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초전법륜경과 무아경
불교 교리의 역사를 나누는 방법이 여러가지다. 그 중의 하나로
근본불교,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티벳불교,
선불교 이런 방법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근본불교는 부처님이 깨친후 일년 사이에 일어난 일을 말한다. 그리고 초기불교는 부처님 사후 100년까지,
그러니 부처님과 직접 만난 경험이 있는 스님들이 살아있던 시기까지 이다.
물론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근본불교이다. 과연 부처님은 무엇을 깨치었고,
가장 먼저 말한 설법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결국은 이것이 씨앗이 되어 그후 여러 송이의 꽃과 열매가 맺었을 것이다.
초기 일년 사이에 일어난 일은 먼저 정각이다. 깨친 것이다. 이 내용은
연기, 12연기라고 한다.
그 다음에 초전법륜의 내용은 중도라고 한다.
부처님을 따라 고행수행하던 5비구에게 초전법륜을 내렸다.
그러나 5비구들은 법의 내용은 이해했으나 아작 깨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무아경을 보탰다.
씨앗에 영양분을 준 것이다.
그랬더니 5비구가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드디어 삼보-불보, 법보, 승보의 삼보가 갖추어진 것이다.
그럼 중도의 내용과 무아경의 내용은 무엇인가?
중도는 8정도라고 했다.
8정도는 정견에서 시작해서 정사유, 정어, 정업을 통해 정명(일상생활)과
정정진(수행생활)로 나누어지고,
수행생활은 다시 정념과 정정으로 구분된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견이다.
그럼 정견, 무엇을 바로 본다는 것일까?
바로 4성제다. 4성제란 1)고성제, 2)고집성제 3)고멸성제 4)8정도이다.
중도가 8정도라고 해 놓고,
다시 4성제에 8정도가 나온다.
불교의 교리는 이렇게 언제나 서로 엮이어 있다.
그러니 불교 개념을 하나씩 따로 떼어 보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12연기에서 말하는 무명 역시,
무명이란 4성제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냥 무명이 아니다.
이제 4성제를 다시 살펴 보아야 한다.
먼저 고성제, 삶이 고라는 것을 본다라는 의미다.
생로병사우비고뇌,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여러가지 고가 있지만 종합하면 오음성고다.
5가지 감각현실을 영원불변하는 자아를 기준으로 바라보는 관점,
이런 관점에서 나오는 고(=어긋남, 부조리, 불협화음)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내외부대상을 간접적으로 접촉/지각한다.
이러는 과정에서 환각이 만들어지고, 그 중 가장 심한 환각이 [자아]가 존재한다는 환각이다.
감각현실을 바라보는 자아의식은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결과물이다.
이런 자아가 있어야 몸을 편하게 관리할 수 있다. 이를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다.
단지 이 자아가 잠시 존재하다 사라진다거나, 이런 자아가 변한다든가,
이런 자아가 다양하게 여러 개 있다든가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자아라는 환각은 인간의 몸이 필요에 의해서 진화의 결과로 만들어 진 일시적인 장치일 뿐이다.
이걸 영원불변하는 실체, 즉 아트만으로 여긴다는 것이 바로 문제이다. 바로 여기서 현상과 맞지 않는 어긋남/고가 나온다.
삶이 고라는 말은 잘 새겨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삶이 고인 것은 아니다. 부처에게도 아라한에게도 삶은 고가 아니다.
깨치지 못한 사람, 즉 연기하는 현실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 감각현실에서 자아를 붙잡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는 삶이 고라는 의미이다. 연기 역시 마찬가지다.
연기 그 자체가 고인 것은 아니다. 연기의 실상을 알지 못하면 고가 된다.
다음은 고집성제이다. 갈애에서 고가 나온다는 의미다.
갈애의 대상은 1)욕망, 2)나라는 존재 3)관념/개념에대한 갈애이다. 이 셋은 모두 무서운 것이다.
아마도 가장 무서운 것은 비존재, 즉 이데아에대한 갈애가 아닐까 짐작한다.
바로 이것때문에 역사에서 엄청난 죽임이 일어난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고를 끊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8정도를 수행하면 된다.
여기서 8정도는 나중에 37조도품, 또는 6바라밀도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
그럼 이 4성제를 어찌 수행해야 할까? 3전12행상을 거친다고 한다.
3전이란
시전,
권전,
증전이다.
시전은 4성제의 구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권전은 완전히 알고, 완전히 끊고, 완전히 실천하고, 완전히 경험하는 과정이다.
이리하여 자신이 스스로 4성제 수련을 완성했음을 증명하고 선언한다.
참고로 나중에 갖추어지는 삼계 구차제정 역시 바로 이 4성제를 수련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니 불행하게도 이런 과정을 모두 설명했으나 아직 5비구들은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
그냥 밝은 눈만 생겼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무아경을 설한다.
무아경이란 우온무아설을 의미한다.
이미 고성제에서 말했던 내용을 다시 더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내 몸은 내것이 아니고, 내 맘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것은 내가 아니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3특상-
무상,
고,
무아를 말한다.
내 몸이란 항상 변한다. 그런데 이걸 나라고 집착하고 있으니 여기서 고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 집착을 버리면, 무아라고 보면 고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이 3특상은 나중 3법인으로 더 다듬어 진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이제 5비구가 드디어 아라한이 되었다. 그럼 도데체 그 전과 후에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한 마디로 윤회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번 생이 마지막이고, 다시 태어남이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이것이 해탈이고, 열반이다.
윤회에 찌들어 있던 고대 인도에서는 이런 내용이 혁명이고 천지개벽일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윤회를 설정하지 않고 있는 한국에서 윤회의 부정이 과연 그런 해탈이고 열반일까?
비록 윤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논리 과정에서 나온 불교 교리는 인간 삶에 많은 중요한 교훈을 준다.
줄여서 말하면 고는 오음성고라고 한다. 생로병사는 이 속에 들어간다.
오음성고라는 말은 오온의 현상을 자아로 바라보는 것에서 오는 고이다.
위 글에서 [세 번 굴려서 열 두 가지 형태]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시전,권전,증전의 3전을 고집멸도의 4가지, 모두 12형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위 글에서 분명히 해탈의 내용이 윤회 없음의 앎과 봄이라 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
왜 이렇게 윤회가 중요한가는 당시 인도 고대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인도인들은 6도 윤회한다고 보았다.
인간과 천신에 태어나면 그대로 다행이지만, 수라, 아귀, 축생, 지옥에 태어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이곳에 태어남은 엄청난 고통이다. 그러니 윤회하지 않는 것,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붓다는 이런 고통에서 단번에 벗어나 버린다. 윤회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엄청난 혁명이다. 생각을 바꾼 것이다.
무아경에서 말씀하신다. 오온에서 풀려나서 해탈하고, 그러니 분명한 앎이 생겨나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고 선언하신다. 왜 이런 중요한 내용을 불교인들은 말하지 않을까? 적어도 초기불교 경전에서 보면 붓다가 깨친 것은
[윤회하지 않는다, 윤회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 것이다.
그러니 윤회가 없다는 것을 알려면 오온의 관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온/5가지 감각현실을 자아(=영원불변하는 아트만)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서 살펴보면 분명한 앎이 생기고,
그러면 윤회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이리되면 모든 것이 풀린다. 그런 자아(=아트만)의 태어남이 없는데, 어찌 생로병사가 있겠는가?
그런 자아(=아트만)가 없는데 어찌 윤회가 있겠는가?
이런 잘못된 생각은 바로 무명에서 시작한다. 무명이란 4성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거대한 법륜이 굴러진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참으로 정법의말씀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