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은 아내를 잃은 후 쓸쓸하고 허전한 나머지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3년의 지난 어느 날 밤 외딴 들길을 걷다가 우연히 몸종과 함께 달구경을 나온 유옥화(柳玉花)라는 아리따운 낭자를 만난다. 박천은 낭자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낭자를 뒤따르며, 다과라도 대접하고 싶으니 함께 집으로 가 주실 것을 요청하자 낭자는 기꺼이 허락한다. 낭자와 정담을 나누다가 운우지정을 나누게 되었다. 이게 왠 일인가? 요물에게 홀리게 되었으니..........큰일이네..한편 지우도사는 황희에게 주역을 열심히 공부하여 통달할 것을 주문한다.
박천은 넉넉한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나 별다른 고생 없이 자랐다. 부모님은 손이 귀하다고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일찍 장가를 들였는데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아내를 잃은 후 그는 너무나 쓸쓸하고 허전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밤이면 무작정 아무데나 헤매고 다녔다. 3년의 지난 어느 날 밤 외딴 들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몸종과 함께 달 구경을 나온 아리따운 낭자를 보게 되었다. 달빛 아래 드러나는 낭자의 아름다운 맵시는 죽은 아내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17, 8세로 보이는 낭자는 야릇한 향내를 풍기며 천천히 다가와서는 옆을 지날 때는 수줍은 눈웃음을 보냈다. 아무리 보아도 빼어난 미인이었다. 박천은 넋을 잃은 채 낭자의 뒤를 다르면서 말을 걸었다.
박천 : 낭자, 달 구경을 나오셨나요?
낭자 : 적적하여 산책을 나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길입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박천은 낭자의 태도에 용기를 내어 다시 말을 걸었다.
박천 : 낭자, 이 몸은 얼마 전에 낭자와 비슷한 또래의 아내를 잃었습니다. 오늘 낭자를 뵈오니 죽은 아내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저에게 말벗이라도 되어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낭자: 아이, 저를 어쩌나! 상처를 하셨다니 얼마나 외로우실까! 제가 위로라도 해드리고 싶군요.
박천: 우리집이 여기서 가깝습니다. 두 분께 다과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가주시겠습니까?
낭자: 그럼, 폐가 안 된다면 그렇게 하지요.
박천: 이거 참으로 감사합니다. 아내가 죽은 후 매일 저 혼자서 일 없이 쏘다녔는데 오늘은 정말 좋은 말벗을 만났습니다. 저를 따르시지요. 박천은 구름 위를 둥둥 떠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낭자를 집으로 데려가서 자기 방으로 안내하였다. 참으로 처음 보는 순간이었음에도 낭자의 태도는 놀랍기 그지없이 대범하였다. 고려 말의 남녀간의 정조 관념은 상당히 문란하였다. 박천은 곧 행랑채에 기거하는 늙은 여종을 시켜 술상을 보아 오도록 시켰다.
박천: 자, 별로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시지요.
낭자: 아닙니다. 우린 저녁 먹은 지 얼마 안 되어 전연 생각이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일체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박천: 낭자께서는 집이 어디십니까?
낭자: 제 아버님은 전에 황주에서 현감을 지낸 적이 있는데 갑자기 돌림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집안이 점차 몰락하여 지금은 이 아이와 둘이서만 지낸답니다.
박천: 알고 보니 낭자도 무척 외로운 사람이군요. 이름이 무엇입니까?
낭자: 저는 유옥화(柳玉花)라고 하옵니다. 박천과 옥화 낭자가 정담을 나누자 몸종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였다. 결국 한창 젊은 두 사람은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그런데 새벽녘에 눈을 떠보니 옥화 낭자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이상한 것은 그 낭자는 밤이면 이따금씩 찾아왔다. 옥화 낭자의 미혹에 취한 박천은 너무나 황홀하였고 그들은 날로 정이 깊어만 갔다.
박천의 대문간 옆에 있는 집에는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노파가 한밤중에 소피를 보러 나왔다가 박천의 방에서 남녀의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그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문구멍으로 살짝 들여다보고는 ‘악’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않고 말았다. 노파는 눈을 의심하고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는 질겁을 하면서 행랑채(대문간 옆에 있는 집) 쪽으로 달아났다. 겨우 방으로 들어온 노파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털썩 방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것이 생시인지 꿈인지 분갈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박천이 촛불을 켜둔 채 이불 위에서 알몸으로 해골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노파는 잠자는 남편을 깨웠으나 코를 골아댈 뿐 아무런 지척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노파는 아침에 남편에게 지난밤 보았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남편은“이놈의 할망구가 벌써 노망을 하나, 그 무슨 쓰잘데기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겨”라며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결국 몇 번을 설득한 후에 그 광경을 다시 목격하기로 하고, 며칠 후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소문은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결국 박천의 집안 어른이 찾아와 박천에게 그 일에 관해 물었다. 박천은 최근에 옥화 낭자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집안 어른은 이렇게 탄식했다. “여보게, 참으로 큰일났네, 자네가 요물에게 홀린 것이 틀립없어! 자네 안색이 매우 나쁘네. 그 여자가 자네에게 자신에 대해서 무어라고 하던가?
박천: 자기는 전에 황주에서 현감을 지낸 분의 딸이랍디다. 부모님이 갑자기 돌림병으로 죽은 후 지금은 몸종과 둘이서만 산다던데요?
집안어른: 그러지 말고 자네가 그 여자가 산다는 곳으로 은밀히 찾아가 보게. 그래서 이상하면 즉시 대비책을 마련해야지. 박천은 설마 하면서 다음날 옥화 낭자가 산다는 곳을 수소문하여 찾아갔다. 그러나 모두들 그런 사람은 모른다고 대합할 뿐이었다. 할 수 없이 박천은 힘없이 터덜터덜 발걸음을 되돌아오다가 사람이 살지 않는 폐사(廢寺:폐하여 승려가 없는 절)가 있어 호기심으로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폐사에는 신귀사(神歸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어, 무심코 안쪽을 살피다가 박천은 자신도 모르게‘앗’하고 비명을 질렀다. 절간에 딸린 음산한 빈방에는 관이 하나 놓여 있었다. 옻칠을 한 관두껑 위에는, 먹글씨로‘고 황주현감여식 옥화지구(故黃州縣監女息玉化之柩)라고 씌여 있었고, 바로 옆에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놓여 있었는데 삭아빠진 천에‘시녀(侍女) 춘매(春梅)라고 씌여 있었다. 박천은 그것을 본 후 혼비백산, 걸음아 날 살려라, 허둥지둥 달음박질쳐서 그곳을 간신히 벗어났다. 한참을 정신없이 오다가 어느 노승을 만나 관에 대해서 물었더니 노승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 관에는 전에 현감을 지낸 분의 따님의 시신이 들어 있다오. 현감은 벼슬을 물러나 지내던 중에 갑자기 돌림병으로 죽었소. 그런데 어떤 무당이 처녀로 죽은 귀신을 접하면 신령이 내린다고 고곳에 물래 옮겨두었다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날씨가 후리거나, 가까운 이웃 동네에 혼사가 있는 날이면 갑자기 귀신 소동이 일어나곤 했소. 급살 맞아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축들이 원인 모르게 픽픽 쓰러졌소.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 모두 떠나버리고 그냥 폐가에 관이 버려져 있었던 것이오.
박천: 그렇다면 스님, 무슨 방편을 써야지, 그냥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스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실은 그 귀신에게 훌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리치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노승; 허허, 그거 참 딱하구먼, 나는 도저히 그럴 만한 능력이 없소. 혹시 구월산 구룡폭포 맞은편 동굴에서 수도하시는 지우도사를 찾아가면 혹 방법을 알고 계실 것이오.
박천: 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 길로 박천은 며칠을 헤맨 끝에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박천의 말이 끝나자 지우도사가 말했다.
지우도사: 알았노라, 내가 그 손각시를 퇴치시킬 것이니........황공, 어서 부적을 그리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꺼내 놓도록 하게. 황희가 곧 찾아서 도구들을 내놓자 지우도사는 젊은이의 웃옷을 벗게하고 등에다가 부적을 그려 붙였다. 부적은 아교를 칠한 것이기에 잘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젊은이가 아주 고통스러운 듯이 진땀을 흘리다가 모로 넘어졌다. 흡사 간질병 환자처럼 거품을 입에서 내뿜으며 발작을 일으켰다. 마침내 음산한 기운이 젊은이에게서 제거되자 코를 골면서 깊은 잠이 들었다.
지우도사: 예끼, 고약한 요물들, 내 당장 신명계에 고하여 너희들을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하리라! 지우도사가 허공을 향하여 호통치듯 꾸짓자, 허공에서 모기처럼 가냘픈 소리가 들렸다.
“이팔청춘에 환락을 맛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 한스러워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인심을 소란케 하였습니다. 가엾게 여기시어 용서하소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터이니, 제발 부적을 치워주신다면......”
지우도사: 다시 나타나면 그때는 내가 용서치 않으리라!
옥화 낭자의 혼: 소녀는 물러가겠으나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지우도사: 무엇인지 말하라.
옥화 낭자의 혼: 비록 유명은 다르지만 부부의 인연을 맺은 사람의 손으로 제관을 화장시켜 주시면 원이 없겠습니다.
지우도사: 알았노라, 어서 물러가렸다.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난 젊은이는 어두운 기운이 말끔히 걷히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지우도사는 말을 이어갔다. 젊은이, 그대는 곧 마을로 내려가서 내일 사람들을 동원하여 폐사에 있는 관을 화장시키도록 하라. 그때 이 부적도 함께 태우면 다시는 요물이 범접치 못하리라.
박천: 지우도사님, 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화장을 시킨 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지우도사: 아닐세, 여길 찾아와도 나를 만나지 못할 것이니, 오지 마시게. 부디 학업에 힘쓰게. 내년에는 과거에도 오르고, 재취도 하게 될 것이니,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시게.
젊은이가 인사를 하고 돌아간 후 지우도사는 황희에게 말하였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황공도 여자로 인한 횡액이 가시지 않았네. 앞으로 유혹이 많을 것이니 각별히 음덕을 많이 쌓아야 하네.”
황희: 알겠사옵니다. 하온대 선생님, 귀신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우도사: 그것은 주역을 배우면 저절로 깨우치게 되지. 주역에는 모든 우주만물의 오묘한 생성원리가 담겨져 있네. 앞으로 수없이 주역을 읽고 연구하여 통달한다면 세상 만사, 귀신의 세계까지 명경지수처럼 훤히 알 수가 있지. 그래서 더더욱 공에게 주역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네.
다음에 (10)에서 지우도사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