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드르륵’
핸드폰이 울었다. 소리를 내지 말라고 진동으로 해놨건만 이 새벽의 진동은 어마어마한 소리로 변해버렸다.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자야 할 시간에 걸려온 전화는 매번 마음을 덜컥하게 한다.
“엄마. 왜? 어디 아파? 엄마. 엄마."
만지작거리다가 눌린 건지 엄마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웃고 떠드는 TV 소리가 괜스레 야속하다. 아무 일 없으니 다행이다 생각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긴 한숨과 함께 엄마의 혼잣말이 들렸다.
“니들은 참 재미있게 산다.”
눈이 뜨겁다. 그동안 잘 참고 있었는데 엄마의 한마디가 꼭꼭 숨겨 잠가 두었던 빗장을 풀고 말았다. 사실 엄마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깜빡거림이 심해졌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해력이 현저하게 떨어짐을 대화중에 분명 느끼고 있었다. 어제 일도 잊어버리고 처음 겪는 일처럼 말하기도 해서 살짝 귀띔을 해주었지만 역시 기억해 내질 못하셨다. 해마다 치매선별검사도 했었고, 뇌 MRI도 찍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 치매는 아니길 바랐지만 분명히 치매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에 인정하길 주저하며 뒷걸음질만 치고 말았다.
“당장 병원에 데려다줘.”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전화하셨다. 엄마는 며칠 사이로 새까맣게 말라 있었다. 장롱 앞에 불뚝하게 싸놓은 가방이 보였고, 치매 검사를 해야겠다며 주섬주섬 옷을 입으셨다
"보청기를 또 잃어버렸어.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잘 들리지 않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유난히 또박또박 엄마 말만 하고 계셨다. 평소와는 분명 달랐다. 평생 아픈 큰 딸 걱정으로 입원하자면 무조건 버티던 엄마가 먼저 입원을 시켜 달라니. 며칠이 지나 이번엔 한숨을 길게 쉬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하셨다.
"시간 괜찮니? 엄마랑 병원에 좀 같이 가줄 수 있어?"
엄마는 식탁 앞에 가만히 앉아 계셨다. 이번엔 새로 맞춘 보청기가 꽤 쓸만한지 작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은 보청기를 찾으러 간 날 입구를 못 찾고 한참을 헤맸어.”
몇 년 동안 수없이 간 보청기 가게. 익숙한 곳이라 더 놀란 것이 분명했다. 다들 한 번씩은 그럴 때가 있다고 태연한 척 말했지만, 엄마는 한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엄마의 시간을 되돌려본다. 곱고 예쁘던 엄마. 엄마의 봄날은 과연 언제였을까? 오진으로 인해 골든타임을 놓치고 큰언니가 뇌막염 수술을 했던 42년 전 겨울부터 지금까지 쭉 겨울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 같은 큰 언니만 바라보다 엄마의 시간을 다 써버리게 될까 봐 두렵다. 치매검사를 앞둔 엄마는 멍하니 앉아계신다. 괜찮을 거라는 말에도, 이젠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자식들에게 기대라는 말에도 힘없이 웃기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