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벤치와 연호고니
1. 다시 겨울
찬바람이 늦가을 호수의 수면을 팽팽하게 만들고 있었다. 공중벤치는 호수의 상공을 회선하고 있는 한 무리의 고니를 보았다.
"다시 겨울이 시작되는구나! 그렇다면••••••"
공중벤치는 나즈막하게 하늘을 향해 신음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고니들이 발을 뻗는 자세로 수면에 미끄러지듯 내려앉을 때, 그 모습을 벤치뿐만 아니라 갈대숲에서 한 마리의 고니도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연호고니였다. 그는 지난 봄 무리들과 함께 북쪽으로 가지 못하고 연호 호수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절로 터져 나오는 반가움의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며 그들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고향에서 온 친구들이 분명했다. 고니들도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상봉을 지켜보는 공중벤치의 가슴에 감동이 일어났다. 벤치는 지난 봄 연호고니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2. 만남
봄의 호숫가에는 벚꽃이 눈처럼 날리며 호수의 경계에 연분홍 빛 점묘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고니와 벤치는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지만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고니의 눈에 벤치가, 벤치의 눈에 고니가 유심히 보였던 것이다. 둘 사이에는 공유되는 감정이 생겼다. 고니의 눈에 벤치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벤치의 눈에 고니의 외로움도 느껴졌다. 그것이 유대감을 일으켰다. 고니가 부리를 날개에 묻고 잠들 때, 벤치도 잠들었다. 벤치가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둘 때, 고니도 눈길을 따라가 보았다. 다른 벤치들과 달리 공중벤치는 평탄한 산책로에서 약간 올라간 야트막한 둔덕에 있었다. 그에게로 연결된 길이 없어 벤치를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연호고니는 물닭과 청둥오리들과 섞여있었지만, 다른 고니는 보이지 않았기에 홀로임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치 유원지의 오리배 같이 홀로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중벤치만이 높은 위치에서 고니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서로에게 호기심이 쌓여가던 어느 날, 그들의 시선이 겹쳤을 때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들만의 언어로 벤치가 고니에게 물었다.
3. 벤치의 아픔
"안녕!..."
"안녕!..."
"너의 이름은 뭐니?"
"나는 고니야, 연호고니라고 해. 너는?"
"내 이름은 공중벤치야."
"공중벤치? 재밌는 이름이네. ‘공중’이라... 혹시 다른 벤치와 달리 네가 높은 곳에 있어서 그렇게 지은 거니?"
"그럴 거야?"
"그럴 거야라고? 마치 너랑 상관없는 듯이 말하는 구나."
"그렇게 들리니? 내 이름은 여기 소나무 숲길을 지나던 어떤 시인이 지어준 이름이야. 처음엔 과장되게 느껴졌지만, 날 아껴주는 것 같아 받아들였어."
"그래? 나도 호숫가를 돌던 어떤 사람이 나를 한참 보더니 '연호고니'라 부르더라. 이름 짓기를 잘하는 것을 보니 같은 사람인가 봐. ‘연호’ 라는 이름을 가지면서 특별한 고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첫 만남이 주는 어색함이 없이 대화가 편하게 풀려나갈 것 같다는 예감을 벤치는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것은 아마도 서로를 오래 지켜보았고 어떤 유대감과 간절함이 어색함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라고 벤치는 해석했다.
“너는 거기에 언제부터 있었니?"
"나도 몰라. 누군가 나를 설치할 때부터 있었으니까. 내가 나를 의식한 것은 다른 벤치와 비교하면서부터야. 다른 벤치들은 평지에 있는데 나만이 높은 곳에 있더라구. 물론 건너편 인공폭포 옆에는 산책로 보다 높은 위치에 벤치가 여러 개 있긴 하지만, 거긴... "
"거긴 산책로와 연결되어 있어 너처럼 외따로는 아니잖아."
"잘 아네. 그래서 나는 나를 이 공간에 설치했을 그 누군가의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고 눈을 감고 상상해보기도 해."
"네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구나. 물론 넌 주로 생각에 잠겨 있는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하하하, 웃어서 미안해. 외모를 가지고 너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야.“
“괜찮아. 그렇게 세상에 나왔으니까. 우리 각자의 외모에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인 것도 있다고 생각해. 근원을 생각하는 것. 이를테면, ‘별을 바라보는 것’ 같은 거 말이야. 너는 날 설치한 그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니?”
“.그 사람의 마음이라!... 그건 네게 앉을 사람들이 새들처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도록 한 게 아닐까? 그래서 고상한 마음을 가지도록 말이야. 그 마음은 방금 네가 말했듯이 ‘별을 바라보는 것’에 닿아있는 것 같아."
"고상한 해석인 걸. 기분이 좋아지네, 나를 설치한 사람은 다 만들고서는 잠시 앉아서 고상한 마음으로 호수를 둘러보았을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고독한 사람일지도 몰라. 고상함은 고독함과 손을 잡고 있거든."
"그런 상상도 재밌는 걸. 그런데 공중벤치야, 너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고니의 솔직한 표현에 공중벤치는 당황하더니 이내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아픈 데를 건드리는 것 같았지만 고니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고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맞아.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몰라. 아마 내 자리에 앉으면 사람들 눈에 잘 띄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해. 보통의 사람들은 남의 주목을 받는 걸 불편하게 느끼니까. "
"많이 속상하지 않니?"
"홀로 떨어져 사는 기분이야. 처음엔 나도, ‘생겨날 때부터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난 왜 인기가 없을까?’ 하고 자괴감이 들었어. 나도 다른 벤치처럼 되고 싶었어. 다정한 연인이 내 자리에 앉아 알콩달콩 밀어를 주고 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어. 핸드폰을 쥐고 해 지는 연호를 사진에 담는 사람의 벤치가 되고 싶었어. 가만히 앉아 주위의 풍광을 바라보며 인생을 추억한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자리를 제공하고 싶었어. 이런 바램들을 생각하다보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나를 설치한 사람이 처음엔 미웠지. 지금은 마음을 비우고 지내려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오늘 아침에 흰 새똥이 내 몸 위로 떨어져 더럽힐 때 영원히 아무도 앉지 않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어."
"벤치야, 너의 자리에 꼭 맞는 앉을 사람은 꼭 있을 거야."
"고마워...한 번도 이런 얘길 해 본적이 없었는데 하고나니 가슴이 상쾌하네."
고니와 벤치는 마치 오랜 친구였던 것처럼 대화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