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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으로부터 울릉도를 지켰지만 나라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형 당할 뻔 했던 안용복의 목숨을 구해준 남구만
안용복이 귀국해 조정에 그간의 사정을 알리자 나라에서는 상을 내리기는커녕 어이없게도 다른 나라 국경에 침범해 분쟁을 야기시켰다는 죄목을 씌워 참형에 처하려고 했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의 작자 남구만(1629~1711)이 극구 만류해 겨우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안용복을 사형시키지 않았지만 죄를 물어 귀양 보냈다.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이익은 그의 대표작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안용복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했다. 안용복은 미천하지만 만번 죽을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해 강한 적과 대항했다"며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의 기상을 꺾어버리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애통한 일이다"라고 탄식했다.
성호는 이익의 호이다. 사설은 '소소한 이야기'를 뜻한다. 책은 애초 저술을 목표로 쓴게 아니라 성호 이익이 40대 전후부터 40여 년간 독서를 하거나 보고 듣거나 사색을 통해 터득한 것을 적은 비망록을 말년에 묶어 펴낸 것이다.
책은 총 30권 30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천문, 지리 △복식, 음식, 가축, 화폐 등 인간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온갖 사물 △정치, 경제, 사회, 인물, 사건 △경전과 역사 △시와 문 등 광범위한 분야의 주제를 섭렵한다.
수미일관 경세치용적 실학사상과 백성을 위한 위민사상이 깔려 있고 역사 해석에 있어 중화주의에서 탈피해 독자적 관점을 확립하며 다양성과 객관성에 입각한 학문정신을 추구하고 있다.
이익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였다. 노비제도를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이익은 "노비제도는 고려 태조가 전쟁포로를 소유하도록 한 이래 대대로 노비로 삼는 규정이 생겼다"며 "한번 천한 종이 되고 나면 천만 년이 가도 그 신세를 면치 못하며 학대와 고통은 천하 고금을 통하여 아직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천민 시인 백대붕(白大鵬) 생애를 안타깝게 여겼다. 백대붕은 전함사(戰艦司·조선시대 전함을 수리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노비였다. 백대붕은 자신의 시에서 "백발로 풍진을 무릅쓰는 종의 신세"라고 한탄했다. 백대붕은 벼슬이 종2품 가의대부에 오른 유희경(1545~1636)과 절친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가 한 질이나 됐으며 당시 공경대부도 백대붕의 문장에 감탄해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일본통인 백대붕은 임진왜란 때 이일(1538~1601)의 휘하에 불려들어갔다가 패전과 함께 전사했다.
이익은 "천인은 아무리 기이한 재주가 있더라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 채 한평생 천인으로 살아야한다"며 "나는 그를 매우 가엾게 여긴다"고 아쉬워했다.
▲ 김홍도 작 논갈이.
이익은 사대부들도 농업에 종사해야하며 농민들을 천거해 벼슬을 줘야한다고 주장했다
시가와 문장을 위주로 치러지는 과거는 학문을 황폐화시킨다는 논지도 폈다. 그러면서 과거와 천거를 병용하자고 제안한다. 특히 농사를 짓는 백성 중에서 재능과 덕망이 있는 자를 뽑아 벼슬을 주어야 하며 해마다 그 비율을 일정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벌열(閥閱·명문가)의 권세를 깨뜨리고 더나아가 벼슬아치로 하여금 백성이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농부 중 가려 쓸 만한 인재가 드물겠지만 일단 농사에 힘쓰는 자를 등용하는 길이 열리면 어질고 재능 있는 군자들이 기꺼이 농사에 종사할 것이라고 이익은 강조한다.
나라에서 봄에 곡식을 빌려줬다가 가을에 다시 받는 환곡의 폐단이 심각했지만 성호사설이 적고 있는 그 실태는 충격적이다. 저자는 "우리 마을에서 망한 집의 8~9할은 관청에서 빌려먹은 환곡과 사채 때문에 그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이자로 10분의 1을 받지만 썩은 곡식이 섞여 있으며 이동 과정에서 흘리는 부분에다 오가는 길에 먹는 양식, 인부들의 품값까지 부담시킨다. 이 때문에 빌려주는 기간은 7~8개월이 채 못 되는데도 반드시 갑절은 갚아야 한다.
만일 본인에게 세금을 거두다 모자라면 먼 일가나 인척들까지 찾아가 집을 샅샅이 뒤져서 모조리 받아낸다. 이를 위해 고을 수령은 원근을 가리지 않고 각 마을로 군졸을 자주 보낸다.
농지의 소유를 제한하자는 혁명적인 제안도 한다. 토지가 많으면 권력이 강해지고 권력이 강하면 법을 무너뜨리기 마련이다.
이익은 "국가에서 베풀어주는 혜택은 중국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3대보다 많지만 힘을 가진 사람들의 탐학한 짓은 망한 진나라 때보다 더 심하니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은 까닭이다"라고 했다.
책은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풍습도 전한다. 과거에는 근친살해가 인륜을 거스르는 가장 큰 죄였다. 특히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일이 일어나면 고을을 강등하기도 했다. 충청도는 큰 사건이 발생해 공홍도(公洪道·공주, 홍성이 합쳐진 말), 청홍도(淸洪道·청주, 홍성이 합쳐진 말)로 명칭을 바꿔 부르기도 했다.
이익은 "그러다 몇 년 뒤 다시 본래의 명칭으로 돌아가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며 "사람을 죄줄 일이지, 땅을 죄줄 일이 아니다"고 했다.

▲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이덕형의 인품에 감명받아 왕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말해 이덕형을 긴장하게 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자리를 얘기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임진왜란 때 대규모 원병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자신을 맞으러 온 한음 이덕형의 인품에 감동해 "용모가 왕의 상"이라고 치켜세웠다. 이덕형은 이여송이 농담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속내는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백사 이항복이 선조와의 경연 자리에서 이 일을 끄집어냈다. 이항복은 "근세에 웃기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덕형"이라며 그가 왕의 물망에 오른 자초지종을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면서 "성상(왕)의 크고 깊은 덕이 아니면 (이덕형) 제 놈이 어찌 감히 천지간에 용납되오리까"라고 했다.
선조는 선뜻 "내 어찌 가슴속에 담아 두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이덕형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술을 가져오게 명해 이항복, 이덕형과 함께 실컷 즐겼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는 선조의 뜻밖의 면모를 보여주는 숨은 일화이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을 왔을 때 부녀자 한 명이 누각에서 발을 걷고 얼굴을 내밀어 사신 일행을 구경했다. 사신은 여인을 얼굴을 본 뒤 "조선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그렇구나"라고 했다. 이 일은 사대부들 사이에서 비웃음거리가 됐다.
이익은 "여자가 담장 위에 얼굴을 내밀 때(墻上), 말을 타고 있을 때(馬上), 누각 위에 있을 때(樓上), 여행 중에 있을 때(旅中), 술에 취했을 때(醉中), 밝은 태양 아래 있을 때(日中), 달빛 아래 있을 때(月下), 촛불 아래 있을 때(燭下), 발 아래 있을 때(簾下) 아름답게 보인다는 옛말이 있다"고 했다. 여자가 누각 위에 있으면서 동시에 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사신에게 더욱 예뻐 보였다는 것이다.
이익은 중국책을 인용해 먹을 수 있는 곤충을 나열하기도 했다. 참새, 종달새와 함께 매미와 벌을 임금에게 진상하며 개미알과 메뚜기 새끼 등은 잔칫상에 올린다고 썼다.
이 중 개미집 속의 흰좁쌀처럼 생긴 개미알은 매우 작아서 모으기가 어렵다고 했다. 저자는 "메뚜기는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벼싹을 파먹는데 우리나라 메뚜기는 벼의 싹과 잎을 파먹기는 해도 재앙은 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이익(1681~1763)=호는 성호이며 본관은 여주이다. 그의 집안은 남인계 명문가였지만 숙종 6년(1680) 서인이 집권한 경신대출척으로 가세가 기울었다. 유년기 그는 고향인 경기도 안산에서 주로 살았으며, 과거에 나가지 않고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로 일생을 보냈다. 평생 독서인을 자처했던 그는 경전 재해석과 사회제도 개혁을 위한 실학에서부터 예설, 시문, 악부, 언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69권, 95책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1793년 영조의 배려로 정3품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됐지만 그해 12월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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