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138-32 소재. 1956년 2월 21일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가정.
포천 지방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그의 아들 홍인(洪鏔) 레오의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믿음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신유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다른 지방의 신자들이 포천
지방으로 옮겨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900년 초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해룡마을에 포천 지방 최초의 공소가 설치된
이후 내촌, 맑은 데미, 송우리, 고일리, 오가리, 새묵이 등지에 공소가 설정되었다고 한다. 포천 지방은 1921년경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전교 활동을 하고 있던 손성재(孫聖載) 야고보 신부에 의해 사목되다가 그 후 1930년 개성 본당,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행주 본당,
1935년부터 덕정리 본당(현 의정부 주교좌본당)의 관할 지역에 속하였다.
1956년 포천 본당이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포천 일대에 주둔한 6군단 군단장
이한림(가브리엘) 장군의 도움이 컸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한림 장군은 익명의 독지가가 기증한 1,000여 평 대지에 공병 부대의 도움을 받아
성당 건축을 추진하였다. 1955년 11월 60평의 석조 건물로 된 성당과 사제관 20평을 완공하였고, 12월에 춘천 대목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건축을 전후로 잠시 6군단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군종 신부가 포천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하다가 1956년 2월 김진하(金瑨河) 요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포천 본당이 설립되었다.
김진하
신부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공소들을 방문하면서 사목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미국 가톨릭 복지협의회 산하 전쟁 구호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한국 전쟁 직후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의 구제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본당의 발전을 논의하기 위해 사목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뒤이어
신심 단체인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다.
1969년부터 가평군과 포천군 일대가 서울대교구로부터 분할되어 춘천교구에 편입됨에 따라
강원도 일대의 선교를 담당하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크로스비(P. Crosbie, 조선희) 필립보 신부가 포천 본당의 8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70년 11월 운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하고, 양문, 관인, 지포리, 문혜리 일대 신자 306명을 이관하였다.
1971년 11월 4일에는 크로스비 신부의 권고에 따라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에서 포천읍 신읍리 151-3번지에 2층 건물 44평과 2층 창고
건물 12평으로 된 수녀원을 세웠다. 같은 해 11월 7일 일동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하여 내촌면, 일동면, 이동면, 화현면 등지의 신자
279명을 이관하였다. 그리고 11월 말에는 미군 부대의 협조를 얻어 경사면의 성당 대지를 평지로 조성하였으며, 1972년 8월 해룡마을에 마을
회관을 겸한 해룡 공소 회관을 건립하였다.
9대
주임 페리(F. Ferrie, 황) 프란치스코 신부 재임기인 1977년 2월에는 본당 신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포천 대건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1978년에는 신자들이 영적 독서와 성서에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본당 내 교리실을 도서관으로
바꿨고, 1979년 11월 약 40평 규모의 유치원 건물을 완공하였다. 10대 주임 누젠트(W. Nugent, 유) 월터 신부 재임기인
1980년 4월에는 유아들의 교육을 위해 복자유치원을 개원하였고, 1982년 5월에는 성당 정문부터 사제관까지 도로 포장공사를 시행하였으며,
1983년 11월에는 2층 건물로 된 사제관을 완공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1대 주임 엘리스(G. Ellis, 엄) 제라르도 신부 재임기인 1984년 4월에는
레지오 마리애 첫 모임을 개최하였고, 1985년 1월 13일에는 성체회를 발족하였으며, 1월 26일에는 청년회를 26세 이상 청년회원을 중심으로
‘젊은이의 모임’이란 명칭으로 분리하였다. 또한 1987년 3월 초등부 주일학교를 후원하기 위한 자모회를 조직하는 등 본당 내 각 단체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8년에는 1969년부터 약 20년간 본당의 사목을 담당해 오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들 대신 한국인 사제인 허동선(許東善) 마태오 신부가 1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허동선 신부 재임기인 1988년에는 신평 공소
내에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청년 레지오인 황금 궁전 쁘레시디움과 부부들의 모임인 M.E.를 새롭게 결성하였다. 13대 주임 박우성(朴宇成)
사무엘 신부 재임기인 1989년 6월에는 송우리 공소 사도회를 발족하였고, 7월에는 청장년들의 모임인 프란치스코회를 창단하는 등 신심 단체
조직을 통해 본당 활성화에 주력하였다.
1990년
7월 11일 한 취객의 방화로 인해 성당이 완전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주임 신부와 신자들은 화재 발생 다음날인 7월 12일 성당 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당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였다. 박우성 신부와 신자들은 새 성당 건립을 위한 ‘사랑과 나눔의 바자회’ 개최
등을 통해 모금한 기금과 전국 각지에서 받은 성금으로 1992년 3월 새 성당 기공식을 거행하였고, 12월 10일 총건평 205평, 연건평
204평의 지하 1층 · 지상 2층으로 된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91년 8월에는 송우리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하였다.
14대 주임 김정식(金晶植) 토마스 신부 재임기인 1994년 10월부터 수녀원 보수와
증축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 축복식을 거행하였고, 1999년 5월에는 서울대교구 동두천 · 노원 · 덕정 본당 및 춘천교구 송우리(현 솔모루)
본당 신자들과 함께 ‘한마음 가족 체육대회’에 참여하여 교구의 벽을 넘어 친교의 장을 마련하였다. 15대 주임 강성구(姜成求) 요한 신부
재임기인 2000년 6월 철원 월정리에서 개최된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 대회’에 본당 신자 150여 명이 참석하여 남북한의
화합을 기원하였고, 2003년에는 타본당 돕기의 일환으로 2차 헌금을 모아 신남 본당에 전달하였다. [출처 : 양인성,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2005년]
6ㆍ25
전쟁 후 군부대 지원을 받아 지어진 옛 포천 성당은 1990년 한 취객의 방화로 목조 마룻바닥과 지붕틀 등이 불타 뼈대만 남았지만 역사 보존
차원에서 1992년 새 성당을 건립한 후에도 헐지 않고 보존해왔다. 이한림 장군은 신앙 역사가 신유박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포천에 성당이 없는
것을 알고 1955년 포천 어디서든 잘 보이는 왕방산 기슭 언덕에 인근 덕정리에서 가져온 화강석으로 성당을 건립하였다. 이듬해 본당으로 설립된
포천 본당은 그 후 춘천교구 서부 지역, 즉 경기북부 지역 복음화의 산실이 되었다.
옛 포천 성당은 한국 전쟁 직후에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의장적 특징(종탑과
뾰족한 아치 창호)과 공간적 특징(단일 홀로 구성된 강당형 평면), 화강석 조적구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또 한국전쟁 이후 많은 교회
건물을 석조로 지었지만 군부대가 직접 세운 것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9월 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옛 성당은 내벽 풍화와 균열이 심하고, 외벽도 인위적 충격이 가해지거나 강풍이 불면 붕괴될 가능성이 있어 출입로를
폐쇄하고 위험 경고판을 세워 놓았다.
2006년 5월 1일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포천 성당은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홍인 레오 부자의 순교 정신을 계승하여 보다 활기찬 신앙 공동체로 거듭나고자 내실을 기하고 있다. 2011년 초에는 성당 구내에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할 레오 회관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포천의 사도인 홍교만과 홍인 부자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최종수정 2014년 8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