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길 좋다
이경숙
그 곳은 마치 세상의 끝 같은 느낌이 든다. 외진길이라고 하던가, 그 길로 들어가는 길 말고는 다시 돌아나와야만 하는 길. 시각장애인 복지관, 뇌성마비복지관 등 장애인 복지관만 몰아둔 듯하다. 처음에는 가장 가까운 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버스의 간격도 너무 길어서 한번 걸어가 보기로 했다. 교통공원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건너편에는 천변을 끼고 노랑 빨강 꽃들이 점점이 하늘거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 일렁이는 기분으로 공원을 벗어나면 4차선 도로가 펼쳐져 세상이 확 다가온다. 내가 가는 방향으로 운행하는 차는 뒷통수를 보여 알 수 없지만 내 앞으로 오는 차들은 모든 운전자가 나를 보는 것 같아 짐짓 앞만 똑바로 보고 최대한 모른 척한다. 그렇게 가다가 횡단보도를 한번 건너고, 다시 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들어간다. 숲에서는 시선을 어디로 둘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자유로운 나만의 모습이 될 수 있어서 좋다. 하늘을 보고, 잎을 보고, 나무를 보고, 땅을 보며 그 자체로 너무 좋아서 언제든 끝나지 않는 길이었으면 싶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간간이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햇빛이 놓이는 자리에서 노닥거리기도 한다. 숲의 끝에 어린이 놀이터가 보이면 숲길이 끝나고 복지관 도착이다. 이 길은 무어라 이름 붙이면 좋을까? '숲과 숨이 머무는 자리'라고 해볼까.
수요일에는 어르신 복지관에 간다. 암사역에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가슴이 쿵쾅거린다. 나를 기다리시는 어르신들과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기분좋은 흥분과 설렘이 있다. 복지관까지 10여 분의 길을 걷는데, 3년 전 처음 갈 때, 헤매며 무척 멀게 느껴진 길이었다. 1년쯤 다니다 보니, 너무 멀리 돌아다녔구나 중간 샛길이 보였다. 길이 익숙해지며 안 보이던 길들이 눈에 들어왔고 다른 길로 가도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여유가 생긴 때문이리라. 암사역 부근은 내가 사는 동네와 비슷해서 더 정겨웠다. 아주 큰 재래시장도 있어서 처음에는 살 게 없어도 수업이 끝나고 나면 꼭 들러서 구경하는 것이 큰 낙이었다. 재래시장만 보면 고향을 찾은 것처럼 푸근해진다. 싱싱한 채소, 펄떡이는 생선, 먹음직스러운 반찬, 싸게 묶인 양말까지도 무엇에 손을 둘지 몰라 했다. 아마도 나의 눈빛이 가장 빛나는 시간이 재래시장에서가 아닐까 싶다. 재래시장을 나와 조금 더 길을 걷다 보면 세 개의 과일과 채소를 파는 곳이 있어 각각 조금의 차이로 경쟁하고 있다. 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가지각색 음식과 물건 파는 가게들의 간판을 구경하고,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데려가는 젊은 아빠나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다 보면 복지관에 도착이다. 이 길은 무어라 이름 지어줄까? '푸근함이 뚝뚝 묻어 나는 길'이라고 하면 좋을까?
처음 둥지를 트는 곳은 어디든 주변을 탐색하고 마음에 드는 곳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하는 펀이다. 20여 년 전에 일산에서 산 적이 있다. 그때 일산의 끝에 이사를 갔는데 주변에 아무 것도 없이 아파트만 떨렁 있어서 너무나 불안했고 도무지 정이 붙지 않았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재래시장이었다. 그 곳을 발견하고 나니, '일산도 살 만하구나 여기 다 있구만' 하고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집이 덜렁 잠만 자러 왔다갔다 하는 곳이 아니라, 주변에 거닐 만한 곳이 있고, 마음을 줄 만한 곳이 있어야 비로소 '나의 보금자리'라고 인정하는 거 같다. 그러나 언제든 '여기 정말 좋아' 마음을 다 내려놓고 안도했을 때 꼭 떠나야 했다. 여수도, 면목동도, 일산도, 월계동도 영원하지 않았다. 그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어떤 때는 불안함에 휩싸일 때도 있다. 남들은 우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김치도 그렇다. 식구들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나는 내 손으로 김치를 꼭 담고 싶다. 간단한 겉절이는 해서 먹을 수 있지만 항상 김장김치를 담그고 말리라는 책임감 같은 것이 있다. 지금 주시는 김치들은 유한한 것이니까, 식구들은 ‘사먹으면 되죠’ 하지만 영원할 수 없으니, 어느 때곤 내 손으로 김장김치를 담고 싶다는 마음을 숙제처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향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진리일 수도 있지만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일’은 언제 만나도 생경한 거 같다.
복지관 수업을 다니면서 3년, 5년씩 하다 보니, 한 번도 그만둘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별은 생각지도 못 하게 다가왔다. 치료를 요하는 일이 생기면서 나의 일정과 상관없이 병원 일정을 따라야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과정이었다. 특히나 수업은 갑자기 '오늘 못 합니다' 할 수 없으니, 미리미리 다 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눈으로 담고, 손으로 만지던 복지관 가는 익숙한 길들도 더는 볼 수 없겠지 생각하니, 마지막 수업 가는 길에는 모든 곳에 아쉬운 눈길을 주었다.
내가 마음을 주었던 일들과 장소를 잠시 놓는다. 당분간 많이 다녀야 할 새로운 공간에서 또 나의 취향을 찾을 것이다. '숲과 숨이 머무는 자리'와 '푸근함이 뚝뚝 묻어나는 길'은 나의 마음에 담는다. 이 계절을 통과하며 새로 만나는 곳에서 나는 어떤 길을 만나게 될까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이경숙 수필가
이경숙 수필가
1968년 출생, 전남 여수. 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매개로 하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며 문화예술이 가지는 ‘사회안전망 역할’을 해나가려 한다. 2020년 <시와산문>에서 수필로 등단했으며 이후 맵시 있고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녹색수필』 vol. 1권~5권 공저
[출처] [신작수필] <아, 이 길 좋다> - 이경숙 ♣ 웹진 《문예마루》제3호(2026. 1)|작성자 문예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