 부딪는다
언젠가는 점잖하게 ‘지화자’를 읊펐으나
요즘은 충무로 좌장이 잔은 높이 들고
‘우리가 남이가’
‘예, 형님’
김두한식 건배사도 인기를 모았다
충무로의 밤은 화기애애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이상 시원시 2020. 제1집)
술 한 잔 시 한 수
--술 詩 15
옛 선배들이 술집에서
마지막 잔을 들면서 외쳤다
‘사께노 잇데끼. 지노 잇데끼’-
왜말이다. 무엇인가 물었더니
술 한 잔, 피 한 방울이란다
술꾼들 막잔의 구호도 정겹다
얼마만큼의 애주가였으면
남은 한 방울에도 피 한 방울로 비할까
후루룩 쩝쩝, 카하아, 바로 이 맛이야
양주동의 문주반세기
변영로의 명정 40년
조지훈의 주도유단
김진섭의 주중교유록
신동한의 문단주유기
아아, 문인들은 술이 곁에 없으면
글이 한 줄도 씌어지지 않는다는-
나도 그렇다. 시의 묘약은 술이었나니
술 한 잔, 시 한 수-허 허 허.
(이상3편 2021. 11. 청시 25집)
금주령
--술 詩 16
조선시대 영조 임금은
전국에 강력한 금주령(禁酒令)을 내렸다
이유는 흉년으로 곡식 아끼는 일도 중요했지만
술은 사람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행동을 절제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의 문제와
국정이 잘 풀리지 않으면 혼자서 몰래
송설주를 차로 위장해서 마셨다고 한다
조상에게 드릴 제주(祭酒)도 금했으니
밀주(密酒) 장사가 처처(處處)에 성행하고
종내는 일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몰래 마시는 술이 더욱 맛나는 법
결국 금주령을 폐지되어 백성들은
농주(農酒), 약주(藥酒)를 다시 마시게 됐다
그렇다. 술 없는 이 세상에는
살아있을 의미가 없는 것, 오늘은
영조 임금을 알현하고 사도세자를 만나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빌려 읽어야지.
술집 간판의 변천사
--술 詩 17
술꾼들이 술집을 찾아 헤매다가
눈에 번쩍 네온이 밝혀진 간판
옛날에는 니나노집, 목로집, 쌍과부집 등
추억이 서린 술집들이 많았으나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술집 간판도 현대적이다
‘밥 한 술 술 한 모금
노가의리
참새 방앗간
먹고 갈래 지고 갈래
소문난집
주당회의
주유소(酒有所)
여기 이곳에서’ 등
추억의 대폿집, 주막집, 방석집은 없어지고
밤새도록 상다리가 부러지는 색시집도
이제는 무슨 싸롱, 까페, 호프집 등으로
주당들을 날마다 유혹하고 있다.
어어, 취할 띠
--술 시 18
어, 왜 이렇게 늦었어
자. 빨리 한 잔
이봐, 후래자 석잔(後來者 三盃)
어어, 과할 띠
또 한 잔, 어어 과할 띠
또- 어, 아니, 취할 띠
캬, 이 맛이야, 변하지 않았어
늦게 온 벌로
소주 일병을 맥주컵으로 다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W.C.에 다녀왔다
야, 이제부터 시작이야
술, 술, 어이 아직 안 취했어
그만, 그만 이게 막잔이야
이제 끝내고 집으로 가자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음주 사고의 비극
--술 詩 19
부산 태종대에서 경기도 파주 임진각까지 달리는
'2020 대한민국 종단 537km 울트라 마라톤 대회' 참가자 3명이
경기 이천시 신둔면 편도 2차로 도로에서
술취한 A(30)씨가 몰던 쏘나타 차량에 치여
숨졌다는 비통한 뉴스가 아침을 울린다
혈중 알코올 농도수치는 0.08, 운전면허취소 수준
술 마신 채 차를 몰다니 흑 흑
남의 생명을 앗아가는 취한(醉漢)들
음주운전은 절대 금물-
하루도 끊이지 않는 TV 음주 사고
자신이나 남들의 생명이
술 몇 잔과 바꿀 수 있다니
참으로 위기에 세상에 살아간다.
주류와 비주류
어떤 문학 행사가 끝나고 식당에 들어간다
엉, 주류는 이쪽, 비주류는 저쪽-
이렇게 패를 갈라 넣는다
주류 酒類-
비주류 非酒類-
식사문화에서도 양분된 무리들이
서로의 위치를 과시하고 있다.
--
고전에서 본 술 이야기
-
정철의 계주문
{붙임-영역, 일역, 중역시}=간지
단떼를 생각함
피렌체 어느 골목에서
단떼를 만나고 있노라면
별 하나로 반짝이는
베아트리체도 볼 수 있을 게다
베치오 다리의 저물녘에
당신을 기다리지만
다가오는 건
히피들의 광란뿐일 게다
저 멀리 흰 물새 한 마리
기륵끼륵 지금사
당신을 찾아서 울어대지만
10년 만에 지상낙원에서 만난
그는 아닐 게다
아아, 지고천(至高天)을 따라 나선 그대
어둑한 그의 생가 부근을
그냥 헤매고 있을 게다
베아트리체와 늘 함께 있을 게다.
A Thought on Dente
A thought to meet Dente
on street of Florence
may mean me to fancy to see
Beatrice twinkling as a lone star.
I anxiously await you
in vain on the Veccio Bridge, but
I at best give way to
those hippies swarming from the other end.
A water-fowl in white,
noticing you, cries and
cranes the neck longer; but
an unlikely thing is that it meant to hold on
seeing you long in this earthen paradise.
I am sure, you and Beatrice are
side by side ever since,
hovering higher above in the heaven
over and above the grey house of birth.
(Trans. by Tae-jin Park)
어머니
섣달 그믐날 밤
이슥하도록
지등 하나 켜들고
사립문 앞에서 마냥 서 있었다
검둥개 짖는 소리
동구 밖까지 적막을 흔들어
겨울바람은 잠들지 못했는데
오래 전 별이 되신 아버지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My Mother
New Year" Evve
I'Ill late at night
With a paper-coverred lamp
My mother was standing in front of a brushwood door.
The barking of a black dog
Shook the silence our of the village,
And the winter winds didn't fall asleep
But mother was still waiting for my father
Who became a star a long time ago.
The scen was a picture.
(Trans, Kim Yong-jae)
(한국문협 시분과문집)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갈대는 누워서도
서럽게 울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날도
언제나 내 곁에서 우는 울음
산골 깊은 밤을 흔들고
문득 내 앞에 쓰러지는 메아리
갈대는 그렇게
서서도 누워서도 잠들 수 없는 아픔
산그늘이 지고 문득 응시하는 섬뜩한 달빛
어쩌면 산짐승 밤울음으로
그리움만 쌓아가는 눈물겨운 사랑
아아, 그것이 무상을 동반자로 안내하는
내 유일한 운명의 가락일지라도,
천국에서까지 서럽게 울려퍼질 노래
내가 간직하여야 할 사랑의 참회였다.
Reeds Waver With Tears
Reeds were sobbing sorrowfully
Even lying down.
Their cry,
heard always from my side
even on the windless day,
shakes in depth the night
that set in a mountain village.
Yet, its echo has collapsed in front of me.
Reeds still retain the pain,
for which they cannot fall asleep
standing or lying down.
When the mountain gets shaded
And the moonlight looks down like a
frightening gaze,
Sorrowful love grew with nostalgic affection,
like a cry of a beast.
Though it may be a tune of my only destiny,
leading me even as a mutable partner,
Ah, this is the very song
that will resound sadly across Heaven,
this is the very love
I will cherish forever.
( Trans, by Joon-young Lee
늦가을 산책
-억새곷 따라
사랑을 잊지 못하는 누구의 넋이었나
지천으로 하얗게 흔들리는
지울 수 없는 영혼이었나
가슴 가득 안겨 오는 향기 속으로
지나간 사랑의 선율이 흐르고
빛바랜 시간만
이곳에서 일렁이는 은색 물결
오, 시인이여
머물 줄 모르는 바람이여
언제가지 눈물 그대의 품에 쏟으며
사랑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한 아름 말씀으로 화답하는
어느 시인의 독백
어떤 사랑의 고백.
(2000.11. 22~27. 일본 도쿄 “한강과 가와마천”시낭송회)
晩秋の散策
-すすきの穗によせて
金 松 培 キム ソン ベ
愛が忘れらなぃ 誰かの
魂だろうか
地の果てまで 白く搖れている
消すことのできない 魂だろうか
胸いつぱいになる 香りのなかで
過ぎ去つた愛の旋律が流れ
色ぁせた時間だけが
ゆらぬく銀色の波
おお, 詩人よ
止むことも知らない風よ
いつまでも
あなたの胸に 心む殘しているのか
詩人の 愛の 告白
餘白詩 . 21
파종을 한다
보드랍기만 한 가슴 깊숙이
훈훈한 바람 이랑을 지어
아픔을 뿌리고 눈물도 심는다
봄 물길을 튼다
엉긴 시간들 골골이 흘러
기다림의 이랑이랑마다 은빛 눈물
싹 틔우고 어눌한 우수의 꽃을 피운다
그렇지. 한 줌 해살마저 빗겨가는
나의 황량한 텃밭에는
환희가 오기 전에 낙과를 염려하고
새 한 마리 고독의 살점을 쪼아내고 있다
다시 파종을 하기 위해 가슴을 파낸다
어디에도 감응의 화음은 들리지 않고
이미 낡아버린 心地 그 여백에
무한의 넋두리만 갈무리하고 있다
余白诗-21
在柔软的内心深处
播下种子
暖风筑起畦田
种下的是悲伤和眼泪
春天打开水渠
凝聚的时间无声流逝
等待的畦田里泪水闪烁
新芽布满忧愁的花枝
哦,只有一小撮阳光
梳理着我的荒地
为无法收获硕果而忧心忡忡
小鸟啄食着孤独的身子
刨开心灵为重新播种
却听不到丝毫共鸣的和声
已经荒芜的空地上
只剩下无尽的咒语
(陳雪鴻 譯)
--
여백시 -68
우주는 황홀했다
긴 꿈이었을까
육신인지 연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작은 물체로 떠 있었다
流星들이 지나가고
지구의 광채도 빛났다
허공을 遊泳하며 쳐다보는 지구
그곳에서 문득 구조신음이 들린다
-태풍, 폭우, 지진, 해일, 화산 폭발
아아, 저 위험한 일들을 어쪄랴
이 공간까지 전해지는 멸망의 교신
가끔 우주선이 지나간다
다시 돌아갈 생명의 땅이 없어졌다고
우수의 손을 흔든다
꿈이었다. 영혼을 인도하는 별들이
마지막 落下를 준비하고 있었다
꿈속 우주공간에 홀로 남아
궤도를 이탈한 작은 별이고 싶었다.
(2000.10. 韓 . 中 詩集)
餘白詩 . 64
바람의 집을 짓는다
가슴 황량한 한켠에
떠돌던 그림자로 기둥을 세운다
다시 구름으로 하얀 벽을 바르고
별들만 가득 방안을 채운다
--어디서 살면 어때.
--어떻게 살면 어때.
잠시 머물다가
바람의 집을 허문다
그림자 지워지고
구름 흩어지고
별들 제자리로 돌아간다
모두 떠나버린 빈집
허공에 세운 바람의 집.
餘白詩 . 64
在荒凉的心里
修一间风的屋子
流浪的影子作为支柱
白云用来粉刷墙壁
邀来星星们在屋里相聚
--住在哪里都一样
--如何生活都可以
然后,风的屋子
稍存即失
影子被抹掉
白云也消散
星星们纷纷返回原来的位置
哦,修在半空中的风屋
一无所有的空屋子
余白詩 -68
恍惚的宇宙
愿是个长梦吗
弃不出肉身还是灵魂
以小物体浮着.
流星飞逝
地球的光彩夺目
遨游虚空 仰视地球
从那里突然传来求助的呻吟.
-- 颱风,暴雨 地震 海啸 火山爆发
啊!这些险事该如何呢
连这空间传来的灭亡的交信
偶尔宇宙船穿过
摇起忧愁的手
因能再回去的生命之土消失
原来是个梦 引导灵魂的星星们
准备着最后的降落
独自留的梦中的宇宙空间
愿是个脱离轨道的永远的星星。
[許世旭 譯]
* 나의 창작실
고난의 삶과 불혹의 언어
--나의 삶 나의 문학
1. 농촌 청소년의 꿈과 생활 언저리
나는 서부 경남의 합천 농촌 오지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형들을 따라가서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어깨너머로 읽었다. 그때 배운 ‘천고일월명(天高日月明)이요 지후초목생(地厚草木生)이라’는 추구집(推句集)의 구절과 명심보감의 명구(名句)들은 항상 국어 성적을 일등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후 중고생 시절에는 당시(唐詩)에서 읽은 이백(李白), 두보(杜甫), 도연명(陶淵明), 소동파(蘇東坡) 등의 한시에서 매력을 느끼고 나도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소박한 마음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물론 중환으로 그동안 집안과 온 식구들 특히 어머니의 고통이 심했다. 가산은 몰락되었다. 지금까지의 학업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당시의 사회적인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형이 몇 평 안 되는 농사를 맡아서 호구(糊口)를 해결했지만 당시에는 치수(治水)가 잘 되지 않아서인지 가뭄이 계속되고 어떤 때는 홍수로 전답을 휩쓸어가는 일이 빈번했다.
아버지의 별세는 바로 ‘인생은 이런 것인가’하는 우둔한 의문에 항상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당시 ‘학원문단’에 얼비치는 청소년들의 사유는 이러한 나의 고뇌가 충분한 대화의 장으로 이끌고 있었다. 좋은 시를 써야겠다. 시를 씀으로써 사소한 문제들까지 포용하는 방편을 찾아야겠다는 지극히 순정어린 감상주의의 발동이 용틀임치고 있었다.
육군에 자원 입대해서 공백기간을 메웠다. 제대한 후 한동안 수심에 잠긴 나날을 보냈다. 1966년 가을, 몇 권의 책을 싸들고 산사를 찾아 갔다. 자연과 깊이 접하면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섭리에 심취하고 물은 어디에서 솟아나 어디로 흘러가는가에 대해서 골돌하게 생각해 보다가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당돌한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찾아낸 해답은 아무것도 없었고 머리만 더욱 복잡해지면서 가슴은 더욱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 계곡의 물소리는 선녀들의 합창이었다. 차라리 세속을 벗어나 이 산속에서 일생을 마쳤으면 하는 막연한 기원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산문을 드나드는 스님의 행장이 그러하고 산새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와 새벽부터 들리는 독경소리가 모두 여린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도 알리지도 않고 무작정 상경해서 과외선생, 육성회비징수원, 교정사원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잠시 문학과 멀어졌다. 한 10년을 허송한 것 같다. 그래도 퇴근시간 후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면 다시 병이 도져오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무지개 지우고 떠난/ 풀꾹새 울음소리/ 밤 되면 고향 먼 에움길에 깔리는데/ 제 마음으로 남아/ 어느 날 바람이 된 텃밭 감나무
주저리로 달려있는 떫은 전설은
오뉴월 불볕 잘도 견딘
구름 한 조각 가슴 깊이 묻어 두고
따갑게 흘러간 시냇물
오늘도 찾지 못한 무지개빛
아픈 그림자들만
빗속에서 헤어지고
젖은 채로 지워지고
초가지붕 위 하얀 박꽃잎 하나
풀꾹새 울음으로
가슴 앓은 소리여.
당시의 습작 「풀꾹새 울음」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향수에 젖은 일상적인 관념의 단면이다. 자연이나 전원의 정서는 순박하면서도 서정적인 문학소년을 벗어나지 못하고 대학노트에 빼곡하게 숨어있던 낙서였다.
그후 결혼을 하고서도 시에 대한 연민을 계속되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노트를 찾아내서 밤새워 뒤지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고통이었다. 갈등과 좌절로 점철되었던 삶 자체가 고난이었지만 실종당한 나를 찾는 일은 더욱 처절했다.
2. 자력으로 성취한 불혹의 언어
나는 시를 낙서처럼 썼다. 그 당시 어렵게 형이 읍내에서 구해준 『소년세계』, 『새벗』에서부터 『학원』,『학생시대』를 밤새워 읽으면서 틈틈이 적어둔 습작을 여기에 투고하던 순진성을 상기하면서 글을 썼다. 그 이후에 『현대문학』과 『시문학』과 접하면서 현대시를 이해하게 되고 지도작품을 투고하여 선정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시의 신은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마침 서울시교육위원회 일로 만난 시 쓰는 어떤 시인이 시를 이야기하면서 습작을 한번 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박목월 선생의 제자였다. 평소에 동경하던 목월 선생과의 만남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으나 1978년 3월에 목월 선생님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멀리서 쓰러진다/ 누군가 마른 풀씨만 씹다가/ 썩지않은 마음 한 쪽 남겨놓고/ 한 생의 막을 내리는가/ 하늘이 엷게 흔들린다
흔들리는 저 언저리
시린 시야 밖으로
돌아가 눕는 저녁 새떼
바람만
빛살 고운 무늬로 어른거린다
오늘밤
귀에 젖은 물소리는
밤의 중심으로 흐르고
홀로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거기에 나는
그림움처럼 남아 있다.
한 생명의 심층까지 죄어드는 많은 허탈과 절망의 껍질을 벗겨내는 존재의 확인 절차인 이 작품「바람」과 수십 편을 『心象』에 투고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심사가 연기 되고 발표는 기약할 수 없게 상황이 바뀌었다.
박목월 선생님의 추천을 받지 못하는 절망적인 아쉬움이 엄습했으나 침묵으로 기다렸다. 그 아들 박동규 교수가 잡지를 수습하여 1980년부터 정상적인 발행이 이루어지고 신인상도 심사를 하게 되었다. 1984년 4월호 당선 발표의 영광을 안았다. 많이 늦었다. 나에게 등단은 참으로 불혹에 얻은 인생의 보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의 확인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지, 또한 그 고행은 어디에서 끝날 것인지 황막하기만 했다.
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나에게는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허탈과 굴욕에서 황사바람 이는 현상의 어느 벌판, 이런 곳에 한 줄기 훈풍으로 영원히 남아 있었다. 가시거리를 순간에 잊어버렸어도 꿈으로만 엮어진 가난한 마음이 있었고 그 내부 깊숙이 언제나 섬광처럼 번뜩이는 커다란 사상이 깔려 있음은 오늘의 황사현상을 용케도 헤쳐 나온 원동력이었으리라.
나는 당선소감을 ‘불혹의 언어’라는 제목으로 썼다. 이처럼 나는 이 현실적 갈등과 고뇌를 오로지 시를 통해서 정화하려는 확고한 심저(心底)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저항감이나 특정의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당시 농촌의 보릿고개 시절과 아버지의 별세 그리고 학업의 중단, 그래서 지적 자양의 충전이 불가능했던 정서는 언제나 우울한 그림자로 나를 고통스럽게 이끌고 있었기에 친자연적, 향토의 토속적이면서 전원적인 소재에서 인생의 의미 찾기와 존재를 성찰하는 시 세계로 몰입하게 된 것이다.
나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지만, 철저한 유교정신의 근본으로 성장했기에 인본주의(휴머니즘)를 신봉한다. 공맹(孔孟)의 교리도 좋으나 장자의 물을 심취하는 연유도 그렇다. 시를 통해서 자아를 인식하고 가치관을 다시 정립하는 일은 문학에서 중요하다. 여기에는 성찰과 화해라는 상보성(相補性)이 전제하지만, 여전히 상존하는 갈등과 번민을 해소하는 지적 혜안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성취해야 할 문학적 과제이며 숙명이다. 인간의 고통과 자연의 파괴 등은 위정자나 특수 관계인들만의 정책으로는 해소하기 힘들다. 우리 문학이 참여해서 인간의 정신 승화와 자연 친화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삶의 궤적을 회상하는 독백이나 사물을 스케치하는 문학 시대는 이미 낡았다.
평범한 일상이나 사물에서 범상한 진실을 일깨우는 일은 시인의 사명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미숙하고 사유가 부족한 나로서는 나의 존재 찾기의 고행이 더욱 가속화되어 나름대로 독서의 량을 늘리고 지적인 자양의 보충을 위해서 주야로 노력하였다.
아직까지도 고독과 현실 부적응에 혼돈이 따르고 있다. 그 ‘불혹의 언어’는 한국 시단에서 녹녹하게 적응되지 못하고 또 다른 고뇌에 헤매게 되었다. 현실이 냉대하는 인격체들의 생존경쟁에서 언제나 뒷짐만 쥐고 서있는 나의 몰골은 초라하기만 했다. 그러나 시를 종교처럼 간직한다는 그때의 결심은 어언 30여년의 시간 위에서 아직도 유효하다.
그 시절, 그렇게 열정적으로 시낭송회, 시강연회, 해변시인학교 등 시모임에 다녀본 경험은 바로 시창작의 소중한 한 질료로서 감회가 깊어진다. 지금사 시는 무엇이며 인생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가 간직한 특유의 인내와 끈기 그리고 노력의 소산이 아닐까 여겨진다. 시는 일회성의 명멸이 아니라 영혼과의 영원한 접목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생활 전선과 문학 창작의 열정
나는 우선 서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문교부에 근무하는 종형(從兄) 댁에 숙소를 정하고 종로구 재동초등학교 근방에서 국민학생들을 모아놓고 과외선생을 시작했다. 성적들이 올라가 이름 있는 중학교에 합격해서 인기가 좋았으나 다음 해에 중입시제도가 폐지되어 다시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누군가가 소개해서 검인정교과서 회사에서 교정사원 등 다양한 생활 전선에서 인생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다시 이를 악물고 문학과 밤샘을 한다. 모지(母誌)인 『心象』에서 발표지면도 할애해 주고 해마다 열리는 삼상해변시인학교에도 참가해서 담임시인도 맡아 참가독자들과 밤새우면서 시를 얘기하는 행운도 있었다.
이 무렵부터 시중에서 열리는 시낭송회에 초대시인으로 참석해서 시를 읽거나 시론을 들려주는 기회가 많아져서 다시 시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으로 유수한 시론집과 함께 외국 문예이론서, 철학서적까지 탐독하게 되었다. 이는 나부터 시가 무엇인지를 좀 이해하고 독자들과 담론에 임해야 한다는 소박한 결정이었다.
그 후에 나는 성춘복 시인과 홍성유 소설가의 추천으로 한국예총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여 조경희 선생과 조우하게 되고 오학영, 김양수, 최절로, 황 명, 조병화 선생을 만나게 된다. 거기에서 약 20년간 총무부장, 사업부장, 월간 『예술세계』편집주간으로 근무하면서 박봉이지만 생활을 영위했던 것이다.
안개 속에서도 항해는 할 수 있을까/ 영점 몇 이하로 낮아진 시력/ 여전히 안개비는 뿌리고/ 누군가 手信號를 보낸다/ 퇴색된 추상화에 던지는 우리들의 초점은
희미한 기상도와 표류하는 영혼
어디쯤에서 닻을 내릴까
알 수 없군요,
이승과 저승 사이
끝없는 미궁의 물안개 속에
매우 위험한 항해를 시작하는
이 시대의 고통
찢겨나간 돛폭과 흔들리는 등대 불빛
어쩌면 젖어버린 뱃머리로
떼밀리고 있는 사랑이여
멈춰선 나침반은
아아, 방향 감각이 없는 이 바다에서
나 또는 우리들--.
나는 첫 시집을 상재하고 KBS방송문화센터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는 행운도 가졌다. 그러나 위 작품「안개꽃 시대」에서처럼 역시 인생의 혼돈에서 아직도 방황하는 문학청년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시집 10권을 상재하고 제11집을 준비하고 있다. 시인은 어찌되었거나 시를 써야만 하니까.
(1) 첫 시집 『서울허수아비의 수화』1986. 모모. 재판 : 미래문화사
바람 부는 날은 흔들리는 풀잎을 닮아 나의 가슴앓이가 시작 된다. 하늬바람에도 온몸으로 웅성대던 어릴 적 대숲으로 가보면, 게딱지 초가지붕 위로 너울대던 저녁연기는 따스한 한 폭의 정경으로 채색되어 내가 자라서도 남아있기를 염원하던 동심을 청솔밭에 묻어둔 채, 시를 쓰는 일은 조그마한 향수에서 출발한다.
불혹이 지나도록 지울 수 없는 수천의 허탈과 절망은 나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바람을 잠재우지 못하고 어두운 방황 또는 온화하지 못한 한 생명의 심층까지 죄어드는 현실에의 절규에서 빚어진 나의 시는, 더욱 시련의 몸부림 위에서 자리 잡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시는 가장 절망적인 허탈의 늪에서 마지막 건져 올린 찬란한 증언이기도 하다.
허탈은 진정한 한 생애의 비상을 알차게 다듬는 바로 그 과정이었으며, 절망은 삶의 시야에서 시행착오와 갈등을 시작하는 순수한 심상(心象)의 뜨거운 태동(胎動)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안다.(‘후기’에서)
(2) 제2시집 『안개여, 안개꽃이여』1988. 거목
안개 속에 흔들리는 조그마한 풀잎의 냄새가 그리웁다.
싱그럽지도 않을 그 이름 모를 풀잎은 언제나 파아란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을 꿈꾼다. 아니면 어둠과 맞서서 소리 없는 울음에 지쳐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어렴풋이 확인되는 것은 안개 흩날리는 언덕에서 떨리는 모르스 부호를 보내다가 간간이 한 소절씩의 신음 같은 노래만 제 목청으로 부르고 있음이다.
말없이 떠가고 있는 세월, 미처 삭이지 못한 나의 목쉰 노래들이 어쩌면 풀잎의 떨림과도 같으리라. 흐린 시야에 가늠되지 못하는 나의 젖은 마음들이 때로는 자수정처럼 빛나는 한 줄기의 시혼에 감전되어 어둠을 뚫고 구만리 장천을 치닫는 별빛으로 녹아 흐르리라.
어찌 이 세상 아픈 것들이 내 마음뿐이랴 마는 눈물 배인 몇 줄의 삶 위에 부질없이 돌팔매질만 해대는 나의 시는 아무래도 신통치 않음을 스스로 되뇌이면서 여전히 안개를 걷어내는 한 사내를 동숭동 마로니에 그늘에서 만난다.(‘시인의 말’ 중에서)
(3) 제3시집 『백지였으면 좋겠다』1990. 혜화당
지난 80년대는 내게 가장 중요한 삶의 전기가 마련되었었다. 좌절과 갈등을 한 묶음으로 엮어서 진정한 나의 목소리를 갖고자 무척이나 애를 썼다. 한편 생활의 터전을 대학로로 옮겨와서 문학과 더불어 인접 예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나의 시적 사고도 많은 변모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로 하여 상채기진 허물을 몇 껍질이고 벗어 던지면서 태어나는 진통도 맛보아야 했다.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인간 태초의 순수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숨소리, 그 아름다움을 깊게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느끼기에 이르렀음은 퍽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시인의 말’ 중에서)
(4) 제4시집 『황강』1992. 한강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는 그리움이 하나 있다. 知命에도 밤마다 꿈길로 어른대는 노래가 있다. 그것은 지금도 정갈하게 남아 있을 고향에 흠뻑 젖는 일이다. 누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하기야 분단의 저쪽에 두고 온 실향민의 고향에 미칠 수는 있을까마는 아리고 쓰라렸던 어린 시절의 애잔함은 나의 내면에서 어떻게 용틀임하엿을까. 하나 하나 더듬어서 집히는 데까지 아름다움으로 기억하리라.
세 권의 시집을 내고도 허물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 자신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말라버린 마음밭에 신선한 청량제를 뿌리리라. 촉촉이 젖은 꽃망울을 오래 간직하리라. 고향에 질펀히 누워있는 황강은 청순한 서정의 원류이다. 향수와 함께 찾아드는 황강이 언제나 내 곁에 있어서 포근하다.(1991. 11. 응시동인지『응시』 제11집, 시작노트)
(5) 제5시집 『혼자 춤추는 이방인』1994. 문단
그래도 어쩌랴, 육신과 영혼이 한꺼번에 흔들려도 시를 향한 소리는 들어야 하고 나 또한 그 소리에 맞춰 한 소절의 내 노래는 불러야 하겠으니……./ 나는 영원한 이방인(異邦人)이다. / 이제 혼자 춤추는 이방인이다. / 여름 나무는 겨울을 꿈꾸지 않듯이 보편적 존재 이상의 나를 경망되게 꿈꾸지 않는 실재의 춤을 간구하는 나는 이방인이다. / 고뇌하는 내가 아름다와 보인다 / 그 고뇌와 체념과 혹은 눈물이 어둠 속에서 혼불로 타오를 때 춤추는 나는 더욱 아름다와 보인다 / 아무리 살펴봐도 어눌한 몸짓뿐이다. / 어쨌거나 다섯 번째의 보잘 것 없는 나의 분신이다. / 아직 철이 덜든 감성으로 부르는 푸념의 노래만 솔직한 영혼의 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 내 품안을 떠나보낸다.(‘제5시집을 내면서’ 중에서)
(6) 제6시집 『시인의 사랑법』1996. 모아드림
여섯 번째 나의 분신이다.
시는 나에게서 카타르시스(淨化)이건 나르시스(자기도취)이건 두 가지 모두 수용한다.
그러나 확실한 시정신은 화해 구도의 설정에 있다. 곧 사랑을 의미한다. 사랑은 인간 최대의 진실임을 믿기 때문이다.
화해가 위기의식의 탈출이 아니라 극복을 위한 구원의 한 방식이라는 일단의 사유가 이 시집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참으로 불투명한 현실은 나에게 위기를 강요하고 있다. 한 편의 시가 이들에 대한 해법을 조화롭게 제시해 준다는 신념에 안도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나약한 내 모습이라 어눌함을 감출 수가 없다.(‘자서’ 전문)
(7) 제7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1998. 삶과꿈
나에게 배당된 시간은 얼마일까. / 남아 있는 나의 시간은 어림잡아 얼만큼의 길이일까. / 지금쯤에서 돌아본 시간은 과연 적절함과 최선으로 함축한 창조의 행보(行步)였던가. / 어쩐 일인지 시간에 대한 사유의 집착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불투명한 변주곡이기에 무엇을 속단하기 어려운 칠흑 어둠 속 어느 날 내가 홀로 서 있음을 알았다. / 시간은 빛깔이 없다. 동시에 향기도 없었다. / 그러나 시간은 인간이 소비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는 교훈을 새겼다. / 시간은 자아 성찰과 희망을 제공하는 마력에 공감한다. // 옛말 ‘무정세월 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니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도 시간의 허비를 경계하고 있다. / 존재의 확인을 통해 진실의 향방을 유추하는 일은 시간과 비례한다.(‘시인의 말’ 중에서)
(8) 제8시집 『꿈 그 행간에서』2002. 청송시원
여덟 번 째 나의 고뇌를 털어낸다.
인생은 60부터가 아니라 나의 시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한 편의 시가 나의 삶과 인생에 있어서 그 찬란한 증언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내면으로 삭여 왔다.
그러한 존재의 확인이나 성철과 더불어 현실과의 화해는 더욱 나의 시 쓰기를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고 육성으로 시를 쓸 것이다. 그것이 나의 영혼과의 교성(交聲)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해야겠다. 좀더 성숙한 언어와 가치관의 투영을 위해서 땀 흘려야겠다. 빗진 나의 인생에게 승화된 최후의 생명이 환희로 남을 것을 약속하리라.(‘시인의 말’ 전문)
(9) 제9시집 『여백시편』2006. 시원
詩가 곧 생활이라면 얼마나 端雅한 시간의 연속일까.
아무래도 꿈꾸는 이야기인 것 같다.
仙界에서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복합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현실은 그렇게 나를 詩만 붙들고 있도록 그냥 두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살아가는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달래기도 하고 채찍도 가하는, 영원히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이 항상 나의 내면에 가득하다.
그와 동행한 이래 그에게 어떤 증표라도 보일 요량으로 여덟 권의 시집을 묶고 ‘시전집’도 엮었다. 언제나 모자람이 많지만, 스스로 自慰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여기에 ‘餘白’이라는 話頭로 片片을 모은다.(‘시인의 말’ 중에서)
(10) 제10시집 『물의 언어학』2013. 시원
물의 진리는 오묘하다./ 물은 생명수요, 활력의 원천이다./ 물이 포괄하는 진실은/ 우리 인간들과 만유의 자연들에게서/ 생사의 한계를 결정하는 신의 선물이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물도 그 흐름이나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유형이 다르고
생멸(生滅)의 구분도 달라지지만,
물은 언제나 나에게 안온한 시혼을 안겨준다.
물의 탄생은 곧 나의 출생과 동일한 맥락으로 보았다.
그 행로도 나의 삶의 궤적과 비슷하다.
이러한 연유로 ‘물 詩’에 몇 년간 매달렸다.
이를 토대로 지금까지 써 모은 작품들을 모았다. 물의 진정한 의미와 시적 진실을 음미하면서 무려 90여편의 작품을 완성하고 이제 또 한 권의 시집을 상재하려 한다. 계속되는 시업(詩業)에 채찍과 함께 격려 바란다.(‘시인의 말’ 전문)
이 밖에도 시선집으로 『허물벗기 연습』(1994. 경원)과 시전집 『김송배 시전집』(2003. 청송시원) 그리고 시론집『화해의 시학』 『성찰의 언어』 『여백의 시학』『상상과 진실』 『존재의 원형』 『감응과 반응』등 6권과 시창작법 『김송배 시창작교실』 『시가 보인다, 시인이 보인다』『김송배 시감상교실』등 3권, 산문집 『시인, 대학로에 가다』 『그대 빈 가슴으로 대학로에 오라』 『시보다 어눌한 영혼은 없다』 『지성이냐 감천이냐』등이 있다.
제3시집 『백지였으면 좋겠다』가 문예진흥기금 수혜로 선정되어 지원금 100만원의 혜택을 받았으며 얼마 후 윤동주문학상 우수상도 수상하는 영광이 주어졌다.
4. 문단의 주변과 문우들의 교감
나는 한국예총에서 출발하여 한국문인협회 사무처장을 지내면서 많은 문인들과 교감했다. 어찌보면 나의 삶은 시와 더불어 행장기(行狀記)가 성립한다. 운좋게도 한국예총과 한국문협에서 호구(糊口)를 해결하면서 시업은 계속된다. 예총이나 문협은 문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선배문인들을 만나 대화하고 문학적 의견을 교환할 수 있어서 나의 문학과 인생은 더욱 정진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문단과 문학의 업적이 인정되어 제6회 윤동주문학상(1990), 문화부장관 표창(1990), 제1회 탐미문학상(1995), 제23회 평화문학상(2003), 제11회 영랑문학대상(2006), 제27회 조연현문학상(2008), 제1회 한민족문학대상(2010)과 제14회 한국글사랑문학대상(2014) 등을 수상하는 영광도 따라주었다.
출근하는 날부터/ 거기에 묶여야 했다/ 자유인의 몇 마디 갈망들이/ 정리된 기호 속에 갇힌 채
더욱 선명한 모습으로
명상에 잠겨야 했다
환영(幻影)이었다
어느 날 사직서를 내고
온몸 얽어매어 부자유스럽던
진실을 해체했다
양쪽으로 묶여 있던 그 자리에는
침묵의 새 한 마리 문득
창공으로 비상하고 있었다.
또 한번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작품 「( )B에 관하여」에서와 같이 문협 사무처장직을 사임했다. 이유는 S이사장과의 불화였다. 괴팍스런 성격은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주었다. 훌훌 벗어던지고 고향 해인사를 다시 찾아갔다. 지독한 비염의 치료와 함께 잠시 무엇인가 정리를 해야겠다는 심사였다.
이제 잡다했던 공사직에서 물러나 시창작에 몰두하면서 시학의 근원에 접근하고 탐구하는 일만이 나의 여생을 더욱 알차게 그리고 감미롭게 장식하는 보람이 아닌가 하는 좀 엉뚱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절집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의 문구 ‘靜聽魚讀月(정청어독월)’이라는 싯귀(詩句)를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아아, ‘고기가 달을 읽고 있는 소리가 고요한 이 밤에 들린다’.는 한 줄의 싯귀는 누군가 대시인인 고승이 작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이 지나자 매일 고통스럽던 비염도 완쾌가 될 무렵 서울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급상경 요망이었다. 당시 김년균 시인이 문협 이사장을 출마하는데 나를 시분과회장으로 동반 출마하자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몇 번을 사양하다가 수락하고 오로지 S이사장에게 절묘한 패배를 안기고 싶어 열심히 운둥을 한 결과 승리했다.
이 때나는 연전에 KBS에서 강의했던 경험으로 청송시창작아카데미를 개설하고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다. 무려 연인원 300여명이 수료하고 수십 명이 등단하는 영광으로 시창작 강의에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문학단체에서 초청 강의가 쇄도하였다.
김년균 이사장 체제에서 시분과회장은 많은 시인들과 교감하게 되고 각종 행사와 문학상심사 그리고 세미나 주제 발표 등 문협에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정종명 체제에서는 부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문협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특이한 일은 시인들이 시집의 해설과 서평을 부탁해서 지금까지 300 여명과 상호 작품으로의 교감은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시인이 해설을 집필한 경우는 최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이 사람을 가르치고 있다/ 사람은 물보다 못한가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헐벗은 자에게도/ 가장 더러운 곳에서도/ 가장 비굴한 처신에도
생명의 신비를 함께 하는 물
물을 깨우친 사람이 물을 따라 간다
이 지상 닿는 어느 곳에서나
분명히 물보다 사람은 어리석다.
--아아, 물이여, 老子여
여과(濾過)할 수 없는 노래여.
나는 지금 ‘노자의 물’에 심취해 있다. 이 작품 「다시 노자의 물」에서처럼 ‘물의 언어학’ 탐구에 몰두하고 있다. 제10시집에서 91편을 창작했는데도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물과 우리 인간의 이야기. 참으로 생명과 연관된 것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마하게 큰 명제(命題)가 다양한 목소리로 진실을 투영하고 있어서 그동안 고뇌해온 그 고통을 치유하는 행운을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물에 관한 탐구는 이것으로 마무리 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친자연적으로 접근해서 우리 인간들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서 숭엄한 상관성의 해법을 탐색해 나갈 것이다.(시론 「물의 언어학」중에서)’
나의 문학에 대한 평가는 이미 발간된 『김송배의 시세계』(2003. 청송시원)에서 윤강로, 이수화, 윤석산, 원형갑, 김양수, 유창근, 차한수, 채수영, 성춘복, 허형만, 조의홍, 구중회, 이명수, 이기철, 박명용, 제해만, 장 호, 윤병로, 김종주, 주경림, 육근웅, 이기애, 이시연, 유한근, 장백일, 현 희, 이상호, 이 탄, 김수복, 홍윤기 선생 등이 작품 해설을 통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또한 문인들과의 교감을 「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이란 제목으로 현재 60명의 문인들을 매월『문학공간』에 최광호 주간의 요청에 따라 연재하고 있다. 아마도 100회를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나이도 들만큼 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패기와 열정으로 나의 문학은 새로운 시적 지평의 창조를 위해서 부단하게 체험하고 사유하고 창작할 것이다. 문학과 문단과 그리고 나의 삶이 그 위의(威儀)와 본령(本領)을 성취할 때 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평소에 소망하던 한국문학과 문단 발전의 총아(寵兒)로서 우뚝 설 것이다. *
(2014년 가을호 『한국시학』)
사유(思惟)의 확대와 언어 조탁의 공간
나는 달동네 가까운 산중턱 연립주택에서 살다가 조그마한 단독으로 옮겨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어린 애들과 올망졸망 살다보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공간이 따로 없어서 가족들이 잠든 후에 날밤을 새면서 대학노트에 끌적여 습작을 하던 시절을 벗어나 이제 좀 넓은 주택에서 독서와 집필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우선 ‘청송시원(聽松詩苑)’이라는 당호를 붙여놓고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원고지를 메꾸는데 손목과 팔에 통증을 느낄 정도로 힘들었으나 얼마후 아들이 물려주고 가르쳐 준 컴퓨터로 독수리 타법으로 겨우 글을 완성하는 쾌거가 있었다. 아들은 대학에서 컴퓨터가 전공이어서 기능을 높일 때마다 나에게 물려주었다. 사실 나는 워드기능과 이메일 송수신, 까페 댓글 다는 정도 외에는 별로 다른 용도가 필요치 않았다.
나는 그 당시 문학지에 시를 청탁 받는 일도 있었지만 고향 선배가 어떤 협회에 중견 임원으로 있으면서 사보발행에 관여하는 책임자로서 딱딱한 통계숫자로 꾸며지는 업무용 내용에다가 교양과 지혜가 가미된 글을 연재하여 사원들의 업무 능률제고와 일반 상식의 향상을 통한 인성회복에 기여하겠다는 그의 방침에 따라서 무려 5년간이나 월간지에 잡문을 연재를 했는데 그 선배는 쏠쏠한 원고료와 함께 글 내용이 알차다는 전언이었다.
나는 이를 계기로 다채로운 교양서적의 탐독을 위해서 서가에는 문학서적 말고도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책들로 채웠다. 사서삼경을 비롯해서 삼국유사, 고대 신화, 구약성경, 부처님 생애, 이야기한국사 그리고 민속사전, 속담사전, 고사성어, 유머사전 등등에서 인용, 연재의 관심을 더욱 이끌어 현실과 적절하게 접맥하는 작법을 활용하였지만 시 창작에도 다양한 사유의 범주를 확대하는 효과도 있었다.
나는 주로 새벽에 글을 썼다. 조용하고 맑은 아침공기를 음미하면서도 담배를 피워 물어야먄 글이 씌어지던 내 집필실의 모습이었다. 일찍 잠을 깬 아내가 쥬스 한 잔을 들고 방문을 밀었을 때 자욱한 담배연기로 구박받던 나의 서재, 지금은 시를 통한 나를 탐색하기 위한 나만의 아늑한 별천지로 다시 바뀌었다.
나의 창작 공간에서는 다양한 문학 서적이 서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간직한 문학의 지향점이나 정신(특히 시정신)을 수시로 깨우치기 위해서이다. 시론집, 시창작법, 시해설집, 시문학사, 시학사전, 시전집, 시전문 잡지 그리고 많은 시집들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나를 손짓하고 있다. 옛 성현들의 말씀처럼 남아수독 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나 위편삼절(韋編三絶)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나는 이들을 골고루 만나서 즐겁게 대화로 교감하는 일이 요즘의 일과가 되었다.
착목(着目)한 사물에 투영된 의미 탐색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다’라는 등단 초기, 어느 노시인이 들려준 말을 잊지 못한다. 첫 시집 『서울 허수아비의 手話』를 펴내고 난 뒤, 시 쓰기에 부닥친 문제가 바로 언어의 고갈이었다. 먼저 사용했던 단어가 다시 이 작품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는 사어(死語)이거나 새로운 생동감이 없는 언어의 나열이라는 자괴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노시인이 ‘국어사전을 몇 번 읽었느냐’는 물음에 의아했던 내가 비로소 작품에 사용할 언어의 부족으로 새롭고 참신한 표현력을 갖추지 못한다는 반성에서 서점에서 국어사전 몇 권을 사서 안방에, 거실에, 심지어 화장실에 까지 던져두고 수시로 무작위로 펼쳐서 그 속에 잠자는 낱말들을 깨우는 일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옆에서 주어들은 천자문을 비롯한 한자공부가 지금의 언어숙련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깊게 묻혀있던 사전 속에서 어렵게 발굴해 낸 생기 넘치는 낱말 하나하나가 작품의 의미와 품위를 상승시키는 묘미에 심취하는 언어의 마력을 지금도 굳게 신임하고 있다.
나는 시전문지 『심상』에 당선소감으로 ‘시는 종교와 같다’라고 표현한 일이 있다. 이 종교와 같은 믿음의 원천이 바로 언어구사 능력의 연금술적인 기능이 작품의 전개와 의미의 충족을 제시한다는 문학적인 신뢰를 명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언어의 조탁을 위한 훈련을 지속하면서 창작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현장에서 활용하기 위해서 시창작 이론 학습에 몰두하다가 운좋게 KBS방송문화센터 시창작반에서 강의를 진행하면서 『김송배 시창작교실』을 집필, 발행하게 되어 나처럼 시공부에 열중하던 사람들과 많은 시인 지망생들의 공감을 받기도 했었다.
지금까지 내 작품의 지향적인 주제의 투영은 대체로 살아온 체험을 근간으로 해서 이미지를 재생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소재의 선택이나 상황의 설정과 전개 그리고 명민(明敏)한 주제의 정립을 위한 관념적인 시법을 상용하다 싶이 즐겼는데 그 체험은 바로 착목하는 사물들이 유소년, 청년기를 체험한 고향산천이나 전원 그리고 순박한 농촌 이웃들의 생활 속 풍속 등 그 정감 넘치는 순정미에서 탐색하는 인간애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정서나 사유의 방식은 자연스럽게 서정성을 배제하지 못하고 소박한 정념들이 작품의 주안점으로 정착하고 전원적, 토속적인 친자연, 친인간애 등 시적 아름다움 투영에 골몰하게 되어 최근의 『지워진 흔적, 남겨진 여백』까지 13권의 시집을 상재하게 되었다.
첫 시집 이후에는 약간의 사회적인 삶에도 시선을 집중하여 파괴되는 자연과 무너지는 인성에 대한 안타까움들이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안개여, 안개꽃이여』 『백지였으면 좋겠다』 『혼자 춤추는 이방인』 등의 시집을 펴내고 문명 비판이나 내면의식의 탐구로 존재의 문제, 생명의 문제 등 우리 인간들이 당면한 가치관의 인식에 의식의 중심적 흐름으로 사유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지우지 못하는 불망(不忘)의 한(恨)이 작품 속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난이며 눈물이며 절망의 연속적인 내 삶의 단면이 가감 없이 상상으로 재생하는 형상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하는 인간의 연약한 심리가 작품에 항상 동행하고 있어서 때로는 어눌한 면모를 떨치지 못함도 있었다.
다시 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 『꿈, 그 행간에서』에서는 무상(無常)의 세월에 대한 회의감으로 바뀌는 것을 내 자신이 스스로 감지하게 되면서 불경(佛經) 등 종교서적에 몰입하기도 했었다. 이 시간은 말없이 흘러가면서도 삼라만상의 생멸(生滅)을 주관하는 무형의 위력에 경악하면서 그의 신비함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에는 인간의 위기의식과 함께 시사적(時事的)인 현실적 고뇌가 동시에 침잠하고 있어서 내가 창작하고자 하는 시적 진실이나 시정신은 약간 치졸한 표현으로 발현되는 경향도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러하듯이 등단 40여년에서 되돌아보는 나의 시 쓰기의 주안점은 삶을 통한 생생한 체험(七情-喜怒哀樂愛惡慾)에서 창출한 다양한 이미지가 슬픔에서 분노로 다시 사랑으로 새롭게 정련된 형태의 시법을 실험하면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심경의 변화를 자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고희를 넘긴 삶의 연륜에서 지각하게 되는 자성의 가치관 확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 시집 『나와 너의 章法』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나’를 추적하면서 과거, 현재의 시간과 더불어 지탱해온 나, 나에 대한 진솔한 가치관은 무엇이며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남아 있는 미래의 시간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삶을 유지하면서 작품을 창조할 것인가를 스토리 텔링의 형식으로 써보기도 했었다.
최근에 발상하게 된 지워져버린 흔적이나 아련하게 남겨진 흔적의 여백에서는 두 갈래의 형태의 전개를 볼 수가 있는데 여과되지 않은 생생한 삶의 궤적을 실재의 현장에서 회고하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만유(萬有)의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친근하게 교감하면서 의미를 긍정하는 ‘사물의 의인화’ 작업에 몰두한 바도 있었다.
이제 박목월 선생님의 순수서정에 함몰했던 초기의 정서는 현대사회의 변혁과 인성의 변화에 따라서 나의 시법도 많은 변동을 실감하게 된다. 가끔 이러한 발상은 시의 위의(威儀)나 본령을 이탈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느끼지만 M. 아놀드의 ‘시는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다’라는 말을 신뢰하면서 지금까지 써온 작품들을 집대성하고 정리하는 일과 여생(餘生)에서 유종의 미를 향한 자적(自適)의 향기를 만끽(滿喫)하는 일만 남아 있는 것 같다.*(『월간문학』 202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