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하늘땅사람교회(최성수목사)
 
 
 
카페 게시글
논 문 스크랩 한국 기독영화의 의미와 전망
고구마 추천 0 조회 96 11.01.20 10: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 기독영화의 의미와 전망

 

“영화는 지난 20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었고 대중문화 예술의 고향이었으며 모태였습니다.”(영화배우 신영균)

 

 

미국에서는 지난 2007년 2월에 열린 전미종교방송위원회(NRB)의 연례총회시 영화 제작자들과 영화감독들 그리고 영화사 관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독교 영화의 문제점과 미래의 방향을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기독교 영화의 정체성’과 ‘좋은 기독교 영화를 만들기 위한 조건’이라는 주제로 2개의 분과로 나누어서 진행된 세미나였는데, 가장 중심적인 관심은 기독교 영화의 대중성과 작품성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이런 소식을 접하며 문제의식에 공감했던 필자는 같은 해에 개최된 제5회 기독영화제 포럼(2007)를 준비하면서 “교회가 기독영화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오해, 그리고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일단은 영화의 기독교적인 의미를 성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지만, 사실 글을 쓰는 동안에 ‘기독영화’ 자체에 대한 정의가 없는 한국 현실에서 무엇이 기독영화인지를 고찰해볼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무엇보다 기독영화가 갖는 문화신학적인 의미와 관련해서 교회가 영화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들과 이를 위한 교회의 구체적인 과제들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기독영화 제작에 있어서 비교적 앞선 경험을 갖고 있는 미국과는 달리 당시 한국 기독영화의 제작환경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기 때문에, 필자는 상업영화를 기독교 비평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주로 영화교육적인(cineliteracy) 측면을 부각시키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간 몇 년 사이에 한국 기독영화계는 많은 것이 변했고, 이 변화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필자는 한국 기독영화의 미래를 위한 과제를 파악하기 위해 한국 기독영화의 의미와 전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기독영화의 정체성

2007년 포럼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필자는 ‘기독영화’와 ‘기독교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영화’를 구분하면서, ‘기독영화’를 기독교 상징이나 이미지를 사용해 기독교적인 주제와 가치를 성찰하며 제작된 영화로 정의했다. 무엇보다 먼저는 그리스도인들의 감상을 겨냥하며 제작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비그리스도인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되기를 기대하며 노력한다. 선교와 소통의 차원에서 그럴 필요성은 언제나 현존한다.

이에 비해 ‘기독교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영화’는 비록 상업적인 혹은 예술적인 의도와 기획에 따라 만들어져서 기독교적인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아도(때로는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의미론적으로 혹은 주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말한다. 기독교적 교훈이나 가치는 영화에 대한 의미론적 분석과 주제 파악, 그리고 비판적 해석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유비적인 상상력과 분석적인 비판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기독교적 영화보기를 위해서는 영화 교육을 통해 영화에 대한 이해와 최소한의 영화문법에 대한 상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영화의 주제와 교회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메시지만 일치하면 교회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될 수 있는 기독영화에 비해 이런 영화들은 영화감상과 비평작업을 통해 기독교적인 가치와 교훈이 먼저 확인된 후에 비로소 설교나 교육의 현장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인들 간의 상호소통 뿐만 아니라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그리고 기독교적 교양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소비될 수도 있다.

기독영화와 관련해서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현재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영화에 대한 기독교적 교훈이나 혹은 기독교 신학적인 의미를 모색해보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영화의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노력을 찾아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영화를 ‘기독영화’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특별히 기독영화제를 준비하는 분들이 절감하셨을 것이지만 기독영화의 정체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를 상영할 것인지를 결정할 분명한 기준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영화제작자들 혹은 감독들의 제작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흥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장르를 선정하고 또 주제나 내용과 관련해서 관객이미지를 추구하며 제작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영화의 정체성이 분명치 않으면 도대체 누구를 겨냥하며 제작해야 할 것인지, 어떤 장르로 틀을 짜야 할 것인지,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한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되면 관객으로서 기독교인 역시 영화를 선택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사실 명시적인 기독영화는 예술적인 감흥보다는 교훈을 주고 의미를 깨닫게 하는 산파에 가까운 감동을 겨냥하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지나치게 설교조로 진행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것이 다반사다. 게다가 상징적 혹은 의미론적으로 구성된 영화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관객들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고 결국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기독영화의 의미

기독영화의 의미는 기독교 문화 안에서 차지하는 것과 한국 영화와의 관계에서 갖는 의미를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독교 문화 안에서 차지하는 의미

기독교 문화는 하나님과의 소통뿐만 아니라(기도, 찬양, 시, 춤, 신앙고백, 그리고 경건한 삶 등) 그리스도인들의 소통 방식의 다양성으로(간증, 설교, 권고, 시, 잠언적 교훈, 노래, 춤, 각종 예술, 공동체적인 삶 등) 인해서 교회의 과제로 인식된다. 한국 교회에서 기독교 문화는 초기에는 계몽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문화 변혁적인 측면이 강해 환영을 받았다. 전후 시대에 교회 문화는 봉사와 헌신,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라는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사회가 점차 안정되면서 기독교 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교회는 설교와 교육 그리고 찬양이라는 단순하고도 일방적인 소통 방식을 고집했고, 젊은 세대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세상 문화가 쏟아지면서 교회는 문화의 빈곤을 느끼게 되었다. 특별히 성도들의 신앙경험을 표현하고 또 하나님 경험을 다양하게 인식할 수 있는 문화가 부족하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하나님 경험에 갈망이 문화 욕구로 분출된 것은 하나님의 다양한 임재 방식과도 관련되지만, 때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들의 삶이 다면적이고 다층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청년들은 자신의 마음과 경험들을 다양하게 표출할 수 있는 문화를 찾아 세상을 기웃거렸고, 미국에서 들여온 가스펠 송은 한국 교회 문화에 적지 않은 도전이자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기독교 문화와 세상 문화의 갈등은 세속화 혹은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으며, 진보와 보수의 갈등 국면이 문화계에서도 재현되었다.

문화 욕구가 간절한 것은 문화라는 것이 원래 생명 활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자신의 살아있음을 드러내기 바라고 구체적인 형식과 내용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문화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또한 성도들의 신앙이 생동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미 현존하는 문화나 전통 문화들을 공동체가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체계화시키는 것도 교회가 할 일이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생명 활동을 위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교회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과제이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문화를 생산하시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 안에서 기독영화는 하나의 장르에 불과하다. 기독교 문화 안에서 아직까지 지배적인 장르는 음악과 춤, 그리고 문학이다. 영상에 대한 관심은 21세기에 들어서 폭발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일반 영화가 다른 문화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례하는 것이다. 영화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한국영화의 위상이 바뀐 현실, 그리고 IT산업의 발달은 소통의 방식을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는 환경을 조성해주어 문화에서 영상은 특별한 위치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영상은 그야말로 상상만 할 수 있었던 것들의 현실화이며 꿈의 실현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경향에 발맞추어 기독교가 기독영화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주제는 소통이었다. 좁게는 영상을 통한 설교와 교육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영상세대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고, 크게는 교회와 세상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매개로서 의미가 부여되었다. 영상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미디어가 될 수 있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적 영화보기가 실천되었다. 기독교 문화 안에서 영상 문화의 약진은 결국 소통 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교회가 세상에 더욱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디딤판이 되었다.

 

둘째, 한국 영화와의 관계에서 기독영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국 영화 안에서 기독영화는 사실 이렇다 할 의미를 갖지 않는 것 같다. 기독영화가 한국 영화에 기여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을 뿐더러, 한국 영화가 기독영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해준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 속 기독교’라는 주제의식을 갖고 영화를 보면 기독교가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물론 한국 근대화 과정을 조명하는 영화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로부터 현대까지 제작된 영화들은 기독교에 긍정적인 옷을 입히지 않았다. 있다 해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은 그리스도인의 영화보기를 주저하게 만들었고, 그렇다고 해서 영상시대에 영화를 결코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영상능력을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보기가 가능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좋은 영화에만 제한되었고, 그 밖의 영화에 대해서는 주로 비판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영화를 긍정적으로 읽어내려는 시도들이 등장했다. 기독교적 영화보기가 점차적으로 확산되면서 교육이나 설교에 영화를 활용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서 단편영화와 교육용 영화(애니메이션)에 수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경우에 한국 영화는 기독영화 제작에 자극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기독영화제에서 개최되었던 몇 차례의 포럼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이지만, 기독영화에 대한 깊은 관심에는 기독교 이미지를 개선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금 시선을 돌려보면 한국 영화와 기독영화는 적지 않은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기독영화의 가능성은 기독영화인들의 활약에서 찾을 수 있다. 감독과 배우, 그리고 스탭들의 참여가 없이는 기독영화가 가능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영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과 비례한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 상관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기독영화는 주제의 까다로움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 관객들의 문화적인 요구에 부응할 만한 영화제작에 대한 한계 때문에 한국 영화에서 소홀히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영역을 대신 맡아준 셈이다. 따라서 기독영화는 소수자의 관심에 부응하는 다른 영화제들(다문화 영화제, 퀴어영화제, 청소년 영화제, 여성영화제 등)과 더불어서 영화의 다양화와 영화인구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하도록 했다.

 

한국 기독영화의 미래를 위한 전망과 과제

기독영화와 관련해서 권위 있는 저서로 잘 알려져 있는 테이텀의 『예수영화 100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서구인들에게 기독영화는 성경을 재현하는 영화나 성경을 해석하는 영화, 혹은 교회사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들을 재구성하는 영화들이다. 영화가 갖는 재현적인 혹은 재구성적인 의미 때문에 영화사 초기에 기독교는 다른 누구보다도 영화를 가장 많이 활용했었다. 이에 비해 한국영화계는 비록 초창기부터 기독교가 소재로 등장하거나 혹은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생산했고, 때로는 기독교 이미지를 소비하는 영화들도 제작했지만, 성경재현 영화 제작에 있어서만은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의 미국의 한 교회를 중심으로 알렉스 켄드릭 목사에 의해 제작된 기독영화 <파이어 프루프>나 <믿음의 승부>, 마이클 엡티드 감독의 <어메이징 그레이스>등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의 기독영화는 단순한 성경재현이나 간증의 차원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와 관련해서 기독교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록 판에 박힌 스토리텔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영화의 대중성과 기독교적인 성찰을 함께 고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들 영화들은 삶의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기독교적인 가치와 신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는데, 한편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오히려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너무 노골적이라는 것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예술은 드러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은유나 비유 혹은 상징을 통한 암시적이고 간접적인 메시지 전달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토론하게 하며, 더 나아가서 이런 논의들은 새로운 영화제작을 위해 큰 밑거름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 기독교 문화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은 양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다양한 장르(뮤지컬, 영화, 음악, 미술, 댄스, 문학, 스포츠 분야)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는 것이다. 기독교 문화에 대해 꾸준히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국 기독영화의 발전에는 일반 영화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높아진 것이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즉, 영화 인구의 저변 확대에 발맞추어 그리스도인들이 소비할 수 있는 영화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이를 위해 공급적인 차원에서 기독영화 제작을 위한 지원과 투자가 다방면으로 이뤄졌다. 2003년 “기독교, 영화와 만나다”란 주제 하에 세상과 소통을 강조하며 시작하여 제8회까지 지속된 서울기독영화제는 영화제 자체는 물론이고 영화제 기간 내에 개최된 포럼 등을 통해 한국 기독영화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탐색한 점은 한국 기독영화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는 2007년 미국에서 개최된 세미나와 같이 한국에서도 기독영화의 미래를 위해 좀 더 심층적인 분석과 지속적이고도 폭넓은 대화를 위한 세미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기독영화의 역사를 더듬어 보고 현재의 상황과 메가트렌드를 분석하면서 대안적인 미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한국 기독영화의 밝은 미래를 위해 필자가 그동안 생각해온 몇 가지를 정리해본 것이다.

한국의 기독영화의 미래를 위한 과제를 몇 가지로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먼저는 기독영화는 대안영화이며 독립영화이다.

기독영화는 분명 일반영화와 구별되며 또 반드시 구별되어야만 한다. 대중문화와 기독문화의 관계 속에서 볼 때도 차이가 현저하지만, 기독교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작 과정과 여건에 있어서도 다를 필요가 있다. 문화적인 형식을 공유하고 또 영상문화로서 현상은 같을 수 있다 해도 문화 생산 및 유통, 그리고 소비와 재생산 과정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인간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다른 상업영화가 추구하는 가치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뿐만 아니라 의미경험(의미발견, 의미탐색을 포함해서)을 겨냥해서 현실을 재구성하며 제작되는 일반 영화들과 구분하여 기독영화는 하나님을 만나 그로 인해 삶과 가치와 생각들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미학적으로 실험해야 한다. 기독영화는 어느 정도 독립영화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나 신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단지 일반영화와 비교해볼 때 시류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상업 자본에 지나치게 의존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또한 어느 정도 창의적인 시도를 감행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내용은 물론이고 출연자들의 개런티 배분문제, 영화제작 방식과 홍보에 있어서도 일반영화와 구별될 수 있다.

대안영화로서 그리고 독립영화로서 기독영화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감독과 배우와 스탭들과 같은 전문 영화인 양성과 기독영화 제작사의 설립, 그리고 기독영화가 상영될 수 있는 영화관 확보가 가장 시급하다. 현실적으로 영화인을 양성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리스도인 영화인들이 기독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영화제작이 주로 교회의 후원에 의존하는 것은 성장에 한계가 있다. 교회로서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선교와 교육이라는 차원에서 후원하지만, 사실 교회가 원하는 취지에 맞는 영화만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극영화 제작을 위해 기독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제작사가 설립되어야 한다. 또한 상영과 관련해서 현재는 대체로 서울극장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고, CGV는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의미에서 상영관을 내주고 있지만 기독영화가 장르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상영될 수 있는 영화관이 있어야 한다. 전용관을 짓기에는 재정적으로 쉽지 않겠지만 교회가 연합한다면 교회를 짓는 열정으로 각종 문화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복합문화관을 지을 수 여건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어놓고도 상영관을 찾지 못해 개봉하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대안적이고 독립적일 수밖에 없는 기독영화를 위한 전용관은 기독영화 시장의 미래와 활성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영화관에서 상영된 영화는 그렇지 않은 영화보다 공중파 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현재 상영관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극장에 가지 못하는 교인들이나 특히 지방에 거주하는 교인들이 기독영화를 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영화를 관람하는 기회를 위해서 교회가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케이블 방송국에서 이미 종영된 영화를 방영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둘째, 기독교적인 혹은 종교적인 주제를 다룬 시나리오가 절실하다.

기독영화 제작은 기독교적인 주제나 문제의식이 담긴 시나리오를 근간으로 한다. 예외가 없진 않으나 영화제작은 희곡, 소설, 만화, 드라마,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가 기반이 되며, 무엇보다 영화의 출발이 되는 것은 시나리오다. 좋은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를 만든다.

기독영화의 부진은 사실 오늘날 척박한 한국 기독교 문학의 현실을 반영한다. 대형교회 목회자의 설교집이나 유명 인사들의 에세이 등이 대부분인 오늘 우리들의 기독교 출판계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삶의 모습들, 그리고 기독교 주제들을 성찰하는 소설이나 만화 등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간증과 관련된 글들이 없지 않지만 주관적이며 또한 너무 식상한 스토리로 인해 영화적인 스토리텔링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인간극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감동적인 내용을 가진 간증이 아쉽다. 전혀 없진 않다 해도 그것이 글로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설령 표현되었다 해도 미학적인 측면에서 고려되지 않은 채 출판되다 보니 시나리오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한 마디로 영화인들을 자극할 만한 작품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기독교 영성은 표현의 능력을 포함한다. 하나님 경험은 글로 혹은 노래로 혹은 그림으로 혹은 춤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영성교육의 일환으로 문학적인 상상력을 키우고 표현능력을 기르기 위한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셋째, 기독영화에 대한 관심은 영화교육이 좌우한다.

교회는 그동안 성서 이야기에 충실하거나 정통 신학적인 해석에 따르고, 또 정형화된 기독교 정서에 부합된 표현에 대해서는 관용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였다. 반기독교적인 가치를 주장하고 또 그것에 대한 담론을 생산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교회가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영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예컨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다빈치 코드>(론 하워드), <몬트리올 예수>, <밀양>등에 대한 반응이 대표적이다.

영화 발전의 토대는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력, 수준 높은 관객, 그리고 좋은 제작 여건(투자, 정책, 시장)이다. 기독인으로서 영화감독이 전체 감독의 30%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들이 기독영화 제작을 꺼리는 이유로 드는 것을 보면 앞서 지적한 시나리오의 부족과 더불어 영화에 대한 교회의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 그리고 부당한 요구 등이다. 물론 교회로부터 투자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경우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독영화는 교회에서 많은 경우 상영될 수 있는 조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사실 표현의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적 표현에 있어서 고루한 장면들로 만족할 수 없는 감독들의 입장도 고려가 되어야 한다. 예컨대 교회가 투자자가 될 경우 감독들은 교회로부터 성도들이 영화를 통해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독교 상징이나 아이콘을 사용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되는데, 이런 압력이 전혀 없을 수 없지만 영상미학적 측면에서 다방면으로 반성되어야 한다.

이미 1960년대부터 영화교육을 중등교육과정에 포함시키고 있는 이웃나라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영화교육은 몇몇 시범학교에서만 선별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또 그 실태를 살펴보면 대체로 영화감상으로 끝나고 있다. 영화문법에 대한 교육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화제작을 위한 기초적인 지식습득이나 실습을 할 수도 없다. 입시위주 교육의 폐단이 아닐 수 없는데, 그래도 청소년 영화제에서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할리우드 키드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지 영화교육이 바탕이 된 것은 아니다. 영화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넓은 시장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절실한 것은 교인들을 관객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교회의 영화교육은 영화의 저변확대를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건전한 영화제작과 감상을 위해 영화교육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국가적인 제도로 정착되기 전까지는-기독영화의 미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성도들의 비평적인 감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일 것이다. 영상능력이 높아질수록 교회는 수준 높은 관객들을 양성해내고, 또 그럼으로써 영상문화에 대한 건전한 선도가 가능하게 된다.

예컨대, <바보>(김정권)와 <크로싱>(김태균)은 기독인들의 기도가 바탕이 되어 제작되었고, 또한 좋은 영화를 향한 강한 의욕을 갖고 만들어진 영화였다. 주제 역시 기독교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1-2주 만에 종영되었다. 흥행은 고사하고 교회의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제작사나 감독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제작단계부터 교인들의 관람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철저히 외면당한 것이다. 교회 혹은 목회자들은 홍보의 부족을 지적하지만 사실 기독교 잡지나 주요 교단신문의 칼럼을 통해 소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독영화가 영화계에서 제 목소리를 높일 수 없으며 문화선교의 주체자로서도 부족하다. 문화선교는 단순한 복음 선교와 달리 고도로 복잡한 역학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참여가 높아지면 소비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가 부각이 되어 영화사의 기독영화 제작에 대한 관심이 자연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다.

 

넷째, 다양한 장르의 영화제작이 필요하다.

최근에 제작된 영화들을 중심으로 본다면 주로 단편영화나 교육용 단편영화, 다큐멘터리 영화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러 애니메이션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작품으로는 <강아지 똥>이다. 이것은 권오성 감독이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동명 원작을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수작이다. 한편, 예산의 규모나 열악한 제작환경으로 인해서 단편영화가 기독영화의 주류를 형성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단편영화로는 배우 전원이 노 개런티로 출연해 화제가 된 <이층집 남자>와 <창>(파이오니아21연구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문화법인과 문화선교연구원이 공동으로 교육용으로 제작한 단편영화 <매직캔디>, <하교길>, <미녀는 즐거워> 등이 있다. 기독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경향은 다큐멘터리 제작이 활발해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최춘선 할아버지의 삶을 조명한 간증영화 <팔복>과 부흥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한국에서의 부흥을 성찰하고자 했던 <부흥의 여정>(김우현), 선교사의 활동을 그린 선교영화 <소명>과 <소명2-모겐족의 월드컵>(신현원), 그리고 <잊혀진 가방>(김상철), 이스라엘 안에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박해를 보여주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망한 다큐영화 <회복>(김종철) 등이다.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십계명의 주제와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단편 극 영화 <버스>(하정완)도 있다. 기독교 문화, 특히 영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달라진 시각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며, 이들 영화들이 기독교 기관 혹은 교회의 후원에 따라 제작된 점은 미래전망적인 사실이다. 특히 <회복>은 모나코국제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을 했고, 또 비록 한국인에 의해 제작되지 않았지만 <위대한 침묵>(필립 그뢰닝)에 대해 보여준 한국 그리스도인들(대부분은 카톨릭 신자들이라고 하지만)의 높은 관심은 한국에서 기독영화의 가능성을 일깨워준 영화이기도 했다.

<워낭소리>(이충렬) 이후에 나타난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는 했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현실을 영상을 통해 보여주려는 기독영화의 관심이 주로 간증이나 선교, 혹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에 편중되어 있는 현실은 지양되어야 한다. 다큐멘터리는 인간과 사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비록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하더라도 대중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극영화로서 기독영화의 제작이 부족한 현실은 기독영화의 미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상황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소명2-모겐족의 월드컵>과 유지태의 나레이션으로 화제가 된 <희망의 별:이퀘지레템바>(이흥석)이 관객들에게 극영화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축구가 주는 재미와 감동을 맘껏 즐길 수 있게 해준 영화였다.

이것은 단순한 다큐의 한계를 넘어서 극영화적인 요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시사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cinementary(cinema+documentary), 즉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결합한 형태의 작품들이 활발하게 제작되는 현실에서 기독영화 역시 다양한 장르 개발을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영화적인 상상력이 부담 없이 발휘될 수 있는 토양이 요청된다.

예컨대, <밀양>(이창동), <불신지옥>(이용주), <파괴된 사나이>(우민호), <시라노: 연애조직단>(김현석) 등은 기독영화를 표방하지 않았지만 기독교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며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그리스도인들이 공감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제작도 필요하지만, 복음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기 위해 비그리스도인들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형태, 곧 극영화 형태의 제작도 없어서는 안 된다. 굳이 기독교 아이콘이나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면 미학적으로 뛰어나야 한다. 예컨대 <십계>(세실 B. 데밀)나 <벤허>(윌리엄 와일러)와 같은 영화들은 물론이고,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역시 뛰어난 영상미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다섯째, 기독영화는 영상미학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고찰도 필요로 한다.

한국의 ‘기독영화’라는 장르적인 입장에서 볼 때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소명>과 <회복>, 그리고 <희망의 별:이퀘지레템바>는 영상미학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아쉬운 점이 너무 많다. 기독교 영상은 최소한의 신학적인 고려가 반영되어야 한다. 선교현장과 선교사들의 삶, 그리고 이스라엘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의 현장을 담은 영상들을 보면서 감독 자신의 열정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가진 의문은 감독에게 선교신학이나 반유대주의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엔딩 크레딧을 유의해보았지만 신학적인 자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영상미학적인 표현은 주제에 대한 깊은 성찰이 바탕이 될 때 더욱 풍부한 상상력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영화제작의 사전작업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부분은 주제 탐색이다. 주제에 대한 다양한 경로의 성찰은, 예컨대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혹은 민속적이며 역사적 종교적인 성찰은 좋은 영화를 위해 필수적이다. 인간에 대한 다양한 성찰이 밑받침 될 때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이미지 구성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독영화 제작에 있어서 주제에 대한 신학적인 탐색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는 인간과 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바탕이 된 작품이다.

감독이 신학자일 수는 없고 또 감독이 전혀 주제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편의 영화가 갖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선교란 무엇이고, 선교현장에서 무엇이 카메라에 담겨져야 하며, 그것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인 고찰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을 의심했던 것은 필자만은 아니다. 또한 박해의 현장을 전해주는 것은 현장에 있지 않으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갈등을 넘어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위해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박해현실을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한 주제 및 문제의식이 분명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스라엘 안에서 이뤄지는 선교가 아시아에서 행한 서구식 선교를 답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는데, 만일 서구 기독교가 선교를 통해서 아시아 교회에 미친 긍정적인 결과이외에도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면, 좀 더 다른 시각에서 조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반유대주의에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유대교인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한 안목을 일깨워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만남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은 전무한 것 같이 여겨질 정도였다.

이에 비해 <버스>는 실화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것인데, 십계명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학적인 고려가 바탕이 되어서 그런지 굳이 기독교적인 상징을 부각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기독교적인 의미와 메시지를 읽어볼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부산영화제에서 초청작으로 상영될 정도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성경의 주제나 신학적인 주제에 부합하는 이미지 계발이 절실하다.

영상미학의 기독교적인 성찰이 전무한 현실에서 기독교 영상제작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고민은 기독교 주제에 적합한 이미지를 찾는 것이다. 기독교 주제는 다양하고 매우 포괄적이기도 하고 심층적이기도 하다. 너무 직접적이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상징적일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영화 이해자체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만을 겨냥할 수 있지만, 영화가 대중성을 가지려면 서로 소통하고 또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를 찾거나 계발해야 한다. 이미지 계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교회는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명시적으로 표현되어야 만족하는 경향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물론 교회 안에서만 상영되기 위해 만드는 영상은 다를 수 있다.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가장 적합한 표현방법은 은유나 비유인데, 상상력을 통한 소통을 위해 이미지를 계발하고자 할 때 필요한 작업으로 필자는 한국의 고전과 신화에 대한 연구를 제안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고전은 한국인의 가치관과 정체성, 그리고 삶의 모습들을 반영하고, 신화는 집단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적인 가치를 드러내자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인 소재와 이미지를 통해서 말할 때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나라와 민족마다 고유한 신화가 있거니와 만일 기독교 주제와 의미, 그리고 가치들을 그런 신화들의 소재들과 이미지들을 차용해서 표현할 경우 영화의 의미와 관련해서 대중적인 관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들 역시 영화의 기독교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나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신화적이며 동화적인 소재와 이미지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듬뿍 담아낼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루이스와 톨킨의 글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었고, 그것이 영화적으로 표현되었어도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문제는 신화적인 소재와 이미지들을 뉴에이지나 혹은 범신론, 혹은 반기독교적인 정서로만 보려는 교회의 보수적인 태도이다. <아바타>(제임스 카메론)와 관련해서 보여준 일부 교계 인사들의 비판적 시각과 범신론적이라는 비판은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영상 이미지 해독 능력이 어떠한지를 폭로하는 것이었으며,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신학교육에서 영화교육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깨닫게 해준 해프닝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두의 관심이 되는 역사적 인물(교회사적인 의미를 갖는 사람만이 아니라)이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과거 <상록수>나 <순교자>(유현목), 그리고 <꼬방동네 사람들>(배창호)과 같은 영화들은 당대의 사회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기독교적 가치와 의미를 부각시킨 영화다. 한국의 사회영화들 속에서 기독교는 몇 편의 영화를 제외하면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교회가 사회문제에 등한시 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교회의 공공성을 염두에 둔다면 기독영화가 사회문제와 관련된 주제들, 예컨대 노숙자, 청년 실업, 싱글 맘과 싱글 대디, 저출산, 노인, 세대간의 갈등, 다문화 가정과 사회, 종교 간의 갈등 같은 문제들을 발굴하고 영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공적인 책임과 더불어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갖는다. 기독영화가 이런 문제들을 소홀히 대할 때 영화 속 기독교의 이미지는 언제나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영화가 적극적으로 이런 문제들을 다룰 때는 기존의 사회영화에서 다뤄졌던 방식과는 다르게 기독교를 조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일곱째, 기독교 영화비평 능력을 향상시키고 또 활성화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비판하기를 삼갈 뿐만 아니라 또 비판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현실을 인정하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사고를 선호한다. 이런 태도는 학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인간관계의 미래를 위해서 비판을 꺼리는 것이다. 기독영화에 대한 태도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발견하게 되는데, 영화의 내용에만 주목하는 가운데 영화에 대한 비평에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 선교의 실제적인 상황, 실화에 대한 관심, 간증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독영화와 관련해서 비평의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비평은 영화를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또한 차기 영화제작에 도움을 주는 작업이다. 물론 자신의 고정된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영화는 도마 위에 올라와 있는 생선에 불과하고, 그래서 결국 파괴적인 비평으로 이어지지만, 내적인 비평, 다시 말해서 감독의 의도와 관련해서 스토리텔링의 구성과 영상적인 재현에 대해 비평하는 것은 생산적이며 상생적이다.

기독영화에 대한 비평이 활성화될 수 있기 위해서는 비평의 장이 다양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현재 기독교 신문에서는 프리뷰나 리뷰 형태로만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또한 잡지에 기고되는 글 역시 감상문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비평은 기독영화의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과정이며, 비평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기독영화의 업그레이드는 비평을 소통함으로써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 비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또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을 숙지할 수 있는 기회, 곧 영화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문자에 대한 학습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글짓기 대회와 같은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던 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과 같은 영상시대에는 영상을 이해하기 위한 학습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필수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