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병상련의 정이 담긴 사제동행-딸처럼 따르고 아빠처럼 의지하고
남효덕
초등학교 졸업 1년만에 대학생이 된 김양
덕성장학회가 설립된 바로 이듬해인 1997년 가을 대입자격검정고시에 최연소자로 합격한 김춘영에 관한 기사가 온 메스컴에 큰 화제가 되었다. 김춘영양은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을 단념해야 했다. 그 대신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상금 100,000원으로 중학교 3년 과정 모든 교과서를 구입하여 독학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눈물겨운 숱한 일화를 남기며 졸업 3개월만에 고입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하였고, 연이어 3개월 후에 있었던 대입자격(고졸자격)검정고시에 도전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는 특종기사였다. 남들이 6년을 거쳐야 할 수업과정을 6개월만에 마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도 믿기 어려운데, 집안 사정은 아직도 어려워 공부방은 말할 것도 없고 취침할 공간마저 없다는 딱한 사연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하였다.
때마침 학창시절 내가 받았던 도움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덕성장학회’를 설립한지 2년만인 바로 그때라 나는 이러한 특종 기사를 보고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어렵게 김양의 연락처를 알아 김양의 부모들께 나도 작은 격려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으나 김양 부모들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춘영이를 돕겠다는 귀한 뜻은 정말 고맙지만 본인의 자녀교육은 자기들이 맡겠으며 외부인들의 도움은 정중히 사양하겠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교육감을 비롯한 각 기관장과 여러 독지가로부터 일백칠십만원의 성금이 이미 답지되었고, 또 H대학으로부터는 김양이 본대학에 입학하면 4년간 등록금을 면제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미담도 듣게 되었다. 김양의 부모들은 우선 현금으로 들어온 성금 전액을 당장 뇌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사경을 헤매는 딱한 어린이에게 이미 전달했다는 것이다.
오랜 인연으로 이어진 귀한 만남
나는 김양의 부모님들을 설득했다. 남에게 도움받는 것이 결코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부끄럽다거나 자존심 같은 것과 결부시킬 일이 아님을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뿐만아니라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 작은 성금은 엄격히 말하면 내 개인돈이 아니라 공적 기관인 덕성장학회 예산으로 마련되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설명하였다. 나도 가정형편상 중학교를 다니지 못해 고입자격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어렵게 사범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도 그대로 알려주었다.
아울러 지금(그당시)은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창시절 주위 분들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덕성장학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는 사연까지 소개하였다. 이 모든 사실과 내 진심을 알게 된 김양과 부모들은 ‘검정고시 출신도 대학교수가 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닫혔던 마음의 문이 차차 열리게 되었다.
김양 부모들과의 첫 만남이 계기가 되어 김양의 학과교육에 수반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두고 상담을 청해 왔고 나는 자연스럽게 멘토가 되었다. 나는 일시적으로 거금을 도와줄 형편은 못되지만 김양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고등학교 등록금에 해당되는 돈을 매분기마다 보내겠으며, 진로문제를 비롯하여 김양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상담에 응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김양은 초등학교 졸업 3개월 후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그 바로 3개월 후 대입자격검정고시에 응시하여 합격하는 등 그야말로 지치도록 바빴지만 3개월 앞으로 다가오는 대학수능시험에 도전하였다. 흡족한 점수는 받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바로 그해 말 최연소의 나이로 H대학에 무난히 입학하게 되었다. 물론 약속대로 4년간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고 기숙사도 무료로 입사할 수 있었다.
이 일연의 과정들을 미루어볼 때 김양이 얼마나 시간을 아껴 써야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양의 말을 빌리면, ‘아빠는 나에게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공부를 하라’고 독촉하기 때문에 밥을 최대로 천천히 먹었다는 하소연까지 하였다. 하루에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을 19시간 넘길 때가 많았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바쁘게 시험을 준비하는 와중에서도 전공과목 공부와는 별도로 각종 자격시험애도 취득코자 최선의 노력을 해 왔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대학 졸업 때까지 전자기술 관련 자격증을 12개나 취득하였다고 하니 평범한 일반학생들은 흉내내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상급학교 진학과 진로 탐색에 조언
대학 졸업반이 되던 해 김양은 교사가 되겠다고 한 때 교사임용고시를 준비하였으나 데학원에 진학하여 더 큰 꿈을 펼쳐보라는 나의 권유를 받아들여 내가 봉직하고 있는 영남대학교 대학원 전자정보공학부에 입학하였다. 나의 제안도 있었지만, 대학 측에서는 총장과 대학원장의 흔쾌한 동의를 받아 재학 기간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는 것은 물론 기숙사비 및 어학연수비 등의 면제혜택도 받게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김양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대학원 지도교수께 부탁드렸고, 지도교수도 기쁜 마음으로 김양을 중요 연구프로잭트에 참여시키고 넉넉한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니 적어도 재학기간에는 재정걱정은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김양이 17살의 어린 나이로 대학원에 입학하였다는 사실이 일간지를 비롯하여 각종 언론기관을 통해 다시 세상에 알려지자 나와 우리 덕성장학회도 덩달아 언론기사로 나오고 보니 나는 쑥스럽기도 하거니와 부담도 적지 않았다. 언론에 보도된 나와 김양을 함께 소개하는 기사의 제목이나 내용에 ‘동병상련’이라는 문구가 제일 많이 눈에 띄였다.
김양이 효성대학교 입학과 졸업, 그리고 영남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기까지 갖가지 행정적 절차와 학문의 성격 등을 안내했지만, 이젠 지도교수가 중심이 되어 김양을 지도를 책임지고 있으니 나는 모든 걱정을 놓을 수가 있었다. 다행히 학과 공부는 물론 연구활동에도 더 없이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도 진로를 택힐가 고민하고 있다니 나는 또 하나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김양은 이제 더이상 나의 도움이나 자문이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 역시 달구벌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일로 너무 바빠서 김양을 포함하여 대학원생 한사람 한 사람에게 세심한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다만 지도교수를 통하여 김양의 안부를 계속 듣고 있었는데, 한때 일본 나고야 대학 대학원에 입학하고자 마음먹고 새로운 꿈을 간직하여 구비서류도 준비한 적이 있지만, 결국 전자컴퓨터를 공부한 학부전공과 전자정보공학 분야에 심도있는 연구를 수행해 온 김양은 지금까지의 전공을 살려 국내의 신설 연구업체에서 실무경험을 쌓기도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양은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유도 있었을 뿐 아니라 국내외 상황변화에도 발맞추어 의학전문대학에 입학하였다. 의학전문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전자정보공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기면서 3, 4년의 시간이 소요되였지만, 또래 친구들의 학번에 비해 아직도 늦지 않으니, 지금 대학병원 전문의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과제는 얼마든지 있다는 말로 김양에게 격려와 축하의 뜻을 전했다.
김양 부모들의 특이한 교육관과 애착
김양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위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조언도 있었지만 김양의 부모님들의 독특한 교육관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사료된다. 김양의 어머니 역시 가정사정상 초등학교만 마치고 야학에서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남편을 만났지만, 남편과 춘영이와 셋이 생계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학교성적이 전교에서 일등을 차지했던 딸이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자 ‘빈곤의 되물림’이라는 말을 연발하며 가장 가슴아프게 생각한 분이 춘영이 어머니일 것이다.
딸이 밤이 새도록 공부하는데 어머니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는 딸 옆에서 책을 읽으며 같이 밤을 보내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딸이 공부하던 헌책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중학교 과정 일부 과목을 어머니 나름대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도전 2년만에 고입검정고시에 당당히 합격하는 기쁨을 얻었고, 연이어 고등학교졸업자격고사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수년간의 노력 끝에 고등학교 졸업자격 시험에도 합격하였다.
또 가족회의에서 내킨 김에 대학에도 진학하자고 의견을 모았고, 45세의 나이로 경주대학교 식품조리학과에 만학도로 입학하였다. 당장 학비 문제가 대두되었지만 우리 덕성장학회에서도 작은 금액의 장학금을 보냈고, 대학에서도 만학도 장학금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춘영이가 받은 장학금 일부와 과외로 활동한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어머니 학비 상당 부분을 충당하였다고 하니 춘영이는 스스로 공부를 하면서 어머니 대학 공부를 시킨 셈이다.
작은 나눔 큰 보람
1997년 우연히 만난 김양은 대학생활에 수반되는 일 외에도 개인 신상문제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일을 나에게 상담해 왔고,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 등 뜻있는 날에는 한번도 인사를 빠뜨리지 않고 있다. 편지나 전자메일을 보낼 땐 언제나 ‘예쁜 딸 ○○○'라고 쓰면서 애교까지 부릴 땐 딸이 없는 나에겐 친딸 같은 정감까지 든다. 우리 덕성장학회에서는(혹은 나는) 김양이 대학입시를 준비한 기간과 대학 1학년 동안 6회에 걸쳐 고등학교 공납금에 상당하는 장학금만 보냈지만 나를 기억해주는 마음씨가 너무 곱고 급우들에 비해 5년이나 월반하고도 대학 4년간 줄곧 최상위 성적을 유지하리만큼 착실한 김양이 더 없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양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더 자세히 소개하고 싶은 소재는 많지만 김양의 저서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찾은 ’17살의 작은 거인(2002년 청어)’이라는 책이 있다.
첫댓글 남 교수님의 옥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께서는 '그렇게 자란 학생이 그렇게 학생을 키운다'라는 마음이 드는 글을 두편 보내시면서, 편집위원회에서 고르라고 하셨습니다. 책을 편집할 때는 물론 한편만 선택하겠지만, 글이 둘 다 아름다와서, 그리고 또 알려졌으면 하는 바램에서 오늘 두편을 다 <사제동행>란에 올립니다. 책으로 묶을 때는 이 두 글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을 모색하든지, 아니면 한편만 택하게 될 것 같습니다. 5월 마지막에 오면서 흐뭇한 이야기들에 많이 배우고, 또 많이 따뜻해짐을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