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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러쉬 - 잠 못드는 밤
이른 아침이라는 걸 제대로 증명하듯 두어 번 눈을 비비며 종아리에 힘을 주어 힘겹게 계단 위로 올랐다. 눈치 없이 자꾸만 내 두 눈을 찔러오는 태양빛에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표정이 거의‘저 지금 불만 있어요.’라는 문장을 자동연상 시켰다. 요즘 따라 자비 없이 극성으로 치솟는 추위는 날 이불 속에서 쉽게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요즘 들어 지각은 일상다반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반쯤 감긴 눈과 함께‘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건 종소리요, 내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같은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며 느릿하게 걷고 있는 나와는 달리 지각만은 면하기 위해 무려 두 칸씩이나 되는 계단을 성큼성큼 겁 없이 뛰어 올라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에 무의식적으로 몽롱한 정신을 잡고 좀 더 보폭을 늘리려 발걸음을 떼지만 영혼 없이 축 쳐진 몸은 금방 숨이 차올라 지쳐버리고 만다. 내 거지같은 저질체력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래도 지각, 저래도 지각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확실해졌을 때쯤, 갑자기 등 뒤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과 함께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나면…….
“너 또 지각이야.”
요즘은 착시현상도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구나. 도경수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긴 했어.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리니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경수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럼 태웠다. 아침부터 그 목소리를 들으니 꼭 더 자도 된다는 일종의 자장가로까지 들리는 거 아니겠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하다하다 이젠 놈의 관한 환상까지 만들었다는 거였다. 떡하니 내 등에 두 양손을 올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도경수를 그저 흐리멍덩한 환영으로 치부해버린 내가 쩌억 소리가 날 만큼 크게 하품을 하며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나 막 모른 척 하네.”
“…….”
“내가 밀어줄게 얼른 가.”
“……도경수?”
“응?”
“도경수? 도경수야?”
“그럼 나지 누구야.”
“아, 잠깐만……!”
“너 오늘도 지각하면 몇 번이나 지각이야, 빨리 올라가자.”
그냥 죽을까, 아니면 저 창밖으로 곤두박질 쳐버릴까. 아니, 경수가 모르게 사라져야 해. 차라리 멀리 바다를 가버리자. 그래, 그게 좋겠다. 연신 혼이 나간 얼굴로 무어라 중얼거리고만 있던 나를 보고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며 꽤나 심각한 얼굴로‘병원 가볼래?’라며 내 성질을 자극해오는 민예의 옆구리를 향해 브라질리언 킥이라도 날려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봐도 지금의 내 상태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사람처럼 중심 따위 없는 어깨로 입만 벌리고 있는 꼴이 가히 폐인과 다를 것 없었다. 하마터면 그 순간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눈 채 힘없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였을 뿐 더러, 그 중에서도 갑 오브 갑인 건 악어와 버금가는 듯한 하품을 입도 안 가린 채 그대로 보여줬다는 것이다. 갑갑한 한숨을 토해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준비를 했다.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좋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친년이라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변백현에게 투자한 내 피 같은 돈들이 하늘 위로 날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지같게도 텔레토비 태양 안에 들어간 변백현이 날 조롱하는 듯 해맑게 웃으며‘넌 끝났어.’라는 말까지 하는 거였다. 넌 끝났어, 넌 끝났어……난 끝났어, 제길.
“변백현.”
“…….”
“백현이 안 왔니?”
“…….”
“백현이 오면 교무실로 오라고 전해주고, 이따가 종례 시간에 자리 바꿀 거 애들한테 미리 말해 놔. 반장.”
“네, 차렷! 경례!”
“안녕히 가세요.”
종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선생님이 문을 닫자마자 눌려있던 음소거가 다시 켜진 것처럼, 엄청난 난리 통을 피우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복잡한 상황에도 아까의 거지같은 순간을 변백현이 두 눈으로 보지 않았음에 감사하다는 생각만 하며 하늘에게 깊은 뜻을 표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추하다 못해 눈물겨운 명장면을 기억 속에서 하나둘씩 지워가고 있는데, 어딘가 장난스럽고 또 간지러운 무언가가 자꾸만 내 볼을 찌르는 게 느껴지는 거였다. 그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면.
“……아, 뭐야.”
“너야말로 왜 멀쩡한 머리카락한테 지랄이야? 머리카락이 뭔 죄라고.”
“……오자마자 시비야 왜.”
“잠시만 고개 제대로 들어봐.”
“왜…….”
고개를 들라는 놈의 말과 함께 톡 쏘는 레몬향이 강하게 내 코끝을 찔렀다. 말없이 눈동자를 내려 향기의 근원을 파악했다. 이런 건 언제 사온 건지, 레몬 맛 막대 사탕이 예쁜 자태로 날 유혹하기 시작했다. 좋으면서도 안 좋은 척, 정색하며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밥 주는 거야.”
“…….”
“우리 밥통 밥 주는 거라고.”
“아, 진짜 밥통이라고 하지 마!”
“먹고 있어, 교무실 갔다 올게.”
“아, 맞다. 너 오늘 왜 늦었어?”
“이야, 이젠 내 일거수일투족이 막 궁금해? 이 여자 큰일이네, 이렇게 사랑이 빨리 변해서야.”
“개소리 집어 치우고 교무실이나 가라?”
‘미치겠다.’라는 표정과 함께 한 손으로 제 반쪽 얼굴을 가리며 눈을 감고 조용히 미소 짓는 변백현이었다. 놈에게 절대지지 않을 거라는 내 계획이 수포가 되어버려 자존심이 상하자 되지도 않는 복수를 다짐하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입술만 내밀고 있는데, 그제야 알겠다며 무언가 진지한 말을 하려는 듯 제 손바닥을 내 정수리 위로 얹고, 살짝 돌리는 거였다.
“우산은 챙겨왔어?”
“당연하지, 어제 계속 눈 엄청 온다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엄마가 그러는데 오늘 하루 종일 눈 올 거래. 발목까지 온다고 했나? 아니 그거보다는 더 적게 오나? 아무튼 오늘 눈 장난 아니게 올 거라고 옷도 단단히 입고가라고 했어. 변백현 너도……”
“또, 또 종알종알.”
“…….”
“어디 말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내가 말 많은데 보태준 거 있냐.”
“그건 없고 우산은 보태줄 수 있지.”
“나 우산 있다니까?”
“네 우산 말고.”
“…….”
“도경수 우산.”
놈의 입에서 ‘도경수’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멈춰있던 기능이 활성화됐다. 이젠 의식보다 몸이 더 빠르게 반응하는 정도에 나조차 경이로웠다. 그건 참 쓸모없는 능력이었다. 이어 놈이 내 눈앞에서 내민 건, 변백현만의 향기가 희미하게 베여있는 파란색 단색 우산이었다. 그 말에 난 감정 없는 메마른 눈으로 변백현을 응시하며‘경수도 가지고 왔겠지.’라고 답했지만, 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제 휴대폰을 켜 보여주는 거였다.
“봐봐, 내가 미리 김종인한테 밑밥 뿌려놨어.”
“…….”
[김종인 씹지마 시발 답해]
[김종인]씨발 왜
[너 학교에 우산 2개있냐?]
[김종인]누가 학교에 우산을ㅅㅂ 내꺼 밖에 없지 당연히
[아 미친 그럼 어떡하지]
[김종인]왜
[나 여친이 학교 오는데 우산이 고장 났대 그래서 자기 데리고 오라는데 나도 우산 안가지고 왔다고 시발 나 살려줘]
[김종인]여친 또 생겼냐? 우리학교?
[알빠? 우리 학교면 뭐 아 진심 도경수한테 물어보ㅏ 있는지]
[김종인]니 제정신이냐? 도경수꺼 빌린다고?
[나라고 말 안하면 되잖아 좀 물어봐]
[김종인]아 도경수는 안 물어봐도 우산 당연히 있지 뭐 어떡해 그냥 나 아는 친구가 사정이 이렇다고 해?
[ㅇㅇㅇ제발 바로 가져다 준다니까? 나라고 절대 하지 말고 걍 친구라고 하라고 제발]
[김종인]아 진짜 병신새끼 기다려
바보 같이 실실 웃으며 뿌듯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식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경수에게 피해를 줘서 까지 내 욕심을 충족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굳게 다문 입술에 저도 이상함을 느낀 건지 그제야 표정을 풀고 휴대폰을 거두는 변백현이었다.
“도경수 우산은? 도경수 우산은 어딨어? 이 파란색 우산이 도경수꺼야?”
“도경수 꺼 내 사물함에 있는데, 이건 내꺼야.”
“아, 진짜……너 이런 식으로 거짓말해서 도경수랑 이어줄 속셈이었으면 나 너한테 연애코치 부탁 안 했어, 이러면 경수 속이는 거 같잖아.”
“…….”
“그렇다고 도경수 우산을 가져오면 어떡해. 거짓말이라도 경수한테 피해는 안 가게 해야 할 거 아니야.”
“……이게 뭐가 거짓말 치는 거야?”
“그럼 거짓말이지 사실이……!”
“나 새로 사귄 여자친구 우리 학교인 것도 맞고, 걔 우산 고장 나서 같이 쓰고 오느라 학교 늦은 것도 맞고, 거짓말 한 거라곤 김종인한테 나도 우산 없다고 한 것뿐인데 뭐가 그렇게 다 거짓말이야?”
“…….”
“그래서 준 거잖아. 너한테 내 우산 주면서 도경수랑 같이 쓰고 가라했는데 그게 너한테 이렇게까지 욕보일 일이냐?”
“……너 여자친구 생겼어?”
“왜, 그건 또 궁금해? 또 속이는 걸까 봐?”
“그게 아니라, 알았으면…….”
“그냥 걔가 어제 내 번호 따가서 사귀자고 고백했어,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사귄 거고.”
“…….”
“그래서 곧 헤어질 거야, 아무 감정이 없거든.”
잊었던 사실이 있었다. 변백현이 그냥 단순히 연애라는 부분에 능해서 연애코치가 아니라는 걸.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연애를 해봤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여자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쉽게 간과하지 못한 나였다. 도경수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 흔한 인사 하나도 못할 뿐더러 내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했던 것처럼, 분명 변백현에게도 그런 여자들은 수도 없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무런 대가 없는 투명한 색의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놈은 이렇게 한 순간에 감정 없는 무채색으로 돌려버렸을 거다. 그건 내 입장에서 여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욱신거리는 쓰라린 통증에 고개부터 돌려버렸다. 그래봤자 속상한 마음은 나아질리 없었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던 변백현이 고개를 꺾어 밑으로 나와 눈을 마주하려 용케도 애쓰는 모습이 선하게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냐고 묻는 말에도 난 아무 말 없이 아랫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내 모습이 오늘 안에 놈에게 차일 그 여자라도 된 것 같았다.
“왜 말 안 하냐고, 내가 지금 말했잖아.”
“…….”
“야, ○○○.”
“변백현, 넌 그렇게 아무 감정 없이 사귀고 아무 감정 없이 헤어져?”
“뭐?”
“그럼 왜 사귀는 건데?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귀지를 말던 가 왜 괜히 죄 없는 애한테 허영심만 심어주는 건데?”
“○○○.”
“너 진짜 짜증난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지독하게도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는 괜한 화풀이라고 정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변백현은 자신만의 연애방식이 있는 거고, 나도 나만의 연애방식이 있는 거였다. 그러니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변백현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다. 마음에 없던 독이 발린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반사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화장실로 돌진해 있는 대로 수도꼭지를 다 틀었다. 메아리 소리가 자꾸만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냥,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이유 없이 쓴 말을 해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밥 먹듯이 사귀고 또 밥 먹듯이 헤어지는 놈의 태도에 화가 나기보단 두려운 게 먼저였다. 그 말이 내 숨통을 잔인하게 조르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꽤 악화된 상황에 멍하니 벽에 기대어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그럴수록 변백현의 대한 야속함은 더 커져갔다. 아마 내가 놈에게 배운 모든 것들이 헛된 건가 싶을 정도로 크게.
“자리 바꿀 거야, 딱 한 번만 돌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아, 선생님 두 번이요 두 번!”
“세 번이요!”
“그냥 깔끔하게 열 번 어때요?”
한 달간의 정들었던 내 짝꿍과 작별 인사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많이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틈틈이 수학 과외를 받으며 몇 마디 주고받았던 반장 서희에게 짧은 미소를 띠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날로그적 제비뽑기 시스템이 아닌, 자리 뽑기 프로그램을 (각자 번호를 적고, 버튼을 누르면 랜덤으로 자리가 배정된다.) 다운받으신 선생님인데 이게 뭐라고 한 번 마우스를 클릭할 때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꽤 스릴 넘쳐 자리를 바꾸는 날만 기다리는 우리였다. 고요한 정적과 이상한 긴장감이 감도는 교실에서 마우스를 쥐고 있는 반장에게만 집중 했다. 경쾌하게 들려오는‘달칵’소리에 빠르게 자신의 번호를 스캔하는 아이들과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면.
“와, 너 나랑 짝꿍이다!”
“우리 또 짝꿍이다!”
“아, 선생님 자리 바꿔주세요!”
“한 번만 더 돌리면 안돼요?”
단짝과 짝이 되어 기뻐하는 아이들, 좋아하는 친구와 짝이 되어 수줍어하는 아이들, 싫어하는 이성과 짝이 되어 분노하는 아이들.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소란스러워진 아이들 사이로 보이는 변백현에게로 시선을 돌리면.
“…….”
“…….”
나와 같은 표정으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는 놈이 보인다. 젠장, 어쩜 하늘은 이렇게 저한테 끊임없이 가혹할까요. 우연도 이런 거지같은 우연이 어디 있을까요. 하필이면, 왜 오늘인데.
[변백현/○○○]
“차렷, 경레.”
“감사합니다.”
종례를 하자마자 언제 자리가지고 불평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총알처럼 교실 밖으로 튀어 나가는 아이들이었다. 그에 나도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 어색함을 대체 어떻게 풀어야할지 고민하다 축 늘어진 몸을 일으키고 힘없이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내일이 문제였다. 오늘 화해를 하지 않으면 당장 그 상태에서 짝꿍을 어떻게 하냐 이 말이었다. 한숨은 더 깊어지고, 고민은 더 넓어졌다. 한참을 지끈거리는 머리를 핑계로 최대한 느릿하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내 등 뒤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대로 온몸이 굳어버린다.
“내가 아까 준 우산 가지고 경수 기다려.”
“…….”
“김종인은 내가 끌고 나갈 테니까, 도경수 우산 없을 거야. 그리고 애들이랑 집 방향 달라서 혼자 갈 거고.”
“……변백현.”
“우산 같이 쓰자 하면 바로 쓸 애니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
“난 여친꺼 쓰고 가면 돼.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가야겠다. 안녕.”
왜 이렇게 난 성격이 물러터진 건지. 오늘따라 눈은 이렇게도 많이 오는 건지. 난 왜 하필 오늘 죄 없는 변백현에게 화를 낸 건지. 왜 변백현은 바보같이 내게 속상한 티 하나 안 내는 건지. 표정은 또 왜 저렇게 굳어있는 건지. 그리고 하필 왜……. 뭉툭한 느낌의 짐이 내 어깨 축을 기울게 만들었다. 추적추적 기분 나쁘게 내리는 진눈깨비 소리에 자연스럽게 미간 사이가 좁혀지는 나였다. 이대로 멍청하게 가만히 서 있다간 경수도 놓쳐버리고, 변백현과의 사이도 멀어질 게 뻔했다. 두 어깨 위에 올려있는 두 짐을 사이에 두고 간당간당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내 머릿속이 이내 변백현이 건네 준 단색 우산을 들고 빠르게 교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다. 변백현의 노력을 이번에도 날려버릴 수 없었다. 그건 두 개 모두를 잃어버리는 일이었으니까. 빠르게 계단 밑으로 내려가 놈이 시키는 대로 경수를 기다렸다. 그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딱 경수를 발견하는 일은 생각보다 꽤……쉬운 일이라는 게 함정이었지만. 한 눈에도 큰 흰 눈이 보기 좋게 내 눈에 꽂혔다. 심지어 빛까지 나는 게 내가 도경수에게 단단히 빠졌나 싶었다. 정말로 우산 없이 패딩 모자를 쓰고 나오는 모양새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졌다. 이제 볼품없는 내 발 연기 실력을 다시 들어낼 차례였다. 꽤 큰 보폭으로 경수에게 다가갔다. 익숙한 인기척에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다름 아닌 경수였다.
“어, 도경수 안녕…….”
“아, 안녕.”
“왜 모자 쓰고 가? 우산은?”
“아……어떤 애가 빌리고 안 돌려줘서.”
“…….”
“돌려달라고 해야 하는데 빌려간 애가 누군지 모르겠네. 종인이는 친구랑 게임한다고 가버리고……날씨 별로인 날은 놀기 싫어서 그냥 가려고.”
내 양심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상황이었다. 꽁꽁 모자를 뒤집어쓰고 큰 눈을 깜빡거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는 경수의 모습은 설렐 정도였지만,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우산까지 숨겨야했나, 라는 생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럼 안녕.”
급해진 마음에 무작정 이름부터 부르니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는 경수였다. 마비라도 될 것 같은 입술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접착제를 붙인 것 마냥 꼼짝없이 붙어있던 입술을 희미하게 열어 여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
“…….”
“나 우산 두 갠데 쓰고 갈래?”
“…….”
“방, 방향도 같잖아! 집 방향…….”
“……그래도 돼?”
“응?”
“그래도 되냐고.”
“……당, 당연하지.”
오늘은 조금 더 색다르게 우산을 펼쳤다. 손목에는 평소와 다르게 더 힘이 들어갔고, 그 소리는 가히 살랑거리는 바람이 경수와 내 사이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한 번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질퍽하게 감겨오는 소리가 저절로 내 기분을 두루뭉술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따뜻했던 학교 안에서 밖으로 나오니 멀쩡했던 몸이 끊어지기라도 할 듯 차가웠다. 그에 어깨를 더 움츠리고 팔짱을 끼는데.
“발이 이런데 몸을 움츠리면 어떡해.”
“응?”
“신발 끈 풀렸잖아, 넘어져.”
“…….”
“들고 있어 봐.”
여전히 우산 위에는 기분 나쁜 진눈깨비가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로 우산을 공격해대고 있었다. 내게 우산을 건네고 제 허리를 숙여 신발 끈을 묶어주는 경수를 보자 그 거지같던 진눈깨비도 새하얀 눈으로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야 만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번에도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예전처럼 또다시 경수가 나를 지나치지 않을까, 이대로 나를 모른척하지 않을까. 변백현의 여자친구처럼……오늘이 마지막이지는 않을까. 말랑거리는 심장은 점점 더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그렇게나 예뻐 보일 수 없었다. 처음으로 내가 경수를 내려다보는 날이었다. 늘 뒤에서, 혹은 구석에 숨겨왔던 내 마음이 최초로 위를 향해 움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경수가 내 밑에서 신발 끈을 묶어주고 있다는 건. 오늘 꿈은 꽤 길고 생생하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속 부풀어 오르는 풍선에 존재를 눈치라도 챈 건지, 단단하게 신발 끈을 고정시키고 다시금 허리를 펴 슬금슬금 나를 향해 미소 짓는 경수가 내 두 눈에 들어왔다.
“아까 계단에서도 그러더니 너 엄청 둔하다 진짜.”
“…….”
“아까 너 아침에 하품하는 거 보고 한참 웃었어.”
“아, 그건…….”
“나쁜 뜻으로 웃은 거 아니야, 좋은 뜻으로 웃은 거야.”
“…….”
“감기 걸리기 전에 얼른 가자.”
로봇마냥 굳어있던 내 손에 쥐어진 우산을 빼가는 경수 덕분에, 그제야 길었던 잠에서 깬 듯 주위의 소리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전까지는 경수와 나, 둘만의 드라마였다면 이번에는 아니었다. 정말 현실이라는 걸 직감한 순간이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게 꿈이 아니라 당당한 현재였다. 꽤나 큰 소리를 내며 기도를 타고 침을 넘겼다. 그 소리가 생각보다 커 황급히 한 손을 들어 입가에 갖다 댔다. 혼자서 쇼라는 쇼는 다 하고 있는 나였다. 좋은 뜻이라고 했다, 나한테. 그것도 웃으면서. 생각만 해도 옆구리가 간지럽고, 코끝이 살근거리는 기분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누군가 내 발을 잡고 하늘 위로 올리는 기분. 그래, 딱 그거다. 내 앞을 지나쳐 먼저 앞으로 걸어가는 경수를 놓칠세라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데, 그런 내 앞으로 보이는 건.
‘내가 아까 준 우산 가지고 경수 기다려.’
‘…….’
‘김종인은 내가 끌고 나갈 테니까, 도경수 우산 없을 거야. 그리고 애들이랑 집 방향 달라서 혼자 갈 거고.’
‘……변백현.’
‘우산 같이 쓰자 하면 바로 쓸 애니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
‘난 여친꺼 쓰고 가면 돼.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가야겠다. 안녕.’
……여자친구와 단 둘이 아닌 혼자서, 우산도 하나 없는 맨 몸 그대로 교문 밖을 걸어 나가는 변백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