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年譜(연보)
세종13년(世宗:명나라 선덕(宣德6년) 1431)
신해년(辛亥年)2月9日 신묘미시(辛卯未時)에 선생(先生)은
안동부 서풍산현 남불정촌리제(安東府 西豊山縣 南佛頂村里第)에서 탄생(誕生)하시다.
을묘년(乙卯年)오세(五歲)에 비로소 글을 받게 되다.
선생(先生)의 선고(先考)현감공(縣監公)께서 말로 문자(文字)를 가르치니 금방 이해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성품은 침착(沈着)하고 과묵(寡默)했으며 같은 또래들과 어울리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니 이미 사람들은
그가 장차(將次)대기(大器)를 이룰 것임을 알았다.
현감공 역시 기대 하는 바 커서 멀지 않은 앞날에 반드시 우리 문호(門戶)를 부축할 것이니
문학(文學)은 염려할 바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註]현감(縣監)=종6품의 지방관.
병진년(丙辰年) 6세(正統6年)
경신년(庚申年) 10세에 비로소 입학(入學)하니 번거로움 없이 배워도 글과 그 뜻을 통달(通達)하고
누구의 독려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송독하였다.
임술년(임술년) 12세에는 독서를 즐기어 손에서 책이 떠날날이 없었으니 입학 수년만에
문학과 예술이 크게 진척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4세 10월 현감공이 비안 임소로 떠나매 배행(陪行)하여 그곳 향교에서 수업하였다.
을축년(乙丑年) 15세에 동학(東學)에 나아가 용학(庸學)을 강의 받았다.
그무렵 유생들이 처음 과거에 응시하려고 사학(四學)에 나아가 용학(庸學)을 강(講)할때라 선생 또한
정열(精熱)을 기울여 숙습(熟習)함으로서 칭찬을 받았다.
병인년(丙寅년) 16세 가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7세 봄 생원회시(生員會試)에 합격하였으니 비안관아(比安官衙)에서 경사의 잔치를 베출었다.
이해 봄 이천서씨(利川徐氏)를 부인(夫人)으로 맞이하니 지동복현사 휘 운(知同福縣事 諱 運)의 따님이며
이조전서 휘 효손(吏曹典書 諱 孝孫)의 증손(曾孫)이다.
경오년(庚午年) 20세 2월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승하(昇遐)하셨다.
신미년(辛未년) 21세 문종대왕원년(文宗大王元年:명나라 경태(景泰2년)
임신년(壬申年) 22세 5월에 문종(文宗)이 승하(昇遐)하였으며,
이해 가을 증광동당시(增廣東堂試)에 제이인자(第二人者)로 뽑하다.
계유년(癸酉年) 23세 2월에 부인서씨(夫人徐氏)가 타계(他界)하다.
선생은 서울에서 부음(訃音)을 받고 돌아와서 용궁 무이곡 병향(龍宮 武夷谷 丙向)의 원(原)에 장사하였다.
갑술년(甲戌年) 24세 10월에 부인(夫人)의령남씨(宜寧南氏)에 재취(再聚)하였으니 지평상치(指平尙致)의
따님이며 의령군(宜寧君) 심(深)의손(孫)이다.
을해년(乙亥年) 25세 세조대왕원년(世祖大王元年:명나라 경태6년)
병자년(丙子年) 26세때 자(子) 극인(克仁)이 태어나다.
정축년(丁丑年) 27세 영종천순원년(英宗天順元年)
기묘년(己卯年) 29세 자(子) 극의(克義)가 태어나다.
경진년(庚辰年) 30세때 거묵(居默)에 생활근거(生活根據)를 삼다.
거묵(居默:지금의 묵계(默溪)은 안동부 길안(安東府吉安)인데 산림(山林)이 울창하고 수석(水石)이 기절(奇絶)하여
선생이 일찍 이곳을 왕래(往來)하면서 항상(恒常)이 운치(韻致)깊은 자연(自然)에 동경(憧憬)해 오다가 이제 여기에
농막(農幕)을 두고 만년(晩年)의 휴식처(休息處)로 삼은 곳이다.
신사년(辛巳年) 31세 가을 식년(式年)에 동당초시(東堂初試)에 합격(合格)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학문(學門)을 연수(硏修)하였다.
임오년(壬午年) 32세 4월에 환향 6월에 성주교수(星州敎授)로 임명되다.
계미년(癸未年) 33세에 임지에 당도하다.
이 먼저 선생의 형의 아들 장질(長姪)학조(學祖)가 출가(出家)하여 국사(國師)가 되었으니,
왕의 총애를 빙자하고 위세를 꽃피울때라 하루는 성주에 이르러 마침내 향교로 가 선생을 배알하려하니
목사(牧使)가 이르기를 국사(國師)께서는 수고로이 거동하실 필요(必要)가 없습니다. 하고
사람을 보내어 선생을 맞으려 했으나 선생이 가지 않으니 국사가 부득이 가 뵙옵거늘 선생께서 이르기를
너는 왕은(王恩)만 믿고 교만을 자행하느라 노숙(老叔)을 찾아와 보지는 아니하고 도리어 노숙으로 하여금
너를 찾아 뵈라 하느냐? 하며 매로 꾸짖으니 거의 출혈(出血)에 가까웠다.
얼마 뒤 국사는 숙부님께서 오랜 세월(歲月)과거에 고생하시온데 만약 벼슬 하실 뜻만 있으시면 힘써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씀 드리니 선생은 너로 인해서 벼슬을 얻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곘느냐, 고 하니
국사는 두번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갑신년(甲申年) 34세에 3남(三男) 극례(克禮)가 출생(出生)하였고 12월에 현감공(縣監公)이 병환에 들게 되었다.
선생은 의관(衣冠)을 벗지않고 친히 약을 다려 올리며 지극(至極)한 정성으로 다하였으니 밤에도 눈 한번 붙이지
아니한 지 여러 달이 되었으나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이란 볼 수도 없었다.
을유년(乙酉年) 35세 8월에 상(喪)을 당하여 예천군 동직곡 곤좌(醴泉君 東稷谷 坤坐)의 원(原)에 장사(葬事)하였다.
장전조석(葬前朝夕)으로 죽만 드시고 기년(期年)이 되도록 다과(茶果)도 물리치니 몸이 쇠약하여
목숨을 부지(扶支)키가 어려울뻔 했으며 그런 경황에도 려막(廬幕)을 지키며 예서(禮書)를 읽고 그밖에 상사(喪事)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슬픔으로 묘소(墓所)를 살피기를 아무리 험궂은 날씨에도 단 한번 폐한 날이 없었다.
정해년(丁亥年) 37세 10월에 탈상하다.
무자년(戊子年) 38세 9월 세조대왕(世祖大王)이 승하(昇遐) 하였다.
기축년(己丑年) 39세 11월에 예종(禮宗)이 승하(昇遐) 하였다.
경인년(庚寅年) 40세 성종대왕원년(成宗大王元年) 자(자) 극지(克智)가 출생하였다.
신묘년(辛卯年) 41세 4월에 점필재김선생(佔畢齋金先生)과 더불어 주역(周易)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였다.
선생(先生)과 점필재선생(佔畢齋先生)은 도의로 맺으신 교우(交友)로서 상종함이 매우 절실 하였다.
계사년(癸巳年) 43세 사위인 유자온(柳子溫)에게 가 수일을 머물고 돌아왔다.
갑오년(甲午年) 44세 2월 충주향교(忠州鄕敎)의 교수로 임명되고 6월에는 자(子) 극신(克信)이 출생하였다.
을미년(乙未년) 45세때 자 극인(克仁)으로 하여금 먼저 묵계(默溪)에 우거케 하였다.
병신년(丙申年) 46세 7월 충주(忠州)에서 임기를 마치고 잠시 묵계에 들렀다가
곧 풍산 사제(笥堤)의 구가(舊家)로 떠났다. 12월에는 상산(商山)에서 점필재선생(佔畢齋先生)이 래방(來訪)하였다.
정유년(丁酉年) 47세 2월 상산(商山)으로 점필재선생(佔畢齋先生)을 심방하다.
기해년(己亥年) 49세 가을 식년동당초시(式年東堂初試)에 합격하였다.
경자년(庚子年) 50세 3월에 급제하여 연만(年滿)으로 육품직(六品職)에 올랐다.
점필재선생(佔畢齋先生)이 경저(京邸)로 내방(來訪)하였으며 12월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제수(除授)받았다.
총마계축(騘馬契軸)에 시(詩)두수와 계안이첩(契案二帖)이 있다.
신축년(辛丑年) 51세 점필재(佔畢齋)및 성희안공(成希顔公)과 함께 여러날 종유(從遊)하다.
성공(成公)은 바야흐로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명성이 일세에 떨치게 되나 단아(端雅)하게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으며
그의 동생 희증(希曾)과 더불어 빈번히 찾아와 기탄없는 대화를 함으로써 마음으로 믿음에 이르렀다.
희증(希曾)은 곧 선생과 동년에 급제 하였다.
임인년(壬寅年) 52세에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제수 받았다.
선생(先生)의 강직(剛直)함이 조정(朝廷)에 용납되지 않아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정사(政事)에 임해서 장엄히하고
백성을 위해서는 자혜로우며 청렴(淸廉)하고 근신(謹身)함을 스스로 지키며 매사를 신속히 처리해 나아가니
몇 달이 안되어 교화가 잘 보급되고 기강이 바로 서서 관민(官民)모두가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였다.
점필재 기록에 자신의 몽시일수(夢詩一首)와 증별시이수(贈別詩二首)에 소서(小序)를 곁들인 것을 문집에서
볼 수 있으며 이에 함께 모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신축(辛丑)11월 초8일 밤 꿈에 나귀를 타고 산수간(山水間)을 호젓하게 거니는데 지난해 급제한 친구 김취사(金取斯)와
뜻 밖에 만났더니 나는 사헌부감찰로서 남의 배척을 받아 파직 당하고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이 되었다. 며
관부(官府)에서와 같이 소위(所謂) 격(檄)이라는 방판(方板)에다가 그 사건의 시말(始末)을 적은 것을 내게 보임에
읽고 있으려는데 이미 지워버리고 그 글자를 시제(詩題)로 주는 것이었다.
이루지 못하고 잠을 깨니 다만 기억나는 것은 앞의 연구(聯句)뿐이라 드디어 김군(金君)이 나이 오십이 넘어서
급제 했다는 시제(詩題)를 족히 이룰 수가 있었다.
桂籍非遲暮 계적비지모 관적(官籍)에 늦었음이 아닌것이라
烏臺任去留 오대임거유 오대(烏臺)의 거유(去留)대로 맡겨주었다.
人皆行或泥 인개행혹니 사람은 다 행동(行動)함이 구니(狗泥)가 되어도
天且子爲謨 천차자위모 하나님은 그대위해 도모(圖謨)하신다.
檄上雲烟動 격상운연동 격상(檄上)에선 운연(雲烟)도 움직이였고
驢邊水石幽 려변수석유 려변(驪邊)에 수석(水石)도 그윽하도다.
猶勝茶酒務 유승다주무 다주(茶酒)에 힘씀보단 나은것이니
程驛可優遊 정역가우유 정역(程驛)은 우유(優遊)하게 자적(自適)하도다.
[註]
정역(程驛)=역참(驛站)
신축년(辛丑年) 내 일찌기 꿈에서 김감찰계행(金監察係行)과 서로 만난 일을 기록한적 있다.
지난해 왕명을 받들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다시 김군(金君)을 만났지만 끝내 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금년 가을 김군(金君)이 사태(事態)로 해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여 고령현감으로 나가게 되니 비록 역관(驛官)의
자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의 꿈이 과연 그런 증빙이 있었던지라 드디어 그 사실을 들려 주면서 김군과 한차례 크게 웃고
점운(前韻)을 써서(잉용(仍用) 부(賦) 이수(二首)를 넉넉치는 못했지만 노자로 떠나 보내면서.
其一
伽倻古膝薛 가야고슬설 가야는 옛적에는 등설(藤薛)이오니
謫宦勝封畱 적환승봉유 좌천(左遷)됨이 봉토(封土)보다 나은것이다.
筍鱖供廚興 순궐공주흥 순궐은 요리(料理)맛 도와서주고
溪山與目謀 계산여목모 계산은 경치(景致)가 눈에 드노라.
風淳氓保靜 풍순맹보정 풍순하니 백성은 안정(安靜)되었고
官冷屋廬幽 관냉옥려유 관냉하니 구옥(舊屋)이 그윽하도다.
昔我趨庭處 석아추정처 옛적에 내가 추정(趨庭)하던 그곳에
弦歌待子遊 현가대자유 현가로 그대와서 놀기바랐다.
其二
郵官非是讖 우관비시참 우관은 이것이 참(讖)이아니라
桃縣足淹畱 도현족엄유 도현에 머물음 족하였도다.
正協三刀夢 정협삼도몽 삼도의 꿈에는 바로 맞았고
難營二頃謨 난영이경모 이경을 꾀함은 어려웠도다.
簿書寧局促 부서영국촉 부서는 차라리 국촉하였고
花竹㪅淸幽 화죽경청유 화죽은 다시금 청출(淸出)하도다. 㪅
欲訪儒仙迹 욕방유선적 유선의 자취를 찾아보려면
倻山峙上遊 야산치상유 가야산(伽倻山) 위에서 놀고있도다.
계묘년(癸卯年) 53세 8월 여가를 빌어서 선영(先塋)에 참배하고 9월에 귀임(歸任)하였다.
갑진년(甲辰年) 54세 2월 홍문관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弘文館副修撰 知製敎 兼 經筵檢討官 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에 임명되어 소명(召命)을 받들고 환조(還朝)하여 부임하였다.
8월에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으로 전임하고 상소해서 천재(天灾)와 시정(時政)의 폐단 그리고 인사관계 등을
논(論)하다가 권귀(權貴)들에게 거슬리어 파직 되었다.
을사년(乙巳年) 55세 4월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로 임명 받았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6월 홍문관의 교리(校理)로 왕의 부름을 받고 가다가 중도에서 사임하고 돌아와서 11월에 홍문관의 응교(應校)로
승진하여 어명을 받들고 조정으로 돌아와서 부임 하였다.
락선방(樂善坊)에 주거(住居)를 하다.
병오년(丙午年) 56세 8월 결근계(缺勤屆)를 내고 귀성하였다.
정미년(丁未年) 57세 6월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어 병으로 사퇴하고 9월에 또 교리로 임명 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치 않았다.
무신년(戊申年) 58세 8월 사간원의 헌납(獻納)으로 임명 되었다가 환조해서 사헌부 장령(掌令)에 옮겨서 다시
홍문관의 전한(典翰)으로 전임하였다.
기유년(己酉年) 59세 5월 으정부(義政府)의 검상(檢詳)으로 임명되었고 7월에 사간원의 사간(司諫)자리에 옮겨서
상소하고 승니(僧尼)를 폐지할 것을 청원(請願)하고 여가를 얻어 귀성하였다.
이먼저 왕후윤씨(王后尹氏)를 폐위하니 그는 곧 연산(燕山)의 어머니다.
지금에 와서 또 다시 표석(表石)에 폐위의 묘라 되어 있는 것을 다만 윤씨의 묘라고만 하고 앞으로 백세 뒤에라도
영원히 고쳐 바꾸지 말라는 왕명이 내렸다.
이때 조론은 양분되어 서로 밀거니 당기거니 두 주장이 맞섰다.
선생(先生)은 이 사태를 깊이 걱정한 나머지 더 이상 조정에 머물기가 싫어 물러날 뜻을 절실히 하였다.
12월에 모부인(母夫人) 상(喪)을 당하다.
경술년(庚戌年) 60세 2월 직곡(稷谷)에 현감공과 같은 원(原)에 이봉(異封)으로 장사하고 여막에서 종상하다.
3월에 자(子) 극지(克智)가 세상을 뜨다.
7월에 다시 헌납(獻納)으로 임명 되었으나, “ 이는 조정에서 상중(喪中)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임관한 것이다.”
임자년(壬子年) 62세 2월에 탈상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 지제교(同副承旨 知製敎) 겸(兼)경련 참찬관(參贊官),춘추관의 수찬관(修撰官)에
임명 되었으나 사임하고 돌이켜서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임(移任)되었다.
3월에 극례(克禮)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4월에 예조참의(禮曹參의)로 임명되어 세번 이나 사임해서 체임(遞任)되었으며,
6월에는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와 사간원의 대사간(大司諫)에 전임하여
사임원을 냈으나 윤허 받지 못하였으며,
9월에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으로 임명되고 네번이나 사표하여 교체되었다.
계축년(癸丑年) 63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피실(직곡(稷谷)의 선영(先塋)에 참배하고 이로부터 풍산과 묵계간을
오가면서 한가로운 나날로 만족하게 지내셨다.
갑인년(甲寅年) 64세 정월(正月)여기서 박눌(朴訥)에게 가다.
박공(朴公)의 아들 오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5월에 병조참지(兵曹參知)에임명 받아 사임 교체. 12월에 성종대왕(成宗大王)이 승하(昇遐)하셨다.
선생께서 문부하고 바로 입경(入京)하셨다.
을묘년(乙卯年) 65세 2월 광주(廣州)에서 국장(國葬)의 산역(山役)을 감독하였다.
동년(同年) 5월 도승지(都承旨)로 임명 받고 사의(辭意)의 상소(上疏)를 올렸으나 윤허(允許)치 않아 다시 상소해서
극력(極力)으로 사양하여 해임 되었다.
병진년(丙辰年) 66세 특별(特別)히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양을 거듭해도 윤허(允許)하지 않아
부득(不得)이 부임 하였다.
정사년(丁巳年) 67세 시정(時政)의 잘못을 지적하여 소(疏)를 올렸으나 회답(回答)이 없으매 바로 사직하고 환향하였다.
당시 간악(奸惡)한 권신(權臣)들이 국정(國政)을 맡아 날로 정사를 그르치며 일부 궁녀들 속에는 상감의 총애만을 믿고
온갖 방자한 행동을 일삼는 폐단이 만성하니 이를 추궁하는 선생의 간언이 너무나 절실(切實)하였음에도
가납(嘉納)되지 않으니 선생은 어쩔수 없음을 감지하고 체임을 빌어 고향으로 돌아와 즐겁게 앞으로의 생애를 마칠
뜻이 있음이 분몀(分明)하였다.
무오년(戊午年) 68세 사제택반(笥堤宅畔)에다가 자그마한 정사를 짓고 편액을 붙여 보백당(寶白堂)이라
이름을 하였으니 선생은 일찍 시(詩)에서『우리집엔 보물이란 없나니,있다면 오직 청백 뿐이다.』고 하였거늘,
당편(堂扁)에 담긴 보백당(寶白堂)은 아마 이런 뜻에서 취해진 것이리라,
날마다 조용히 그곳에 거처하며 성현(聖賢)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며 생도들을 가르킴에 정성을 다하니,
원근(遠近)의 사인(士人)들이 많이 나들었다.
자(子) 극인(克仁)이 특명(特命)으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받았다.
이때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등이 무고(誣告)하여 일대옥사(一大獄事)를 일으켰으니,「무오사화(戊午士禍)」
선생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얼마후 석방되셨다.
처음 탁영김일손(濯纓金馹孫)이 헌납(獻納)으로 재직(在職)할 때 권귀(權貴)들에 굽힘없이 직언(直言)을 다하니
이극돈은 그 직언이 자기에게 절박(切迫)했음에 불쾌(不快)하여 마음속에 벼르고 있던 차에 마침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으로 되었으니 김공(金公)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당시 자기의 허물을 하나 빠짐없이
기록했음을 보고나서 더욱 원한(怨恨)이 뼈속에 사무치었다.
그리하여 이는 세조(世祖)때 일을 쓴것으로 핑게하고 그로 기회(機會)를 삼아 맺혔던 한을 풀려는 계획으로
유자광과 몰래 꾀했으니 유자광 또한 점필재(佔畢齋)로 말미암아 철거(撤去)케된 함양현판사건(咸陽懸板사건)에
대한 혐악(嫌惡)이 있었던 터라 이에 이른 두 사람은 팔을 걷어부치며 힘을 합하고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啇)등과
더불어 주야(晝夜)로 사건(事件)의 명분(明分)을 만들려고 음모(陰謨)한 끝에 점필재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내용을
들어서 연산(燕山)의 분노를 충동(衝動)질 하기를 이는 세조(世祖)를 가르켜 한 말이며 김일손의 죄악(罪惡)은 다 그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교훈(敎訓)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것입니다. 고 하니
연산이 대노(大怒)하여 대역죄(大逆罪)로 몰아 탁영(濯纓)은 마침내 참화(慘禍)를 당하고 김종직은 황천(黃泉)에 까지
화(禍)가 미치니 일시에 명현(名賢)들이 거의 다 유배(流配)되거나 처형(處刑)되었으며 선생은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조호문(趙好問)등 십여인과 같이 태형(苔刑)을 받고 석방(釋放)되었다.
7월에 다시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任命)되었다.
기미년(己未年) 69세 정월(正月)첨중추(僉中樞)로 임명(任命)받았다.
도승지 신수근(都承旨 愼守勤)은 연산비 신씨(燕山妃 愼氏)의 형이라,
선생이 사간원(司諫院)에 재직(在職)할 때 여러번 외척(外戚)과 애첩(愛妾)에 과계(關係)하여 직언(直言)한 바 있다.
수근이 이것을 마음에 끼고 있다가 노사신(盧思愼),한치형(韓致亨)등과 모의(謀議)하고 선동하기를
지난해 국청(鞫廳)을 설치(設置)한 때에 사건의 잔당(殘黨)들을 다 제거(除去)하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후일(後日)의 우환(憂患)이 될 것입니다. 하고 계청(啓請)을 내어서 다시 국청(鞫廳)을 열었다.
이때 선생이 국정(鞫庭)에 들어서니 군중(羣衆)은 시기(猜忌)와 원기(怨氣)에 서려 사태(事態)의 앞을 가늠키
어려웠으며 다행이 구원(救援)의 손 길이 있어 무사(無事)하게 되었으나 동시에 동배(同輩)들은 일망타진(一網打盡)
되었으니 선생은 슬픔과 한스러움에 깊이 젖어 홀로 대화(大禍)를 면하개 된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았다.
8월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으로 임명(任命)되셨다.
이조참의(吏曹參議)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 되었음이 규장각(奎章閣)의 인물고(人物攷)에는 기재(記載)되 있으나
날자는 기록(記錄)이 없다.
경신년(庚申年) 70세 또 취리(就理), 연산(燕山)이 지난 사건(事件)을 가지고 또 명령(命令)을 내려 구금(拘禁)하니
5개월 만에 방면(放免)되고 환향(還鄕)하였다.
신유년(辛酉年) 71세 3월 묵촌별저(默村別邸)로 우거(寓居)하다.
선생은 일찌기 송암동(松巖洞:묵계하리(默溪下里)폭포(瀑布)위에 정자(亭子)를 짓고 만휴정(晩休亭)이라 이름하였다.
아마 만년(晩年)에 휴식(休息)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리라.
계해년(癸亥年) 73세 아들 극신(克信)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을축년(乙丑年) 75세 가을 직곡(稷谷:명호면 직산동) 선영(先塋)에 성묘(省墓)하였다.
병인년(丙寅年) 76세 중종대왕원년(中宗大王元年 1506) 무종정덕 원(武宗正德 元)9월 중종반정(中宗反正).
선생은 연산이 폐위(廢位)되었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눈물을 지으면서 이르기를,
이는 분명(分明)히 국가대계(國家大計)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10년이나 섬겼던 그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며
슬퍼하셨다.
정묘년(丁卯年) 77세
무진년(戊辰年) 78세 4월 보백당(寶白堂)에서 소연(小宴)을 베풀다.
그때 외손(外孫)박거린(朴巨麟),형린(亨麟)등이 이어서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여,
찰방공(察訪公:그들이 부(父)을 따라와서 향수(享壽)를 기원(祈願)하였다.
기사년(己巳年) 79세 선생은 가명한 자질로서 경학(經學)전력(專力)하고 성리(性理)를 사색(思索)함에
오직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 주력(主力)하였다.
경오년(庚午年) 80세 2월 청명(淸明) 날 직곡선영(稷谷先塋)에 성묘(省墓)를 떠나니 자제(子弟)들이
그 노쇠(老衰)한 몸으로 무리(無理)함을 걱정하였으나 선생은 불청하였다.
신미년(신미년) 81세 2월 내외 종친(內外宗親)이 모두 모여서 헌수(獻壽)를 올리는 자리에는 내외 자질손(內外子姪孫)이
대소과(大小科)에 급제(及第)한 자가 10 여인이나 되고 관직(官職)에 있는 자가 7인이나 되었다.
당실(堂室)은 하객(賀客)으로 가득하고 문전(門前)은 노비(奴婢)들로 뒤덮히었으니 보는 자마다
부러워(흠이(欽羡)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더욱더 조심스럽고 간절하게 타이르기를 『너희들이 연다라 과명(科名)에 오름은 또한 다행한 일로서
이고장 사람들이 더러는 나를 가리켜 복이 많다 하겠지만 나로서는 집안의 번창함이 두려움을 더할 따름이니
성만지구(盛滿之懼)너희들은 명심(銘心)해서 스스로 몸가짐을에 삼가 또 삼가하고 사람을 접함에 있어
정성을 다하며 경박한 일로해서 죽어가는 노옹(老翁)에게 욕을 드리움이 있어 말지니라.』 하셨다.
정축년(丁丑年) 87세 12월 13일 전미(丁未)에 병환(病患)에 들어 외사(外舍)로 옮기고 형자(兄子)영추(永錘)로 하여금
판재(板材:널)를 준비(準備)시키다.
15일 기유(己酉)임종시 유계에 자질(子姪) 및 종손(從孫)삼당공(三塘公)영(瑛)을 불러 앉히고
『가전청백 세수공근 효우돈목(家傳淸白 世守恭謹 孝友敦睦)』청백을 가전하고 공근을 세수하며 효우로 돈육하라.
더욱 선대(先代)의 소중한 교훈을 너희들은 하나 하나 준수해서 교만하거나 경박한 행동으로서 가명(家名)을
훼손하거나 실추시키는 일은 말아야 하며 상제(喪祭)에는 오직 정성과 경건함에 두고 낭비나 허례에 치우쳐 말것이다.
또한 나는 경연(경악(經幄)에 오래 있었으나 임금을 돕지도 시폐(時弊)를 구하지도 못하였으니,
살아서 세상에 보탬이 없는지라 죽음에 마땅히 검박하게 장사하고 다만 성명이나 써서 무덤만 표시하고
절대로 남에게 거짓으로 찬미하는 비문을 청하지 말아야 하며 잘한 일도 없는데 명예를 얻은 것은 나로서는
심히 부끄러워 하는 바이니라. 고 하고 그래서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의 싯귀를 음영(吟咏)하다.
16일 경술(庚戌) 부녀(婦女)들에게 배사(拜辭)케 하고.「남자(男子)는 부인(婦人)의 앞에서 운명하지 않는다.」는
고예(古禮)의 뜻을 들어 임종때 다시 와 보지 못하게 하였다.
17일 신해(辛亥) 정침(正寢)에서 운명하다.
선생은 입조(立朝)한지 수십년 동안에 일에따라 충언을 다 하였으며 또한 문학으로도 한때 숭앙을 받았다.
계(啓),차(箚),소(疏)등의 서장과 그 밖의 유고도 세상에 전함이 반드시 많을 것이나 여러번의 변란을 격은 까닭에
거의 산실되었으니 어찌 애석하다 않으리요.
무인년(戊寅年) 3월 임오일(壬午日)에 직곡을좌(稷谷乙坐)의 원(原)에 장사(葬事)하였다.
병술년(丙戌年) 숙종대왕삼십이년(肅宗大王三十二年)향인(鄕人)들이 묵계서원(默溪書院)에다
위패(位牌)를 봉안 하였다.
응계옥선생(凝溪玉先生)과 같이 병향(並享)하고 후에 운천김선생(雲川金先生)을 추향(追享)하였다.
묘호(廟號)는 청덕사(淸德祠)라 하였다.
[끝]
苟全公 14代孫 金台東 옮겨씀
[註]
동학(東學)=사학(四학)의 하나.
용학(庸學)=사서(四書)가운데의 중용(中庸)과 대학(大학).
사학(四學)=문학진흥(文學振興)을 위하여 창설(創設)한 중앙의 사부학당(四部學堂) 곧 東,西,中, 南,北,의
오부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북학당(北學堂)은 학사(學舍)를 마련하지 못하여 끝내 폐지되고
사부학당(四部學堂)만 존속(存續)했다함.
생원시(生員試)=소과초시(小科初試) 즉 회시(會試)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과거시험.
생원회시(生員會시)=소과초시(小科初試)에합격(合格)한 사람에게 보이는 과거시험,
이조전서(吏曹典書)=고려 때의 이조(吏曹)상서(尙書)로서 후대로 내려오면서
판서(判書)전서(典書)로 바뀌었다.정3품직.
증광동당시(增廣東堂試)=과거는 식년(式年)에 여는 것이 원칙이나 나라네 경사(慶事)가 있을때 보이던 임시과거
제술과(製述科),동당과(東堂科).
지평(指平)=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의 정5품 벼슬.
식년(式年)=삼년마다 즉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 과거를 실시하던 해의 이름.
동당초시(東堂初試)=제술과(製述科)를 말함.진사과(進士科)
관리로서의 등용문격(登龍門格)제술시는 과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거시험 이며
다른과에 비해 합격자가 많이 등용됨. 선발하는 인원도 많았음.
려막(廬幕)=궤영(几筵)옆이나 무덤 가까이 상제가 거처하기 위해 짓었던 풀집.
점필재(佔畢齋)=조선조 성종때 학자 김종직(金宗直)의 호(號),자는 효관(孝盥).계온(季온)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본관은 선산(善山),성균사예숙자(成均司藝叔滋)의 아들 세조5년(1459년)문과에 급제함.
성종때 형조판서(刑曹判書)문장과 경술에 뛰어났고 야은(冶隱)의학통을 이어받음,
제자로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등이 있음.
사후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부관참시(部棺斬屍)를 당했음.
문집(文集)으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청구풍아(靑丘風雅),동문수(東文粹),이존록,등이 있다.
제수(除授)=벼슬에 천망절차(薦望節次)를 밟지 아니하고 국왕이 직접 임명(任命)하는것. 제배(除拜)라고도 함.
홍문관(弘文館)=조선때 삼사(三司)의 하나 .경적(經籍),문한(文翰),고문(顧問)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
부수찬(副修撰)=홍문관의 종5품벼슬.
지제교(知製敎)=조선시대 왕에게 교서등을 기초(起草)하여 바치는 일을 맡아 보는벼슬.내외의 지제교가 있음.
검토관(檢討官)=조선시대 관직. 경연청에서 의독(議讀),논사(論思)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정6품 관직.
춘추관(春秋館)=조선시대 시정(時政)의 기록(記錄)을 맡아 보던 관아(官衙).
기사관(記事官)=춘추관에 두었던 관원(官員)으로서 품계(品階)는 정6품~9품.
부소(赴召)=왕의 명을 따라 나아옴.
사간원(司諫院)=조선시대 삼사(三司)의하나로 간쟁(諫爭),논박(論駁)을 맡은 관청.
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 벼슬.
권귀(權貴)=권력이 있고 귀하다는 뜻. 세도(勢道)를 구사 한다는 말.
부교리(副校理)=홍문관의 종5품 벼슬.
교리(校理)=홍문관의 정5품 벼슬.
응교(應敎)=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에 소속되어 있으며 품계는 정4품. 정원은 각 1명.
이조정랑(吏曹正郞)=육조(六曹)에 속한 정5품의 벼슬.
헌납(獻納)=사간원의 정5품 벼슬.
장령(掌令)=사헌부의 종4품 벼슬.
전한(典翰)=홍문관의 종3품 벼슬.
의정부(議政府)=중앙의 최고(最高)관청, 지금의 국무원(國務院)과 같음.
검상(檢詳)=의정부의 정5품 벼슬.
사간(司諫)=사간원의 종3품 벼슬.왕의 잘못을 간하고 논박하는 일을함.
통정대부(通政大夫)=조선시대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인 문관(文官),종친(宗親)및 의빈(儀賓)의 관계(官階).
승정원(承政院)=왕명을 출납(出納)을 맡은 관청.정원(政院),후원(喉院),은대(銀臺),대언사(大言司)등 으로 불림.
동부승지(同副承旨)=승정원(承政院)의 정3품관직 여섯 승지중 끝자리로 공방(工房)의 일을 맡아봄.
참찬관(參贊官)=경연(經筵)에 속한 정3품관 으로 궁원(宮員)7명은 모두 승지 및 부제학(副提學)이 겸임(兼任)함.
수찬관(修撰官)=춘추관(春秋館)에서 시정(時政)을 기록(記錄)하는 정3품관.승정원,홍문관의 부제학이 겸임한다.
병조(兵曹)=육조(六曹) 즉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조(工曹) 가운데의 하나.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최고관(最高官)으로 정3품이며 유학(儒學)에 관한 일을 담당.
학생을 가르치고 지도하며 겸직은 원칙으로 금하였으나 대제학이 겸하는 경우가 많음.본조후금지.
대사간(大司諫)=사간원(司諫院)의 으뜸 벼슬이며 왕에게 충간(忠諫)하는 일과 다른사람의 언론을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일을 맡음, 정3품.한명을 둠.학식과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맡김.
부제학(副提學)=홍문관(弘文館)의 정3품관, 대제학(大提學)의 다음으로 직제학(直提學)의 위인데 정원 1명.
박눌(朴訥)=선생(先生)의 사위.
참지(參知)=육조(六曹)에 소속(所屬)된 정3품 벼슬.
감동(監董)=감동관(監董官)의 준말. 역사(役事)를 감시(監視)하고 독촉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벼슬.
도승지(都承旨)=승정원(承政院)의 여섯 승지중에서 으뜸되는 정3품관(正三品官).
참봉(參奉)=종9품관직 원(園), 능(陵), 종친부(宗親府) 등에 있었음.
실록청(實錄廳)=실록을 편찬하던 임시관청. 왕이 죽고 새왕이 즉위하면 실록청을 임시로 설치하고,
종재관(摠裁관)과 당상낭청(堂上郎廳)을 임명하여 부서(部署)로 나누어 실록을 편찬케 했다.
노사신(盧思愼)=세종9~연산4년(1427~1498) 연산 때의 제상.
윤필상(尹弼啇)=세종9년에서 연산군10년에 이른 성종때의 상신.
이극돈(李克墩)=세종17~연산9년 자 사고(士高)시호 익평(翼平)세조3년 문과급제 여러벼슬을 거처 좌찬성(左贊成)
유자광(柳子光)=연산군때의 간신.자 우준(于俊),본관 영광(靈光)세조14년 무과급제 남이(南怡),강순(康純)등을
역모(逆謀)로 몰아 죽인 공으로 훈봉(勳封)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흉.
후에 시호,훈작이 삭탈되고 귀양가 장님이되고 배소에서 죽었음.
김일손(金馹孫)=세조10~연산4년 학자 자는 계운(季雲),호는 탁영(濯纓)김해김씨 김종직의 제자 성종17년 문과급제
기사관이되어 성종사초(成宗史草)를씀,세조찬위를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훈구파의 비행을 기록,
사국당상관(史局堂上官)이 된 이극돈의 눈에 띄니 훈구파의 유자광,윤필상,노사신등과 문인을 싫어 한
연산군을 부추겨사옥(史獄)일으켜 김일손은 김종직등 영남학파의 여러 학자와 함께 처형됨.
조의제문(弔義帝文)=성종(成宗)때 학자(學者) 김종직(金宗直)이 항우가 초왕을 죽인 고사(故事)를 비유(比喩)하여
세조(世祖)의 왕위찬탈(王位纂奪)을 풍자한 글.
어세겸(魚世謙)=세종12~연산6년 조선초기의 명신.자는 자익(子益)호는 서천(西川) 시호는 문정(文貞)본은 함종(咸從)
화려한 관력(官歷)으로 좌의정(左議政)까지 이르렀다.
첨중추(僉中樞)=중추부(中樞府)의 첨지사(僉知事).
중추부(中樞府)=,중앙관청의 하나. 삼군부(三軍府),중추원(中樞院)등 이름이 바뀌어 오다가 세조12년 중추부로 고치고
일정한 사무없이 문무당상관(文武堂上官)으로서 임직(任職)이 없는 자를 우대하는 의미에서 두게됨
첨지사(僉知事)=중추부의 정3품 당상관으로 정원8명 그중 3명은 체이직(遞兒職) 일정한 사무가없는 한직.
신수근(愼守勤)=연산군때의 문신, 연산12년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두 아우가 피살됨.
대각(臺閣)=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총칭(總稱).
한치형(韓致亨)=성종때의 문신.여러벼슬을 거처 우의정,좌의정에서 후에 영의정이 되었으나 연산군의 폭정을
충간(忠諫)하다가 갑자사화때 부관참시를 당하고 가족이 몰살 당했다.
대사헌(大司憲)=사헌부(司憲府)의 정2품의 으뜸벼슬.
원문(原文) 연보(年譜) 皇明宣宗宣德六年(世宗大王十三年)辛亥二月九日辛卯未時 先生生于安東府豊山縣南佛頂村里第황명선종선덕육년(세종대왕 십삼년)신해이눨구일신묘미시 선생생우안동부풍산현남불정촌리제 十年乙卯(先生五歲)始受字書 십년을묘(선생오세)시수자서 先生先考縣監公 口授文字輒能曉解 久而不忘 沈重寡言笑 不喜與同隊兒遊戱 人已知其將成遠器 縣監公期待不淺曰 선생선고현감공 구수문자첩능효해 구이불망 심중과언소 불희여동대아유희 인이지기장성원기 현감공기대불천왈 將來必扶我門戶 文學非所慮也 장래필부아문호 문학비소여야 英宗正統元年丙辰(先生六歲) 영종정통원년병진(선생육세) 五年庚申(先生十歲)始入學 不煩開釋而通透文義 不待課督而誦讀甚動 오년경신(선생십세)시입학 불번개석이통투문의 불대과독이송독심동 七年壬戌(先生十二歲)好讀書 手不釋卷 入學數年 文藝大進 칠년임술(선생십이세)호독서 수불석권 입학수년 문예대진 九年甲子(先生十四歲)十月陪往縣監公 于比安任所 入鄕校肄業 구년갑자(선생십사세)시월배왕현감공 우비안임소 입향교이업 十年乙丑(先生十五歲)詣東學 講庸學時儒生初赴擧 詣四學講庸學先生以精熱 稱 십년을축(선생십오세)예동학 강용학시유생초부거 예사학강용학선생이정열 칭 十一年丙寅(先生十六歲)秋 中解生員試 십일년병인(선생십육세)추 중해생원시 十二年丁卯(先生十七歲)春 中生員會試 說慶席于比安縣衙是春 聘夫人利川徐氏 知同福縣事諱運之女 書諱孝孫之曾孫也 십이년정묘(선생십칠세)춘 중생원회시 설경석우비안현아시춘 빙부인이천서씨 지동복현사휘운지녀 서휘효손지증손야 景皇帝景泰元年庚午(先生二十歲)二月 世宗昇遐 경황제경태원년경오(선생이십세)이월 세종승하 二年(文宗大王元年)辛未(先生二十一歲) 이년(문종대왕원년)신미(선생이십일세) 三年壬申(先生二十二歲)五月 文宗昇遐 秋 中增廣東堂試第二人 삼년임신(선생이십이세)오월 문종승하 추 중증광동당시제이인 四年(端宗大王元年)二月 夫人徐氏 卒 先生自京聞訃而還 葬于龍宮武夷谷丙向之原 사년(단종대왕원년)이월 부인서씨 졸 선생자경문부이환 장우용궁무이곡병향지원 五年甲戌(先生二十四歲)十月聘夫人宜寧南氏持平尙致之女 宜寧君深之孫 오년갑술(선생이십사세)시월빙부인의령남씨지평상치지녀 의령군심지손 六年(世祖大王元年)乙亥(先生二十五歲) 육년(세조대왕원년)을해(선생이십오세) 七年丙子(先生二十六歲)子克仁生 칠년병자(선생이십육세)자극인생 英宗天順元年丁丑(先生二十七歲) 영종천순원년정축(선생이십칠세) 三年己卯(先生二十九歲)子克義生 삼년기묘(선생이십구세)자극의생 四年庚辰(先生三十歲)卜居默別業 居默洞 在安東府吉安 任壑幽敻 泉石絶勝 先生常往來畱連愛翫 仍置別墅 사년경진(선생삼십세)복거묵별업 거묵동 재안동부길안 임학유완 천석절승 선생상왕래유연애완 잉치별서 爲晩年棲息之所 위만년서식지소 五年辛巳(先生三十一歲)秋 中式年東堂初試 入太學 治學究業 오년신사(선생삼십일세)추 중식년동당초시 입태학 치학구업 六年壬午(先生三十二歲)四月下第還鄕 六月薦授星州敎授 육년임오(선생삼십이세)사월하제환향 육월천수성주교수 七年癸未(先生三十三歲)莅星州壬所 先是先生兄子學祖 出家爲國師 憑藉 上寵 勢滔薰灼 一日到星州 將謁先生於鄕校 칠년계미(선생삼십삼세)리성주임소 선시선생형자학조 출가위국사 빙자 상총 세도훈작 일일도성주 장알선생어향교 牧使曰師不必勞動 吾請敎官來 使人邀先生 先生不往 師不得已往謁 先生數之曰汝恃 恩駮恣不來見老叔 反使老叔謁汝邪 목사왈사불필노동 오청교관래 사인요선생 선생불왕 사부득이왕알 선생수지왈여시 은박자불래견노숙 반사노숙알여사 痛杖幾出血 旣而師請曰叔父 久因場屋 若有仕意 請致力 先生怒曰汝得官 何面目見人 師不敢復言 통장기출혈 기이사청왈숙부 구인장옥 약유사의 청치력 선생노왈여득관 하면목견인 사불감복언 八年甲申(先生三十四歲)子克禮生 十二月縣監公寢疾 先生衣不解帶 湯藥必親 目不 交睫者累月而未嘗少懈 팔년갑신(선생삼십사세)자극례생 십이월현감공침질 선생의불해대 탕약필친 목불 교첩자누월이미상소해 憲宗成化元年乙酉(先生三十五歲)八月丁 縣監公憂 十月 葬于醴泉君東稷谷坤向之原 葬前朝夕啜粥 期年不進菜果 헌종성화원년을유(선생삼십오세)팔월정 현감공우 시월 장우예천군동직곡곤향지원 장전조석철죽 기년불진채과 柴毁幾不能支 守廬讀禮之外非喪事 不言 日哀省墓所 不以雨雪寒暑而或廢 시훼기불능지 수여독례지외비상사 불언 일애성묘소 불이우설한서이혹폐 三年丁亥(선생삼십칠세)十月 服闋 삼년정해(선생삼십칠세)시월 복결 五年己丑(睿宗大王元年)(先生三十九歲)十一月 睿宗承遐 오년기축(예종대왕원년)(선생삼십구세)십일월 예종승하 六年庚寅(成宗大王元年)(先生四十歲)子克智生 육년경인(성종대왕원년)(선생사십세)자극지생 七年辛卯(先生四十一歲)四月 佔畢齋金先生 講論周易近思錄 先生與金先生 結道義之交 相與甚至 칠년신묘(선생사십일세)사월 점필재김선생 강론주역근사록 선생여김선생 결도의지교 상여심지 九年癸巳(先生四十三歲)往女壻進士柳子溫家 畱數日而還 柳公於西厓先生 爲曾祖 少有才望 先生勉厲 期許殊不淺 구년계사(선샌사십삼세)왕녀서진사유자온가 류수일이환 유공어서애선생 위증조 소유재망 선생면려 기허수불천 十年甲午(先生四十四歲)二月除忠州敎授 六月子克信生 십년갑오(선생사십사세)이월제충주교수 육월자극신생 十一年乙未(先生四十五歲)使子克仁 先寓居默村 십일년을미(선생사십오세)사자극인 선우거묵촌 十二年丙申(先生四十六歲)七月自忠州遞任歸默村 尋 還豊山笥堤舊居 十二月佔畢齋先生自商山來訪 십이년병신(선생사십육세)칠월자충주체임귀묵촌 심 환풍산사제구거 십이월점필재선생자상산래방 十三年丁酉(先生四十七歲)二月訪佔畢齋于商山 십삼년정유(선생사십칠세)이월방점필재우상산 十五年己亥(先生四十九歲)秋 中式年東堂初試 십오년기해(선생사십구세)추 중식년동당초시 十六年庚子(先生五十歲)三月登第 以年滿陞六品 佔畢齋先生來訪于京邸 十二月除司憲府監察 有騘馬契軸詩二首契案二帖 십육년경자(선생오십세)삼월등제 이년만승육품 점필재선생래방우경저 십이월제사헌부감찰 유총마계축시이수계안이첩 十七年辛丑(先生五十一歲)與佔畢齋及成公希顔 累日從遊 成公方入翰苑 名重一世而雅 敬服先生 與其弟希曾 頻來款語 십칠년신축(선생오십일세)여점필재급성공희안 누일종유 성공방입한원 명중일세이아 경복선생 여기제희증 빈래관어 相許爲知心 希曾 卽先生同年及第也 상허위지심 희증 즉선생동년급제야 十八年壬寅(先生五十二歲)除高靈縣監 先生以剛直 不容於朝 出補外莊以莅政 惠以字民 淸謹自守 剖決如流 數月之內 십팔년임인(선생오십이세)제고령현감 선생이강직 불용어조 출보외장이리정 혜이자민 청근자수 부결여류 수월지내 治化普洽 紀綱振肅 吏民 無敢犯法 치화보흡 기강진숙 리민 무감범법 佔畢齋有記夢詩一首 贈行詩二首 幷小序 見文集 今俱錄 如下 점필재유기몽시일수 증행시이수 병소서 견문집 금구록 여하 辛丑十一月初八日夜夢 騎驢薄遊山水間 與故人前年及第金取斯相遇云 我以司憲府監察 爲人所排而罷 爲省峴道察訪 신축십일월초팔일야몽 기허박유산수간 여고인전년급제김취사상우운 아이사헌부감찰 위인소배이파 위성현도찰방 用方板如官府所謂激者 錄其事始末 以示余讀之 旣諧洗其字 題詩以贈 未成而覺 但記前聯 遂足成之 金君 過五十得第 용방판여관부소위격자 록기사시말 이시여독지 기해세기자 제시이증 미성이각 단기전연 수족성지 김군 과오십득제 桂籍非遲暮 계적비지모 관적(官籍)에 늦었음이 아닌것이라 烏臺任去留 오대임거유 오대(烏臺)의 거유(去留)대로 맡겨주었다. 人皆行或泥 인개행혹니 사람은 다 행동(行動)함이 구니(狗泥)가 되어도 天且子爲謨 천차자위모 하나님은 그대위해 도모(圖謨)하신다. 檄上雲烟動 격상운연동 격상(檄上)에선 운연(雲烟)도 움직이였고 驢邊水石幽 려변수석유 려변(驪邊)에 수석(水石)도 그윽하도다. 猶勝茶酒務 유승다주무 다주(茶酒)에 힘씀보단 나은것이니 程驛可優遊 정역가우유 정역(程驛)은 우유(優遊)하게 자적(自適)하도다. 辛丑歲僕嘗記夢 與金監察係行相遇事前年被 恩命還京 再與金君遇 終不言夢事 今年秋金君 以事不容於朝 出爲高靈縣監신축세복상기몽 여김감찰계행상우사전연피 은명환경 재여김군우 종불언몽사 금년추김군 이사불용어조 출위고령현감 雖非程驛之任 余之夢 果有微也 遂語其事 金君亦大噱 仍用前韻 賦二首 聊以贐行云 수비정역지임 여지몽 과유미야 수어기사 김군역대갹 잉용전운 부이수 료이신행운 其一 伽倻古膝薛 가야고슬설 가야는 옛적에는 등설(藤薛)이오니 謫宦勝封畱 적환승봉유 좌천(左遷)됨이 봉토(封土)보다 나은것이다. 筍鱖供廚興 순궐공주흥 순궐은 요리(料理)맛 도와서주고 溪山與目謀 계산여목모 계산은 경치(景致)가 눈에 드노라. 風淳氓保靜 풍순맹보정 풍순하니 백성은 안정(安靜)되었고 官冷屋廬幽 관냉옥려유 관냉하니 구옥(舊屋)이 그윽하도다. 昔我趨庭處 석아추정처 옛적에 내가 추정(趨庭)하던 그곳에 弦歌待子遊 현가대자유 현가로 그대와서 놀기바랐다. 其二 郵官非是讖 우관비시참 우관은 이것이 참(讖)이아니라 桃縣足淹畱 도현족엄유 도현에 머물음 족하였도다. 正協三刀夢 정협삼도몽 삼도의 꿈에는 바로 맞았고 難營二頃謨 난영이경모 이경을 꾀함은 어려웠도다. 簿書寧局促 부서영국촉 부서는 차라리 국촉하였고 花竹㪅淸幽 화죽경청유 화죽은 다시금 청출(淸出)하도다. 㪅 欲訪儒仙迹 욕방유선적 유선의 자취를 찾아보려면 倻山峙上遊 야산치상유 가야산(伽倻山) 위에서 놀고있도다. 十九年癸卯(先生五十三歲)八月 乞暇省先墓 九月 還任 십구년계묘(선생오십삼세)팔월 걸가성선묘 구월 환임 二十年甲辰(先生五十四歲)二月 拜弘文館副修撰知製敎 兼經筵檢討官 春秋館記事官 赴 召還朝 八月 移司諫院正言 이십년갑진(선생오십사세)이월 배홍문관부수찬지제교 겸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 부 소환조 팔월 이사간원정언 疏論天灾時弊及薦引失當 忤權貴見罷 소론천재시폐급천인실당 오권귀견파 二十一年乙巳(先生五十五歲)四月 拜弘文館副校理 辭不赴 六月 拜弘文館校理 赴 疏中道辭還 十一月 陞弘文館應敎 이십일년을사(선생오십오세)사월 배홍문관부교리 사불부 육월 배홍문관교리 부 소중도사환 십일월 승홍문관응교 赴 召還朝 僦屋于樂善坊 부 소환조 추옥우낙선방 二十二年丙午(先生五十六歲)八月 呈告歸覲 이십이년병오(선생오십육세)팔월 정고귀근 二十三年丁未(先生五十七歲)六月 拜吏曹正郞 以病 辭遞 九月 于拜校理 辭不赴 이십삼년정미(선생오십칠세)육월 배이조정랑 이병 사체 구월 우배교리 사불부 孝宗弘治元年戊申(先生五十八歲)八月 拜司諫院獻納 還朝 尋 移司憲府掌令 轉弘文館典翰 효종홍치원년무신(선생오십팔세)팔월 배사간원헌납 환조 심 이사헌부장령 전홍문관전한 二年己酉(先生五十九歲)五月 拜議政府撿詳 七月 遷司諫院司諫 上疏 請罷僧尼 因乞暇歸覲 先是 王后尹氏廢 이년기유(선생오십구세)오월 배의정부검상 칠월 천사간원사간 상소 청파승니 인걸가귀근 선시 왕후윤씨폐 卽燕山之母也 至是又有 旨廢妃之墓 只曰尹氏之墓 百世之後 永勿改易 於是朝論擕貳 互相擠援 先生深憂之 不樂在朝 즉연산지모야 지시우유 지폐비지묘 지왈윤씨지묘 백세지후 영물개역 어시조론휴이 호상제원 선생심우지 불낙재조 求退甚切 十二月 丁母夫人憂 구퇴심절 십이월 정모부인우 三年庚戌(先生六十歲)二月 葬母夫人于稷谷 與縣監公同原異封 旣葬廬墓終制 三月 子克智卒 七月 復拜獻納 삼년경술(선생육십세)이월 장모부인우직곡 여현감공동원이봉 기장여묘종제 삼월 자극지졸 칠월 복배헌납 (朝廷未知居憂故有是 除)(조정미지거우고유시 제) 五年壬子(先生六十二歲)二月 服闋 陞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辭不赴 오년임자(선생육십이세)이월 복결 승배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지제교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사불부 旋移拜兵曹參議 三月 子克禮中生員 四月 拜禮曹參議 三辭遞 六月 拜成均館大司成 還 朝 移司諫院大司諫 辭 不許 선이배병조참의 삼월 자극례중생원 사월 배예조참의 삼사체 육월 배성균관대사성 환 조 이사간원대사간 사 불허 九月 拜弘文館副提學 四辭遞 구월 배홍문관부제학 사사체 六年癸丑(先生六十三歲)還鄕 省掃稷谷先墓 自是 往來豊山默村間 優游以自適 육년계축(선생육십삼세)환향 성소직곡선묘 자시 왕래풍산묵촌간 우유이자적 七年甲寅(先生六十四歲)正月 往女壻察訪朴訥家 朴公 有五子 皆登文科 五月 拜 兵曹參知 辭遞 十二月 成宗昇遐 칠년갑인(선생육십사세)정월 왕녀서찰방박눌가 박공 유오자 개등문과 오월 배 병조참지 사체 십이월 성종승하 先生聞 訃 卽入都 선생문 부 즉입도 八年(燕山君元年)乙卯(先生六十五歲)二月 監董 因山之役于廣州 五月 拜都承旨 上疏辭 不許 又上疏力辭遞 팔년(연산군원년)을묘(선생육십오세)이월 감동 인산지역우광주 오월 배도승지 상소사 불허 우상소역사체 九年丙辰(先生六十六歲)特除大司諫 上疏辭 不許黽勉 赴 召 구년병진(선생육십육세)특제대사간 상소사 불허민면 부 소 十年丁巳(先生六十七歲)疏論時政闕失 不報 卽辭遞還鄕 時 權奸當國 時事日非 又有女嬖恃 寵專恣之弊 先生上疏論之 십년정사(선생육십칠세)소론시정궐실 불보 즉사체환향 시 권간당국 시사일비 우유여폐시 총전자지폐 선생상소논지 言甚剴切而不見納 先生知不可有爲 乞遞還鄕 怡然有若將終焉之志 언심개절이불견납 선생지불가유위 걸체환향 이연유약장종언지지 十一年戊午(先生六十八歲)構小齋於笥堤宅畔 扁曰寶白堂 先生嘗有詩曰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堂扁 蓋取是意也日 십일년무오(선생육십팔세)구소재어사제택반 편왈보백당 선생상유시왈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당편 개취시의야일 靜處其中 潜究聖賢遺書 敎授生徒 惓惓不懈 遠近士子多歸之 子克仁以 特命 除 英陵參奉 時李克墩柳子光等 정처기중 잠구성현유서 교수생도 권권불해 원근사자다귀지 자극인이 특명 제 영능참봉 시이극돈유자광등 誣起大獄 先生逮繫考訊 尋 見釋 初濯纓金馹孫 爲獻納時 盡言不饒權貴 李克墩 惡其言切已心銜之 及爲實錄廳堂上 무기대옥 선생체계고신 심 견석 초탁영김일손 위헌납시 진언불요권귀 이극돈 악기언절이심함지 급위실록청당상 見金公爲史官時 書已惡甚悉 尤恚恨次骨 托以書 世祖時事 欲因爲逞憾計 密謀柳子光 子光常恨佔畢齋撤咸陽懸板事 견김공위사관시 서이악심실 우에한차골 탁이서 세조시사 욕인위정감계 밀모유자광 자광상한점필재철함양현판사 至是 攘臂合勢 與盧思愼 尹必商等 日夜謀所以鍜鍊成獄 釋佔畢齋弔義帝文 以撼怨燕山曰 此 指 世祖而作 馹孫之惡 지시 양비합세 여노사신 윤필상등 일야모소이하련성옥 석점필재조의제문 이감원연산왈 차 지 세조이작 일손지악 皆由於其師宗直敎誨以成之也 燕山大怨 論以大逆 濯纓 竟被慘禍 畢齋禍及泉壤 一時名賢 誅竄殆盡 先生與急世謙成 개유어기사종직교회이성지야 연산대원 논이대역 탁영 경피참화 필재화급천양 일시명현 주찬태진 선생여급세겸성 成希曾 趙好問十餘人 決杖見釋 七月 復拜大司諫 성희증 조호문십여인 결장견석 칠월 복배대사간 十二年己未(先生六十九歲)正月 叙拜僉中樞 二月 又就理 都承旨愼守勤 燕山妃愼氏之兄也 先生在臺閣時 십이년기미(선생육십구세)정월 서배첨중추 이월 우취리 도승지신수근 연산비신씨지형야 선생재대각시 屢以外戚內嬖 爲言 守勤 以此心惎之與盧思愼 韓致亨等 合謀構煽曰前年說鞫時 不盡除餘黨 必爲後日之患 啓請㪅鞫 루이외척내폐 위언 수근 이차심기지여노사신 한치형등 합모구선왈전년설국시 부진제여당 필위후일지환 계청갱국 先生 於是 再入鞫庭 衆怨羣猜 事將叵測 賴有救之者 事得已然 同時儕流網打無餘 先生深自慟傷 不以獨免大禍爲幸 선생 어시 재입국정 중원군시 사장파측 뢰유구지자 사득이연 동시제류망타무여 선생심자통상 불이독면대화위행 八月 拜成均館大司成 拜吏曹參議(載在奎章閣人物攷而月日未詳)拜大司憲(載在奎章閣人物攷而月日未詳) 팔월 배성균관대사성 배이조참의(재재규장각인물고이월일미상)배대사헌(재재규장각인물고이월일미상) 十三年庚申(先生七十歲)又就理 燕山以前事又命拿鞫 五閱月而蒙宥還鄕 십삼년경신(선생칠십세)우취리 연산이전사우명나국 오열월이몽유환향 十四年辛酉(先生七十一歲)三月 寓默村別業 先生嘗築亭于松巖洞瀑布上而名曰晩休 葢取晩年休息之義也 십사년신유(선생칠십일세)삼월 우묵촌별업 선생상축정우송암동폭포상이명왈만휴 개취만년휴식지의야 十六年癸亥(先生七十三歲)子克信登武科 십육년계해(선생칠십삼세)자극신등무과 十八年乙丑(先生七十五歲)秋 省掃稷谷先墓 십팔년을축(선생칠십오세)추 성소직곡선묘 武宗正德元年丙寅(先生七十六歲)九月 中宗靖內亂 先生燕山廢 泫然曰固知出於 宗社大計而臣事十年 安得不戚戚然 무종정덕원년병인(선생칠십육세)구월 중종정내란 선생연산폐 현연왈고지출어 종사대계이신사십년 안득불척척연 二年(中宗大王元년)丁卯(先生七十七歲) 이년(중종대왕원년)정묘(선생칠십칠세) 三年戊辰(先生七十八歲)四月 設小酌于寶白堂 時外孫朴巨鱗亨鱗等 連登大科 陪其父察訪公 來壽 삼년무진(선생칠십팔세)사월 설소작우보백당 시외손박거린형린등 연등대과 배기부찰방공 래수 四年己巳(先生七十九歲)先生以剛明之資 專精經學 潜心性理 惟以格致誠正 彌篤 사년기사(선생칠십구세)선생이강명지자 전정경학 잠심성리 유이격치성정 미독 五年庚午(先生八十歲)二月淸明 省掃稷谷先墓 子弟悶其衰老難强而 先生不聽 오년경오(선생팔십세)이월청명 성소직곡선묘 자제민기쇠노난강이 선생불청 六年辛未(先生八十一歲)二月 內外宗婣齊會上壽時 內外子姪孫 登大小科者十餘 有官守者七 皁葢塡門 貴客滿堂 육년신미(선생팔십일세)이월 내외종인제회상수시 내외자질손 등대소과자십여 유관수자칠 조개전문 귀객만당 觀者莫不榮羨 而先生愈加警飭曰 汝輩連占科名 亦云幸矣 鄕人 或稱吾福厚 而吾則只增盛滿之懼 汝曹持身謹愼 관자막불영선 이선생유가경칙왈 여배연점과명 역운행의 향인 혹칭오복후 이오칙지증성만지구 여조지신근신 待人忠厚 勿以輕薄 忝垂死者老翁 대인충후 물이경박 첨수사자노옹 十二年丁丑(先生八十七歲)十二月十三日 丁未 寢疾 遷居外舍 命兄子永錘 治壽器 十五日己酉 疾革遺戒 십이년정축(선생팔십칠세)십이월십삼일 정미 침질 천거외사 명형자영추 치수기 십오일기유 질혁유계 召子姪及從孫三塘公瑛坐 而戒之曰 家傳淸白 世守恭謹 孝友敦睦 尤爲先訓所重 汝曹一一遵守 勿以驕恣薄行 소자질급종손삼당공영좌 이계지왈 가전청백 세수공근 효우돈목 우위선훈소중 여조일일준수 물이교자박행 墜毁家聲 喪祭惟在誠敬 勿務爲豐侈且吾久在 經幄 不得匡君救時 生旣無益於世 死當薄葬 但記姓名 以表幽墟 추훼가성 상제유재성경 물무위풍치차오구재 경악 부득광군구시 생기무익어세 사당박장 단기성명 이표유허 切勿虛辭溢美請人爲碑碣 無善事而得善名吾所深耻也 仍誦寶物惟淸白之句 以詔之 절물허사일미청인위비갈 무선사이득선명오소심치야 잉송보물유청백지구 이조지 十六日庚戌 命婦女拜辭 以男子不絶於婦人手之義 命 臨絶不復來見 십육일경술 명부녀배사 이남자부절어부인수지의 명 임절불복래견 十七日辛亥 考終于正寢 先生入朝數十年 隨事盡言 又以文學 見推一時 啓答疏章 及他遺文字 必多可傳於世者 십칠일신해 고종우정침 선생입조수십년 수사진언 우이문학 견추일시 계답소장 급타유문자 필다가전어세자 而屢經變故 敢佚無餘 豈不惜哉 이루경변고 감일무여 기불석재 十三年戊寅 三月壬午 葬于稷谷乙坐之原我 십삼년무인 삼월임오 장우직곡을좌지원아 肅宗大王 三十二年 丙戌 鄕人 奉安位版于默溪書院 與凝溪玉先生 並享 後又以雲川金先生 追享 廟號 淸德祠 숙종대왕 삼십이년 병술 향인 봉안위판우묵계서원 여응계옥선생 병향 후우이운천김선생 추향 묘호 청덕사
苟全公 14 世孫 金台東 옮겨씀.
|
첫댓글 대단히 소중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할배.평안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