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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禪은 인류 구할 정신문화” -
“의식·무의식 초월
망심을 다스리면
단박에 평화찾는다”
*무차선회 큰스님 법어
18일 고불총림 백양사(주지 지선)에서 열린 무차선회 고승대법회에는 5천여 사부대중이 모여 서옹·혜암·진제스님의 법어을 들었다. 세 스님의 법문과 수좌들과의 법거량을 요약한다.<편집자 주>
인류는 지금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과학 문명으로 위기를 맞고 있으며, 서양 학자들은 동양 문화에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 문화를 찾고 있습니다. 선(禪)은 정신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을 근원적으로 구해줄 수 있는 정신 문화입니다. 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선의 도(道)는 어디에도 끄달리지 않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실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은 물질이 풍부해지면서 ‘내 것’ ‘네 것’ 등 분별심에 기초한 문명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때부터 위대한 성인들이 나와 인류 구제를 부르짖지 않았습니까.
세계는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현 문명의 총아인 과학이 자연에 대해 품고있는 주요 생각은 ‘자연은 정복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류의 삶의 영역이 더욱 넓어지고 편리해진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전과 비교해 반디불이와 다슬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까. 이것은 과학 문명이 수세기 동안 지속돼 낳은 결과 중 극히 일부분일 뿐 입니다. 분별심에서 비롯된 과학과 자연의 대립적 관계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경각으로 치닫고 결국 대자연은 파괴될 것입니다. 대립과 투쟁의 시각으로 현실을 보았던 20세기 초에 결국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선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은 둘이 아닙니다. 선은 원융무애한 자비심을 키워주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을 가르쳐 줍니다. 선의 입장에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등에 놓여있는 문제를 해결한다면 단박에 평화가 찾아 올 것입니다. 선이 마음에 있는 수많은 망심(忘心)을 다스려주기 때문입니다.
망심 중에서 분별심은 현 위기 상황의 주범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대립적인 것으로 나눕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보다 한몫 더해 분별된 것을 선과 악의 대립 구조로 다시 나눕니다. ‘아름답다’ ‘추하다’, ‘좋다’ ‘나쁘다’ 등의 분별이 심해지다 보면, 결국 악이 득세해 선을 선이라 해도 믿지 않게 됩니다. 선이 선이 아니고 참이 참이 아니고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아니면 절대적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분별 의식이 낳은 망심에 빠져서 살아간다면 생사(生死)와 죄악(罪惡)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선(禪)입니다.
불교에서는 의식이 끊어진 곳에 무의식이 있다고 합니다. 서구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것을 잠재의식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의식 뿐만 아니라 무의식에서도 잠재의식에서도 망심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껏 의식의 세계는 주관을 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생사를 면할 수도 없고 죄악을 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의식 세계가 있는 동시에 무의식(아뢰야식)의 세계도 있습니다.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는 동일한 차원이므로 둘 다 주관과 죄악과 생사를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관에 매달려 살기 때문에 죄악과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를 초월하여 주관과 죄악과 생사도 없고 시간과 공간도 초월한 경지에서 어떤 걸림도 없이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경계에 도달해야 합니다.
선방에서는 “의식도 투과하고 무의식도 투과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 공부하는 것으론 의식을 투과할 수 있겠지만 무의식을 투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 길은 화두를 드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생사 문제의 해결은 지해(知解)로도 성취하지 못하며 의식을 무조건 끊는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조사선의 공안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바르며 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1천7백여개의 공안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무한히 많습니다.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바로 화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화두 공안이든지 그 중에서 하나만 해결하면 모든 공안은 일시에 해결됩니다.
공안을 제대로 참구하려면 먼저 인간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생사를 해결하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안을 의심을 해야 합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조주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했습니다.
선종의 시조인 달마스님이 서쪽 인도에서 중국에 오신 뜻을 묻는 것은 조사선에 대해서 물었다고 하겠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라 했는지 의심을 하되, 분별심으로 따져서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의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를 대상으로 해서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이 없이 ‘뜰 앞의 잣나무’와 한 덩어리가 되어 의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의심하면 나중에는 저절로 의심이 통일(統一)하게 됩니다. 더욱 더 용맹정진하면 의식이 아주 딱 끊어져서 돌덩어리 쇳덩어리 같이 됩니다. 우리가 이 경지에 서면 지금까지 화두에 쏟았던 의심은 더욱 성성(惺惺)해 질 것입니다. 이것이 두번째 과정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의식 뿐만 아니라 무의식 조차 초월하게 됩니다. 이 경지에선 모든 것을 초월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현성(現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계에는 생사도 없고 죄악도 없고 공간도 시간도 없이 무한히 자유자재합니다.
모든 것이 상호 원융무애해진 것입니다. 이것을 무한히 초월하고 현성하면서 어디에도 걸림없이 활발발 자유자재 하더라도 실제로는 앞뒤가 있어서 따로 따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해 있습니다. 이것이 우노(愚老)가 말하는 조사선의 궁극적인 경지입니다.
수좌: “부처님도 스님도 보이지 않는 이 자리에 고불총림 임제스님만이 참석하셨습니다. 임제스님 보다는 스님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서옹스님: “내 모습이어도 30방이요, 내 모습을 투과(透過)해도 30방이다.”
*약력
·1912년 충남 논산 生
·1932년 백양사서 만암스님을 은사로 득도
·1962년 동국대학교 선원장
·1964년 무문관, 동화사, 백양사, 봉암사 선원 조실 역임
·1974년 조계종 제5대 종정
·現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 주석
·저서 <선과 현대문명> <절대현재의 참사람> <절대 참사랑> 등“세계가 병들고 있습니다
#진제스님<동화사 조실·사진오른쪽>
-“의심이 클수록 깨달음도 크다”-
“눈밝은 선지식만나
바른 참구법 배워
자나깨나 화두들라”
부처님과 조사의 해탈의 도를 알고자 할진대
만가지 법이 비록 옴이나 서로 이르지 못한지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이 다 끊어짐이나
소리와 빛깔의 무더기 속에 넓고 넓은 땅이로다.
온 세상의 禪을 다 참구하는 자여!
항상 활구선을 참구할 지어다.
부처님께서 도를 깨달으신 후 하신 말씀이 “31일동안 사유하고 사유해도 법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천고만고 끝에 도를 깨달은 후 왜 열반에 드시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신 것입니까. 부처님이 이같이 말씀하신 올바른 뜻을 알아야 합니다.
문수보살이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법은 비록 그러하나 방편으로써 근기가 낮은 중생들을 위해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을 하니 부처님께서 “너의 말에 일리가 있구나!”하시고 49년간 인연과 그릇을 따라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에 “내가 49년동안 인연과 그릇에 따라 팔만사천 법문을 설했지만 실로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큰 깨달음의 살림살이를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면 그 의미의 머리와 꼬리를 멋있게 장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서양인들은 ‘마음 다스리기’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미 한국불교의 심인법이 되었습니다. 이같은 한국불교의 심인법은 혜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혜능스님이 어느날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받치고 밝기로는 일월보다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검다. 이름도 모양도 없되 일상 동용(動用) 중에 가고 오고 말하는 가운데 쓰고 있으면서도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 무엇인고?”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한 납자가 일어서서 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불성입니다”라고 했지요. 이에 혜능스님은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고 했는데 무슨 소리냐”하고 호통을 쳤다.
그후 7년만에 회양스님이 찾아와서 답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하니 혜능스님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닦아 증득함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아니하나 오염될 순 없습니다”
혜능스님이 다시 말했습니다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 때문이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니라”라며 회양스님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혜능스님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이렇게 분명히 선을 그어 놓았습니다. 부처님 정안(正眼)의 법을 면밀히 이은 종사들은 돈오돈수를 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출가한 본래의 뜻은 견성성불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견성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정진해야 하느냐? 활구 참선을 해야 합니다. 고래부터 많은 선승들이 활구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활구를 참구하여 분명히 크게 깨달으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된다”는 등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활구 참선이겠습니까? 일천(一千) 성인의 말을 일시에 투과할 수 있다면 능히 부처님의 스승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일천 성인의 말을 투과할 수 있도록 화두를 참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투과한 자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고, 기(機)와 용(用)을 가지런히 쓰는 수완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눈 코 귀 입을 다 갖추고 있는데 용맹정진 대신심을 가진다면 못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옛 도인들이 “의심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크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곳에 있는 대중들은 이제 ‘천명의 성인들의 말이 어떠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흑탄속에 거꾸러짐이로다”라고 대답해야 하고 또 어떤 사람이 ‘필경에 오늘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천번을 말하고, 만 가지를 말해도 아는 사람이 없네./향(向)하는 아래의 글이 길으니, 내일에 있어 부치리라”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수좌: “대웅전 뒤 뜰의 백합이 아름답습니다”
진제스님: “차나 한잔 들게나.”
*약력
·1934년 경남 남해 生
·1954년 해인사에서 석우선사를 은사로 득도
·1967년 향곡선사로부터 임제법통 인가
·1976년 해운정사 금모선원 조실
·1994년 이후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現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 주석
·저서 <석인대소> <선백문백답> 등
#혜암스님<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삿된 지식 버리고 마음의 눈으로 광명보자”-
“본성은 영원하고 무한
하늘과 땅 무너져도
자기는 변함없어요”
불법은 본래 부처님과 달마스님이 오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남산에 구름 일어나면 북산에 비 내리고, 구름 흩어지면 청산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이 곳에 모인 대중들에게 묻노니 한 마디 일러 보시오. “대체 만 길 되는 구덩이 속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구해내겠는가?”
공의 경계 걱정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밝은 달을 바라보면 옛 길을 밟으리라.
푸른 구름과 들의 학은 짝을 지어 오가는데
흰 바위 푸른 솔은 온몸을 드러내네.
큰 도(道)에 이르는 문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질을 떠난 지식과 학문은 깨끗하고 순진한 인간의 본래 마음을 더렵혀서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가 일쑤입니다. 아무리 좋은 보물도 깨끗한 눈에서는 장애가 되고 거울 위에 먼지가 쌓일 수록 마음의 눈은 더욱 더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을 가리는 삿된 지식과 학문을 미련없이 버리고 허공보다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 마음의 밝은 눈을 활짝 열어 무한의 광명을 뚜렷이 바로 봅시다. 이것이 바로 조사선입니다.
우리 자신은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본래 모습은 먼지에 덮인 구슬과 같습니다. 먼지가 아무리 쌓여도 구슬의 본 성질은 변함없지 않습니까. 먼지를 닦아내면 본래 깨끗하고 아름다운 구슬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닦아낸 구슬은 오래도록 빛날 것입니다.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가 자기이기에 미물, 곤충, 유·무정물 할 것 없이 모두 자기인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기에 만약 자기 밖에서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으며 잘못된 법입니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려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자기는 바다와 같고 천상천하에서 최상의 보물입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거품은 물질일 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대중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시고 21일 뒤 녹야원에서 아약교진여 등 5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하실 때 “나는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중도설은 모든 양변(兩邊)을 여읜데서 하시는 말씀이기에 중도와 변견(邊見)을 다 버리고 정등각(正等覺)을 이루어야 합니다. 중도는 부처님 당시에만 쓰던 것이 아니고, 고금을 막론하고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중도를 알면 불법을 알고, 불법을 알면 조사선(祖師禪)을 알며 견성(見性)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의 궁극적인 목적은 견성성불이며 구경각입니다. 즉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견성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중도를 정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견성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조사선은 도(道)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증득한 수행자라면 반드시 스승의 한 마디에 대해 분명히 두 마디로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한 길이며 한번의 견성은 모든 것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돈오돈수니 점수니 하는 논쟁이 필요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스님들이 속세를 등지고 출가한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견성성불을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닙니까. 견성에 이르는 길 중에서 가장 좋은 방편이 바로 화두 참구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은 일반적인 알음알이를 투과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활구참선을 정진하고 있다는 대전제를 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우리가 일하고 장사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화두를 놓지않고 계속 의심하며 곱씹어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기쁘나 슬프나 화두를 항상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낮과 밤을 잊어버리고 결국 우리 자신 또한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올바른 화두 참구법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세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대부분 삼독에 찌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는 부처님의 도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일등 신도가 되기 위해서는 세간 속에서도 참선을 지속해야 합니다. 참선에는 간화선, 염불선, 묵조선 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간화선이 으뜸입니다. 바로 화두에 대한 ‘의심’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의심 삼매가 다 지나고 나면 아주 깊은 깨달음 즉 견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최상승의 도(道)인 만큼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말고 수행정진해야 합니다.
어제도 이렇게 공부를 안하고 지나가니 죄와 허물이 하늘에 넘치고
오늘도 닦지않고 이러하니 호랑이 밥이로다.
둘 셋은 묻지 않거니와 격 밖의 한 마디는 어떻게 하려는가.
동쪽에 해가 뜨니 낮과 같이 광명이 비치고
무차선회를 하니 비로불이 광명을 놓네.
주인공아, 예예 하는 것이 이뭣고.
백암산 꼭대기 뿌리없는 나무는 가을바람 아니라도 단풍이 아름답네.
수좌: “참다운 도와 실상관에 대해 일러주십시오”
혜암스님: “미혹과 깨달음을 쳐부수니 하늘과 땅이 밝아지도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참다운 도를 알 수 있어. 깨달음 그대로가 실상이며 삼라만상 그대로가 실상이야. 깨닫고, 못 깨닫고가 문제지.”
정리=오종욱 기자(gobaoou@buddhapia.co.kr)
약력
·1920년 전남 장성 生
·1946년 합천 해인사에서 인곡스님을 은사로 득도
·1947년 경북 봉암사에서 청담, 향곡, 성철스님 등과 결제
·1949년 한암, 고봉, 동산, 금오, 경봉스님등 선지식을 참방(參訪).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선원에서 일중일식, 장좌불와 등 두타행
·現 해인사 원당암에 주석 ?
불기 2542년
서기 1998년 8월 26일
현대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