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은 주변에 범일국사 설화가 얽힌 학바위와 석천(石泉)당간지주(보물 제86호), 범일국사 부도(보물 제85호), 등 역사와
다섯번 꺾어 부르기 때문에 오독떼기라는 설, 오독떼기가 동·서·남·북·중의 오독을 떼기(개척 : 開拓)한다는 뜻에서 왔다는 설,
‘오’는 신성하고 고귀하다 는 뜻이고, ‘독떼기’는 들판을 개간한다는 뜻에서 생겼다는 설, 신라 때 화랑들이 강릉지방을 순력(巡歷)
하면서 풍류도를 닦을 때 부르던 노래가 곡조만 살아서 내려왔다는 설 등이 옛날 고려 태조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강릉지방 민요로
유명한 무형문화재 학산 오똑떼기를 만나볼수 있는 길이다.
당나라서 ‘짝귀스님’ 예시 받고 귀국
양양에서 ‘보살상’ 찾아 낙산에 봉안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는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였던 사굴산문의 본거지였던 굴산사지가 있다. 사적 제448호로
지정된 굴산사지에는 보물 제85호인 부도(浮屠), 보물 제86호인 당간지주(幢竿支柱), 강원문화재자료 제38호인 강릉 굴산사지
석불좌상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사굴산문을 연 범일(梵日)국사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명주에서 개국사 낙성대법회가 봉행됐다. 이 자리에는 당나라는 물론 신라의 고승대덕을 비롯한 수 만명의 사부대중이
동참했다. 당나라 명주에서 수행정진 중이었던 신라국 범일스님도 주요 내빈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법회가 끝나갈 무렵 끝자리
한 켠에 앉아 있던 이름 모를 스님이 범일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스님께서는 혹여 신라국에서 오시지 않으셨는지요?”
“예, 소납은 신라국에서 왔소이다만….”
범일스님은 순간 멈칫했다. 스님의 왼쪽 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세상에 한쪽 귀 없이
태어난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이름 모를 스님은 범일스님에게 깍듯한 예를 갖추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제가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소납에게 말씀해 보시지요.”
귀 한쪽이 없는 ‘짝귀스님’은 자신도 신라국에서 왔다며 말문을 열었다.
“소납도 신라의 접경지인 익령현(현재의 양양)에 있는 ‘덕기방’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부탁하고 싶은 말은 스님께서
귀국하시면 꼭 한번 제가 사는 마을을 찾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지금 당장 말씀 드릴 수가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너무도 정중하게 부탁하는지라 범일스님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청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스님께서 제가 사는 마을에 오시면 반드시 커다란 부처님 과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수 많은 중생들의
복밭을 일군다고 생각해 주시고, 저의 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소납은 이만 돌아 가겠습니다.”
짝귀스님은 비록 정상인과 같지 않았지만 자비스런 풍취를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같은 고국에서 온 스님이니 나중에 꼭 한번
찾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귀국하면 꼭 찾아가겠으니 그때 뵙지요.”
범일스님은 여러 조사와 스승을 찾아 공부하다가 염관 제안선사로부터 법기(法器)임을 인정받고 의발을 전수받은 후 신라로
돌아와 굴산사를 창건했다. 중국에서 법을 받았다는 소문에 신라에 알려지자 전국에서 법을 청하는 대중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굴산사는 범일스님의 법향이 가득했다. 그러다보니 중국 당나라에서 만났던 ‘짝귀스님’을 찾아가겠다던 약속은 계속 미루어졌다.
“꼭 한번 찾아가 봐야 할 텐데….”
그렇게 10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 하루는 스님의 꿈에 꼭 10여 년 전에 당나라에서 만났던 그 짝귀스님이 나타났다.
“스님, 저 와의 약속을 잊어버리신 겁니까.”
범일스님은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합니다. 스님. 약속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데 귀국 후 일과가 너무 바빠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너무나 황망한 범일스님은 무척 미안했다. “제가 수 일 내로 시간을 내겠습니다.” 짝귀스님은 대답했다.
“도량을 일구시어 중생제도하시는 일도 중요하지만 소납을 꼭 한번 찾아오셔서 부처님과의 인연을 짓는 것도 중요하니 꼭 한번
들러 주시지요. 소납은 계속 ‘덕기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짝귀스님은 그때서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소납은 빠른 시일 내에 만나 뵙길 바라면서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범일스님은 마치 현실에서 겪은 듯 생생하기만 했다.
“그래.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니 지금이라도 실행해야겠어.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살면서도 내가 무심했지.”
날이 새자 시자를 동행한 범일스님은 양양으로 향했다.
출발 당일 저녁이 되어 범일스님은 낙산사 아랫마을에 머물게 됐다.
숙소에 머물면서 마을 앞을 지나가는 여인이 있어 덕기방이라는
곳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스님 앞에 와서 공손히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저는 덕기방이라는 지명은 모릅니다. 하지만 제 딸의 이름과
꼭 같으니 신기하기만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도 있다고 생각한 범일스님은 덕기라는 딸 아이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물어보았다. “제 딸은 올해 8살이 됐습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자라면서도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니요?”
“예, 덕기는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틈만 나면 남쪽에 있는
시냇가에 가서 혼자 놀다가 오곤 했어요. 거기서 무엇을 했냐고 물어
보면 금색동자랑 재미있게 놀았다고 하면서 신이 난듯 이야기를 해요.”
“금색동자랑 놀아요?” “네, 자기와 놀아주는 금색동자는 몸이 황금색이라고 해요.”
“허허.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요.” 범일스님은 한참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궁금증이 더해졌다.
“제 딸은요 스님. 날마다 금색동자와 놀면서 글도 배운다고 하네요.”
순간 범일국사는 직감이 왔다. “범상치 않는 일이로고. 이 보시오 부인. 내가 부인의 딸을 한번 만나 볼 수 있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범일스님은 부인이 인도해 주는 집으로 가서 딸 아이를 만났다.
“이름이 덕기라고 했니?”
“네, 스님.”
“그렇구나. 그러면 덕기가 같이 노는 금색동자를 함께 만나볼 수 있을까?”
덕기는 스님 일행을 시냇가로 인도했다. 시냇가 돌다리 근처 아래에 도착해 덕기는 손가락으로 물 밑을 가리켰다.
“저기요!”
그곳에는 황옥석의 돌부처가 물빛에 어렸는데 범일스님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돌부처님의 한쪽 귀가 없어. 필시 당나라에서 본 짝귀스님과 똑같아.”
당나라 개국사 낙성식에서 만난 짝귀스님을 꼭 닮은 모습의 돌부처를 본 범일스님은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물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시오, 범일스님. 나는 정취보살이오. 이곳에서 오랫동안 스님을 기다렸으니 나를 어서 낙산사로 옮겨 주시구료.
그곳에는 내가 앉을 자리가 있을 것이오.”
범일스님 일행은 물속에서 돌부처를 건져 올렸다. 모시고 낙산사에 이르니 관세음보살 옆에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빈 좌대에 안치시키니 보살상에 꼭 맞게 미리 만들어 놓은 듯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았다.
정취(正趣)보살은 ‘극락 또는 해탈의 길로 빨리 들어서게 한다는 보살’로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 또는
‘목표를 향하여 묵묵히 걸어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무이행보살(無異行菩薩)’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 설화는 일연스님이 신라스님이 정취보살을 신라에서 만나게 된다는 점을 부각시켜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범일스님은 신라 문성왕대(839~856)에 활동한 스님으로 ‘국사’에 오를 만큼 법력이 높았으며
굴산사의 개조가 되어 ‘굴산조사’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학산 오똑떼기
'사리랑'은 오독떼기 부속농요로서 가사내용이 남녀애정 연정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오독떼기 중간에 한바탕 섞어 부르면
더욱 흥미를 북돋워주는 농요이다. 담성가는 힘든 오독떼기와 중간 중간 잡가, 사리랑을 부르다가 섞어 부른다. 담성가는
오독떼기보다 힘은 좀 덜드는 편이나 창법이 특이하며 가사 내용이 흥미를 돋구고 농부들이 즐겨 부르는 농요이다. '싸대'라는 것은 오독떼기를 부르면서 김을 매다가 참 때나 점심 때가 되면 여러 농민들이 논 바닥에서 각기 자기의 몸 위치를
둥글게 원을 형성하여 김을 매어 쌈처럼 싸서 들어낸다는 뜻이다. '가을 벼베기소리(불림)'는 농민들이 이른 봄부터 씨앗을 뿌려 애써 가꿔온 곡식이 가을에 결실될 때 농민들이 모여 의기
양양하게 벼를 베면서 부르는 소리이며 ‘불림’이라고도 하는데, 그 어원은 알 수가 없다. '짐지고 가는 소리'는 오솔길 농로로 볏짐을 운반할 때 고달픈 애환을 처량하게 부르는 소리이다. 타작하는 소리는 추수를 해 놓고 곡식을 여러 일꾼들이 도리깨를 들고 늘어서서 상놀이가 도리깨를 치면서 소리를 매기면
다같이 따라서 합창을 하며 도리깨를 치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학산에 잘 보존되어있는 이 소리들은 강릉 단오제에서 실제 체험할수 있겠다.
- 인터넷 검색에서-
굴산사지 당간지주 앞
아홉시 삼십분경
바우길 제7구간 바다맞이 길은
소설가 이순원 바우길 개척 단장님과
이기호 바우길 개척 대장님.
그리고 이미 지난 구간들을 함께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지인들.
이번길에 처녀 동행인 나를 비롯하여
풍호인 몇몇과 옥천초등 34회 동창몇몇
함께 어우러져 길을 나선다.
가을도, 그렇다고 겨울도 아닌 계절만큼
아침기온은 차나 입김은 보이지 않고
푸른 하늘도 차갑게는 느껴지나
바람은 대관령 흰 이불속에 잠든탓에
주변 풍경만큼의 온기에
온기만큼의 미소와 웃음으로 길을 나선다.
걸음마다
온기만큼.풍경만큼 의 행복한 걸음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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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하단으로 계속해서 이어갈 것입니다. 제8코스 사진올라오기 전 까지 끝 내도록 하겠습니다.
바우길 후기를 개인적인 기행과 느낌, 길 주변에 흩어져있는 역사나 전설 등을 곁들이고 바우길 안내,홍보등을 믹싱하다보니 시간이 좀 필요하네요.
아...정말 대단한 내 친구다. 시 시(詩)자를 써서 시와 함께 하는 동네라는 뜻의 시동에 문재가 많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내 친구의 글을 읽으니 시동에 내려오는 말 그대로다. 정말 대단하다.
같은 길을 걸어도 각자가 느끼는 감성은 이렇게 틀리네요. 그러면서도 함께 할수 있는 길이 이길이 아닌가 싶네요.
아 소설가님 왜 이러시나 이건 시도 아니고 주절주절 말이라네
예. 진센님. 그길이 그 길입니다.
라모나님 . 이렇게 사진과 함께 마음에 닿는 글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영원히 잊지못할 길.. 동행했음에 또한 감사하다고 ..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친구는 다시 바다에서 만나는 물처럼 하나로 만나진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저 또한 많은 소중한 인연들을 만난 길 입니다. 길위엔 악연보단 좋은 인연의 길이 더 많다고 생각 합니다. 그 인연들을 간직하고자 특별한 길은 이렇게 영상과 함께 느낌을 정리해 두는게 이젠 습관이 된듯 하네요. 언제라도 꺼내 볼수있어 퇴색되지 않도록....
님은 저보다 더 길을 사랑하십니다. 이 날이 오리라고 항상 생각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있습니다. 길은 아스팔트나 포장도로보다 맨땅을 걷는것이 더 따숩지요. 대장님 생각대로 많은 사람들이 대장님이 개척해 놓은 그 맨땅 길에서 따수운 행복을 찿을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좋은길을 개척하시는 대장님도 대단하시고 그 길을 동행하시는 바우길 가족분들에게도를 보냅니다. 그 길을 사진과 좋은 글로 후기를 올려주신 라모나님 ^^
와우~~~~~~ 넘 멋져요. 느낌이 살아있는 길이라 더욱 그렇네요.
가슴으로 느끼는 길. 이지요
영상으로 다시걷는 그 길. 이제 덕현리 까지 왔네요. 이제 산 언덕을 올라야 하는데, 나도 막걸리 한사발 먹고 출발할걸....
못난이 모과나무를 향기나무라고 부르시는 라모나님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바우길 위에는 아름다운 사람들만 거니는가봅니다. 서해바다의 잔잔한 낙조를 벗하며 동해바다의 일출을 그리워합니다. 인천댁이 ..........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람살이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이 길은 내게 좀 특별한 길이기에 조금 정성을 들이는건 사실입니다만, 걸으면서 느낌이 서로 다를지라도 자신이 느낀대로 가슴에 남아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된게지요.
함께걸었던 길이기에 더 정감있고 아름답던 길이었습니다. 작업하시기가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리셨을텐데 정말 감동입니다. 더 감동적인 2편 풍호로 가는길을 기대하며..(저기 모과덩어리에 아주 야물딱지게 한방맞은 손목은.. 솔직히 말해도 되쥬? 뼈가 화가났는지 아직 누루지 못해유..ㅋㅋ거실에 놓아둔 모과향기로 치료가 마저 되어갑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향기로운손. 그거 아무 손이나 향기나는게 아닙니다. 출산의 고통같은 아픔이 동반한 후에라야 향기로워 지는게지요. 아마 거실에둔 모과향이 없어질쯤엔 그 향이 모두 푸른하늘님 손에 스며들어 있을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