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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예종
● 본명: 이황, 세조의 둘째아들(맏아들의 요절로 승계)
● 출생-사망: 1450 ~ 1469
● 재위기간: 1468년 9월~1469년 11월(1년 2개월)
● 주요 업적: (딱히 없음)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는 유자광의 고변을 듣고 남이 일파 제거 (재위 1년 남짓 만에 요절)
[제8대 예종실록]
[1.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예조의 짧은 재위] (1450-1469, 재위 기간 1468년 9월-1469년 11월, 1년 2개월)
세조의 아들들은 몸이 유약해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그 죄가를 받은 것이라고도 했다. 세조의 맏아들은 의경세자였다. 그는 세조가 즉위하자 18세의 나이로 즉시 세자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 수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2년 뒤에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일설에는 그가 낮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살을 맞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두 번째 세자에 책봉된 사람이 예종이었다. 하지만 예종 역시 수명이 길지 못했다.
예종은 1450년 태생으로 이름은 황, 자는 명조였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에 해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57년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즉위하긴 했으나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데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섭정과 원상제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행사해야 했다.
섭정은 모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뤄졌는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행한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정희왕후는 성격이 대담하고 결단력이 강한 여자였기에 예종의 유약한 성품을 잘 떠받쳐주었다. 또 예종도 세자 시절에 왕의 서무에 참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국사 처리가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종 시대의 조정은 그다지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왕권은 미약했다. 또한 왕의 업무 결재 능력의 미숙함을 보조하기 위해 원상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원상제도는 세조가 죽기 전에 예종의 원만한 정사 운영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 제도였다. 왕이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 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세 중신의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측근 세력들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정치 보조를 바탕으로 예종의 1년 2개월 동안의 짧은 치세가 이루어졌다. 1468년에 유자광의 계략으로 '남이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을 처형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다. 또한 그 해 6해에는 각 도에 있는 군전(병영에 예속된 전답)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9월에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처럼 예종은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에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대리서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시기에도 세조 때와 마찬가지로 언관들에 대한 왕의 태도는 강경했다. 언관들에게 강경했다는 것은 왕권이 안정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의 결과이기도 했는데, 다시 말해 왕권은 미약했지만 정희왕후의 힘은 강력했다는 뜻이다.
예종의 정비는 영의정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였다. 하지만 그녀가 17세에 요절하자 계비로우의정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를 맞이했다. 예종의 능호는 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용두동 서오릉 묘역에 있다.
[2.예종의 가족들]
제8대 예종의 가계도
예종은 정비 장순왕후와 계비 안순왕후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들에게 2남 1녀를얻었다. 세자빈 시절에 죽은 정비 장순왕후 한씨 소생으로는 인성대군이 있었고, 계비안순왕후 한씨 소생으로는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었다. 하지만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덕종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이 세자에 책봉되었기에 예종의 아들은 아무도 세자가 되지못했다.
인성대군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는 유년 시절에 죽은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에 장순왕후, 안순왕후, 제안대군 등의 삶을 약술하여 예종의 가족사를 살펴보도록 한다.
장순왕후 한씨(1445-1461)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는 영의정 한명회와 부인 민씨의 큰딸이다. 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친언니로 동시에 촌수로는 그녀의 시숙모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1460년에 당시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예종과 가례하여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1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 후 1472년(성종 3년)에 장순왕후에 추존되었다. 능은 공릉으로 경기도 파주에 있다. 공릉은 조성 당시 세자빈 묘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난간은 없고, 봉분 앞에 장명등과 혼유석만 놓여 있으며, 능 앞 양쪽에 문석과 석마를 세우고 석양과 석호가 추가로 설치되어 능을 호위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순왕후 한씨(?-1498)
안순왕후 한씨는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이며, 1460년 한명회의 딸이었던 세자빈이 병사하자 1462년 예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예종이 병사했기 때문에 1471년 인혜대비에 봉해졌다. 그러다가 1497년(연산군 3년)에 다시 명의대비로 개봉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죽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으며, 제안대군의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능은 창릉으로 예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묘역에 합장되어 있다.
제안대군(1466-1525)
제안대군은 예종의 둘째아들이며 안순왕후 한씨 소생이다. 4세 때 부왕인 예종이 죽자 왕위 계승의 첫 번째 후보로 올랐으나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의 반대로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이후 1470년 5세의 나이로 제안대군에 봉해졌으며,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12세에 사도시정 김수말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어머니 안순왕후가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에 14세에 다시 박중선의 딸과 혼인하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쫓겨난 김씨를 잊지 못해 1485년 20세 때 성종의 배려로 그녀와 다시 복합하였다. 1498년 안순왕후가 죽은 후로 홀로 거처하였으며, 평생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는 노래를 즐기고 사죽관현 연주에 뛰어났다. 그래서 연산군이 네 차례나 음률을 잘 아는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그에게 내렸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패관잡기'에서는 '그는 성품이 어리석었다'고 기록하는 한편 '그것은 몸을 보전하기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즉 왕위 계승전에서 밀려난 사람은 언제든지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고의로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보신책 덕분이었는지 그는 1525년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3.예종 시대 최대의 옥사 '남이의 역모 사건']
재위 기간이 14개월밖에 안 된 예종 대에도 대대적인 숙정 작업이 있었다. 이 숙정 작업은 한명회, 신숙주 등의 승정원 원상 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남이, 강순의 역모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약 30명의 무인 관료가 죽고 그 가솔들이 노비로 전락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과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 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한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 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고, 병권의 수장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그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강희맹, 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에 비하면, 예종은 유약하고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다. 예종은 그 때문에 촌수로 당숙뻘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직에서 해임시켜버렸던 것이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직으로 물러났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이 광경을 보면서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병조참지로 있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고변해 그를 역신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마찬가지로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로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난 자였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하고 있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해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이 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 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유자광은 또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의 집에서 북방 야인들에 대한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 같은 천별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고변당할까 봐 두렵다'고 말하며 '그 간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여 진술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남이 측근들에 대한 문초는 강해질 수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남이와 함께 겸사복장으로 있던 문효량이 역모를 시인했다. 문효량은 여진 출신 장수로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었다. 문효량은 '언젠가 남이의 침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남이는 하늘의 변화를 기화로 간신들이 모란할 징조가 엿보이므로 자신과 함께 이들을 몰아내 나라에 은혜를 갚자는 제의를 했으며, 그리고 이 거사에 영의정 강순도 뜻을 함께 하고 있으니 왕이 산릉에 갈 때, 도중에 두목격인 한명회 등을 제거한 다음 영순군과 구성군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문효량의 이 진술은 남이로 하여금 역모를 시인하게 만들었다. 버텨봐야 문초만 더 당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는 역모 관련 내용을 모두 인정했고, 영의정 강순역시 시인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으로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조경치의 장인인 김개가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측근 30여 명도 함께 죽였다. 그리고 이 밖의 가솔들과 친분 관계가 있는 자들은 공신녹권이 몰수당하고 종으로 전락시키거나 변방에서 종군하게 하였다.
남이의 기질과 경력으로 볼 때 이때의 역모 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까지 오른 그가 예종이 즉위 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울분이 컸을 것이다. 더구나 남이가 무인이었고 역모 사건 발각 당시에 가까이 지내던 영의정 강순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이 무인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한명회, 노사신 등의 훈구 대신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남이의 옥을 날조 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 <연려실기술>인데, 여기에서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조선 중기의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이 강한 조선 사학도들은 유자광을 참사를 획책하는 극악무도한 간신배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이의 역모'는 단지 그 간신배 유자광의 날조극이라고 믿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다. 현재 남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설화들은 그의 출생, 결혼, 입공,죽음 등의 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4단계는 모두 원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테면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남았다는 등 대개는 그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다. 이 때문에 민간과 무속에서는 남이 장군신을 믿는 신앙이 형성돼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이는 용맹을 떨쳤던 남이의 위용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출발하고 있다.
[4.<예종실록> 편찬 경위]
<예종실록>은 총 8권 5책으로 되어 있으며, 원명은 '예종양도대왕실록'이다. 여기에는 1468년 9월에서 1469년 11월까지 예종 재위 1년 2개월 동안에 일어난 각 방면의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다른 실록과 함께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는 <예종실록>은 예종이 죽은 다음해인 1470년 2월에 내려진 왕명에 따라 사초를 꺼냈으나, 당시 <세조실록>이 아직 편찬되지 못한 관계로 편찬 작업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1471년 12월 <세조실록>이 완성되자 곧바로 편찬에 착수하여 반년 뒤인 1472년 5월에 완성되었다. <예종실록>편찬 작업은 신숙주와 한명회를 춘추관 영관사로 하여 최항의 감수 아래 강희맹, 양성지 등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당시 작성된 것 중 현재 남아 있는 <예종실록>은 전주사고에 봉안하던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필사하여 5부가 있었으나, 1624년 이괄의 난(인조2년) 때 춘추관본은 타서
없어지고 나머지 4부만 전해지고 있다.
#예종 시대의 세계 약사
예종이 즉위하던 1468년 독일에서는 서양 최초로 인쇄본을 간행한 구텐베르크가 죽었으며, 예종이 죽던 1469년에는 영국 작가 말로리가 <아더왕의 죽음>을 완성했다.
조선왕조 제8대 예종
예종의 즉위
예종은 1450년 태생으로 이름은 황, 자는 명조였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 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 음에 해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57년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7일 세조로 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원상제도
원상제도는 세조가 죽기 전에 예종 의 원만한 정사 운영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 제도 였다. 왕이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 원에 상시 출근해 모든 국정 을 상의해서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 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세 중신은 한명회, 신숙주, 구치 관 등 측근 세력들이었다.
예종의 짧은 치세
1468년에 유자광의 계략으로 '남이 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 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 하 등을 처형시켰으며, 이듬 해에는 삼포 에서 왜와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다. 또한 그 해 6월에는 각 도에 있 는 둔 전(병영에 예속된 전답)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 다. 그리고 9월에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하지 못하 고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장순왕후 한씨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는 영의 정 한명회와 부인 민씨의 큰 딸이다. 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친언니로 동시에 촌 수로는 그녀의 시숙모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1460년에 당 시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예종과 가례하여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이 듬 해 원손 인성대군을 낳 고 건강이 악화되어 17세의 나이로 요절했 다. 그 후 1472년(성종3년)에 장순왕후에 추존되었다. 능은 공릉으로 경기도 파주에 있다. 공릉은 조성 당시 세자빈묘로 만들어졌기 때문 에 난간은 없고, 봉분 앞에 장명등과 혼유석만 놓여 있으며, 능 앞 양 쪽에 문석과 석마를 세우고 석양과 석호가 추가로 설치되어 능을 호위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순왕후 한씨
안순왕후 한씨는 청주부원군 한백륜 의 딸이며, 1460년 한명회의 딸이었던 세자빈이 병사하자 1462년 예종 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 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예종이 병사했기 때문에 1 471년 인 혜대비에 봉해졌다. 그러다가 1497년(연산군3년)에 다시 명의대비로 개봉되었으며 그 이듬 해 죽었다. 그녀 의 소생으로는 제안대군과 현 숙공주가 있으며, 제안대군의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 다. 그녀의 능은 창 릉으로 예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묘역 에 합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