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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복 단편소설] 참외 / iclickart
참 외
이광복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공동 운명체였다. 형제분은 본래 시루봉 너머 연화 마을에서 출생했다. 팔자가 순탄했으면 그곳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실 분들이었다. 하지만 두 분은 성년이 될까 말까 한 푸른 시절에 모진 풍파를 겪었다. 집안 어른들과 형제들이 잇따라 죽어나가는 줄초상 속에 전답은 물론이고 가옥을 포함하여 재산이라는 재산은 모조리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갔다.
비참했다. 대대로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던 양반의 후예들이 어느 날 갑자기 쪽박을 차게 되었으니 실로 땅을 치며 통곡할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 가문이 융창하기는 어려워도 곤두박질치는 것은 하루아침이었다. 양반이고 뭐고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큰)아버지와 아버지만 천우신조로 간신히 살아남았고, 형제분은 피눈물을 삼키며 부랴부랴 누대의 세거지 연화를 떠나 들판 건너 시루메 마을로 피접했다. 시루메의 한자 명칭은 원증산이었다. 두 분이 아주 머나먼 타관으로 떠나지 않고 지척에 주저앉은 것은 선대 조상님들의 산소가 우리 일족의 근거지라 할 연화를 중심으로 근동의 여러 산록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었다.
(큰)아버지는 소싯적부터 양반의 후예라는 확고한 자긍심과 투철한 숭조(崇祖)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예부터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았다. 설령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겻불을 쬐지 않는 법이었다. 집안이 송두리째 폭삭 망했을지언정 당신은 언제 어디서든 결코 비굴하거나 얍삽하게 처신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 또한 어느 누구 앞에서든 저자세로 굽실거리지 않았다. 물론 책잡힐 일도 하시지 않았다.
항상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을 생명처럼 지켰던 (큰)아버지. 당신은 제례와 성묘와 벌초와 일가 돈목(敦睦)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허둥지둥 연화를 떠날 때 당신 형제분의 생각은 단순했다. 일단 인근에 자리 잡고 조상님 산소 잘 지키면서 일가들과 돈독히 지내는 가운데 아들딸 낳아 가문의 명맥을 이으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큰)아버지에게는 인력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업장이 있었다. 혈맥을 계승을 후사가 없어 큰일이었다. (큰)아버지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로 맞이한 (큰)어머니께서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다. 이 무슨 운명의 저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종가의 종통이 끊길 판이었다. (큰)아버지는 그걸 가장 한탄하면서 하늘을 원망했다. 아무리 박복하기로소니 종통을 잇지 못한다는 현실이 천형처럼 느껴졌다.
(큰)아버지는 일신의 영달보다 가문의 번성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그렇건만 종가가 무후할 마당인지라 이건 뭐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사안이 아니었다. 만일 재산이라도 넉넉하면 소실을 두어 서출이든 뭐든 후사를 취할 수 있겠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당신은 앉으나 서나 절손의 자책감과 조상님들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남들은 입에 발린 말로 무자식 상팔자니 뭐니 개떡 같은 개소리를 늘어놓았지만, (큰)아버지는 하루라도 빨리 꿈같은 기적이 일어나 절체절명의 숙원인 계대(繼代) 문제가 시원하게 해소되기를 간구했다.
그럴 즈음 아버지께서 파격적인 용단을 내렸다. 당신 형님의 고적함을 달래 위안을 드리려고 둘째 딸, 즉 내 작은누님을 낳아 젖 떨어지자마자 윗집에 양녀로 보냈다. 큰 누님은 1939년생, 작은 누님은 1942년생이었다. 아버지의 결정에 이웃 주민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어린 딸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두 집이 한동네에 있는지라 친가 부모님께서 둘째 딸이 자라는 모습을 몸소 눈으로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큰)아버지 내외분에게는 근심 걱정 떠날 날이 없었다. 우선 먹고살 것이 없어 근심이었고, 앞으로의 그 무슨 대책조차 보이지 않아 걱정이 태산이었다. 윗집은 근동에서 가장 가난했다. 오죽하면 저 넓고 많은 땅 중에 (큰)아버지 땅이라곤 한 뼘이 없었다. 촌간에서의 땅은 곧 농토라고 말할 수 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농토는 농민의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윗집의 경우 땅이 없으니 농토가 없고, 농토가 없으니 필연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폐일언하고 윗집은 극빈 중의 극빈이었다.
(큰)아버지의 유일한 주특기는 사방 공사 감독이었다. 하지만 사방 공사란 연중무휴가 아닌, 봄과 가을에만 한시적으로 시행되는 사업이었다. 감독은 봄에 얼마 벌어 여름까지 먹고, 가을에 얼마 벌어 겨울까지 먹고살아야 하는 별 볼 일 없는 비정규직이었다. (큰)아버지는 구호 대상자, 최하층 빈민이었다.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기야 당초 (큰)아버지 형제분이 급거 연화를 떠나 시루메에 첫발을 디뎠을 때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적수공권이었다. 두 분에게는 집도 절도 없었다. 남의 집 곁방에 몸을 들이밀고 겨우겨우 곤고한 삶을 지탱했다. 잘 나가던 양반 가문의 후예들이 이런 고초를 겪게 될 줄이야 가위 어느 누구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밀히 살펴보면 (큰)아버지께서 곤궁을 면치 못하는 데는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다. 모두가 다 알다시피 당신은 농사꾼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반농반학(半農半學)의 어중간한 한량이었다. 사무직으로 종사하기에는 붓대 길이가 짧았고, 머슴을 살거나 막노동을 하기에는 일이 서툴러 기용해 주는 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소위 ‘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견문이 넓었지만 정작 발등의 불은 끄지 못했고, 두주를 불사했지만 생일이나 돈벌이에는 소질이 없었다. 어쩌면 가문이 추락하기 직전까지 호의호식하며 호사를 누렸던 응보로 그 졸경을 치르는지도 몰랐다. 천지사방을 둘러보아도 형편이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반면 아버지는 붓대와 전혀 관련이 없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밖에 모르는 일꾼 중의 만능 일꾼이었다. 당신은 근면과 성실을 무기로 가난과 정면 대결을 벌였다. 힘든 작업을 하면서 막걸리를 드실 때는 딱 한 잔으로 만족했고, 담배는 봉초로 포장되어 나오는 ‘풍년초’를 신문지에 돌돌 말아 피웠다. 간혹 궐련이 생기면 한 개비를 통째로 피우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걸 아끼느라 절반으로 나누어 꺾은 다음 한 번에 반 토막씩 물부리에 끼워 피웠다. 다른 사람의 한 개비는 아버지에게 두 개비가 되는 셈이었다.
(큰)아버지께서 줄곧 빈곤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아버지는 시루메 마을 한복판에 자그만 살림집을 마련했다. 석성면 증산리 766번지였다. 비록 토담집이었지만, 빈손으로 떠나와 드디어 내 집을 장만했다는 것은 그만큼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집 뒤에는 능구렁이 같은 정 서방네가 살고 있었다. 악질로 소문난 정 서방은 경계선에 나뭇가지로 섶 울타리를 쳐놓고 있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아버지 어머니는 토담집에서 내 작은 누님 밑으로 출생한 젖먹이 3남매를 내리 잃었다. 자녀들이 태어나자마자 잇따라 아침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면사무소에 가서 출생 신고를 했지만, 그러고 나서 얼마 안 가 이번에는 사망 신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괴한 일이었다. 출생 신고와 사망 신고가 되풀이되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갓난아기들을 가슴에 묻었다.
그 무렵 (큰)아버지는 시루봉 들머리 감나무 곁에 오죽잖은 오두막집을 지었다. 시루메 갑부 윤구병 씨네 땅이었다. 지주 윤씨가 특별히 편의를 봐줘 그곳에 집을 지은 것이었다. 번지도 울타리도 없었지만, 그러나 마당에는 우람한 감나무가 수호신처럼 서 있었다. 그 집에서 (큰)아버지 내외분과 작은 누님이 살았고, 3남매를 잃은 토담집에서는 부모님과 큰 누님이 살고 있었다.
윤구병 씨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앞 재 너머 함석집에 살고 있었다. 모든 가옥이 초가집 일색이었던 그때 그 시절 오로지 윤씨네 저택만 비까번쩍하는 함석집이었다. 우리 동네 주민들의 경우 그 집 땅을 밟지 않고서는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윤씨는 시루메 일대에 방대한 농토와 임야를 소유하고 있었다. 전답 중에는 과수원까지 있었다.
그런 만큼 그 집에는 사시사철 일거리가 많았다. (큰)아버지는 텃도지로 연간 품 네 개를 물고 있었다. 명목상의 텃도지라고나 할까 아주 저렴한 헐값이었다. 만약 윤씨네 땅이 아닌 다른 집 땅에 집을 지었더라면 그보다 더 비싼 텃도지를 물어야 할 것이었다. (큰)아버지 내외분은 텃도지 몫의 날품 이외에도 시루봉 관리 등 그 부잣집 대소사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다.
다른 집은 몰라도 그 집에서 논일이든 밭일이든 대대적인 농사일이 벌어질 때는 많은 일꾼이 필요했다. 거짓말 좀 보태자면 동네 남녀노소가 총동원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럴 때 (큰)아버지는 주로 일꾼들을 뒤에서 돕는 허드렛일을 했고, (큰)어머니는 대규모 인원의 먹새를 장만하느라 그 집 부엌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때로는 아직 소녀였던 작은 누님까지 그 집 일을 도와드렸다.
윤씨는 (큰)아버지 내외분에게 텃도지 이외의 품삯을 꼬박꼬박 계산해 주었다. 물론 작은 누님의 품삯도 챙겨 주었다. 작은 누님의 품은 온품이 아닌 반품이었고, 품삯 또한 어른들 품삯의 절반이었다. (큰)아버지 내외분과 작은 누님이 받아온 품삯은 생계에 큰 보탬이 되었다. 윤씨가 우리 집에 물심양면으로 큰 시혜를 베풀어준 셈이었다. 얄팍한 이해타산보다는 푸근한 인정이 더 존숭되던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 가공할 참극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총성과 포성이 지축을 흔드는 가운데 쌕쌕이가 하늘을 찢으며 날아다녔다. 그 이듬해 내가 태어났다. 음력으로는 4월 그믐날, 양력으로는 6월 4일이었다. 그때 아버지 연세는 이미 불혹을 넘어서고 있었다. 평균 수명이 단명했던 시대인 점을 감안한다면 나는 장남이면서도 일응 늦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당분간 내 출생 신고를 유보했다. 이 젖먹이도 필경 얼마 못 가 죽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한밤중에도 종종 경기를 일으켜 까무러치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살려내기 위해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사방팔방으로 득달같이 뛰었다. 아버지는 심사숙고 끝에 우리 가족을 이끌고 죽음의 그림자가 얼씬거리는 토담집을 벗어나 저 위쪽 이영우 씨네 집 행랑채로 이사했다. 갓 태어난 나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 후 가세가 시나브로 나아지고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강경에서 자전거포를 열어 크게 성공한 외삼촌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마르디로 건너가는 ‘질안배미’ 논 엿 마지기를 사주었다. 빈집에 소 들어온 형국이었다. 논이 기름진 데다 아버지가 워낙 농사를 잘 지어 해마다 평년작 이상의 소출을 올렸다.
아버지는 그 여세를 몰아 당산 너머 새뱅이에 있는 봉천지기 다랑논 두 마지기를 더 손에 넣었다. 비록 남의 땅 소작이긴 하지만, 신작로 잿무덤부리로 나아가는 길목과 시루봉 너머 자그마한 뙈기밭도 경작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 당신은 근검절약으로 한 동네에 있는 증산리 764번지 번듯한 삼간집을 사서 입주했다. 그러고는 종래의 토담집을 헐어낸 뒤 그 자리를 남새밭으로 조성했다.
결국 아버지의 방책은 적중했다. 나는 죽지 않고 새록새록 자라났고, 아버지는 마침내 면사무소에 찾아가 출생 신고를 마쳤다. 1953년 3월 20일이었다. 그 결과 내 호적에는 얼토당토않은 생년월일이 등재되었다. 나이는 두 살 줄었고, 생일 또한 엉뚱한 날로 기록되어 두고두고 애로를 겪어야 했다.
어쨌든 그 어간에 아버지는 또다시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생일대의 중대 결단을 내렸다. 내가 젖을 떼자마자 당신의 형님께 후사로 보낸 것이었다. 작은 누님에 이어 나까지 떠나보낸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밥술이나 먹는 좀 더 부유한 집으로 보냈어도 심히 불안하고 우려되는 일이건만 끼닛거리조차 없는 최하 밑바닥 극빈 환경으로 보냈으니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더구나 내리 3남매를 잃고 뒤늦게 얻은 귀하디귀한 장남을 큰집에 ‘빼앗긴’ 부모님으로서는 애간장이 녹아났을 것이었다.
특히 그 시점에서는 내 뒤로 자녀를 더 출산하게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마당에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오직 종가의 종통 계승을 위해 나를 주고받은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우리 가문 한 지파의 7대 종손이 되었다. 작은 누님과 나 사이의 나이 차이가 무려 아홉 살이나 벌어진 것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중간에 영아 3남매가 일찍 하늘나라로 떠난 탓이었다.
다행히 친가에 경사가 이어졌다. 1954년 남동생 차복, 1957년 여동생 옥희, 1959년 남동생 선복, 1961년 남동생 계복… 이렇게 세 살 내지 두 살 터울로 4남매가 더 태어나 아버지 어머니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골수에 사무치는 통한을 안겨드린 내 원죄까지 사면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나는 그런 내막조차 모르는 채 (큰)아버지 슬하에서 너덧 살 때부터 한글과 천자문을 배웠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섣달 대목이었다. 설을 앞두고 (큰)아버지 내외분은 차례상에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주과포혜(酒果脯醯)조차 마련할 길 없어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명절 때와 선조님 제사 때 가장 곤경에 처했다.
결국 아버지께서 자진하여 논산 장에 가서 제수를 장만해 오셨다. 당신께서는 큰집, 즉 형님 일을 당신 일이라 생각하며 설은 물론 추석 때, 그리고 선조님 기제사 때에도 거의 예외 없이 몸소 제물을 부담했다. (큰)아버지는 당신 아우로부터 노상 신세를 지면서 뭔가 보답할 길이 없어 참담한 세월을 보냈다.
설날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부터 하고 나서 벼루에 먹을 갈아 세필로 지방과 축문을 썼다. 신위의 위격은 당연히 제주이신 (큰)아버지 기준이었다. 예컨대 고조는 나의 고조가 아닌 (큰)아버지 형제분의 고조였다. 훗날 선대 어른들이 돌아가신 뒤에는 위격이 내 중심으로 바뀌었다.
‘顯高祖考學生府君神位 顯高祖妣孺人善山金氏神位’ ‘顯曾祖考學生府君神位 顯曾祖妣孺人全州李氏神位’ ‘顯祖考學生府君神位 顯祖妣孺人安東金氏神位’ ‘顯考學生府君神位 顯妣孺人全州柳氏神位’… 갸름하게 재단한 한지에 2행 종서로 쓰되, 좌우의 글자 수가 다른지라 자간으로 대위를 잘 조절했다. 상단의 ‘顯’ 자는 좌우 머리를 맞추고, ‘府君’의 ‘君’과 유인의 ‘氏’ 자를 딱 맞춘 뒤 약간 떼어 ‘神位’가 상호 대칭을 이루도록 나란히 썼다. 엎드려 지방을 쓰고 있는 내게 (큰)아버지가 말했다.
“윤복아, 너는 증말 재주가 비상하구나. 그만하믄 명필이여. 어린 니가 늙은 나보다 희낀 낫다.”
‘증말’은 ‘정말’을, ‘그만하믄’은 ‘그만하면’을, ‘어린 니’는 ‘어린 네(너)’를, ‘희낀’은 ‘훨씬’을 일컫는 우리 고장 ‘표준말’이었다. 극찬이었다. 친가 아버지께서도 또박또박 써놓은 내 글씨를 보며 탄복을 아끼지 않으셨다.
“으른들 뺨치는구나.”
‘으른들’이란 ‘어른들’의 우리 고장 발음이었다. 이렇듯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내가 쓰는 지방과 축문을 보시고 매우 흡족해하셨다. 나 또한 설날 아침부터 어른들의 칭찬을 받아 여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워낙 빈한한 살림인지라 차례상은 초라했지만, 어른들을 비롯한 우리 식구들의 정성만큼은 어느 부잣집 누구와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해 정월에도 우리 집으로 마실 오는 동네 어른들에게 흥미진진한 얘기책을 읽어드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농한기에도 낮이나 밤이나 한시반시 쉬는 적이 없었다. 지게로 두엄을 짊어져 논에 부렸고, 똥지게로 걸쭉한 분뇨를 지어 날라 보리밭에 뿌리기도 했다. 당신께서는 이런 일 저런 일 가리지 않고 무슨 일에든 등골이 빠지도록 온몸을 던졌다.
언젠가도 밝혔지만, 어린 시절 나는 (큰)아버지를 따라가서 석성면 현내리 옥녀봉 사방 공사 현장을 견학한 적이 있었다. 시루봉 기슭 우리 집에서 꽤 먼 옥녀봉에는 백제 시대의 산성이 있었다. 석성면의 ‘석성’, 즉 돌[石]로 쌓은 성(城)이라는 지명도 이 산성에서 유래했다. 현내리의 ‘현내’는 현(縣)의 안[內]이라는 뜻으로 과거 왕조 시대 석성현 관아가 있었기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옥녀봉 아래 탑동이 있었다. 탑동이란 옛 절터 석탑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었다.
유사 이래 석성은 백제 수도 사비(泗沘)의 관문이자 요충이었다.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신라와 대적할 때 이곳 석성산성에서는 백제 상비군 주력이 당나라와 맞서 사생결단을 벌였다. 결과는 중과부적이었고, 황산벌 패전 비보가 날아든 이후 백제의 용사들은 장렬히 산화했다.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백제 의자왕 20년, 신라 태종무열왕 7년, 단기 2993년, 서기 660년 음력 7월 상순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염천에 갑옷 입고 투구 쓰고 혼신의 힘으로 창검을 휘두르며 적을 무찌르던 용감무쌍한 백제의 장병들. 옥녀봉은 바로 백제의 피어린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필사의 격전지였다. 산기슭에는 아직도 허물어진 성벽이 그대로 남아 그날의 끝장 혈투를 뚜렷하게 증언해 주고 있었다. 옥녀봉 정상에 오르면 그 너머로 백마강의 전모가 시야에 들어왔다.
날씨가 몹시 써늘했던 그 날, 아버지는 사방 공사에 나온 여러 인부 중에서 유일하게 석축을 전담하고 있었다. 산사태와 토사를 막기 위한 작업이었다. 아버지는 무거운 돌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해머로 깨고 망치로 다듬고 정으로 쪼아 각을 세운 뒤 허술한 산고랑에 성벽 같은 축대를 쌓았다. 골짜기에는 메마른 가랑잎이 후르륵후르륵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 다루기를 마치 무 조각이나 나무토막 다루듯 하였다. 깰 데는 깨고, 각을 세울 데는 세우고, 다듬을 데는 다듬고… 어쩌면 그렇게 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지 저절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당신은 단순한 일용직 날품팔이 석공이 아니라, 흔해빠진 석재를 격조 높은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현장에서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또 다른 면모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의 별명은 ‘참봉’이었다. 당신보다 연세가 많으신 손위 노인들이나 동년배 친구들이 아버지를 지칭할 때에는 본명보다 별칭을 더 선호했다. 아버지보다 서너 살 연하의 손아랫사람들은 ‘참봉 어른’이라 불렀다. 새까만 아이들은 까마득한 어른의 존함이나 별명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었다.
물어보나 마나 아버지는 종9품 참봉 관직과 하등 관련이 없었다. 그 벼슬 근처에 가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별호의 밑변에는 내밀한 은유와 당신의 위상이 그대로 투영돼 있었다. 당신의 처지로 말하자면 비록 이름 없는 민초에 불과할지라도 태생적으로 양반 가문의 후예인 데다 인품과 능력으로 볼 때 최소한 참봉 정도의 예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별칭을 쓰다 달다 아무런 말씀 없이 염화시중의 미소로 받아들였다.
조금만 학력을 쌓았더라면 능히 고관대작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았을 아버지. 당신은 능히 그럴 만한 도량과 덕망을 갖추었고, 무슨 일이든 손을 댔다 하면 큰일에서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한 치의 오차가 없었다. 아버지의 사전에는 ‘실수’나 ‘빈틈’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오직 ‘완벽’이 있을 뿐이었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한여름 풀을 베어다 두엄더미를 쌓더라도 항상 가장자리를 수직으로 반듯하게 정리했다. 심지어 나뭇짐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게 위 나뭇짐에 바늘 들어갈 만큼도 엉성한 구석이 없었다. 마당에 노적가리를 쌓거나 논두렁에 줄가리를 치면 다른 집 볏가리보다 월등히 정연하면서도 짜임새가 탄탄했다.
아버지가 숫돌에 칼이나 낫을 갈면 대장간에서 벼린 것처럼 서슬이 시퍼레졌다. 담장 밑에 무시래기를 엮어 매달 때도 당신 특유의 성품이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 초가지붕 맨 꼭대기에 덮는 용구새를 엮을 때는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문화재급 명품을 만들어 냈다.
해가 바뀌어 또다시 새봄이 오고 있었다. 대동강 물 풀린다는 우수 경칩이 지나자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녹느라 길바닥이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3월 삼짇날에는 날쌘 제비들이 나타나 이리저리 휙휙 날아다녔다. 산천초목에 물이 올라 푸른빛이 감돌았고, 시루봉에서는 노고지리가 높이 떠서 재재골재재골 우짖었다.
보릿고개였다. 절량농가가 속출했다. 윗집은 겨우내 배를 곯으며 여기까지 왔지만, 웬만큼 농토를 가진 중농이라 해도 양식이 떨어져 쩔쩔맸다. 쌀은 추곡(秋穀), 보리는 하곡(夏穀)이라 했다. 지난해 추수한 쌀이 바닥났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었다. 우리 식구들은 시래기와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주린 배를 채웠다.
한편, 날씨가 풀린 이후 아버지는 본격적인 농사 준비를 서둘렀다. 항아리에 씨나락을 담갔고, ‘질안배미’ 모서리 물꼬 가까운 위치에 못자리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논두렁에 흙을 붙이고 가랑까지 내어 잘 방비한 뒤 논에 물을 철렁하게 가두어 모내기에 대비했다. 마파람이 불어오면 논물에 물고기 비늘 같은 윤슬이 생겨나 반짝반짝 찰랑찰랑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논두렁에는 쇠뜨기와 둑새풀을 비롯한 여러 잡풀이 퍼렇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큰)아버지 내외분이 윤구병 씨네 과수원으로 일을 나가게 되었다. 그 집은 매년 다른 농가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농사일을 서둘렀다. 워낙 부농인지라 그렇지 않고서는 영농 일정을 제대로 맞추기 어려웠다. 여느 중농이나 영세농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날 아침 (큰)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윤복아. 이따가 함석집으로 오거라.”
“왜유?”
“내가 거기서 일하니께 즘심을 같이 먹자.”
‘즘심’은 점심이었다. 그 시대에는 어른들이 일하러 가면 아이들까지 덩달아 따라가서 그 집밥을 먹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식량이 부족해서 밥 굶는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던 시절인지라 그건 흉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게 몹시 마땅찮게 느껴졌다. 내가 말했다.
“엄니, 거기보다는 아랫집에 가믄 안 돼유?”
“아랫집? 그럼 그렇게 하든지…”
(큰)어머니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점심때 함석집이 아닌 아랫집으로 갔다. 집에서 이것저것 잔일을 하고 계시던 아버지 어머니가 반색하며 반겨주었다. 동생 차복은 마당에서 통탕통탕 뛰어놀았고, 큰 누님 등에 업힌 옥희가 생글생글 웃었다. 점심때 우리 식구들은 어머니가 차려주는 구수한 시래기죽을 맛있게 먹었다.
아랫집에는 언제부턴가 윗방 앞 서까래에서 돼지우리 뒤쪽 가죽나무까지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꽤 긴 빨랫줄이 있었다. 아버지가 질긴 삼으로 쇠밧줄보다 더 튼튼하게 꼬아 매어놓은 빨랫줄이었다. 바지랑대에는 굴비 두름이 디룽디룽 매달려 있었다. 모내기 때 일꾼들에게 내놓을 반찬거리였다. 가죽나무 꼭대기에 개발자국 만한 새순이 몽글몽글 돋아 오르고 있었다. 돼지우리 앞에는 과거 새우젓 독으로 쓰다가 이가 빠지고 금이 가서 용도를 변경한 구정물통이 있었다.
산야가 전부 푸르렀다.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이었다. 아버지는 시루봉 너머 보리밭에서 어머니와 함께 누렇게 익은 보리를 베었다. 두 분은 금슬이 좋았다. 평생 목소리를 높이거나 얼굴 한 번 붉힌 적이 없었다. 내외분은 세상에 둘도 없는 일심동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낫질하며 지나간 자리에는 보리 그루터기 밭고랑이 드러나고 있었다. 두 분은 보릿대를 낫자루로 휘어감아 즉석에서 매끼를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만든 매끼로 간동하게 묶어낸 보릿단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저쪽 신작로에는 가끔 부여와 논산을 오가는 버스나 트럭들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손에 잡힐 듯 나타났다가 가뭇없이 사라지곤 했다.
구례들 건너로 연화 매봉재가 보였다. 매봉재는 야트막한 일자문성 능선이지만, 그래도 연화에서는 표고가 가장 높은 그 동네 주산이었다. 말하자면 시루메의 시루봉에 비견되는 산이었다. 매봉재는 지형이 매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곳 산자락 밭뙈기에서도 누군가가 보리를 베고 있었다.
매봉재 자락에 사챙이가 있었다. 사챙이는 ‘사창(四倉)’의 와음으로 백제 시대에 네 개의 군창(軍倉)이 있던 곳이었다. 그 너머 연화 안동네에 종조모와 당숙 어른들과 춘복 형을 비롯한 재종형제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 조부가 큰집이었고 연화 종조부가 작은집이었다. 생존하신 어른 중 가장 높으신 종조모를 큰당숙께서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 당숙들은 아버지보다 연세가 낮았다.
보리 베기가 끝나자 아버지는 지게를 언덕 아래 낮은 곳에 세워 놓고 언덕 위 높은 곳에 올라서서 보릿단을 어긋매김으로 얹었다. 지게에는 보릿단이 대나무 꼬작 끝까지 까마득하게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꼬작이란 짐을 더 많이 지기 위해 지게뿔 위에 깃대 모양으로 높이 덧세운 두 개의 나무 막대기를 의미했다. 당신은 집까지 여러 차례 왕복하며 보릿단을 져 날랐다.
어머니는 갓난아기 업어 줄 때 허리에 두르는 광목천으로 보릿단을 몇 단씩 합쳐 꽁꽁 묶은 뒤 머리로 이어 날랐다. 나는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새끼줄 멜빵으로 보릿단을 짊어지고는 집까지 몇 차례 왔다 갔다 내달렸다. 까끌까끌한 까끄라기가 살갗에 닿으면 가시처럼 콕콕 찔러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었다. 고된 작업이었다.
사흘 뒤 6월 5일은 절기상으로 망종이었다. 아버지가 동네 회의 때 쌍품 나지 않도록 이웃들과 상호 조율하여 오래전에 잡아 놓은 모내기 날이었다. 쌍품이란 같은 날 두 집 이상 품앗이가 겹치는 경우를 뜻하는 말이었다. 다른 집들도 최대한 쌍품을 피해 각자 모내기 날짜를 잡았다.
아버지는 역시 날짜를 잘 선택했다. 준식이 아버지가 소를 몰아 죽죽 써레질을 해주었고, 아버지는 품앗이 나온 동네 어른들과 더불어 못자리의 모를 쪄서 논 전체로 옮겨 심는 이앙에 착수했다. 우리 집과 준식이네는 평소 가깝게 지냈다. (큰)아버지는 준식이 할아버지와 절친했고, 아버지와 준식이 아버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아버지가 형님, 준식이 아버지가 아우였다. 논에는 올챙이들이 여기저기 숱하게 바글거리고 있었다.
날씨가 아주 좋았다. 엷은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데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긋한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와 땀을 식혀 주었다. (큰)아버지는 준식이 할아버지와 마주 보며 양쪽 논두렁에서 못줄을 잡았다. 두 분은 못줄을 넘길 때마다 “어잇! 어잇!” 목청을 높이며 신호를 주고받았다. 호흡이 척척 잘 맞았다.
아버지를 비롯한 농민들은 못줄 눈꽃에 맞추어 부지런히 어린 모를 심었다. 한 손에 모춤을 한 움큼 꼭 틀어쥐고 다른 한 손으로 한 모심씩 쪽쪽 떼어 질퍽한 무논에 콕콕 찔러 모를 심는 손길이 무척 빨랐다. 한 줄을 다 심으면 일꾼들이 일제히 뒷걸음질을 쳤고, (큰)아버지와 준식이 할아버지가 “어잇! 어잇!” 외치는 가운데 동시적으로 못줄을 불끈 들어 연신연신 한 칸씩 떼어 넘겼다.
나는 모쟁이가 되어 모심는 어른들 뒤에다 열심히 모춤을 날랐다. 거머리가 종아리에 달라붙으면 손톱으로 비틀어 가차 없이 떼어낸 뒤 멀리 집어던졌다. 어떤 어른의 장딴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거머리에 뜯긴 것이었다. 꾸억산이나 사기장골이나 광대골에서 뻐꾸기와 꾀꼬리가 줄기차게 노래 부르고 있었다.
‘질안배미’ 옆 마르디 사람 논에는 어제 갓 꽂은 가녀린 모들이 뿌리를 내리느라 힘겨운 몸살을 앓고 있었다. 저쪽 구례들에서 연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열심히 모내기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못줄 넘기는 목소리가 우렁찼고, 내 또래 아이들이 모쟁이를 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농번기에는 어른이든 아이들이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한낮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신작로를 건너왔다. (큰)어머니 뒤에는 우리 개 메리까지 졸래졸래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와 (큰)어머니는 논두렁이 ‘열 십(十)’ 자로 교차하는 너부죽한 모래 언덕 근처에 밥과 반찬을 펼쳤다. 아버지와 (큰)아버지와 일꾼들 전원이 손발에 묻어난 진흙을 훌훌 씻고 한자리로 모였다. 아버지가 먼저 밥을 한 숟갈 듬뿍 떠서 논으로 뿌리며 외쳤다.
“고수레!”
그런 연후에 전원이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반주로 막걸리까지 곁들였다. 나는 어른들 틈에 끼어 밥을 먹었다. 수라상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흘린 땀의 분량만큼 음식 맛도 꿀맛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맛있는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메리는 운 좋게 밥 한 숟갈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눈망울을 굴리며 줄곧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나는 메리에게 두어 숟갈 밥을 나눠 주었다.
그 이튿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당에 나란히 홀태를 세워 놓고 보리를 훑었다. 엊그제 시루봉 너머 밭에서 베어온 누런 보릿단이 헛간 앞에 높이 쌓여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보릿단을 홀태 옆에 옮겨 놓고 한 움큼씩 쥐어 홀태 갈기에 끼운 다음 죽죽 잡아당길 때마다 목 잘린 보리 이삭이 홀태 밑으로 똑똑 떨어져 내렸다.
우리 고장에서는 이삭을 곧잘 ‘모감댕이’라고 표현했다. 벼 이삭은 벼 모감댕이, 수수 이삭은 수수 모감댕이였다. 모감댕이는 목, 즉 동물이나 식물의 모가지를 일컫는 말이었다. 닭 모가지는 닭 모감댕이였다. 예컨대 닭의 모가지를 비틀 때에는 닭 모감댕이를 비튼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나 돼지처럼 목이 굵고 튼실한 짐승에게는 구태여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일부 몰상식한 부류는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모가지와 모감댕이를 그대로 끌어들여 손목을 손모가지나 손모감댕이로, 팔목을 팔모가지나 팔모감댕이로, 발목을 발모가지나 발모감댕이라 일컬었다. 모가지든 모감댕이든 상대방을 얕잡아 깔아뭉개는, 어떻게 보면 거의 욕설에 가까운 부적절한 비속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심지어 누군가와 다툴 때 무슨 무슨 모감댕이를 확 분질러 놓겠다고 협박하는 작자들까지 있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홀태 옆에 수시로 보릿단을 옮겨다 놓아드렸고, 홀태 밑으로 수북하게 쌓이는 보리 이삭을 갈퀴로 북북 긁어냈다. 그러면서 아버지 어머니가 집어던진 보릿대를 주섬주섬 거둬 한쪽으로 치웠다. 마당 한복판에는 보리 이삭이 점점 불어났고, 아버지 어머니 뒤로는 이삭을 떼어내고 내려놓은 보릿짚이 자꾸 쌓여갔다. 날이 궂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 새때 조금 지나 홀태질이 모두 끝났다. 아버지는 보리 이삭을 마당에 골고루 펴 널었다. 그 이튿날은 날씨가 끄무레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비가 내릴까 봐 서둘러 도리깨질을 했다. 이른바 보리 바심, 다른 말로는 보리타작이었다. 아버지 내외분이 도리깨를 후려칠 때마다 뭉그러지는 보리 이삭에서 보리알이 톡톡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도리깨에 바스러진, 마치 보릿겨 입자 같은 탑세기가 여기저기 묻어나고 있었다. 보리는 쌀 다음으로 중요한 식량이었다.
다행히 타작을 마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알곡을 그러모아 가마니에 담았다. 이제 곧 방아를 찧으면 보리쌀이 나올 것이고, 보릿짚과 검불은 시일을 두고 잘 말려서 땔감으로 쓸 것이었다. 나는 실팍한 보릿대로 여치집을 엮었다. 날씨가 점점 더 우중충해지고 있었다. 여치집이 얼추 다 만들어졌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아이구, 우리 윤복이는 못 하는 것이 없네. 오매, 저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쉬워유.”
“쉬워?”
“야. 아부지 엄니 일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쉬워유.”
“참, 말도 이쁘게 하네.”
어머니의 눈동자에 사랑이 가득했다. 나는 여치집 꼭지를 굵은 비료부대 실로 단단히 묶어 손잡이까지 만들었다. 몸을 비틀며 층층이 올라간 여치집은 멋이 있었다. 나는 그걸 팔목에 걸고 삘닐리리 삘닐리리 보리피리 불면서 남새밭으로 갔다. 여치를 잡아 가두어 놓고 면밀히 관찰할 생각이었다.
내가 밭 귀퉁이로 들어섰을 때 별안간 물뱀 한 마리가 나타나 깜짝 놀랐다. 머리끝이 찌풋했다. 좌우간 뱀이란 놈은 독사가 아니라 해도 물뱀이든 유혈모기든 뭐든 한결같이 징그러웠다. 나는 퉤퉤 침을 뱉었고, 뱀은 정 서방네 섶 울타리 사이로 꿈틀꿈틀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는 뱀이 또 나타날까 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남새밭 한복판으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거기, 상추 아욱 쑥갓 가지 고추 감자 등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작은 밭에다가 이렇듯 알뜰살뜰 여러 작물을 골고루 가꾸고 있었다. 밭에는 잡초 한 포기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여치 여러 마리를 잡아 여치집에 가두어 가지고 밭에서 나왔다.
며칠 후 단비가 내릴 때 아버지는 새뱅이 봉천지기에 호락질로 늦모를 심었다. 땅이 촉촉해지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루봉 너머 보리 벤 밭에 콩을 심었고, 두 번째 비가 내리던 날에는 잿무덤부리로 나아가는 길 위쪽 밭에 고구마 싹을 꽂았다. 두 분은 고구마밭 한쪽에 들깨 모종까지 옮겨 심었다.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니었다. 자고로 상농작토(上農作土) 중농작곡(中農作穀) 하농작초(下農作草)라 했다. 상급 농부는 토양부터 기름지게 만들고, 중급 농부는 작물을 잘 가꾸고, 하급 농부는 곡식 농사짓는다는 풍신이 잡초만 우거지게 방치한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상농이었다. 농토가 적은 것이 철천지한이었다. 당신의 경우 만일 농토만 웬만큼 있다면 능히 천하제일 대농으로 우뚝 서고도 남을 만큼 땅과 기후와 자연의 섭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그때 절기와 날씨를 잘 맞추면서 최적 영농에 심혈을 기울였다. 여름 내내 논밭을 매 가꾸었고, 벼 이삭이 황금 물결을 이룰 무렵에는 혼자 피사리를 했다. 시루봉 너머 밭에서 콩이 통통하게 여물었고, 잿무덤부리로 나가는 길목 고구마밭에서는 땅속의 고구마 몸집이 커지면서 넝쿨 사이의 땅 거죽이 쩍쩍 갈라졌다. 그해 농사는 대풍이었다.
1958년 정초였다.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게는 석양국민학교(현재의 석양초등학교) 취학 통지서가 나왔는데 나에게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큰)아버지는 학교에 찾아가 어떻게 된 까닭인지 경위를 파악했다. 그 결과 호적 나이가 두 살 적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관계를 확인한 학교 당국에서는 법정 학령과 관계없이 선처를 베풀어 입학을 허가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해 3월 아무 차질 없이 학교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호적상의 나이를 따져 굳이 말하자면 만 5세 이전에 조기 입학한 셈이었다. 키는 중간쯤 되었다. 누차 밝혔다시피 그 후 3학년인가 4학년 때쯤 이르러 ‘입양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차라리 큰집이 아주 먼 곳에 있었더라면 내 입양의 비밀이 영원한 비밀로 남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생가와 양가가 한마을에 있었던 터라 나의 입양은 결국 ‘공지의 비밀’이 되고 만 셈이었다. 피맺힌 사연이 흉기처럼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흘러간 과거를 현재나 미래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불가역적인 내 운명이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가을이었다. 추석 전후 태풍 사라호가 전국을 덮쳐 피해가 막심했지만, 우리 학교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성대한 추계 운동회를 개최했다. 나는 백군이었다. 운동장에는 청색과 백색이 혼재돼 있었다. 청군 진영에는 청색 깃발, 백군 진영에는 백색 깃발이 휘날렸다.
청군은 하얀 모자에 청색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지만, 우리 백군은 그냥 아무것도 표시하지 않은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계주를 할 때 청군은 청색 바통, 백군은 백색 바통을 주고받으며 내달렸다. 오자미 던지기 바구니 역시 청색과 백색으로 구분돼 있었다. 우리는 오전 내내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발휘했고, 학부모(학부모를 일컫는 그 당시의 호칭)들도 자녀들과 뒤섞여 이인삼각이나 공굴리기 등 합동 경기를 벌였다.
마침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푸짐한 음식을 펼쳐놓고 신나게 먹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개뿔이나 내놓고 먹을 것이 없었다. 눈은 풍년인데 입은 흉년이었다. 그렇다고 거지처럼 누군가에게 빌붙어 얻어먹고 싶지도 않았다. 우울하고 서러웠다. 나는 집에서 (큰)어머니가 챙겨 준 햇고구마와 옥수수로 그럭저럭 허기를 메웠다.
그때였다. 아버지께서 한껏 풀 죽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전혀 예측 못 한 일이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큰 누님은 지난해 출가했고, 작은 누님은 과년한 처녀로서 이런 데 잘 나타나지 않았다. 동생들은 아직 취학 전이어서 학교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작년에는 (큰)아버지 내외분이 학부모 자격으로 운동회를 참관했는데, 이번에는 (큰)아버지 내외분이 불참한 대신 아버지께서 오신 것이었다. 내가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아부지, 언제 오셨어유?”
“좀 전에 왔다. 날 따라 오너라.”
나는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운동장 상공에 만국기가 휘날렸고, 백군과 청군 응원석에서는 누군가가 각기 백색과 청색 깃발을 풀럭풀럭 휘젓고 있었다. 아버지는 교정 모퉁이 공터 자갈밭에서 멈추었다. 거기 늙수그레한 농민이 바지게를 받쳐놓고 철 지난 참외를 팔고 있었다.
알다시피 참외는 무더운 한여름이 제철이었다. 아마도 지금 나온 참외는 끝물인 모양이었다. 아직 시설 원예업, 즉 비닐하우스가 보편화하기 이전인지라 채소류와 청과류는 거의 죄다 노지에서 생산되었다. 싸릿대로 촘촘히 엮어 만든 지게 발채에는 먹음직스러운 참외가 가득했다. 참외에서 단내가 뭉클뭉클 풍겨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고장에는 참외가 참 귀했다. 가격도 비싼 편이었다. 참외 장수가 아버지에게 공손히 인사했고, 아버지는 어른 주먹보다 훨씬 큰 한 참외 한 개를 사서 내게 주었다. 얼룩무늬가 선명한, 몸통이 둥그스름하게 잘 생기고 배꼽이 툭 불거져 나온 개구리참외였다. 아버지는 아끼고 아낀, 꼭꼭 접어 깊이 간수해 두었던 쌈짓돈 중에서 지전 한 장을 꺼내 농민에게 참외 값을 치렀다. 내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걸 왜 제게 주세유?”
“먹어라. 얼마나 배고프냐.”
“아부지는 점심 잡수셨슈?”
“그럼, 먹었지. 어서 이 참우 먹어라.”
아버지는 점심을 건너뛰었으면서도 일부러 빈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 ‘참우’는 ‘참외’를 일컫는 말이었다. 내가 참외를 통째로 손에 쥐어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목이 메어 도저히 참외를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지금은 속이 안 좋아서 못 먹겠어유.”
“왜 속이 안 좋아?”
“아까 고구마 먹은 것이 얹혔내벼유. 이 참우는 이따가 속 가라앉으면 먹을게유.”
나는 임기응변으로 어영부영 둘러댔고, 내 속내를 뻔히 들여다보신 아버지께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늘은 높고 햇볕은 따사로웠다. 나는 참외를 만지작거리면서 백군 응원석으로 돌아왔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막말로 내 양육에 관한 일차적 책임은 나를 양자로 맞아들인 윗집 (큰)아버지 내외분에게 있었다. 하지만 당신들에게는 나를 먹여 살릴 능력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배곯는 나를 가엾게 여긴 나머지 뭐라도 사 먹이기 위해 일부러 학교에 오신 것이었다.
오후 서너 시쯤 고학년 선배들이 풍금이며 뜀틀처럼 덩치 큰 장비들을 교실과 복도로 옮겼다. 운동회가 끝나자 교정을 가득 메웠던 군중이 뿔뿔이 흩어졌다. 텅 빈 운동장에는 만국기만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참외를 챙겨 윗집으로 가져왔고, (큰)아버지 내외분과 작은 누님과 내가 4등분으로 나눠 먹었다. 참 달고 맛이 있었다.
눈물겨운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갔다. 오래전 (큰)아버지 내외분과 아버지 어머니께서 한 많은 일기를 마치고 돌아가셨다. 그 후로는 사실상 양가와 생가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그 반면 내 소임과 사명감은 더 막중해졌다. (큰)아버지의 종통을 이어받은 나는 우리 동기간과 전국 각지로 흩어진 연화 재종들에 이르기까지 종종 소통하면서 당내 간 결속과 일체감 조성을 위해 나름대로 안간힘을 썼다.
내가 볼 때 숭조와 돈목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우리 대소가는 항상 조상님을 높이 받들고 서로 두터운 정을 나누며 화목하게 지내왔다. 특히 일가친척의 경조사에는 지친들이 벌 떼처럼 모였다. 나는 아버지 제삿날 조율이시(棗栗梨柿)와 더불어 반드시 참외를 제사상에 올렸다. 어언 큰 누님이 유명을 달리했고, 나머지 동기간 6남매는 노년에 들어섰다. 머리에 희끗희끗 서리가 내리는 동안 고향에도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지난 2015년이었다. 부여군이 석성면 현내리 탑동 마을 옥녀봉 초입에 백제무명용사충혼비를 건립하고 그 주변을 쾌적한 공원으로 조성했다. 이와 함께 뜻있는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석성산성보존회를 결성하여 석성산성 보존에 애써왔다. 만시지탄이 없지 않지만, 높이 상찬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여기에 동참한 관계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나하고 가깝게 지내온 석양국민학교 선후배들이었다. 그분들은 매년 가을 이 충혼비 앞에서 충혼 문화제를 올렸고, 이 행사는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는 제례 이외에도 민속놀이 등 다양한 공연을 펼쳐 이제는 석성면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재작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나는 고향 원증산에 갔다가 현내리 탑동 충혼비를 찾았고, 숨 막히는 폭염 속에 막판까지 백절불굴의 전투 의지로 사력을 다해 용전분투하던 백제의 무명용사들 영령 앞에 경건한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일찍이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사방 공사를 하던 옥녀봉 기슭으로 눈길을 돌렸다.
알다시피 지금의 옥녀봉은 지난날의 옥녀봉이 아니었다. 헐벗을 대로 헐벗었던, 그리하여 희뜩한 속살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옥녀봉 일대는 짙푸른 숲으로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그 숲에는 필경 과거 (큰)아버지께서 인부들과 함께 식재한 수목들도 허다할 것이었다.
나는 즉각 그 현장으로 올라가서 (큰)아버지의 숨결을 느끼며 왕년에 아버지가 쌓은 석축 유적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산기슭에 나무와 풀이 겹겹으로 뒤엉켜 감히 발을 들이밀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산에 들어간다 한들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것 같았다. 자칫 산에 잘못 들어갔다가 멧돼지의 공격을 받거나 뱀에 물리거나 벌과 쐐기에 쐴 수도 있었다.
나는 그런 핑계로 입산을 포기했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려고 날씨까지 푹푹 쪄서 가만히 서 있는데도 비지땀이 줄줄 흘렀다. 나는 고향에서의 일정을 마친 뒤 곧바로 귀경을 서둘렀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번개가 번쩍번쩍 눈앞을 베고 지나가면 그 뒤를 이어 천둥이 우르릉 꽝꽝 밤하늘을 사정없이 두들겨 부쉈다.
며칠 전이었다. 무심코 아파트 상가 청과물 가게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실로 우연히 아주 오랜만에 얼룩덜룩한 개구리참외를 발견했다. 놀라웠다. 신품종 노란 참외에 밀려 개구리참외가 완전히 멸절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 참외를 발견한 순간 국민학교 2학년 가을 운동회 때 학교로 찾아오셨던 아버지가 떠올라 콧날이 시큰하면서 눈시울이 화끈했다.
마치 지게 발채처럼 생긴, 각양각색의 청과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진열대에서는 단내가 등천했다. 나는 배꼽이 툭 불거진 개구리참외 몇 개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을 위해, 가정을 위해, 형님을 위해, 가문을 위해 신명을 바치신 아버지. 한평생 모든 일을 완전무결하게 처리했던, 그리하여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법도를 극명하게 가르쳐 주신 당신이 그립고 또 그리워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이승에는 참외를 받아주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서글픈 계절이었다.
◆ 이광복(소설가·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충남 부여 출생
1973년 문화공보부 문예창작 현상모집 장막희곡 입선
1974년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 당선
1976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
1979년 『월간독서』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
[경력]
ㆍ(사)한국문인협회 이사장(제27대), 평생교육원 원장(제3대), 『월간문학』『한국문학인』 발행인 겸 편집인, 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 한국문학진흥 및 국립한국문학관건립공동준비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진흥정책위원회 위원,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 위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제27대~제28대),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이사, 국립한국문학관 이사,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대표회장, 제6회 세계한글작가대회 조직위원장 역임.
ㆍ현재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대한민국 명예해군
[작품]
ㆍ소설집『 화려한 밀실』 『사육제』 『겨울여행』 『먼 길』『동행』『만물박사(전3권)』『뿌리』
ㆍ장편소설 『풍랑의 도시 』『목신의 마을』 『폭설』『 열망』 『술래잡기』 『겨울무지개』 『바람잡기』 『송주임』 『이혼시대(전3권)』『삼국지(전8권) 』『한 권으로 읽는 삼국지』 『사랑과 운명』『 불멸의 혼-계백』 『구름잡기』『 안개의 계절』 『황금의 후예』
ㆍ콩트집 『풍선 속의 여자』 『슈퍼맨』
ㆍ산문집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ㆍ전래동화 『에밀레종』
ㆍ교양서적 『태평양을 마당처럼 세계는 없다 』『끝나지 않은 항일투쟁』 『금강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천수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문학과 행복』
ㆍ시나리오 시련과 영광 아, 대한민국 외 다수
[수상]
대통령표창(1987, 1995). 제7회 동포문학상. 제2회 시와시론문학상. 제20회 한국소설문학상. 제14회 조연현문학상. 제1회 문학저널창작문학상. 제19회 한국예총예술문화상 공로상(문인부문). 노동부장관 표창. 제28회 국제PEN문학상. 제14회 들소리문학상 대상. 부여 100년을 빛낸 인물(문화예술부문). 제30회 한국예총예술문화상 대상. 제3회 익재문학상. 제9회 정과정문학상. 제3회 한국지역방송연합(KBNS)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제35회 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 제61회 한국문학상. 제21회 창조문예문학상
첫댓글 <참외>을 읽으면서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감동했습니다.
작가의 유년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선명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한국어문화문법을 연구하는 독자로서 금쪽같은 표현을 적었습니다.
설령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겻불을 쬐지 않는 법이었다.
항상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을 생명처럼 지켰던 (큰)아버지.
남들은 입에 발린 말로 무자식 상팔자니 뭐니 개떡 같은 개소리를 늘어놓았지만.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적수공권이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빈집에 소 들어온 형국이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
산기슭에는 아직도 허물어진 성벽이 그대로 남아
그날의 끝장 혈투를 뚜렷하게 증언해 주고 있었다.
보릿고개였다.
마파람이 불어오면 논물에 물고기 비늘 같은 윤슬이 생겨나
반짝반짝 찰랑찰랑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까끌까끌한 까끄라기가 살갗에 닿으면
가시처럼 콕콕 찔러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었다.
“고수레!”
나는 실팍한 보릿대로 여치집을 엮었다.
피사리.
참외를 챙겨 와 4등분으로 나눠 먹었다.
나는 배꼽이 툭 불거진 개구리참외를
몇 개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승에는 참외를 받아주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눈물짓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