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K. 비일의 성전 신학]
비일은, 아담은 불순종 이전에도 동산에서 땅을 경작하고 지상의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일을 수행하였으나 범죄 이후 그의 사명은 ‘대적(땅)을 정복하는 것’이 추가되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에 이르러서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새로운 약속이 주어지고, 야곱에게 이르러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보증이 공식화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성전”을 확장시키는 과제가 주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아담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결국 범죄로 인해 역사 속에서 이 사명은 완전히 성취되지 못하고 종말론적인 완성을 기다리는 과제로 남아 있다. 아래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 보자.
창세기 1장의 본래적인 사명과,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후손에게 주어진 사명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지만 몇몇 차이점도 존재한다. 불순종 이전에도 아담은 땅을 경작하고 지상의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주권을 드러냄으로써 “다스리고 정복하는” 사명을 성취했다. 그가 지배했던 피조물 중에는 동산 밖에서 지내다가 나중에 동산 안으로 들어온 사탄적인 “뱀”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담의 범죄 이후 그의 사명은 인류를 대적하는 악한 인간적인 힘들에 대해 새로운 통치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텍스트에는 “대적의 성문을 차지한다”라는 표현이 추가되기에 이른다(창 22:17). 다른 곳에서 이 표현은 “땅을 정복한다”라는 의미로 언급된다(민 32:22을 주목하라; “그 땅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게 하기까지”; 여기서도 창 1:28처럼 “정복”을 의미하는 동일한 단어[kābaš]가 사용됨; N. T. Wright 1992a: 23).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복을 얻으리라는 언급은 갱신된 후손들과 함께 “땅을 가득 채우게 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새롭게 변화된 인류 공동체를 가리킨다. 또한 이 인류 공동체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으면서 그분을 반영하게 될 “사람의 도성”의 다른 사람들을 향해 그분의 형상과 빛을 비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개종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은총으로 “복을 받으며” 계속 커져가는 그분의 나라의 구성원이 될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사명의 반복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차이점은, 이제는 이 반복이 사명을 함축하는 약속으로 공식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사명”의 측면이 여전히 유지된다는 것은 창세기 12:1-3이 이 사명을 소개하면서 명령형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 “너의 고향…을 떠나라…복이 될지라.” 이는 인류가 자신의 힘으로는 이 사명을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이 인류로 하여금 어떤 형식으로든 그것을 수행하게 하실 것임을 의미한다(창 17:1-7; 18:18-19도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보증은 아담이나 노아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같은 약속이 야곱에게 되풀이될 때까지는 공식화되지도 않았다. 이 보증은 하나님의 약속의 기초인 동시에 그분의 성막 임재가 널리 퍼지도록 땅을 가득 채우라는 사명의 기초다(이삭[창 26:24]과 야곱[창 28:15] 및 모세[출 3:12] 등의 경우를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보증은 그분의 임재를 뜻하는 “성전”을 확장시키는 과제의 핵심을 이룬다. 이런 점은 함께하신다는 하나님의 보증이 이삭과 야곱과 모세에게 주어진 그분의 약속과 사명의 중심이라는 점을 주목할 때 분명해진다(창 26:24; 28:15; 출 3:12 등을 다시 보라). 인간의 과제를 성취하고 약속의 성취를 보증하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동행하심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응답하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은 최초로 아담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그의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들을 지켜야” 했다.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6).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때라야 비로소 그들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분의 임재를 계속 누리면서 약속을 유업으로 받아 참되게 “살아갈” 것이다(신 30:5-6, 16).
솔로몬에게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양식(formula)이 반복된다. 다윗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며 네가 형통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며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대상 22:11-12). 솔로몬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에서는 성전 건축의 맥락 안에서 약속의 양식이 나타난다.
예레미야에서도 동일한 상용구 양식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그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가 되게 하시어(1:5)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실 때(1:10; 이 양식에 대해서는 1:8, 19을 보라)다.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포로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다시 불러 모을 때의 목적이 “새 일”을 행하려는 자기 목적에 대해 이방 나라를 향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그들의 사명을 갱신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실 때도 동일한 양식을 사용하신다(사 43:5-21).
바벨론 유배로부터의 귀향 이후, 그 땅에 남은 자들에게 성전을 재건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같은 양식이 두 번 적용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학 1:13; 2:4). 학개 2:5은 이 양식의 의미를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한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마찬가지로 슥 4:6-9이 말하듯 “나의 영”이 스룹바벨 총독에게 두 번째 성전을 건축하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출애굽기 33:14-17의 내용을 가리키는 듯하다.
¹⁴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¹⁵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¹⁶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¹⁷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출 34:9도 참조)
학개 2장도 출애굽기 19:5-6을 언급하는 듯하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 중에 거하며 살며, 성전 임재 안에서 그분의 영화로운 빛을 반영하는 제사장처럼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이방 나라를 위한 중재자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학개 2장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통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하실 때를 언급한다. 이때는 출애굽기 33장의 약속이 성취되며, 출애굽기 19장의 약속과 사명이 이루어지는 때다. 달리 말해서 학개 2장은 앞의 두 출애굽기 텍스트의 약속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전이 그의 백성 중에 건축될 것임을 뜻하는 약속이라고 이해한다. 장차 건축될 성전에 대한 학개의 묘사는 두 번째 성전을 당연히 넘어선다. 이 건축 계획은 초기의 솔로몬 성전에 비해 덜 중요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약속하신다(학 2:3-9). 두 번째 성전이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넘어서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에스겔이 예언한 종말론적인 성전의 기대(겔 40-48장을 보라)도 성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간기”의 유대교는 자연스럽게 미래의 종말론적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성전은 솔로몬 성전보다 작았을 뿐더러 주후 70년에 파괴됨으로써 오래 지속되지도 못했다. 이 성전 파괴 사건은 그때 이후로 유대인들이 성전을 생각하는 방식에 위기를 가져왔다.
확실히 동산 성소에서의 아담의 순종은 하나님의 함께하심(“동산에 거니시는” 그분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창 3:8])을 통해 그분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열쇠였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아담의 명령 이행을 돕기 위해 항상 그와 함께할 것임을 약속하셨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사실상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자신의 임재를 거두셨다. 죄의 결과로 아담은 하나님의 영화로운 임재의 성소로부터 쫓겨났으며, 그분이 주신 사명을 성취할 수 없었다.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전에 관해 규정하는 법에 대해 이스라엘이 “에덴동산” 안에서 이룰 순종은 집합적 아담으로서 그들이 수행할 새로운 사명의 한 부분이었다. 명시적으로 이스라엘 땅은 에덴동산에 비교되며(창 13:10; 사 51:3; 겔 36:35; 47:12; 욜 2:3 등을 보라), 에덴과의 상응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아주 비옥한 땅으로 묘사된다(참조. 신 8:7-10; 11:8-17; 렘 47:1-12; Dumbrell 2002: 58-59를 보라). 약속의 땅 자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 불린다(시 78:54; 슥 2:12). 왜냐하면 이곳은 훨씬 더 큰 규모의 에덴동산 같았기 때문이다(Dumbrell 2002: 58-61). 최초의 에덴에서 아담의 역할을 통해 주어진 정복의 사명(창 1:26-28)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표상하는 이스라엘 성전을 통해서도 표현된다(Clements 1965: 67-73).
이 사명은 출애굽기 19:6에 잘 표현되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이 텍스트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너희가 내게 대해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고 말한다. 그들은 어두운 세상의 나머지 영역에 하나님의 성막 임재의 빛을 널리 전하는 중재자가 되어야 했다. 창세기 1:28과 에덴 및 성전 사이의 이런 연결 고리는 쿰란 문서의 『찬양 두루마리』에 있는 다음과 같은 사상을 불러일으켰다. “저의 통치는 [땅의] 아들들에게 미칠 것입니다…저는 당신이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 [만]드신 에덴을 일곱 줄기 [빛]으로 비추겠나이다”(1QH 7.23-24. “일곱 줄기 의 빛”의 형상 배후에는 일곱 등불을 가진 성전의 등잔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처럼 이스라엘은 범죄했고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의 땅으로부터 쫓겨났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그들의 성전으로부터 거두셨다(겔 9:3; 10:4, 18-19; 11:22-23). 주후 70년, 회복되었던 이스라엘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로 로마인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했을 때다. 물론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을 떠나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창세기 1장의 명령을 실현하도록 함께하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을 통해서도, 그의 몸에서 난 후손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성전 안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성취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레고리 K. 비일, 강성열, 『성전 신학』(새물결플러스, 2014), pp. 152-158.
첫댓글 제시해주신 비일(G.K. Beale)의 성경신학적 통찰에 깊이 공감하고 댓글을 남겨드립니다.
아담에게 부여된 '성전 확장'의 사명이 아브라함과 야곱을 거쳐 이스라엘로 계승되는 구속사적 흐름을 명확히 짚어주셔서 큰 울림이 됩니다.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임재의 약속을 통해 당신의 성소를 온 땅으로 넓히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열심을 보게 됩니다.
비록 역사 속 이스라엘은 미완으로 남았으나,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종말론적 완성을 기대하며 오늘의 사명을 되새기게 됩니다.
공감합니다 😁
‘창세기 1장의 본래적인 사명과 - 그분의 나라의 구성원이 될 것이다’ 부분은... 창조 시의 사명이 타락 이후 어떻게 구속사적으로 재해석되고 심화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탁월한 통찰이 나오네요. 이에 공감합니다.
아담의 '다스림'이 타락 이후 대적을 이기는 '정복'으로 구체화되며,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그 통치권이 회복되는 과정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대적의 성문을 차지한다'는 표현을 창조 명령과 연결하여,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닌 악의 세력을 제압하는 영적 승리로 읽어내는 관점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인류 공동체가 세상의 빛이 되어 '사람의 도성'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킨다는 설명에서 선교적 사명을 깊이 느낍니다.
결국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사명은 깨어진 세상을 치유하고, 온 땅을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거룩한 성전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본문과. 이 댓글에서 좋은 의견을 듣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 참되게 “살아갈” 것이다" 부분에는 인간의 순종이 단순한 의무를 넘어, 하나님의 동행하심이라는 은총의 보증 속에서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깊이 있는 통찰도 나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보증이 단순히 위로에 그치지 않고, 온 땅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확장해 나가는 사역의 핵심 동력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길로 행함'의 과제가 이스라엘의 순종을 거쳐 우리에게 이어지지만, 결국 그 성취의 열쇠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마음의 할례'에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인간의 유한한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한 임재가 우리 삶의 터전을 거룩한 처소로 변화시키며, 종말론적 유업을 향해 나아가게 함을 깊이 신뢰합니다.
아멘 🙏
‘바벨론 유배로부터의 귀향 - 학개 2장도’ 부분은 성전 재건의 역사적 맥락이 단순한 건축을 넘어 하나님의 임재와 제사장적 사명의 회복임을 잘 보여줍니다.
임재의 연속성: 바벨론 귀향 후 성전 재건은 출애굽 당시 언약하신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보증과 성령의 역사가 중단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구별된 정체성: 이스라엘이 천하 만민과 구별되는 유일한 증거는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실재적인 동행과 그분의 영이 머무는 것입니다.
제사장적 사명: 성전 임재를 경험한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 어둠 속의 이방 나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재자의 과제를 부여받습니다.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아담처럼 이스라엘은 - 성취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었다’ 부분은 인간의 반복되는 실패와 성전의 파괴를 통해, 참된 회복이 인간의 노력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성취를 향해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아담에서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실패의 역사가 결국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버린 '파괴된 성전'으로 귀결되는 지점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통감하게 됩니다.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고 성전의 영광이 거두어지는 비극은, 창세기 1장의 사명이 혈통적 이스라엘이나 가시적인 건물을 통해 기계적으로 성취될 수 없음을 반증하는 듯합니다.
이처럼 역사 속에 남겨진 미완의 과제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불순종을 넘어 하나님의 임재를 온전히 보존하실 참된 성전, 곧 메시아를 통한 종말론적 완성을 더욱 갈망하게 만듭니다.
아멘 🙏
인간의 거듭된 실패와 성전의 파괴라는 비극적 역사가 참된 성전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깊은 통찰입니다. 이에 공감하며 저도 댓글을 남겨드립니다.
* 아담에서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불순종과 성전 파괴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나 가시적인 건물만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뼈아프게 보여줍니다.
*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고 성전의 영광이 거두어지는 과정은, 창세기 1장의 통치 명령이 혈통적 후손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 비록 역사 속 성전은 미완으로 남았으나, 이 결핍은 결국 우리를 참된 성전이자 언약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소망을 품게 합니다.
비일의 최종 결론을 미리 언급한 좋은 댓글입니다.^^
비일의 성경신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역설적인 희망과 하나님의 열심에 초점을 맞춘 좋은 포스팅입니다.
인간의 반복되는 실패와 성전의 파괴는 역설적으로 '건물'에 갇힐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며, 우리로 하여금 가시적인 성소를 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국 역사 속의 미완된 사명을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승리로 반드시 이끌어 가실 것임을 믿습니다.
아멘!
포스팅 해주신 역사의 흐름은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신실하심 사이의 거대한 서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에 깊이 공감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파괴되었으나, 오히려 그 결핍이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으로 이어져 우리를 영원한 소망으로 안내한다는 점이 큰 위로가 됩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하나님의 임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에, 우리 안에 직접 찾아오셔서 거처를 삼으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다시금 깨닫습니다.
창세기 1장의 통치 명령이 혈통을 넘어 만유를 회복하시는 그리스도의 승리로 완성될 것을 믿으며, 미완의 역사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그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