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6 주일설교
인본주의자의 최후
사무엘하 13:22~39
저는 지난 주간에 매우 억울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내용이 무엇인지는 설교시간에 언급하지 않겠지만 저와 함께 현장에 있었거나 후에 그 내용을 알게 된 분 중에도 많은 분들이 속상해할 정도였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이 안 나왔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고 강력하게 대처하겠다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서 기도하고 또 말씀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겠지만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세상을 살다보면 말도 안 되게 억울한 일을 당하여 견디기 힘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힘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너 죽고 나 죽자고 하든지 아니면 힘이 생길 때까지 칼을 갈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억울할 때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능력 있는 압살롬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능력이 있는 왕자였습니다. 압살롬은 우선 외모가 잘 생겼습니다. 사무엘하 14:25~27을 보면 그는 빼어난 미남이었고 압살롬의 딸까지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삼하 14: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삼하 14:26)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삼하 14:27)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또한 압살롬은 결단력도 있고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15:2~6을 보면 그는 국민의 마음을 아버지 다윗에게서 자기에게로 훔친 후에 4년 만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삼하 15:2)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삼하 15:3)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삼하 15:4)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삼하 15:5)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삼하 15:6)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이런 압살롬이었으니 압살롬은 맏아들 암논의 경계 대상이었습니다. 세자의 위치에 있는 암논은 언제나 셋째가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논은 어리석게도 압살롬을 짓밟아 버리기 위해 다말을 욕보이기로 했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범한 후의 행동을 보면 암논은 처음부터 다말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의 동생인 처녀 다말을 범하므로 압살롬을 짓밟으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암논에게 야비한 사촌 요나답이 붙었습니다. 요나답의 작전은 성공적이어서 암논은 다말을 범함으로 다말과 압살롬을 수치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원수 갚는 압살롬
집안에서 강간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은 ‘이게 다 나의 죄 때문에 생긴 일이다’하고 자책(自責)만하고 있을 뿐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화가 난 압살롬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해결해 주지 않으면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동생 다말을 건드린 것은 곧 압살롬을 짓밟은 것이니 반드시 몇 배로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압살롬은 철저하고 장기적인 복수 계획을 세웠습니다. 압살롬은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암논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 암논의 잘잘못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압살롬은 2년간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땅 바알하솔에서 양털을 깎는 날에 큰 잔치를 열고 모든 왕자를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왕을 초대했습니다. 이것은 왕이 거절할 경우 세자 암논을 초대하는 것에 성공하기 위한 초석이었습니다.
압살롬의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모두가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기분 좋게 술이 잔뜩 취했을 때 암살롬의 종들은 실수 없이 암논을 살해했습니다. 이제 압살롬은 세자의 서열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둘째 아들 길르압이 있었지만 아무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일찍이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암논이 죽는 것을 본 왕자들은 놀라서 예루살렘으로 도망을 갔고 압살롬 역시 도망을 갔지만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외조부의 나라 그술로 달아난 압살롬은 거기서 3년을 살았습니다. 그술은 갈릴리바다 동쪽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그 3년 동안 압살롬이 어떻게 지냈는지 설명이 없지만 아마도 본국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다윗의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압살롬을 향해 간절해졌습니다(39절). 아마도 암논은 어차피 죽었고 세자가 될 사람은 역시 압살롬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이렇게 우유부단한 사람이 되어 버렸을까요? 마음은 그렇지만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는 다윗을 위해 요압이 작전을 세워 왕이 압살롬을 불러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사무엘하 14장). 요압의 작전은 잘 먹혀들어서 다윗은 요압에게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허락했습니다.
반역하는 압살롬
그런데 압살롬이 귀국했지만 다윗은 그를 만나주지 않고 그냥 자기 집으로 물러가라고 했습니다(삼하 14:24). 그렇게 또 2년이 흘렀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압살롬은 요압을 불러서 이럴 것이면 왜 자기를 데려 왔느냐고 따졌습니다(삼하 14:32). 이번에도 요압의 중재로 다윗과 압살롬은 드디어 부자상봉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만난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사건과 문제를 해결할 마음도 잃어버렸고 나라를 제대로 통치할 능력도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제는 이 나라를 자기가 접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압살롬은 호위병 50명을 세웠는데 이것은 자신이 세자라고 대외에 천명하는 행동이었습니다(삼하 15:1).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그는 성문 길 곁에 앉았습니다. 거기서 기다리다가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백성들을 만나면 입을 맞추고 사연을 들어줍니다. 자기가 왕이라면 문제를 해결해 줄 텐데 부왕(父王)은 재판관을 세워놓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압살롬은 4년 만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감히 아버지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압살롬의 반란군이 요압의 군대에 패하고 압살롬은 요압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압살롬의 결말이며 최후입니다.
인본주의자 압살롬
압살롬은 형 암논조차 시기하고 경계할 만큼 능력 있는 왕자였습니다. 외모도 출중해서 온 백성이 흠모할 만했습니다. 그는 용기도 있고 결단력도 있는 사람이어서 아버지가 처벌하지 않은 강간범을 자신이 처단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결단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결국 아버지를 향해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계획에는 하나님이 빠지고 없습니다. 언제나 인본주의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문제 해결도 자기 방식대로 했고 자기의 권리도 자기가 알아서 챙겼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방법은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거짓말이든 속임수든 반란이든 패륜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아마 압살롬은 자기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자기의 반란을 도와주어서 전쟁에 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란을 실패했습니다. 압살롬은 너무 멀리 나갔습니다. 압살롬처럼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는 결국 망하는 법입니다.
압살롬은 아까운 사람입니다. 형 암논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암논은 어리석게도 압살롬에게 도발했습니다. 압살롬은 아까운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강간법을 처벌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아마 처벌했다면 암논을 사형시키지는 않았어도 세자 자격을 박탈했겠죠. 그러면 후에 압살롬이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아까운 사람입니다. 그술에서 돌아온 후에 아버지가 답답하더라도 반역하지 않고 아버지의 부족한 부분을 도우면서 기다렸다면 자연스럽게 차기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한 가지도 하나님께 맡기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본주의자가 되지 말라
사람이 인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 하실 기회를 드리지 많고 하나님이 하시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억울함도 내가 내 힘과 내 방식으로 풀고 성취도 내가 내 힘과 내 방식으로 하겠다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멸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억울합니까? 지금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지만 몇 년이건 칼을 갈면서 오직 복수에 내 인생을 불태워야겠다는 마음입니까?
또 여러분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인데 누가 감히 내가 가는 길을 막는단 말이냐 하면서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면 안 됩니다. 내 억울함도 내가 풀고 내 소원과 목표도 반드시 내가 이루겠다는 인본주의자가 되면 그 결말은 소원 성취가 아니라 파멸에 떨어질 것입니다. 행복이 아니라 모두의 불행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억울해서 견디기 힘든 일을 당한 것은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좀 더 낮추라고 하시는 메시지입니다. 이미 많이 낮추었지만 낮춘 김에 아주 납작 엎드리라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낮추라고 하실 때는 낮추어야 합니다. 스스로 머리를 쳐들고 억울함을 호소하면 추해질 뿐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고 자기 힘과 인본주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면 파멸에 이를 뿐입니다.
베드로는 억울하고 부당한 고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죄를 짓고 벌 받으면 당연히 달게 받아야겠지만 부당하게 죄인 취급을 받을 때에도 참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벧전 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에너지 중에 가장 강력한 에너지는 분노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파괴적인 에너지입니다. 억울하다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교회도 망하고 하나님 나라에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운전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굉장히 급하게 운전을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급하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급히 운전하는가 생각해보니 내 안에 있는 분노 에너지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 마음의 분노 에너지를 내려놓아야 내가 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본주의자는 불신자입니다. 인본주의자는 파멸합니다. 이 땅에서 파멸하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무대이며 우리 모두는 그 무대 위의 배우들입니다. 우리는 연출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본분입니다. 배우가 연출자를 무시하면 퇴출당합니다. 어와 여러분은 인본주의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라고 인정받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