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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 2025년 09월호(통권 367호)
중국의 유서 깊은 문화적 배경을 찾아서
역사와 문학, 그 상관관계 탐구
―상하이 역사와 문학을 중심으로
김호운
사)한국문인협회 이사장⋅소설가⋅수필가
1. 들어가는 말
문학 작품은 예술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주된 의미로 강조되나 그 시대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서사를 구성하기에 인문학 기록물로도 훌륭한 자료가 됩니다. 그 시대의 생활사를 살펴볼 수 있고, 때로는 의식주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문학 작품은 역사의 시간을 되돌리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며 때로는 같은 공간에 과거 현재 미래를 오버랩하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이번에 개최하는 (사)한국수필가협회 상하이 심포지엄은 우리에게 독특한 역사 문화 체험을 줄 것입니다. 국가가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문학은 자유공간에서의 사유가 가능하기에 새로운 체험 공간에서 함께 호흡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상하이[上海]는 중국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며 중국 경제중심 도시입니다.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이번 상하이 심포지엄은 매우 뜻깊은 행사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때 소중한 체험을 얻을 수 있도록 이 행사를 주선한 (사)한국수필가협회 권남희 이사장님을 비롯하여 동참해 주신 회원 여러분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모름지기 문학은 창작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러한 학술 심포지엄과 현장 체험에서도 형성됩니다. 이번 상하이 심포지엄과 문학 여행을 통해 훌륭한 작품이 많이 탄생하기를 희망합니다.
이 발제는 상하이와 우리나라를 연결하는 역사와 문학, 이 두 개의 키워드로 진행하겠습니다. 발표 지면과 발표 시간을 고려하여 중요한 내용들만 발췌하였습니다. 관심 있는 회원들께서는 이 발제문에서 언급한 한국과 중국을 연결하는 역사와 문학을 참고로 하여 심도 있는 자료를 살펴보시면 더 깊이 있는 체험이 될 것입니다.
2. 상하이 역사
국가나 한 도시의 출현은 기록된 역사로 나타내지만 대부분 이와 연결하는 신화 또는 민간 구전 이야기를 곁들이기도 합니다. 상하이 역사는 우리나라 역사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으니 4,358년 전인데, 상하이 역사는 약 6,000년 전부터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장강 하류의 조그마한 어촌이었으나 명나라 때부터 상업 중심 도시로 발전하였고, 19세기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난징조약(1842년)과 텐진조약(1856년)에 의해 외국에 개항한 이후 국제무역 중심도시로 발전합니다. 곧이어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상하이에 들어오면서 이 세력들이 이곳에 조계지(租界地)를 만들어(일본은 조계지에 속하지 않음) 중국의 영토지만 중국의 행정 치안이 미치지 않는 특별 구역이 되었습니다. 점유하는 나라들은 자국 영토도 아니면서 독자적 행정 치안을 이루는 특이한 지역이 된 겁니다. 이때 상하이는 와이탄을 중심으로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고, 중국 전통 건축 양식과 혼합된 건축물들도 속속 세워집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한 뒤 일본 세력이 들어오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점령되면서 중국의 일부 영토는 일제 강점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격변하는 역사 속에 상하이는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었으며 상업 및 경제도 동시에 발전하여 중국에서 상업 중심 도시로 부각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변혁을 거친 상하이는 세계 각국 상인과 정치와 종교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넘쳐나 세계적인 자유도시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색깔의 구성원들이 모여들면서 새로운 문화와 예술이 생성되기도 합니다.
상하이는 중국에서 베이징시, 톈진시, 충칭시와 함께 4개 직할시로, 성(省)급 도시라고 해서 성급 시(省级市)로 불립니다. 우리말 독음으로 ‘상해(上海)’라고도 하는데, 양쯔강(장강)이 바다(海)로 나가는(上) 길목에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국공내전이 끝나기 전까지 상해의 이전 도시 이름은 송호(淞沪), 중국 발음으로 ‘쑹후’였습니다. 상하이에서 벌어진 중국과 일본 전투도 ‘쑹후회전’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자동차 번호판 등에서 이 도시를 가리키는 약자로 여전히 沪(hù)를 사용합니다. 상하이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우쑹강(吳淞江)의 옛 이름이 쑹강(淞江)입니다. 우쑹강은 쑤저우허(蘇州河)라고도 하는데, 태호에서 발원하여 상해시 북부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와 황포강(黃浦江)에 합류합니다. 이 쑹강에서 ‘쑹’을 따오고, 이곳 어민들이 고기잡이 도구로 사용하는 ‘후(沪, 번체자 扈호)’를 붙여 ‘쑹후’가 되었습니다. 상하이란 이름보다 쑹후(송호)란 이름이 훨씬 더 전통이 깊기에 아직도 전통 상하이 사람을 일러 후런(沪人) 또는 쑹후런(淞沪人)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는 고속철도를 징후(京沪)고속철로, 고속도로는 징후고속공로라 부릅니다. 중국 최대 증권거래소인 상하이증권거래소도 상하이에 있습니다.
춘추시대에는 오나라에 속한 항구였으며, 전국시대에는 초나라 땅이었습니다. 황포강의 옛 이름은 춘신강(春申江)인데, 초나라 재상이었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의 봉지여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상하이의 약칭인 ‘沪(후)’와 함께 ‘申(신)’으로도 표시하는 건 이 춘신군에서 따 온 것입니다. 삼국시대 오나라 황제 손권의 형 손책이 회계전투에서 승리하여 이곳을 차지하였고,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손권은 이곳 와이탄에 별장을 짓기도 했습니다. 송나라 말에 상해진(上海鎭)이 형성되면서 이때부터 상해(상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상하이에서 개최하여 중국공산당이 탄생하면서 상하이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하는 정치 현장으로 부각합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하고 상하이 조계를 공격하여 점령하는데, 이때 미국과 영국이 물러나면서 100년 동안 이어져 오던 조계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면서 중국이 수복하여 1949년 5월까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상하이를 통치했으나, 1949년 5월 27일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인민해방군이 지배하면서 상하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상하이는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이 차지한 조계지가 있어서 일본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가까이 광뚱(광동)에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가 있어서 지원받을 수 있는 요지였기에 1919년 무렵부터 우리나라 독립지사들이 이곳으로 들어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우호적이었던 프랑스 조계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치하였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잔치를 겸한 상하이 점령 전승절 기념행사장에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의거가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영화와 문학 작품에서도 많이 다루어졌습니다. 현대도시 상하이는 고층 빌딩이 밀집된 지역을 푸둥지구라고 하며, 근대의 중심지였던 와이탄과는 황푸강을 사이에 끼고 서로 마주합니다. 2021년부터 푸서 지역의 개발이 진행되어 서쪽과 남쪽에서 강을 끼고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이 세워집니다.
3. 상하이를 다녀간 문인들
상하이에 오면 우선 세 사람의 중국 작가가 떠오릅니다. 루쉰(鲁迅, 1881-1936), 샤오홍(蕭紅, 1911-1942), 장아이링(張愛玲, 1920-1995)입니다.
루쉰은 우리에게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 『아큐정전(阿Q正伝)』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며 샤오싱(紹興)시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저우수런(周树人)이며, 최초로 쓴 소설 『광인일기』에 ‘루쉰’이란 필명을 사용한 이후 이 이름을 사용합니다. 부유하게 살았으나 아버지가 약 처방 잘못으로 세상을 떠난 뒤 가세가 기웁니다. 1906년 3월에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에 다녔으나 병든 신체보다 중국인의 정신 건강 개조가 더 시급함을 알고 의사가 되는 걸 포기하고 문학을 선택합니다. 동경 생활이 여의치 않자 잠시 문학을 쉬고 있을 때 친구의 권유로 다시 문학을 시작합니다. 그의 첫 소설집 『눌함(呐喊)』 자서에서 밝힌 글에 의하면, 그는 이렇게 친구들에게 묻습니다. “쇠로 만든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방이 있는데, 절대로 부술 수 없어. 이 방에서 사람들이 곤히 잠들어 있어. 당연히 이 사람들은 곧 모두 질식해 죽을 거야. 혼수상태로 죽음에 이르니 고통이나 슬픔은 모를 거야. 그런데 너희들이 큰소리를 쳐서 이 가운데 몇 사람을 깨운다면, 이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죽을 텐데, 이건 못 할 짓 아닌가.” 이 물음은 몰락해 가는 청나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소설 같은 걸 쓰지 않는 게 좋다는 의미로 물은 것입니다. 친구는 그에게 “눈 뜬 사람이 몇이라도 있다면, 쇠로 된 그 방을 부수려는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 했습니다. 그는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쓴 소설이 「광인일기」입니다. 「광인일기」는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이며 백화문(白話文)으로 썼습니다. 백화문은 송나라 원나라를 거치며 민간에 널리 쓰이던 문체며, 구어체를 뜻하는 백화(白話, Vernacular Sinitic)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백화문으로 쓴 소설을 백화소설(白話小說)이라고 하며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전』 『금병매』 『유림외사』 『홍루몽』 등은 백화문으로 쓴 소설입니다. 1917년 1월, 교육자이자 철학자인 후스(胡适,1891~1962)가 잡지 『신청년(新靑年)』에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문어체 문학을 배격하고 백화문학을 하자고 주창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1917년 ‘문체개혁운동’이 불붙었습니다. 루쉰이 『광인일기(狂人日記)』 백화문으로 쓴 것은 후스가 주창하는 문체개혁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입니다.
1926년, 베이징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의 혼란에서 위기에 몰린 루쉰은 수필가 린위탕(林語堂)의 초청으로 남쪽 푸젠성(복건성)의 샤먼(廈門)으로 가 샤먼대학 교수로 일합니다. 그러나 이곳도 그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이룰 수 없는 걸 알고, 샤먼을 떠나 광저우로 가 중산대학 교수로 근무합니다. 이곳에도 그는 견디지 못하고 곧 상하이로 옵니다. 당시 상하이는 장제스 국민당 정권의 제2수도였으며, 『웹스터사전』에 “동사‘to Shanghai(상하이하다)’-아편으로 인해 마비되어, 인력을 구하는 배에 팔려버리다. 사기와 폭력으로 한바탕 싸움을 일으키다.” 1)
1)리어우판, 『상하이 모던(새로운 중국 도시 문화의 만개, 1930-1945)』,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
라는 뜻으로 적힐 정도로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이곳에서 지하 공산당 조직에 발기인으로 참여합니다. 중국인의 정신 개조를 위한 다양한 문필 활동을 하며 혁명문학파로 공산당 발전을 위해 활동하다가 1936년 폐질환으로 사망합니다. 그는 ‘중국의 막심 고리키’라 불릴 정도로 청년들에게 추앙받았으며, 실제로 그는 고리키가 사망한 넉 달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루쉰이 처음 상하이에 와서 살던 곳이 홍커우공원 근처 대륙신촌이었던 인연으로 1956년 다른 곳에 있던 그의 묘지를 이곳 홍커우공원으로 옮겨오며 공원 이름도 루쉰공원이 되었습니다. 공원 안에 샤호홍에 있는 고향집을 본떠 지은 루쉰기념관이 있습니다.
“希望本是无所谓有(희망본시무소위유) 无所谓无的(무소위무적)。这正如地上的路(저정여지상적로);其实地上本没有路(기실지상본몰유로) 走的人多了(주적인다료) 也便成了路(야변성료로).”
“희망은 원래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건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사실 땅에는 길이 없다. 사람이 많이 걸으면 길이 된다.”
— 루쉰 소설 「고향」에서 따옴
혼란스러운 청조 말의 중국인들에겐 희망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으나, 함께 노력하면 땅 위에 생겨나는 길처럼 갈 길이 만들어진다는 희망을 암시합니다.
중국의 여성 소설가 샤오홍(蕭紅, 1911-1942)은 하얼빈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불운한 작가였습니다. 본명은 장나이잉(张廼莹)입니다. 지주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으나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던 당시 전통 가문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합니다. 이때(1932년) 작가 겸 기자였던 샤오쥔(萧军, 1907~1988)을 만나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 다음 해 작품을 발표하고 소설가가 됩니다. 하얼빈과 만주에서 힘겹게 지내다가 상하이로 와 1934년부터 루쉰의 지도로 문학계에서 활동합니다. 1938년 샤오쥔과 헤어진 뒤 대학교수로 활동하던 중 1936년에 일본 도쿄로 잠시 유학을 떠납니다. 1938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산시성 시안에 정착합니다. 이곳에서 동료 소설가인 돤무훙량(端木蕻)과 결혼하고, 당시 영국령이었던 홍콩으로 떠납니다. 1942년 홍콩에서 안타깝게 폐결핵으로 사망합니다. 대표작으로는 장편소설 『생사의 장』이 있으며, 2014년 그녀의 삶을 조명하는 탕웨이 주연의 영화 <황금시대>가 개봉되었습니다.
소설가 장아이링(张爱玲, 1920-1995)은 이안 감독이 연출한 영화 <색, 계> 원작자입니다. 「색계」는 1979년에 집필한 그녀의 단편소설을 영화로 제작했는데, 중국 배우 탕웨이의 출세작이기도 합니다. 장아이링은 상하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 은둔 생활을 하다가 심장혈관 질환으로 74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화려했던 그녀의 활동에 비해 낙엽처럼 외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는 로스엔젤레스의 시민들에게 어떠한 장례 의식도 갖지 말고 곧장 화장하여 뿌려달라고 유언했는데, 그녀의 유해는 유언대로 지인들에 의해 태평양에 뿌려졌습니다.
4. 상하이와 한국문학과의 연관성
피천득(皮千得) 수필가가 1932년 신동아에 발표한 수필 「은전(銀錢) 한 닢」은 ‘내가 상해에서 본 일이다.’ 이렇게 첫 문장을 시작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길에서 구걸하는 한 걸인이 한 푼 한 푼 얻은 푼돈을 모아 각전(角錢)으로 바꿉니다. 이렇게 모은 각전을 다시 대양(大洋)이라 부르는 은전 한 닢으로 바꿉니다. 그는 이 은전이 진짜인지 궁금하여 여기저기 전장(錢蔣)에 돌아다니며 물어봅니다. 진짜가 맞다는 곳이 있고, 어느 집에서는 걸인이 귀한 돈을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하여 되묻기도 합니다. 혹 남의 것을 훔친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걸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잔돈을 모아 각전으로 바꾸길 여섯 번이나 하여 귀한 대양 한 푼 얻었으며, 여섯 달이나 걸렸다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합니다.
이 수필은 마치 단편소설처럼 구성하였습니다. 화자인 ‘나’가 왜 그렇게까지 애써서 은전 대양을 가지려 했는지, 그 돈으로 무얼 하려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이 돈 한 개가 가지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 은전 ‘대양’은 희망이며 자존심으로 상징됩니다. 주인공 거지는 어려운 일을 견디며 소박한 꿈을 이루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망을 대신 보여줍니다. 피천득 수필가 특유의 절제된 서술이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하는 수필입니다. 당시 상하이로 몰려온 사람들의 희망과 이를 이루고자 하는 집념을 이 수필 「은전 한 닢」에 담았습니다. 당시 상하이로 몰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그린 작품입니다.
피천득은 16세 때인 1926년부터 1937년까지 10여 년을 상하이에서 지냈습니다.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 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검정고시로 2학년을 월반하여 경성고보에 입학했는데, 당시(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의 눈에 들어 그의 집에서 3년을 함께 삽니다. 1913년과 1919년 두 차례 상하이에 머문 적 있는 이광수는 피천득이 상하이에 유학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피천득은 상하이를 유학지로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그땐 대개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 생각도 했죠. 그런데 춘원이 일본으로 간 사람들은 많으니 앞으로는 다른 교육을 받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고 했죠. 특히 그때는 주요한 씨가 거기 –상해 호강대학교-를 졸업하고 와서 동아일보에 취직을 했죠. … 그런데 동생인 주요섭이 있었어요 … 그 주요섭이가 그 호강대학 교육과에 재학 중이었죠. 그래서 그이를 믿고 상해에 가려고 마음먹은 것도 있죠. 그이가 나를 돌봐줄 것이라는 생각으로.2)
2) 정정호 엮음 『피천득의 대화록』, 범우사, 2022, 60-61쪽을 참조한, 김양수 『자유의 도시, 올드 상하이』
동국대학교 출판부, 2023, p.147.
피천득은 훗날 상하이를 회상하면서 “인간이 꿈꾸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의 가능성이 다 열려 있는 도시”라고 했는데, 그는 상하이를 당시로서는 아시아의 도시들이 따라가지 못할 코즈모폴리턴의 도시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3)
3) 김양수, 『자유의 도시, 올드 상하이』 동국대학교 출판부, 2023, p.147.
피천득은 경성고보를 졸업하기 전에 상하이로 떠나 기독교 계통의 토마스 한버리 고등학교(Tomss Hansbury Public School)에 다녔으며, 1929년에 후장대학 예과, 1931년에 본과에 입학합니다. 상하이에 유학할 당시 주요섭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피천득이 상하이로 간 데는 이광수뿐만 아니라 도산 안창호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 상하이에 체류하던 한국인은 50여 명이었다.”4)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뒤 한국인 이주자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4) 위책 p.43
피천득의 상해 유학을 도와준 춘원 이광수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으며 11살 때 콜레라로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동학에 입문합니다. 이 인연으로 1905년 동학의 도움으로 일본에 가 이듬해 다이세이 중학교에 입학합니다. 우연하게도 일본에서 벽초 홍명희와 같은 하숙집에서 기거합니다. 안타깝게도 동학 내부의 분열로 학비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이광수는 도중에 귀국합니다. 그 뒤 황실 장학생으로 다시 일본에 가서 메이지학원에 편입학합니다. 이 기간에 그는 세계문학을 읽으며 문학을 가까이합니다. 그가 상하이로 가게 된 동기는 1913년 23살 때 무전여행으로 세계를 일주하겠다는 꿈으로 오산을 떠나 봉천, 항저우, 허난, 난징, 상하이, 광동을 거쳐 베트남, 인도, 페르시아로 갈 예정으로 길을 나섭니다. 이때 그가 묵은 객주에서 위당 정인보를 만납니다. 정인보의 권유로 그는 세계일주 여행의 꿈을 접고 상하이로 갑니다. 그곳에는 일본에서 알게 된 홍명희와 호암 문일평이 있었습니다. 정인보도 곧 상하이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이때 이광수는 정인보에게서 여비로 중국돈 20위엔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내게도 돈 한 푼 없지만 그 양반들도 강목을 치르는 판인데, 정인보 군이 본국에서 돈을 얻어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며 침을 삼키고 앉았는 꼴이라고 한다. 그렇게 궁한 판에 내라는 식객이 하나 늘었으니 걱정이다. 침대를 장만할 돈이 있나, 금침은 장만할 것도 없거니와 나는 홍명희 군과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침대란 게 좀 지질한가. 종려 노로 얽은 것 위에다가 얇은 돗자리 하나를 깔았으니 무거운 궁둥이를 맞대고 낯을 반대 방향으로 하고 자던 것이었다.5)
5) 이광수, 「상하이 이일 저일」, 『이광수 전집』 제13권, 삼중당, 1962, 329쪽 내용을 인용한 김양수 『자유의 도시, 올드 상하이』
동국대학교 출판부, 2023, p.49
상하이는 세계의 축도하고 볼만하나이다. 인종치고 아니 와 사는 이가 없으며 물화(物貨)치고 아니 와 놓이는 것이 없고, 제일 볼만한 것은 십수 개 국 통화(通貨)가 다 통용됨이로소이다. … 한편에서는 파리 학사원의 회원과 베를린대학 교수 같은 최신식 학자, 명사와 사회주의, 허무주의 같은 최신 사조에 입가에 거품을 날리는 청년이 있으며, 다른 한 편에는 공수(拱手)하고 정좌하여 요순의 도를 강(講)하고 공맹의 예를 설하는 낡은 부유(腐儒)가 있나이다.6)
6) 이광수, 「상하이 이일 저일」, 『이광수 전집』 제13권, 삼중당, 1962, 203쪽 내용을 인용한 김양수 『자유의 도시, 올드 상하이』
동국대학교 출판부, 2023, p.53
이광수의 글 「상하이 이일 저일」에는 상하이를 ‘세계의 축도(縮圖)’라고 표현합니다. 외국이라고는 일본에 가 본 경험밖에 없는 그가 무전여행으로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졌는데, 상하이에서 그러한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간접 체험하게 됩니다. 상하이라는 한 공간에 모여든 ‘다원화(多元化) 세계’는 그에게 낯섦, 타우마제인의 충격이었습니다. 단순히 새로운 체험에 대한 놀라움만을 체험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그라드는 중국인들에 대한 연민도 기록했습니다. ‘한 편에는 공수(拱手)하고 정좌하여 요순의 도를 강(講)하고 공맹의 예를 설하는 낡은 부유(腐儒)가 있나이다.’라며 몰락하는 유교 문화에 대해 강력하게 공격합니다.
이광수가 「상하이 이일 저일」을 쓴 1913년은 중국에서 5ㆍ4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5ㆍ4운동은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 시작된 반제국주의, 반군벌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입니다. 중국 근현대사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사건으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산둥반도 점유 권리를 인정하자 중국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전국 시위로 확산되었습니다. 베이징대학생 3천여 명이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하고 전국 노동자들이 파업하였으며 상가가 철시했을 정도로 대규모 학생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5ㆍ4운동은 단순히 외세와 군벌에 저항하는 운동이 아니라 신문화운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전통 유교를 비판하고 서구 사상을 수용하는 사회개혁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이 5ㆍ4운동을 기점으로 중국 문화사에서 근대와 현대로 구분하며, 문학도 마찬가지로 이전을 근대문학, 이후를 현대문학으로 나뉩니다. 이날을 중국에서는 ‘청년절’로 기념합니다.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도 1921년 30살에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사 특파원으로 중국 각지를 여행합니다. 이때의 보고 들은 일들을 「신예술가의 눈에 비친 지나의 인상」이란 글을 씁니다. 이 글에서 그는 “상하이는 어쩐지 어수선하고 사람들도 들썽들썽 정말로 바쁘다. 게다가 북방에 오면 대체로 조용하고 사람들도 역시 침착함이 있어 실로 대륙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풍겨나오는 듯하다.”7) 라고 썼습니다. 여기에서 ‘북방’이라고 함은 베이징을 가리킵니다. 베이징에 비해 상하이는 매우 번잡하고 어
7) 『日華公論』 1921년 8월호에 실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신예술가의 눈에 비친 지나의 인상」글에서 발췌 인용한 내용을, 김양수 『자유의 도시, 올드 상하이』, 동국대학교 출판부, 2023, p.69에서 재인용함.
수선하다고 인상을 밝혔습니다. 당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상하이에 도착한 직후 건성늑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여 항저우, 쑤저우, 양저우, 난징, 지우장 한커우, 창사 등을 돌아보고 베이징을 거쳐 귀국합니다. 이 기간이 1921년 3월에서 7월 사이니까 약 5개월에 걸쳐 중국을 둘러본 것입니다. 따라서 상해에 머문 기간은 얼마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상하이를 깊이 체험하지 못한 그의 눈에는 ‘들썽들썽’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앞서 상하이를 ‘세계의 축도(縮圖)’라고 말한 춘원 이광수와는 매우 대조적인 평가입니다.
상하이는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이 이곳으로 와 일본인이 운영하는 호텔 동화양행에서 묵었는데, 이곳에서 암살당합니다. 1894년 3월 27일 일본에서 이곳으로 온 김옥균 일행 4명은 동화양행에 투숙하여 휴식을 취하던 중 이튿날 오후 일행 중 한 명인 홍종우가 쏜 총에 피살당합니다. 이 사건은 일본으로서도 매우 민감한 터라 일본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우연하게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일행이 상해에서 묵은 숙소도 동화양행이었습니다. 의도적이었는지 우연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글을 썼습니다.
우리는 어두컴컴하면서도 장식만은 현란한, 묘한 분위기의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과연 이런 분위기라면 김옥균이 아니어도 언제고 창문 밖 어딘가에서 피스톨의 총탄이 날아올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양복을 입은 씩씩한 주인이 …공교롭게도 현관 앞방 말고는 빈방이 없다고 한다. 방에 가보자 침대는 어째서인지 두 개나 있었지만 벽은 그을린 듯하고 커튼은 낡고 의자조차 만족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김옥균의 유령이라면 모를까 그 누구도 편히 쉴 수 있는 방이 아니었다.8)
8)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곽형덕 옮김, 『아쿠타가와의 중국 기행』, 섬앤섬, 2016, p.24 글을 발췌 인용한 내용을, 김양수 『자유의 도시, 올드 상하이』, 동국대학교 출판부, 2023, pp. 71-72에서 재인용함
한 시대의 역사 현장을 바라보는 뒷사람의 평가나 감상이 역사 사건의 사실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닙니다. 다만 가해자와 피해자, 또는 제삼자의 시선이 다름을 이러한 글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감상은 훗날 자신이 쓰게 될 문학 작품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에서는 아직 이날의 체험이 반영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관심 있게 그의 작품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아무러하든 춘원 이광수와 피천득,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글에서 상해는 세계적인 도시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 정치적 역학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도시였음은 분명합니다. 정리된 형태든 그렇지 못하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서든 새로운 문화와 문학이 탄생하기 마련입니다. 당시의 상하이와 오늘날의 상하이를 비교하면서 또 다른 형태의 문학 작품이 탄생하기를 희망합니다.
상하이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소설가 한 분이 있습니다.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쓴 주요섭 소설가입니다. 소설 창작 공부를 하는 분들은 1인칭 관찰자 시점을 배울 때 이 작품을 자료로 삼습니다. 주요섭은 1902년 평양에서 태어나 1918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친형 주요한이 유학가 있는 일본으로 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에 편입학했습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평양에서 김동인과 함께 지하신문을 만들며 만세운동을 하였고, 이로 인해 투옥되었다가 1921년 상하이 후지앙 대학 중학부에 입학하여 상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작품 「인력거꾼」 「살인」 등은 이 시기에 발표했습니다. 1927년에는 미국으로 가 스탠퍼드대학 대학원에 입학했으며,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신동아』 주간으로 일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1934년 베이징의 푸런 대학 교수로 있을 때 쓴 작품입니다.
1925년 4월 『개벽』에 발표한 「인력거꾼」은 주요섭이 후지앙 대학 2학년 때 “사회학 교수의 지도로 인력거꾼의 합숙소 현지 조사에 나갔다가 너무나 심한 충격”을 받고 썼습니다. 이 소설은 사치스러운 유흥시설과 빌딩들이 들어서 있는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오직 땅만 내려다보며 달려야 하는 인력거꾼인 하층민의 시각에서 그려져 문학사로나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으로나 훌륭한 작품입니다.
인력거꾼인 주인공 아찡이 돼지우리 같은 침소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설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상하이 시가의 이백 만 백성이 하룻밤 동안 싸놓은 배설물을 실어 내가는 꺼먼 구루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잔돌 깔아 우두럭 투두럭한 길 위로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고 하는” 모습이었다. 아찡이는 동료 뚱뚱보와 함께 떡집에 들어가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가게에서 불을 피우는 모습이나 조리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 등이 상세하다.
내용을 간추려서 상하이를 거쳐 간 문인들의 생활과 작품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외에 김산, 김광주, 심훈 등 많은 작가가 상하이를 다녀갔으며, 상하이에서의 에피소드를 작품에 반영했습니다. 상하이는 한반도에서는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다원화로 이루어진 신계계였으며, 체험의 폭을 넓히게 해주었습니다.
5. 마무리
상하이의 역사와 문화, 한국문학과의 상관관계를 개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글로벌시대인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매우 낙후된 이미지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00년 이전의 한국과 상하이 모습을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를 실감하게 됩니다. 당시 상하이는 이광수의 말처럼 그야말로 ‘세계를 축도(縮圖)’해 놓은 도시였습니다. 이곳을 거쳐 간 독립지사들, 문화인들, 학자들의 체험이 우리 근대문학에 어떤 모습으로 스며들었는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문인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 체험은 인생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번 (사)한국수필가협회 상하이 심포지엄을 통해 다양한 체험을 얻길 바라며, 이를 작품으로 탄생시켜 한국문학에 소중한 자료로 남겨지길 기원하면서 발제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