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가 만난 문인들 / 13
한산 최절로 시인
‘씨뿌려 거둘지니’라는 족자(簇子)를 한산(閑山) 최절로(崔岊鷺) 시인이 나에게 전해준 것은 1990년, 문인협회에서 수여한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할 때라고 기억된다. ‘爲祝 金松培詩人 尹東柱文學賞 受賞 놀뫼’라 쓰고 낙관까지 찍었다.
그는 전서(篆書)에서도 대가로 한국미술협회 쪽에서 이미 소문이 나서 전국에서 묘비명이나 시비 등의 제작의뢰를 많이 받고 있었던 시절에 오학영, 김양수 예총 사무총장에 후임으로 부임하게 되어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의 본명은 최성민인다. 최절로라는 필명을 쓰지만, 그는 ‘한산’이라는 호를 즐겨 쓴다. 이를 순 우리말로 번역한 ‘놀뫼’도 자주 쓴다. 그가 즐겨 쓰는 전서 작품에는 언제나 그의 아호와 낙관을 대할 수 있다.
조경희 예총회장이 정무2장관으로 영전할 당시 취임했던 오학영 총장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김양수 선생이 취임했으나 전봉초 전 서울음대 학장이 임기를 마치고 강선영 무형문화재(태평무)가 회장 임기를 시작하면서 그를 사무총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그와 나는 예총의 경영에 관한 정비작업을 수행했다. 우선 각종 내부 규정을 정비하는 일에 착수했다. 직제, 인사, 보수 등 기본적인 업무들을 정리하여 하나의 규정으로 확정해 놓으면 누구라도 이 규정만 숙지하면 업무처리가 가능하도록 제도화해 나갔다.
그와는 1980년대 초에 한국문인협회 지방 심포지엄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호탕한 기질과 함께 많은 문우들과의 교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황 명, 성춘복, 홍성유, 윤병로, 김양수 선생 등과의 교류는 특별한 정감적인 교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문학적 열정이 대단했다. 그는 문학정신이 곧 인간의 정신이라는 철학을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시집이나 수상집에서 읽을 수 있듯이 그가 구가하는 사회적 문제라든가 인간적인 갈등이나 고뇌가 그의 시정신과 융합되면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정열이 가미되고 화산이 폭발하듯이 명쾌한 어조와 논리로 문학의 근원을 해부하는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서 경남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그러므로 그의 필치는 예리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인 면에서 그가 신념으로 간직한 주제들이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공감을 획득하고 있었다.
소위 남의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보이는 직업 정치인들, 그들은 단 한번도 국민의 입장에 서서 나라를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아 불만의 소리가 높다.
사랑하는 나라나 국민을 위하여 스스로 판단하여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정치인은 손 털고 국민을 무시하는 이념이 죽어가듯 먼 곳으로 가버리면 얼마나 편할까 싶다.
한 칸의 원고지를 메꾸거나 한 호의 그림을 그리고, 한 편의 곡을 쓸래도 도무지 마음 편치 않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된다면 한 치의 발전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상집『詩人의 목소리』에서 「純愛」중에서
그는 이러한 주장이나 소신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끔직하게도 아끼는 마산고등학교 후배 문인들 중에서 김병총, 감태준, 김건일과 마포구청장을 지낸 시인 이경배 등에게 항상 문학정신과 인간정신의 일치를 강조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로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후에 『최절로 전서집』을 비롯하여 시집『이랑』『고발』『인간중독자』등과 점자시집『제3의 눈』과 육필시집『부재 속을 흐르는 강』과 함께 『西紀 2000年 여섯자 이人間이 어디서 살꼬하니』『춤추는 허사비』등 12권과 칼럼집『조용한 함성』, 수상집『詩人의 목소리』가 출간되어 문단의 관심을 주목하게 되었다.
대체로 살펴보면 ‘매미가 저렇게 우는 것은’, ‘물무당 유전’, ‘앵곶말 사람들’, ‘대나무 숲’, ‘가을 들길의 회향’ 그리고 ‘고향’ 연작시들은 모두가 시간과 공간이 합일된 주제로서의 서정을 화상의 의식 위에서 용해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최절로 시인의 원형적 상징이나 이미지의 주체는 ‘님’이다. 이 ‘님’의 정체가 다변화되어 어떤 인식 단정은 조급하지만, ‘님’이 갖는 다의성은 곧 최절로 시인이 절대치로 인격화시킨 창조의 신비이거나 이상향의 기원에서 탐색된 새로운 정화의 한 상징으로서, 아니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 무한한 사랑과 조화를 꿈꾸는 시적 대상물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의 시집『고운님 그리는 것은』에 대한 서평을 위와 같이 “‘님’을 통한 자아 성찰과 수용 의지”라는 제목으로 써서 당시 『예술세계』에 발표하였다. 그는 나에 대한 문학적 지식을 수용하면서 업무에는 더욱 진지한 지시와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는 신영균 회장까지 마무리하고 예총을 떠났다. 그는 본업인 전서의 작가로 또는 시인으로 조용하게 보내고 있다. 그는 한국예총 사무총장을 비롯해서『조국문학』주간직과 도서출판 ‘문단’ 대표, 한국문인협회와 한국미술협회, 한국건축가협회 그리고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전철 합정역으로 건너오라고 했다. 먼저 그의 집필실에 들려서 그의 근황을 살필 수가 있었다. 여기저기 정돈된 화선지에서 풍기는 묵향이 정감적이다. 글씨와 그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랜만에 참치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이제는 술친구도 시친구도 모두 떠나고 텅비었다고 했다. 어쩐지 혼자만 남아있다는 외로움이 예전같지 않게 엄습하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예술인회관’ 미완성에 따른 불미스러운 예총의 작금 사태에 대해서는 분노를 토한다. 그것은 그나 나도 이를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성사를 보지 못하고 퇴임을 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제법 취기가 오른다. 그는 요즘의 문단 실정을 분노하고 있다. 신인들의 양산에 대해서 쓴소리를 쏟아낸다. 문인으로서의 예절뿐만 아니라, 기초 지식과 소양의 충전 없이 잡지사의 경영문제와 연관해서 신인을 뽑았으므로 기본적인 역량의 미달이라는 견해이다.
요즘 시인들은 특히 공부를 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이 메말라서 기계의 부속품처럼 입력된 언어만 나열되어서 창조라는 개념이 휘발해버린 불감증시대에서 겨우 살아가는 우리 시인들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의 기개나 열정은 이제 많이 퇴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팡이를 짚은 채 거동하는 모습은 역시 세월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인간들에게 시간에 합당한 선물을 고르게 나누어 주는 형상으로 서녘하늘 노을처럼 번지고 있었다.
(2009. 6월호 [문학공간]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