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강. 제발 날 깨우지 마세요 (아가 2:5-7)
아 2:5-7절.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가 솔로몬과 사랑을 하다가 병이 났다고 합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병이 났겠습니까! 우리도 주님과 사랑하다가 병이 들게 하옵소서. 주님 품에서 깨어나지 말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모세는 인생을 정의하기를 한 경점 같다고 합니다.
그것도 신속히 날아가는 시간과 같다고 합니다.
날아가는 세월도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인생은 수고로운 것이랍니다.
왜 그런가요?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죄가 수고와 슬픔을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당하면서 뱉어낸 말이 복중에서 죽은 아이가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생겨난 존재들입니다.
이 말은 인간을 위한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이 인간의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들을 가지고 창세전에 하신 언약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와 녹명 되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생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영벌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토기로 비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인데 어떤 그릇은 긍휼의 그릇으로 지었고 어떤 그릇은 진노의 그릇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주인이고 우리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담는지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에는 긍휼을 담고 진노의 그릇에는 진노를 담습니다.
이를 일컬어 각자의 분복이라고 합니다.
분복은 마치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각자 맡은 배역과 같은 것입니다.
각 사람마다 하나님이 정한 도구로 살다가 창세전에 예정된 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으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긍휼의 그릇으로 살다가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다가 천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예수를 거부하다가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이를 야곱과 에서로 보여 주었습니다.
야곱을 사랑 받기로 작정 하고서 보내어짐을 당하였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 하고서 보내어짐을 당하였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의미에서 보면 야곱과 에서는 신자와 불신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도의 인생에 적용을 하면 우리의 인생에게도 야곱과 에서의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로서 우리 옛 사람을 상징하고,
야곱은 차자로서 우리 새 사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에서로 살았습니다.
그 때는 미움 받을 짖만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나고 야곱처럼 인생을 차압당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집안에서 고난 없이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축복을 받자마자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고 하나님의 집요한 간섭에 의하여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간섭 당하고 살아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생을 차압당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건 우리에게는 재앙(고난)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갈 때를 행복하다고 합니다.
예수를 모르고 살 때가 우리에게는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는 내 맘대로 살아도 누가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누구로부터 간섭당하는 것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왕 노릇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본성을 가진 인간들은 누구로부터 간섭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이건 아이들을 키워보면 대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아기들도 자기가 하는 일에 누가 간섭을 하면 울어버립니다.
아이들이 우는 것은 방어기재가 발동하여서입니다.
왜 날 간섭하느냐?
날 가만히 내버려두란 말이야 라고 울음으로 소리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어느 날 예수가 우리의 주인으로 자리잡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불편한 동거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예수를 만나고 난 후로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를 술람미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술람미의 인생을 보세요.
술람미는 솔로몬에게 사랑 받기 전의 인생과 솔로몬으로부터 사랑 받고 난 후의 인생은 완전히 다릅니다.
솔로몬의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비록 사는 게 고단하기는 하였지만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핍박은 받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의 핍박은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난 후에 나타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삶을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지금 당장 행복한 것을 원합니다.
나중에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하는 것과 지금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하면 우린 지금 당장의 행복을 원합니다.
인간은 당장을 위하여 살지 미래를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 보다 지금 당장 천국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고난 없는 삶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어릴 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부모의 간섭을 받기 싫어서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하잖아요.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키가 하늘만큼 커져서 어른이 되어 있었으면 그러잖아요.
노는데 미쳐서 밥 먹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알약 하나만 먹으면 배가 고프지 않고 밥 안 먹어도 살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실컷 놀고 공부를 안 해도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것은 없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잖아요.
부모님들의 잔소리가 싫어서 난 나중에 시집가고 장가가서 아이를 낳으면 잔소리 안 할 거야,
아이가 해 달라고 하는 것 다 해 줄 거야,
자기 마음대로 놀도록 내버려 둘 꺼야,
그랬어요.
하지만 막상 결혼해서 아이 낳고 키워보세요.
그렇게 되는가.
더 심하잖아요.
인간은 자신의 위치가 갑(甲)과 을(乙)일 때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달라요.
차를 운전 할 때와 걸어갈 때가 다르지 않던가요.
내가 운전을 할 때 입장하고,
내가 걸어갈 때 입장하고 달라요.
운전을 할 때는 빵빵거리는데도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면서도 비키지 않으면 그냥 확 밀어버리고 싶어요.
그러나 반대로 내가 걸어가 보세요.
가는데 뒤에서 빵빵 거리면 욕을 하고 가서 멱살을 잡고 싶어져요.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가 이중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사람은 항상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살아가요.
그러니 내게 잘 해주면 사랑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합니다.
하지만 힘들게 해 보세요.
밉고 꼴도 보기 싫어요.
이게 죄인들의 사랑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해도 아픈 것 없이 사랑하고 싶어요.
하지만 죄인에게서는 온전한 사랑이 나올 수가 없어요.
모두가 이기주의에서 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해도 욕먹지 않고 싶고,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어 해요.
이건 십자가 정신과 상반된 것인데도 육신의 생각은 늘 이런 것을 원해요.
십자가를 이용해서 편해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우린 그 십자가를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입술로는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 뜻대로 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악함을 고발하려고 아픈 사랑을 주세요.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으면 아파요.
원수들이 진을 쳐서 괴롭혀요.
하나님은 사랑을 주고선 아픔 속으로 밀어 넣어요.
예수님이 나만 아플 수 없으니 너도 좀 아파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원함과 상관없이 세상에서 아픔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 인생이 예수님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아픔을 당하였는지 우리도 좀 당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받고 널 구원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고난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짜로 주지만 그 값이 만만치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역사 속에서 아픈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프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에요.
고난 없는 구원은 없어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이끌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에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은 신약의 성도들을 예표하고 있어요.
성경의 증거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모두가 고난당했어요.
가인과 아벨을 보세요.
아벨이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께 사랑 받아서 죽었어요.
그것도 자기 형에게 돌에 맞아 죽었어요.
술람미도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엄청난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술람미도 솔로몬에게 사랑 받지 않았으면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았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미워할 이유도 없어요.
촌 것을 상대해서 뭐하겠어요.
그런데 촌 것이 자기들도 받지 못한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 입장에선 엄청 자존심이 상해요.
아니 자기들보다 나은 것한테 빼앗기면 덜 서운한데 이건 영 아니거든요.
그러니 뚜껑이 열리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대학교수가 술집 아가씨와 바람을 피우면 사모님이 자존심을 상해하지요.
왜 하필 저런 여자냐!
좀 고급스러운 여자하고 바람을 피우면 덜 창피하잖아요.
그러니 화가 나고 뚜껑이 열린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여자들 입장에선 술람미는 자기들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미워하는 것입니다.
‘어디 감히 왕을 넘보느냐,’
‘넘볼 걸 넘보아야지 어디서 꼬리치고 있느냐,’
예루살렘 여자들은 솔로몬이 사랑하는 술람미를 핍박함으로서 솔로몬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술람미의 머리채를 솔로몬의 머리채라고 생각하고 잡아 흔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남편이나 아내가 미워지면 남편이나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걷어차거나 던지거나 하잖아요.
만약에 아내가 곰 인형을 좋아 한다면 아내가 미워지면 그 곰 인형을 땅 바닥에 패대기치면서 던지고 차면서 씩씩거리잖아요.
그냥 던지지 않잖아요.
울분을 토하면서 내동댕이치잖아요.
곰 인형이 무슨 잘못이 있나요.
잘못이라면 마누라가 아낀다는 것뿐입니다.
곰 인형은 가만히 있다가 날 벼락을 맞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하나님께 대한 반감 때문이에요.
가인은 아벨에게 너만 아니었으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벨만 없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워보면 알아요.
동생이 생기면 형이 괜히 심청을 부려요.
엄마가 없을 때 동생을 꼬집고 하잖아요.
동생에게 너 때문에 엄마 사랑을 빼앗겼다고 질투를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싸울 때 보면 너 때문에 내가 엄마 아빠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모두가 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다 죄 때문이에요.
가인도 아벨이 제사만 안 지내도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받았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생각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건 가인의 착각이에요.
아벨이 없어도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아요.
그건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도 그러고 있어요.
이게 죄인들의 어리석음이고 착각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 때문에 솔로몬이 자기들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만 없으면 솔로몬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건 큰 착각이에요.
예를 듭니다.
개그콘서트에 보면 못생긴 여자 두 명이 있어요.
오나미와 박지선이에요.
둘 다 스스로 못난 여자 캐릭터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옆에 허경환이가 꽃미남으로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어요.
오나미와 박지선이가 착각하기를 허경환이가 다른 여자 때문에 자기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경환이가 사랑하는 여자를 질투하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급기야 죽여 버렸어요.
여자가 죽었으니 이제 허경환이가 자기들을 사랑해 줄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요.
왜냐하면! 오나미와 박지선이는 허경환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여자들이 그런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기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은 모든 게 술람미 저 여시 같은 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술람미를 다 너 때문이라고 구박을 해 대는 것입니다.
하지만 술람미가 없어도 예루살렘 여자들은 솔로몬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어요.
예루살렘 여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솔로몬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솔로몬은 혼자 살아도 예루살렘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좋다고 하면 좋은 것입니다.
싫다고 하면 싫은 거예요.
그럼에도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 쪽에서 사랑받을 근거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단장을 하고 좋아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싫다고 하는데도 말이에요.
이 시대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이 그래요.
자기들이 성화하면 하나님이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성화를 싫어해요.
하나님이 싫데요.
왜 싫어한데요?
그냥 싫데요.
하나님이 인간과 상대하지 않는데요.
하나님은 예수님과만 상대하겠답니다.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 낼 수가 없어요.
내가 이러면 하나님이 기뻐 할거야! 라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 착각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적이에요.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를 편애(偏愛) 한 것처럼 하나님도 편애하세요.
그러면 사랑 받지 못한 자들이 사랑받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자 시기와 질투가 발하여 죽이잖아요.
하나님은 이걸 죄의 소원이라고 했어요.
죄는 반드시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미움당하도록 해요.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실을 알려 준 것은 제자들 마음속에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는 사고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를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우상성을 가지고 태어나요.
모든 인간에게 다 있어요.
이 우상성이 신을 섬기면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있어요.
이걸 버리려고 하지 마세요.
안 버려져요.
그냥 안고 살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아세요.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살면 되어요.
인본주의 목사들은 탐심은 우상이니 탐심을 버려야 한다고 설교를 합니다.
성경이 탐심을 버리라고 하였으니까 여러분 탐심을 버립시다! 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곤 자기는 하나님 말씀대로 설교 했다고 합니다.
말씀대로 하라고 가르치니까 틀린 것입니다.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 그게 엄청나게 설교 잘하는 줄 알아요.
바리새인들이 눈만 뜨면 이런 설교 했어요.
그런데 지금 지옥 밑바닥에 가 있어요.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를 짓고 안 짓고와 상관없이 죄인이에요.
근본이 죄인이란 말입니다.
죄인은 탐심 덩어리에요.
죄인에게서 탐심을 분리해서 제거 할 수가 없어요.
이건 제거되는 것이 아니에요.
탐심을 갖고 사세요.
인간 자체가 탐심덩어리인데 어찌 버려집니까?
버리려고 해도 버려지지 않아요.
탐심은 죄인의 본성이에요.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탐심은 그림자처럼 착 달라붙어서 안 떨어져요.
육신이 죽어야 탐심도 죽어요.
우리가 몸으로 살고 있는 한은 탐심은 안고 살게 되어 있어요.
탐심뿐만 아니고 모든 죄성이 그래요.
죄성은 없앨 수가 없어요.
그냥 평생 안고 살다가 죽어야 해요.
흔히들 착각하기를 성령을 받으면 탐심이 사라지는 줄 아는데 아니에요.
성령이 탐심을 물리쳐 주지 않아요.
도리어 속에 감추어진 탐심을 더 들추어내는 일을 하세요.
우리가 탐심을 안 내려고 안 내려고 하면 성령은 탐심아 나오너라 유혹을 해요.
탐심이 나오도록 미끼를 던져서 덥석 물게 만들어요.
넌 탐심의 인간이라고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고발당하는 것이 은혜에요.
고발당하면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여! 나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토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인간은 오래 살수록 우리 안에 감추어진 죄가 더 많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죄가 더 드러나요.
말씀을 알면 알수록 죄의 깊이도 더 알아가요.
살면 살수록 자신이 아주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깊이 알아가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조망을 해 주시면 우리가 괜찮은 인간이 아니라 아주 못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저는 목사가 된 것을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설교를 하기 위하여서 의무적으로라도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면 참으로 나라는 인간은 죄 덩어리라는 것을 실감을 해요.
나도 별수 없는 위선자라는 것이 드러나요.
지금 설교를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다하고 있어요.
생각이 있다는 것은 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뿌리가 있으면 언젠가는 싹을 내게 되어 있어요.
죄가 고개를 내 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운 생각이 있으면 언젠가는 살인으로 나타나고!
탐심이 있으면 언젠가는 도적질하고 강도짓하게 되어 있고!
음란이 있으면 언젠가는 간음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것이 설령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 죄성은 사라지지 않아요.
이게 인간이에요.
우리 속에도 죄성이 주렁주렁 고기 뱃속의 알처럼 들어 있어요.
조건만 되면 쏟아져 나와요.
지금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난 죄 안 지었어 라고 자랑하지 마세요.
죄는 씨와 같아서 환경만 맞으면 반드시 싹을 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누가 범죄하거든 손가락질 하지 말고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러니 잘 사네! 못 사네!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죄를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은혜가 더욱 더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복음인가를 알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보니 그래요.
저는 그렇게 깨달아요.
누가 여러분 죄짓지 마십시오.
그러면 말은 고맙지만 인간이 각오한다고 해서 그 각오대로 살지 못하니 어찌합니까.
죄인더러 죄짓지 말고 살라는 것은 살지 말고 죽으라는 말이에요.
죄인이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살아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또한 죄를 지으니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파와 같은 자들은 이를 오해해서 성도는 의인인데 왜 자꾸만 죄인이라고 하느냐 라고 화를 내요.
이런 것은 구원을 자기 것으로 챙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의인이에요.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고 있어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려면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야 해요.
예수님의 생명이 부활 생명이잖아요.
부활은 죽은 몸을 통하여서 일어나요.
산 사람에게는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우리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인다는 말은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한단 말입니다.
죄인이라야 십자가에 죽지요.
그러면 죽은 우리 몸에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 안에서 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으로 나타난단 말이에요.
구원파 같이 난 의인이야 그러지 않고 난 죄인입니다 라고 해요.
내가 죄인이라야 예수님의 피가 뿌려지지요.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날마다 자신은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넘겨주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죄인으로서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고 살아가는 자에요.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의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인이면 의롭다 여김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의인인데 무슨 의롭다 여김을 받나요.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의인이 아닌데 예수 안에서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이지 의인이 아니에요.
죄인에게는 이건 죄고 저건 죄 아니고 라는 것이 없어요.
죄인은 가만있어도 죄이고 움직여도 죄에요.
인간의 행실로 죄를 구분하고 나누지 마세요.
이건 죄이고 저건 죄 아니다 라는 식의 죄관을 버리세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 죄에요.
예수 안 믿는 것이 죄에요.
술 먹어도 죄이고 안 먹어도 죄에요.
도적질해도 죄이고 안 해도 죄에요.
바람피워도 죄이고 안 피워도 죄에요.
이걸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해도 안 해도 죄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행동 하나 하나가 다 죄에요.
말 귀를 좀 알아들으세요.
누가 살인을 하면 살인자라고 손가락질 하지 말고 내가 살인자라는 걸 아세요.
그 사람은 드러난 죄를 지었고 우린 잠재된 죄를 안고 있어요.
언제 불쑥 튀어나올지 몰라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살인한 놈이나 미워한 놈이나 매 일반이라고,
간음한 놈이나 여자를 보고 예쁘다고 쳐다 본 놈이나 같다고 하잖아요.
육신이 멀쩡한 건강한 인간이라면 선남선녀를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 어떻게 가만있겠어요.
우린 우리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요.
다스려야지 하는 마음뿐이지 안 되어요.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은 간절해도 이미 미움이 자리 잡고 있어요.
탐내지 말아야지 하는데 이미 탐심이 일어나고 있어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에게도 이 우상성은 있어요.
우상성이 예수 믿고 팔자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팔자 고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팔자를 버린다고 했어요.
제자들 속에 있는 우상성을 깨트리려고 예수 믿으면 미움 받는다고 알려 준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받으면 미움이 넝쿨채 굴러와요.
구원은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옵션으로 주어져요.
안으로는 기쁨인데 겉으로 우겨쌈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행복한데 겉으로는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속으로는 천국인데 살아가는 환경은 지옥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술람미가 그랬어요.
속으로는 솔로몬의 사랑을 받아서 기쁘고 행복했지만 겉으로는 사면초가(四面楚歌)였어요.
누구하나 술람미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모두가 적이었어요.
술람미가 당한 고난은 솔로몬의 사랑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 아픔이 술람미로 하여금 더욱 더 솔로몬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갈급해 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참으로 말하기가 좀 걸쩍지근합니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난감하네요.
암튼 성령께 지혜를 구하고 해 봅시다.
오늘 본문은 술람미가 솔로몬과 사랑을 하다가 병이 낫다고 합니다.
아 2:5절.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사랑이 얼마나 좋았으면 병이 날 지경으로 하였을까요.
아마도 밤새도록 사랑을 한 모양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만인이 지켜보는 만찬 석상에서 ‘이 여자는 내 여자입니다!’ 라고 공표를 해 주셨으니 죽도록 사랑 할만도 하지요.
밤이 새도록 사랑 할만도 하겠지요.
사랑도 기력이 있어야 해요.
기력이 없으면 힘이 부쳐서 사랑도 못해요.
술람미가 기력이 딸린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도록 기력을 좀 회복시켜 달라고 합니다.
건포도로 힘을 돋우고 사과로 시원케 해달라고 합니다.
건포도는 기력을 돋우어주는 음식이에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영양제와 같아요.
당시 건포도와 사과는 소성(蘇醒)제로 쓰였어요.
기력이 쇠잔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력회복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어요.
여행을 하거나 전쟁터에 나갈 때 가지고 나가서 힘을 채우곤 했어요.
건포도가 먹고 힘을 돋우는 밥이라고 한다면!
사과는 목마름을 해갈케 해 주는 생수와 같아요.
이걸 복음적으로 이해해 봅시다.
믿음은 생명과 같아요.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려면 힘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산 사람은 밥을 먹는 것입니다.
생명은 밥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생명도 밥을 먹어야 해요.
예수님을 일컬어 생명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날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구원을 받지요.
죽음의 천사는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 갔어요.
그런데 피를 바른 집 안에서는 어린 양 고기를 불에 구워 먹었어요.
어린 양 고기를 밥으로 먹은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가자면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든든히 먹이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어린 양 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예수님도 새 언약을 세울 때 유월절 양 대신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지요.
피는 죄사함을 주는 것이고,
살은 죄사함 받은 성도가 먹어야 할 양식인 것입니다.
다름 아닌 새 언약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가서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먹입니다.
숯불에 구운 떡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뜻합니다.
부활의 생명은 새 언약의 말씀이에요.
부활 하신 예수님이 숯불에 구원 떡을 먹이신 것은 새 언약의 말씀을 먹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고 나자 제자들을 부활의 도를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새 언약의 말씀으로 든든해져 가야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밥을 먹고 자라가듯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야 해요.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을 통하여서 주어집니다.
말씀을 많이 알아야 시험에 들지 않아요.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갖가지 시험거리들이 닥칩니다.
이러한 시험 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야 해요.
광야에서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을 때 말씀으로 이겨냈어요.
마귀도 말씀을 가지고 시험해요.
그러니 저게 마귀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분별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 목사가 지금 마귀의 말을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지 분별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강단에서 비진리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분멸 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어떤 식으로 시험을 하는가 하면 말씀을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자기에게 유익하도록 이용을 해요.
자기를 들어내는데 사용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런 마귀의 말은 연약한 사람은 훅하고 넘어가요.
왜냐하면! 인간을 긍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항상 예수를 이용하여서 영웅이 되라고 미혹합니다.
인간을 부추겨요.
여기에 넘어가면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려고 예수를 이용하기에 이릅니다.
마귀가 광야에 계신 예수님에게 와서 영웅이 되라고 미혹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봐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천사가 받아 준다고 했잖아!
그걸 증명해 보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고!
슈퍼맨처럼 높은데서 뛰어내려 보고!
천하만국의 영광을 차지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너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해 줄 것 아니냐 라고 합니다.
꼭 이 시대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말과 같아요.
얼마나 달콤한 말입니까?
꿩 먹고 알 먹는 것 아닙니까?
교인들이 세상에서는 예수 믿고 복 받아서 잘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에 가자고 하잖아요.
목사들이 이걸 복음이라고 전하고 있잖아요.
이게 마귀의 말인데 말이죠.
그런데 교인들은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는 교인들은 마귀의 말을 넙죽 넙죽 받아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지 마귀의 말인지 분간도 하지 않고 목사들이 성경을 가지고 말을 하니까
그 말이 마귀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인지 분간도 못하고 아멘 아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말씀을 몰라서 그래요.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여서 그래요.
그러니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거짓 종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속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사람의 궤술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공교하게 지은 말에 넘어가지 말고 세상 풍조에 밀려 떠내려가지 말라고 합니다.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다.
이는 믿음 안에 든든하게 서 있으란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당하였던 것을 그대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랑하기 때문에 미움도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은 가시밭길이에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 디딜 때마다 아파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라서 그래요.
이런 고난을 이겨내는 것은 말씀 밖에 없어요.
말씀을 먹으면 힘이 생겨요.
마치 요나단이 전쟁 통에 수풀에서 꿀 한 송이 찍어 먹었는데 눈이 밝아진 것처럼!
하나님 말씀은 꿀처럼 눈을 밝게 해 주어요.
소망을 준단 말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과 사랑을 하자면 힘이 있어야 하듯이!
성도들도 예수님과 사랑을 하려면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사랑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요.
롬 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어야 믿음도 강건해져요.
말씀을 알아야 하나님의 약속이 과연 그러한가 확인 한단 말입니다.
말씀을 모르면 어린아이들처럼 아이스크림 하나에 유괴당해요.
거짓 종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요.
교회 안에 수많은 거짓 종들이 우글거려요.
마치 예수님의 초림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강도들이 우굴 거리듯이 지금도 동일해요.
예수님의 초림은 예수님의 재림의 모형이에요.
그리서 지금은 영적 상태가 초림 때와 같은 모습으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전쟁이에요.
술람미는 지금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전쟁을 하고 있어요.
겉으론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의 핍박을 견디어 내야 하는 전쟁이고!
안으로는 솔로몬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한 상사병을 믿음으로 이겨야 하는 전쟁이에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원수가 가만히 안 있어요.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그 은혜를 쏟을 일들이 닥쳐요.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과 같이 은혜와 시험은 항상 같이 병행하면서 주어져요.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련하려고 불같은 시험을 주신다고 했어요.
벧전 4:12-14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재미있는 것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면서 불같은 시험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사랑하면 시험을 주지 말아야 하잖아요.
도리어 시험이 안 오도록 막아 주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 생각과 전혀 다르게 하세요.
사랑한다 하고선 힘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차라리 하나님께 사랑 안 받았으면 좋다 싶어요.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고로 미움을 받는다고 했어요.
요 15: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역설적으로 택함 받지 않으면 미움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주어요.
솔로몬이 잔치 집에서 술람미는 내 여자라고 깃발로 공표했어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술람미를 손대지 말아야 하잖아요..
그러나 정 반대로 여기저기서 시기와 질투와 분냄들이 나타났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이 가만있지를 않았어요.
더 길길이 날뛰면서 죽여라 죽여라 했어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기(旗)로 덮은 것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나니 우겨쌈을 당하지요.
온 유대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핍박을 했어요.
우리 생각에는 하늘에서 불의 혀 같은 모습들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보았으면 너도 나도 대접을 해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아이고~ 사도님들 우리 집에 오셔서 쉬다가 가십시오.
저희 집 저녁 식사에 초대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잖아요.
아니! 하나님의 종들인데,
그런데 도리어 죽이자고 달려들었어요.
이건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잖아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인간들이 아이고 하나님 아들님 어서 오십시오.
여기 앉으세요.그래야 하잖아요.
아니 대통령이 지금 여러분 앞에 와 있으면 각하 어서 오십시오.
영광입니다.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럴 것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느 놈도 거들떠보지 않았어요.
완전히 개 무시했다고요.
그것도 자칭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그랬어요.
지금도 복음 전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인간들이 이단이라고 해요.
이게 다 이 세상이 마귀의 수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걸 몰라요.
자신들을 장악하고 있는 자가 마귀라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들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의 정체를 들추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제자와 같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하는 종들을 통해서 드러내고 계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고난 속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이는 원수들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입으니 원수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는 나 구원받았다고 자랑만 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늘 룰루랄라 행복하지 않았어요.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 못지않게 사람들로부터 미움도 받았어요.
육신으로는 엄청난 고난을 받았어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늘 크고 작은 시험거리들이 닥쳐요.
이 모두가 신앙생활은 죄악 된 세상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야하기 때문이에요.
성경은 이 세상을 바다라고 합니다.
그것도 그냥 바다가 아니고 고해라고 해요.
고해(苦海)란? 고생의 바다란 말입니다.
풍랑이 이는 곳이란 말이에요.
바다는 늘 크고 작은 파도가 있어요.
바다는 항상 예상치도 못한 풍랑이 일어나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항해를 할 때 풍랑을 만난 것도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을 하는데도 풍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두려워 한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깨어나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하고 동행하면서도 세상에 조그마한 일만 닥쳐도 두려워해요.
예수 예수 하면서도 예수를 안 믿어요.
관념이에요.
관념의 예수를 실제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알려주려고 풍랑이 일게 하여 배에 물이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늘 은혜가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때론 시험에 들 때도 있고 낙심 될 때도 있어요.
이를 이겨 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입니다.
술람미가 핍박을 이겨내고 상사병을 이겨내는 것은 솔로몬의 약속이에요.
그 누가 뭐라고 하여도 솔로몬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건포도와 사과는 말씀과 믿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시험에서 이겨내요.
믿음은 말씀과 같이 활동해요.
말씀은 밥과 같아요.
밥을 먹어야 힘을 얻듯이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라는 힘이 생겨요.
믿음이라는 힘이 있어야 시험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가 어려움을 당할 때 말씀 속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게 만들어요.
시 107:17-20절.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18.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19.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보세요.
죄인이 범죄로 인하여 시험을 당하여서 낙심이 되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서 위경(危境)에서 구원하신다고 하지요.
위경은 위험한 환경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보내서 위경(危境)에서 구한다는 말은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게 한단 말입니다.
말씀을 보낸다는 말은 약속을 붙잡게 한다는 것입니다.
언약 안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언약이 믿어지게 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시험은 모두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를 지옥으로 보낼 수가 없어요.
다만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케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우리야를 죽인 것으로 인하여 나단 선지자로부터 엄청난 책망을 들었어요.
시 51:10-12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책망 듣고 좋아 할 사람이 누가 있나요.
더군다나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책망을 들었는데 낙심이 되지요.
그 누구도 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요.
마음이 상해요.
다윗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는 깊은 시름에 잠겼어요.
왕이 되어서 일반 백성들보다 더 악한 죄를 지었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지요.
앞으로 어떻게 백성들을 다스리겠어요.
간음한 자이고 살인자인데,
백성들이 수군거릴 것이 아닙니까?
대신들이 저런게 왕이라고 하면서 비아냥거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다윗의 마음은 곤고한 것입니다.
왕이라는 즐거움도 상실했어요.
마음이 천근만근인 것입니다.
기쁨도 없고 밥맛도 없고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이걸 신약에선 성령이 근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서 성신을 거두어가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다윗의 마음을 회복케 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인 것입니다.
술람미 식으로 말하면 건포도와 사과인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치료해 달라는 말입니다
술람미는 인간적으로 보면 사면초가(四面楚歌)에요.
피할 방도가 없어요.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술람미는 솔로몬과의 사랑을 생각을 해 낸 것입니다.
왕에게 사랑 받은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 맞아!
내가 솔로몬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고초를 당하는 거야!
너희들이 아무리 날 핍박을 해 봐라 솔로몬의 사랑이 변할 줄 아느냐!
절대 안 변한다!
나에게 약속을 했단 말이야!
그 약속을 생각하고 솔로몬과의 황홀했던 사랑을 생각함으로서 이겨내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 주었는지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아 2:6절.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 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솔로몬이 술람미를 왼손으로는 베개하고 오른 손으로 안았다고 합니다.
이는 솔로몬의 품에서 안식하였던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품은 그리스도의 품과 같아요.
성도가 시험을 이기는 것은 말씀 안에서 든든히 서는 것뿐이에요.
누가 이단이라고 하여도 예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깃발을 꼽아 준 것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어요.
그 어떤 마귀의 참소도 예수님의 피로서 이겨내요.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 안에 머물러 있어야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양 팔로 안은 품 속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이에요.
솔로몬의 품은 그리스도 안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누구든지 이 평안함을 깨트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아 2:7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상상을 해 보세요.
문자적인 의미로 보면 지금 술로몬과 술람미가 짙은 사랑을 했어요.
기운이 빠질 정도로 사랑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너무 진하게 사랑을 하고 난 후 나른한 몸으로 신랑의 팔베개를 하고 자고 있어요.
아주 달콤하게 자고 있다구요.
그런데 누가 깨워보세요.
얼마나 밉겠어요.
그러니 제발 깨우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이 기쁨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난 지금 엄청 행복하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좀 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핍박해라!
그만큼 미워했으면 되지 않았느냐!
제발 내버려 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루와 들 사슴의 이름을 걸고 부탁하고 있어요.
노루와 들 사슴은 겁이 많아요.
조그마한 소리에도 놀라는 동물이에요.
술람미는 노루와 사슴의 이름으로 부탁하는 것은 사소한 일에 자신의 달콤한 사랑을 깨트리기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다툼을 피하고자 해요.
은혜를 아는 사람은 시비에 말려들기 싫어해요.
원수를 만들지 않아요.
물론 원수 마귀가 가만 두지를 않지만 말이에요.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과 다투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냥 종용히 살고 싶어요.
그런데 자꾸만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저도 조용히 살고 싶어요.
그런데 자꾸만 곁에서 시비를 걸어요.
마음을 격동시켜요.
목사가 마음이 격동 되면 엄청 힘들어요.
저는 마음에 분노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면 영감(靈感)이 사라져요.
제일 고통스러운게 영감이 안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럼 미쳐요.
마음에 분노가 가득해 보세요.
깜깜해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그래서 가능하면 시비를 피하려고 해요.
시비 걸지도 않고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주님이 주신 은혜만 뱉어내고 싶어요.
이게 작은 소망이에요.
술람미처럼 주님과 교제하고 싶어요.
특히 아가서는 사랑이야기잖아요.
사랑이야기는 서정적이어야 하잖아요.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해야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취할 수가 있어요.
제가 사랑을 느껴야 토해내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TV도 안 보아요.
영감이 흐려질까 봐서!
집에서도 조심 조심해요.
그런데 자꾸만 격동케 하는 일들을 일으켜요.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마음을 격동케 만들어서 평안을 빼앗으려고 해요.
그러니 그 어떤 싸움에도 휘말리지 마세요.
그냥 저 주고 마세요.
그래서 진흙탕 싸움에 휘말려 들어가지 마세요.
싸움은 이겨도 상처투성이고 져도 상처투성이에요.
싸움은 둘 다 손해에요.
그러니 다툼을 피하세요.
어떻게 다툼을 피하느냐?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어요.
은혜를 받아야 이길 수가 있어요.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강한 자로 살았어요,
성령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았어요.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건포도와 사과를 많이 먹었어요.
우리도 건포도와 사과처럼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말씀을 많이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갖가지 시험들을 이겨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미혹으로부터 지켜주는 말씀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약속이 믿어지면 두려울 것이 없어요.
누가 뭐라고 하여도 흔들리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가 든든한 건포도에요.
눈을 밝게 해 주는 꿀이에요.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의 피라는 건포도를 먹고 힘을 얻어 풍랑 이는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밥은 말씀입니다.
예수라는 양식을 먹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주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은혜를 달라고 하세요.
은혜로 풍랑 이는 바다를 항해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가 건포도를 먹고 기력을 회복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세운 새 언약의 복음을 먹고 힘을 얻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게 하옵소서. 그 어떤 환란이 닥쳐도 약속을 붙잡고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게 하시고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살았듯이 우리도 예수님만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
Amen, Amen, Amen.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