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현대시 신인상 당선작] 최세운 이소호 정선율
라가 외 4편 / 최세운
새벽에 모든 방언은 물의 간격으로 만들어진다
아버지가 더운 몸을 끌어안고 강물 속에서 걸어온다 저, 걸음걸이에서 쏟아지는 사각얼음들 훈김에 젖은 새들 그의 딱딱한 부리들 발톱과 가발 걸린 나무, 안개는 깊은 원을 그리며 아버지를 지운다 사방은 흰 벽이 된다
흐르던 피가 그쳤다 사람들은 광장에 나와 춤을 추었다 사제들이 심판은 끝났다고 했다 모든 문이 잠겼다 어서 점령군의 깃발로 걸라고 했다 보국단원이 형들을 끌고 뒷산으로 갔다
사과의 둘레를 다섯 바퀴 도는 동안 여자의 눈에서 손바닥이 떨어졌다 일정한 길이로 손목을 자르던 여자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바닥에 아기가 넘쳤어 시계를 보지 않는다 발끝을 보지 않는다 여자의 입술이 형광등 아래서 변색되고 있다
나는 왕국설을 들으며 눈을 뜬다 어머니는 안경을 쓰고 노트에 묵상록을 옮겨 적는다 천 년은 하루처럼 하루는 천 년처럼 간단다 잠긴 문고리를 만 번 정도 비틀면 어머니가 햇빛과 채찍을 들고 왔다
*
마을의 모든 새가 도살되었다 어린 니체가 강대상 뒤에서 울기 시작했다
*라가 : 인도 음악의 선율. 성경에서 바보라는 뜻
점점
세잔의 나비들은 제자리에서 깍지를 낀다 저수지의 하늘에 화장실이 걸려 있다 발끝에서 나비들이 액자처럼, 난다 난다 난다 나비들은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몸을 버린다
구름의 윤곽이 조금 흐려졌다는 믿음은 사물들이 욕조로 이동한다는 믿음을, 형광등을 끄고 사물들을 수건으로 닦아내는 믿음은 얼굴들이 피처럼 지워졌다 나타나는 믿음을,
손뼉을 칠 때, 몸을 터트리는 중이라고 말한다
입김이 깊이 가라앉는다 물 안에서 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이 일어선다 두 손으로 아버지의 정수리를 누르고 누르면 눈을 치켜뜨고 발버둥치는 수면
편하게 갈라지는 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는 몸을 보거라 거울 속의 핏물은 더 검어지거라 저수지의 바닥이 깊어질수록 욕조에서 비린내가 났다 터진 손바닥이 낫는 것이라고 믿는다
잠긴 아버지는 세잔처럼 울지 않는다 심심하게 걸린 우리는 점점, 욕조에 날개들이 넘쳐흘렀다 색채가 풍부해질 때 현기증을 느낀 나비들이 익사하는 것
물을 지운다
저수지는 단단하게 잠겨 있다
화장실에서 아무도 걸어서 나오지 않는다
카친
하늘이 가늘게 찢어졌다
불개미들이 뱅글뱅글 돌 모양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더듬이가 돋는 느낌
머리끝에서 딸기들이 태어나는 느낌
그가 보인다 수고꼭지를 잠근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 물속에서 그가 서 있었는데, 그릇을 닦는다 발가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초콜릿과 헤어졌다 사라진 접시 위에 그릇들이 놓일 때 차례차례 쌓인 접시 속에서 늙은 여우가 달그락 소리를 낸다 접시는 녹지 않는다 접시는 피에몬테 겨울이고 설원에서 여우는 발톱을 모으고 깊이 잔다
도끼를 쥔 그와 임신한 그의 아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싱크대에서 손을 잡고 나란히 흘러가는 부부 젖은 사과껍질에 걸린 그들의 발이 보인다 오늘은 울지 말라고 도마를 두드린다 부부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눈을 뜨고 우기를 맞는다 스푼 위에서 얼굴만 길어진 나는 싱크대를 닦는 중이다
사람 없는 회전목마처럼
식탁이 놓여 있다
매트 위에 서면
정오들이 만국기처럼 지나간다
안 될거야 언제나 네 번째 목소리가 나를 눕힌다
간유리 사이로 무릎이 잘린 부부가 빠져 나간다 손이 하얗게 젖고 접시가 마른다 테니스공처럼 팔딱 튀어 오르면서 접시가 하햫게 마른다
얼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아
뜨거워진 달걀들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요일은 노란
노란은 신을 벗고 심심한 노래를 이제부터 하얗고 긴 손가락이 되는 기분 사각형의 노란에게서 간결한 바람이 분다 창문을 닫지 않았다 액자와 수건이 마르지 않았고 노란이 닿는 곳에서 네가 지나치기 쉬운 부분에서 뾰족한 귀들이 태어난다 벽에 매달린, 작고 보드라운 도마뱀 같고 어깨가 부푼, 개구리밥 같고 세 개쯤의 축축한 귀가 극적인 소리를 가져온다 젊은 여자는 사랑해서 그랬다고 가스 불을 켜고 울면서 거젓말을 생각하는 오후 노란은 끝없이 뭔가를 두드린다 바늘같이 앞니같이 노란은 눈을 감고 네 들을 보이며 노란, 춤추는 법을 아니? 노란이 옅어지는 두 다리를 모을 때 한 명의 귀가 더 태어난다 빗방울들은 공중에서 손을 녹이고 겨울에 비친 내 입김을 조금씩 떼어가는 노란, 노란들 창백함이 되려고 유실물이 되려고 너의 발꿈치는 더 동그래지고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손가락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노란은 웃고 소란한 새 친구들이 태어나고 노란이 방안에 넘친다 네 그림자를 위해 담장에 유리조각을 꽃아두었어 노란은 비어있다 노란이 흐르기를 시작하고 언딘가에 터진 곳이 있을 거라고 베개 속에 무표정이 있을 거라고 내 옆에서 누운 노란은 노래를 그친 노란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깊이, 쳐다본다
아잔의 르
르,라고 다시 내놓으라고 기호성이라고 가호가 있으라고 맛있는 돼지수프요리라고 오늘은 선택된 날이고 흐리고 너는 부르카를 쓴다고 너는 침대 위에 눕고 너는 의자 위에 서서 커튼처럼 운다고 벽과 화병은 얇고 더 가벼워진다고 눈을 뜨라고 귀를 감지 말라고 표정을 내놓으라고 손을 잦으라고 포크를 쥐라고 다리를 구르라고 가까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라고 르는 튜브 안에서 천천히 흐르고 르가 무거워질수록 손바닥은 하늘로 향하고 창가는 단단해 황금지붕의 꿈을 꾸면서 너의 발목까지 흘러왔던 것은 르의 입술이라고 양발이 묶인 수직선이라고 초록빛의 수심이라고 내려오라고 잎사귀에서 뿔이 자라는 게 신기하다고 분명한 안색을 보고 싶다고 귓불이 매끄럽다고 거울을 보라고 우산을 쓴 개미들의 행렬이 우습지 않느냐고 입을 크게 벌리면서 더 밝아지자고 손톱 안의 반원으로 다시 태어나자고 모든 바닥은 팽팽해지고 의자와 나는 너의 공중으로 엎드린다 부르카의 끝에서 르가 떨어진다
*아잔 : 이슬람교에서 예배 시각을 알리는 송영
[2014 현대시 하반기 신인추천작품상 당선작] 이소호 정선율
얼굴 외 이소호
주름을 더듬었다. 멍든 눈동자에서 내가 쏟아졌다. 차곡차곡, 나는 눈둥자에 빗방울을 매달아 떠나보냈다. 전속력으로 사라졌다. 인중을 따라 베개 위에 하얗게 깎인 입술, 누워있다. 벼랑 끝으로 내몰려갔다.
낼름 목소리를 높여 읽어본다
낼름 밑줄을 쳐본다
낼름 배고픈 혀가 말의 눈을 감겨버린다
말이 밖으로 나갔다. 말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지 않았다. 의문부호만큼 많은 시침을 가진 밤이 아직도 오고 있었다. 뒤뜰에서 떨어진 별들은 쓸데없이 목숨이 많았다. 몸부림 한번 치지 않던 전화기가 아가미를 열었다. 얼굴을 핥았다
일곱 살
아직 숲을 통과하지 못했다 사막 한가운데 모서리들이 모여 빈 방을 다발로 낳았다 크레파스로 그린 창살에 갇히기 위해,빨강 파랑 노랑 채집된 지문은 둥글게 앉았다 오후 다섯 시부터 나는 바람으로 빚은 짐승, 지는 해를 먹고 나날이 자라온 나는 방으로 들어가 스케치북 위에 가지런히 놓은 코끼리를 하마를 사냥했다 이마에 새겨진 서로의 꼭짓점을 맹렬히 공격하며 등줄기를 횡단하던 식은땀 한줄기 햇볕에 볼록렌즈를 갖다 대고 숲을 몽땅 태워버렸다 어떠한 소문도 박수갈채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동물들은 방 안에서 뜨겁게 소화되고 있었다 코를 흔들어대며 이름 대신 가죽 같은 재를 남기고 흙먼지를 뒤집어 쓴 손바닥 위로 뒤축을 구긴 신발이 달리고.
연습
밥 한 끼 먹자던 가벼운 약속처럼, 시간이 자리를 내어주면 우리는 비로소 체온을 잃지. 울창한 육체 사이로 마지막 잎새 같은 당신의 손바닥, 깍지를 끼고 날마다 빗금을 그으며 남겨진 날들, 접시 위에 살갗을 거슬러 절반의 옆모습 뒷모습을 포개어 두고 재회한 우리, 매 순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전에 명복을 빌어. 우리가 즐겨했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수포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서, 반복되고 반복되는 오늘과 같이 벌거벚은 우리는 멀미를 하고 여전히 귓가엔 고백들이 방을 나서는 소리. 당신과 온 생애를 거슬러 마지막 음표를 마치고,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길. 당신이 끝끝내 가지고 돌아온 나는 이미 오래전 잊혀진 걸 알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는 연습을 할 테니, 당신은 오늘의 거짓말을 영영 들키지 말길
이소호_1988년 전북 무주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재학중
엉덩이가 보이는 첼리스트 잭슨의 정원 외 정선율
어제는 잭슨이 오기로 한 시간 나는 컵을 깨고 있다 향나무를 태운 정원사는 컵을 깨기 위해 남편을 만들고 마녀를 만들었다지('아 목동아'에는 몇 개의 프레이즈가 있습니까) 접시의 윤곽을 지우자 오늘 밤이 선명해진다 통조림은 틀린 것 같아 우린 같은 라면을 먹고 있다니까? 남은 변명이 없어서 여름이 지나지 않는다 나의 팔은 자꾸만 흘러내린다
그것은 아주 여리게, p보다 더 여리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우산은 내가 몇 번이나 떨어트린 컵을 받아주었다 너는 두 명이고 나는 한명이다 나는 세 명이고 너는 한 명이다 지금부터 나는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죽어가기로 한다 복부에서 펀치, 둔부에서 펀치, 정원사는 자꾸만 나의 자두를 숨겨놓는다
근음은 하행입니다 3음이 중복될 시엔 5음을 중복시킵니다
주3화음과 부3화음을 녕결시켜줍니다
기쁘지 않다고 말해야 자라는 새, 거품을 모았다가 거실에서 운다 새의 발톱으로 나는 미녀가 되는데 부모가 되기 위해 고아가 됐구나 정원사는 냄새를 흥얼거린다 속이 생기고 손이 생긴다 나초 젤리, 푸딩, 크린베리, 스프링, 우리는 서로를 들키기 위해 엄마를 만지기로 한다 변색되기 위해 길어지는 해
세 번 동작, 두 번의 달리기
세 사람이 끼어든다 변장에 성공하는데
다음날에 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레가토란 부드럽게 소리 내라는 활줄 활줄 활줄의 표시
하행진행을 유도합니다
엄마는 다리를 꼬지 않아도 팔을 잃을 수 있다니까?
스타카토보다 더욱 짧게
잃은 팔을 제거하면 몸이 불어난다 내가 들은 것은 너에게서 나왔다고, 결말이 드러난다 절반이 되기 위해 자라나는 팔, 나는 가려야 한다 흔들림 없이 일정하게, 미녀의 코끝을 가리키며 정원사는 두세번 세수를 한다
가볍게 팔을 교차합니다
한 손이 다른 손을 따라갑니다
앞니가 자란 정원사, 두 개의 팔이 자란 나의 속엔 가려운 곳이 많아진다. 내동댕이쳐진 자두, 우린 위로 올라간다 목이 젖도록 눈이 내린다
어딘가에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내가 창문을 열면 나와 헤어진 연인들이 다시 창문을 닫아준다
형은 접시 위의 자두로
신은 지우개의 모양으로
허리를 삼킨다
터지려는 듯
열쇠는 죄가 많아 애인을 형에게 준다
형이 나에게 오고
나의 애인이 형에게 가면
형은 나에게 오고
첼로케이스를 가지고 오고
나의 애인은 접시 위에 반쯤 깐 귤이나 되라지
신이 붓펜으로 변하듯이 형은 나에게 허리를 보이고
자두를 벗기고
처음 만지는 것처럼
창문이 열리고
형이 나에게 오고
그럼 나는 애인에게 갈텐데
코트를 꺼내서 주었다
어색하게 들려 커튼은 형을 보고 있다
주화음
형이 커튼을 보고 있다
5음의 생략
나는 애인을 보고 있다
구성요소
우리는 코트를 벗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창문을 닫아야 할까
본래의 이끔음
형은 자두를 지우고
새들은 볼륨을 줄이고 있다
새들을 쪼아 먹는 형
애인은 자두를 삼킨다
반음계적 반음계적
형은 등이 가렵다고 한다
약속을 했어야지
단조는 모두가 같은 성질
창문은 열두 번째 나의 애인이 가져온 거래
코를 쥐어뜯으며 내가 형에게 입을 맞추자
애인이 나에게로 온다
콜라를 흔들 거고
형은 나를 잊었다
정선율 _ 1985년 서울 출생. 본명 정현아. 장편영화 <청개천의 개>. 단편영화 <이상한 나라의 도로시> 조연출. 단편영화 <우리들의 하이라이트 > 외 10여편의 영화음악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