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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김 선계(先系) 주요(主要) 명현(名賢) 열전(列傳)
1세 김흥광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시조단 등이 있다.
2세 김식(金軾) 벼슬이 각간이니 평장의 품계이시다.
3세 김길(金佶)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삼중대광사공에 이르렀다.
4세 김준(金峻)
길(佶)의 아들로 고려의 문신. 삼중대광(三重大匡) 좌복야(佐僕射)를 지냈다.
5세 김책(金策)
준(峻)의 아들로 고려 광종 15년(서기 964년) 甲子三月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있었는데 조익방(趙翌榜)에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니 임금께서 잔치를 베풀고 급제를 축하하고 특별히 의봉문(儀鳳門)을 열어 말(馬)을 하사하면서 마부로 하여금 고삐를 잡고 출입케 하여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였으며, 여러 요직(要職)을 거쳐 좌복야(左僕射), 한림학사,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이다.
한편 광산탁씨족보(光山卓氏族譜)에 의하면 그 始祖 탁지엽(卓之葉)이 光山 金文貞公 문하에서 공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김책(金策)이 관직을 떠난 후 바로 光州에서 터를 잡고 글을 가르쳤다고 본다.
6세 김정준(金廷俊)
김책(金策)의 아들로 고려때의 문신, 서기 1035년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되었고 1040년(정종 7년)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과 권지승선(權知丞宣)이 되었다가 1043년(정종 10년) 승선(丞宣)이 되었다. 1049년(문종 4년) 중추원사(中樞院事)와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를 거쳐 1053년(문종 8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가 1055년(문종 10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1057년(문종 12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할 때 어구마(御廐馬) 1필(匹)을 하사받았다.
7세 김양감(金良鑑)
정준(廷俊)의 아들, 고려 문종때의 문신이며 유현(儒賢). 1050년(문종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서기 1070년(문종 24년) 상서우승좌간의대부(尙書右丞左諫議大夫)와 서북로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가 되고, 이듬해 상서좌승지어사대사(尙書佐承知御史臺事)에 제수 되었으며, 1072년(문종 26년)에 태복경(太僕卿)이 되어 송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1074년(문종 28년)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부상서(戶部尙書)로서 송나라 사신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 1081년(문종 35년) 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使)를 거쳐 좌복야(佐僕射)가 되었다. 1083년(문종 37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아뢰었고 1086년(선종 4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어 이듬해 다시 시정의 득실을 진주(陳奏) 하였으며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로서 그 해 7월 선덕전(宣德殿)에서 또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다. 12월에 수태위(守太尉)가 되었고, 여러 요직을 거쳐 수태보문하시중감수국사(守太尉門下侍中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일찍이 宋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박문약례(博文約禮)하며 미사(微辭)와 오지(奧旨)는 친히 정자문(程子門)에서 배웠고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을 본뜨고 경(經)과 전(傳)을 가지고 돌아와 성현(聖賢)의 연원(淵源)을 닦고 공자(孔子)의 사당을 집 뒤에 세우고 춘추(春秋)로 제사(祭祀)하니 동국(東國:우리나라)에 문묘(文廟)가 시작된 것이 처음이었고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諡號는 문안공(文安公)이며, 1957년 고창(高敞)의 화동서원(華東書院)에 철향(綴享)되었다.
배(配)는 증서해군대부인 최씨(贈西海郡大夫人 崔氏) 父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중추원사(中樞院事) 연하(延하)이다.
8세 김의원(金義元) (1066∼1148) 83歲
양감(良鑑)의 아들로 고려 인종때 문신 17歲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아버지 문안공의 음덕으로 관직에 올라 장사랑과 군기시주부동정(同正)이 되었다, 1088년(선종 6년) 23세에 수어도감판관(戍御都監判官)을 지냈고 여러번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이 되어 감찰어사(叢察御史)로 연천(漣川)을 지킬 때 여진족을 쳐서 큰 공을 세웠다. 호부상서(戶部尙書)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등을 역임했다. 配는 인천이씨(仁川李氏) 父 국자제주(國子祭酒) 석(碩). 配는 인천이씨(仁川李氏) 父 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 知樞密院事) 자인(資仁), 祖 문하시중 정헌공(門下侍中貞憲公), 曾祖 문하시중 장화공(門下侍中章和公) 자연(子淵) (依李氏譜)
9세 김광중(金光中) 의원(義元)의 아들로 고려 후기의 무신. 어머니는 인천이씨로 예부상서 자인의 딸이다. 1163년(의종 18년) 급사(給事) 벼슬로 있다가 병마부사(兵馬副使)에 승천(昇薦)되어 실지(失地)를 회복(回復)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금(金)나라를 공격하여 그 집을 불사르고 방수(防守)하는 둔전(屯田)을 두었다. 1170년(의종 25년) 간의대부(諫議大夫) 비서감(秘書監)이 되었고 8월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박광승(朴光升)의 밀고로 화를 입었다.
配는 인천이씨(仁川李氏) 父 참지정사(參知政事) 식(軾). 祖 병부랑중(兵部郞中) 자효(資孝) 曾祖 문하시중 정헌공(門下侍中貞憲公), 外祖 부평이씨 이위 중서령(富平李氏瑋 中書令) (有李軾誌文)
10세 김체(金체) 고려 후기의 문신, 비서감(秘書監) 광중(光中)의 아들로 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냈으며, 『배순석(裵順碩)이 군사를 모집하므로 公이 군사를 훈련하여 접응하러 가다가 박광승(朴光升)이 제고사(祭告使)로 온다는 말을 듣고 먼저 광승(光升)의 아비를 잡아 원수를 갚았다.』(見高麗史列傳)
11세 김주영(金珠永) 고려 후기의 문신, 벼슬은 금오위중랑장동정행대정(金吾衛中郞將同正行隊正)을 지냈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호부상서상장군(戶部尙書上將軍)에 추증(追贈)되었다.
12세 김광존(金光存)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증,동지추밀원사(贈,同知樞密院事) 주영(珠永)이다. 벼슬은 흥위위(興威尉) 별장동정(別將同正)이었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와 이부상서겸판예부사(吏部尙書兼判禮部事) 상호군(上護軍)에 추증(追贈)되었다..
13세 김대린(金大鱗) 고려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증이부상서겸판예부사(贈吏部尙書兼判禮部事) 상호군(上護軍) 광존(光存)이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예빈경(禮賓卿)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추증(追贈)되었다.
配는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 父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俊齡)이다.
14세 김연(金璉) (양간공 파조:良簡公派祖) (1215년∼1291) 78歲 고려 충렬왕때의 문신. 初名은 중룡(仲龍), 자는 기지(器之), 아버지는 증문하시랑(贈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대린(大鱗)이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김씨(光州金氏)로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俊齡)의 딸이다. 公은 천품이 준수 비범하였고 눈썹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았으며 어릴 때부터 내시(內侍)가 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셨다.
1255년(고종 43)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선정(善政)하였고 네 고을에 치적(治積)을 남겼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1275년(충렬왕 2) 경상도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동정(同征: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일)할 전함(戰艦)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꿈에 허리에 찬 금어(金魚: 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으로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니 스스로 해몽(解夢)하기를 "몸의 장식이 이미 갔으니 이제 오래 머물 수 없다"하고 사퇴하니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승진시키고 이어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匡靖大夫 僉議侍郞 贊成事)로 치사(致仕)했다. 화상(畵像)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고 화상찬(畵像贊)만 남아있다. 1261년(원종 3)에 발행된 호적(戶籍)이 후손(後孫) 부필(富弼)의 종가(宗家)에 보존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현존(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이다. 시호는 양간공(良簡公)이다. 1781년(정조 6) 고창군 고수면 전불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설단 하였다.
配는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조씨(綾城曺氏) 父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 저(著), 祖 검교신호위장군복정(檢校神虎衛將軍僕正) 추재(樞材), 曾祖 호장보윤(戶長甫尹) 자렴(子廉), 外祖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주(貞州) 정장(鄭莊)이다. (見高麗史列傳, 有畵像贊及辛酉戶籍)
『양간공 호적(良簡公戶籍』
대덕(大德)5년 고려 충렬왕(高麗忠烈王) 28년(1301) 11월에 동부 상동향 일리 신유(辛酉: 1261) 방(坊)에 기재된 호적(戶籍)에 준(准)한다. 조산대부 시소부강 김연(金璉)의 고명은 중륭(仲龍)이니 나이가 47이고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아버지는 추봉(追封)된 예빈경 대린(大鱗)이요 할아버지는 흥위위 별장동정 광존(光存)이오 증조는 금오위중랑장동정 행대정 주영(珠永)이고 어머니는 추봉 익양군부인 김씨(金氏)이니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외조는 호장 김준령이다. 처(妻)는 가봉(加封) 연주군부인 조씨(曺氏)이니 본관은 능성(綾城)이요 나이는 42이다. 아버지는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상장군 세자빈객 저(著)이니 고명(古明)은 시저(時著)요 할아버지는 검교 신호위장군복정 추재(樞材)이니 나이 67이요 본관은 정주(貞州)요 외조(外祖)는 좌우위 보승중랑장 정장(鄭莊)이다. 병산( 産)하니 1녀 소사는 나이 19요 2녀 소사는 나이 8이요 1남(男) 파지(巴只)는 나이 5이니 개명(改名)하여 원구(元具)요 3녀 소사는 나이 7이다. (파지(巴只: 남자를 지칭), 소사(召史: 여자를 지칭함)
『양간공 화상찬(良簡公 畵像贊』
높고 훌륭한 평장(平章)이여 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도다 눈썹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도다. 일찍이 내시(內侍)로 임금을 지척(咫尺)에서 모셨도다 용(龍)이 아니면 봉(鳳)이니 상서(祥瑞)롭게 세상에 나리었도다. 나이 30이 못된 약관(弱冠)에 황금인패(黃金印牌)를 찼도다 사주에 애휼(愛恤)을 끼치니 백성이 감당(甘棠)으로 노래하네. 정승의 자리에 오르니 곽분양(郭汾陽)의 부귀를 누렸도다 아들 사위 생질(甥姪)들이 금성(禁省)에 가득하니 영화가 이어져서 조무(祖武)가 상접하니 문호(門戶)가 휘황(輝煌)하게 밝았도다. 청풍만고(淸風萬古)에 길이 영당(影堂)에 걸어 모시리라. ○선세에 집에 세사람 화상이 한 폭으로 되어 각각 찬(贊)이 있으니 한 분은 중산대부 국학대사성 보문서학사로 치사한 김찬(金贊)이요, 둘째 분은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 판판도사사로 치사한 김련(金璉)이요, 셋째 분은 중산대부 판비서성사로 치사한 김제(金?)이다. 김찬(金贊)의 찬(贊)은 전하여지지 않았고 김련(金璉)의 찬(贊)은 위와 같고 김제(金?)의 찬(贊)에는 조부가 동복 있고 아버지 또한 그러하더니 공의 형제에 와서는 칠폭홍천이 있다 하였으니 다 문벌이 화려함을 성대히 칭찬함이었다. 그러나 김찬(金贊)과 김제(金?)는 김련(金璉)의 일가(一家)인 듯 하나 상고(詳考)할 수 없다. ○선조 26년 임진(壬辰: 1592) 병화에 화상이 소실되었으니 원통 하도다.
15세 김사원(金士元)(양간공파) (1257∼1319) 63歲.
고려 후기의 문신. 初名은 또는 원구(元具). 아버지는 양간공(良簡公) 연(璉)이며, 어머니는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조씨(綾城曺氏)로 예부상서(禮部尙書) 저(著)의 딸이다.
1293년(충렬왕 20) 총랑(摠郞)으로 있을 때 언(彦)을 국문(鞠問)하라 했는데 예전부터 아는 관리(官吏)인지라 (彦)을 데려다가 화(禍)와 복(福)으로서 잘 타이르니 언(彦)이 실상을 토로 하므로 이에 대언(大彦)과 영(領)등을 베었다. 1308년(충렬왕 35)에 이혼(李混), 최균(崔勻), 승지 권준(權準)과 함께 번양왕(藩陽王)이 제정한 관제(官制)와 비판서(批判書)를 쌓아가지고 원나라로부터 서울에 돌아오니 권세(權勢)부리던 세신(世臣)과 구관(舊官)들이 다 물러갔다. 홀로 임금을 뵈올 수 있는 총애(寵愛)를 받았으며 1310년(충선왕 3)에 원나라에서 팔찰(八札)등을 보내어 황후책봉(皇后冊封)한 일을 반포했다. 처음 환관(宦官) 이대순(李大順)이 원나라에 들어가 총애를 받고 권세를 부리더니 구평궁(救平宮)으로 더불어 노비(奴婢)의 분쟁이 있자 황제가 제령(制令)을 내려 형부(刑部)에서 결정하라 하므로 그 때 전서(典書)로서 그 안건(案件)을 주장하여 구평궁(救平宮) 위씨(韋氏)에게 노비(奴婢)를 돌려주니 대순(大順)이 노(怒)하여 팔찰(八札)과 같이 황제의 명(命)이라 하여 귀양가게 되었다. 1311년(충성왕 4)에 평양윤(平壤尹)이 되었고 이어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1316년(충숙왕 4) 상의회의(商議會議) 도감사(都監事)를 거쳐 1318(충숙왕 6)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있을 때 왕명으로 온천(溫泉)에서 잡은 새를 "선조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보본(報本)하는 것이요 내가 몸소 새를 잡아 올리는데 유사(有司)가 그렇게 반대한단 말이냐 내가 깊은 궁중(宮中0에 있어 경(卿)이 아니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알으랴"고 하였다. 시호는 정경공(貞景公)이며 묘(墓)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설단 하였다.
配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 父 문성공회헌유(文成公晦軒裕) 祖 판도판서(版圖判書) 부(孚), 曾祖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영유(永儒), 外祖 우사간(右司諫) 漢南金祿延
사(參知政事)였고, 묘(墓)는 실전되어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설단 하였다.
16세 김진(金稹)(양간공파) (1292∼ ?)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적재(迪齋) 아버지는 정경공(貞景公) 사원(士元)이며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로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딸이다.
1307년(충렬왕 34) 문과 추장제술과(秋場製述科)에 급제하여 1332년(충혜왕 3)에 중현대부(中
17세 김영리(金英利)(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
고려 후기의 문신, 初名은 정리(貞利), 아버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장영공(章榮公) 진(?)과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권씨(福州(安東)權氏)로 상호군(上護軍) 윤명(允明)의 딸이다.
문정공 신현(申賢)의 문인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같이 성리학을 배웠다. 1347년(충목왕 4)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속관(屬官)을 지냈고 1351년(충정왕 4) 전라도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로서 민전(民田)을 다스렸으며 1354년(공민왕 4)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서 통의대부(通議大夫) 군기감사(軍器監事)에 이르렀다. 문정공 신현선생의 사실을 모아 화해사전(華海師全) 6권을 저술하였고 묘(墓)는 실전되었다. (見高麗史)
配는 남양홍씨(南陽洪氏) 父 선공부령(繕工副令) 승연(承演), 祖 첨의찬성사 양순공 경(僉議贊成事 良順公 敬), 曾祖 좌리공신 경흥군 첨의중찬 충정공 자번(佐理功臣慶興君僉議中贊 忠定公 子藩), 外祖 밀직부사 연안 이득량(密直副使 延安李得良)
아버지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영리(英利)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선공부령(繕工副令) 승연(承演)의 딸이다.
1367년(공민왕 17)에 양광도(楊廣道: 충청도)와 전라도찰방을 지냈는데 그 때 공로로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으로 책봉(冊封)되었고 중대광(重大匡) 광성군(光城君)에 봉(封)해졌다.
묘(墓)는 실전 되었다가 후손(後孫) 화택(和澤)이 춘천부사(春川府使)로 있을 때 찾아서 다시 수호(守護)하니 춘천시 칠전동 모란봉에 있다. 남한에 있는 묘 중 가장 윗대의 묘이다.
아들인 김약채(若采), 김약항(若恒), 김약시(若時) 3형제 대에서 광산 김씨가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19세 김약채(金若采)(양간공파/판군기감가공파)
고려말,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정(鼎)이며 어머니는 숙신택주(肅愼宅主)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전법판서(典法判書) 방(昉)의 딸이다.
광성군의 첫째 아들로서, 1371년(공민왕 21)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의가 되었다. 이 때 조반(趙 )의 옥사를 다스릴 때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이 권세를 이용하여 조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고문이 참혹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앉은 관원들이 감히 잘못이라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홀로 불가함을 주장하여 고문을 중지시키고 조반의 죄를 면케 하고 염흥방 등을 죽이게 하니 조야가 다 통쾌히 여겼다. 1392년(태조 1) 지신사(知申事)로 나라를 바로잡고 치적이 많았다. 1400년(정종 3) 문하부좌산기상시(門下府左散騏常侍)로서 대사헌 권근(權近)과 같이 권세가문에서 사병을 양성하는 폐단을 막았다. 또 왕실의 종친을 봉군하여 정사에 참여하는 근원을 막았다. 그 해 겨울에 대사헌(大司憲)에 승진되어 이 때 무신 권희달이 완폭하여 죄를 범하자 형리를 보내어 구속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권희달이 형리를 때리고 도망하였다. 그 후 임금은 권희달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으니 그 그릇됨을 상소하여 잘못을 탄핵하고 귀양보내 관의 악습을 막았다. 1401년(태종 2)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승진되고 1404년(태종 5)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어 논산군 연산면 거정리에 세거(世居)하였으니 지금까지 유적(遺蹟)이 전해오고 있으며 후손이 광산김씨의 중흥(中興)을 이루었다.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고 묘(墓)는 양주군 풍양이었으나 실전되어 논산군 연산면 거정리에 설단하였다. (見高麗史,朝鮮王朝實錄,國朝文科榜目,與地勝覽)
19세 김약시(金若時).(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직제학공)
고려말, 조선 전기의 절신,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정(鼎)이며 어머니는 숙신택주(肅愼宅主)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전법판서(典法判書) 방(昉)의 딸이다.
광성군의 셋째 아들로서, 1382년(우왕 9) 사마시(司馬試0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 10)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태조(太祖)가 등극하자 부인과 함께 걸어서 광주(廣州) 금광리(金光里) 산골짜기에 이르러 나무를 얽어 지붕으로 삼아 비바람을 막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의관을 괴이히 여겨 이따금 와서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혹은 술과 음식을 가져다가 대접해도 받지 않으니 그가 살고 있는 동네를 부전어(不傳語)라고 이름하였다.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우울하게 상심하며 흐느끼나 사람들은 그의 듯을 헤아릴 수 없었고 또한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태조가 물색하여 그를 찾아내어 원래의 관직을 주고 벼슬하게 하니 공은 병을 앓아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특별히 성명방(誠明坊)에 있는 집 한 채를 손수 "송헌(松軒: 이성계의 호)이라고 어호(御號)를 써서 주었다. 일찍이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좋지 못한 시기에 태어나서 종묘사직의 망함을 직접 보고도 죽지 못하고 또 훌쩍 속세를 벗어나 멀리 숨지도 못하는 것은 선인의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곧 여기에 장사하되 봉분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두 개를 좌우에 놓아두고 망국의 천부(賤 : 천한 죄인)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卒하자 자손이 그 말대로 하였다. 고상한 풍도와 절조는 길야은(吉冶隱) 제공(諸公)들과 대등한데 공은 다만 그 사적이 민몰(泯沒)되었기 때문이요 후인들이 또 감히 포장천양( 奬闡揚)하지 못하는 것은 공의 평소의 뜻을 상하게 할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공의 지조와 절개를 아는 사람이 적었던 것이다. 두문동 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이며, 조선조 순조 때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묘(墓)는 광주군 실촌면 삼합리에 있고 모충사(慕忠祠)와 장성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다. (見高麗名臣傅, 華東忠義錄, 崧陽耆舊傅, 朝鮮王朝實錄)
20세 김문(金問)(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 (1373∼1393)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충청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약채(若采)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원주원씨로 문정공 송수(松壽)의 딸이다.
자질이 영민하고 학문이 일찍 성취하여 1392년(공양왕 5) 나이 20세에 문과(文科)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묘(墓)는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 (見朝鮮王朝實錄)
20세 허씨 (許氏)(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 (1377∼1455) 79歲,
조선 전기의 열부, 관향(貫鄕)은 양천, 아버지는 대사헌 응(應)이며, 남편은 검열(檢閱) 문(問)이다.
17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니 친가의 부모가 불쌍히 여겨 개가 시키려 하자 부인은 죽기를 맹세코 부모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어린 아기를 업고 머나먼 길을 주야로 걸어 부백리길 연산의 시가까지 와서 아들을 훌륭히 길렀고 종신토록 수절하니 세종대왕이 장한 행실을 듣고 정려(旌閭)를 명하니 허씨부인 43세때였다. 명정(命旌)은 사후에 내리는 것이 통상례이나 이는 특수한 사례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260명의 효열포상이 상신되었으나 엄선하여 26명을 표상하였으니 정경부인 허씨가 포함되었다. 그의 후손들이 현달하여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루었다. 정려(旌閭)가 도지정문화재 109호로 지정되었다. 묘(墓)는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見三綱行實錄, 與地勝覽)
21세 김철산(金鐵山)(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관찰사공파)(1393∼1450) 58歲.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증좌찬성(贈左贊成) 문(問)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로 대사헌(大司憲) 응(應)의 딸이다.
음사로 벼슬길에 올라 세자참군 인수부승 예빈시 직장, 풍저창부사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 천품이 순후하고 강직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서로 비교하지 않았으며 좋고 나쁜 일을 들어내지 아니하니 모두가 숨은 덕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에 책봉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광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21세 김예몽(金禮蒙)(사온직장공파)(1406∼1469) 64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경보(敬甫), 호는 만사(晩沙), 아버지는 증좌참찬(贈左參贊) 소(遡)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옥과조씨(玉果趙氏)로 소감 신우(臣祐)의 딸이다.
1429년(세종 12)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1432년 친시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저작랑에 뽑혀 보임되었고, 이내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고 1440년 부사직(副司直)으로서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시관이 되어 진사 신숙주 등을 뽑았는데 이로부터 항상 시관을 맡아보아 뽑은 선비들이 많이 달관과 제상이 되어 그 때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세종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자 하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는데 조정공론이 公만한 적임자가 없다하여 드디어 거용하여 보내니 公이 해외의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기미의 빛이 얼굴에 나타남이 없으므로 보는자가 모두 칭찬하고 임금이 역시 중히 여기어 은례가 더욱 두터우며 그 재기를 알아줌이 매우 깊었다. 1447년(세종 30) 집현전 교리(集賢殿敎理)가 되어 그 해 중시 문과에 을과 3등 9인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고 대사성으로 옮겼다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초배(超拜)됨에 임금이 날로 고문을 주어 존례가 매우 높았으며 중국에 보낼 표찬이 있으면 반드시 公에게 명하여 지어 바치게 하니 왕이 그 지은 바를 보고 특히 참다운 문장이라고 허락하여 주었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전임하였고 1458년(세조 4) 가선대부에 승자되어 홍주목사로 나아갔다가 1460년(세조 6) 정조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청백하고 너그러운 선정을 베풀어 일도가 다 칭송하였다. 1464년(세조 10) 명나라 헌종황제가 등극함에 부사로 진하하였다. 1468년(세조 14) 정헌대부에 가자되어 공조판서(工曹判書)겸 지성균관춘추관사 판의금부사에 배수되고 팔준도명(八駿圖銘)을 지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配는 정부인(貞夫人) 창평조씨(昌平曺氏), 繼配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이다.
묘(墓)는 중원군 금가면 잠병리 막현이다.
21세 김효로(金孝盧)(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安東예안파 입향조)(1454∼1534) 81歲.
조선 전기의 학자. 字는 순경(舜卿), 호는 농수(聾 ), 아버지는 증참의(贈參議) 회(淮)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안강노씨(安康盧氏)로 현령(縣令) 응(膺)의 딸이다.
1480년(성종 12) 생원시에 3등 8인으로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일삼지 않고 시골에 살면서 청렴 결백으로 신조를 삼고 남과 사귀되 구차하지 않았으며 남의 악함을 보고도 관용을 베풀었다. 제사를 받들되 성경을 다하고 자손을 가르치되 효제로써 하였다. 부귀를 구하지 않고 조행이 탁이 하였으므로 향천을 받았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에 있다.
22세 김국광(金國光)(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1415∼1480) 66歲.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훈신, 字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아버지는 철산(鐵山)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부사 명리(明理)의 딸이다.
1438년(세종 21)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생으로 뽑혔을 때 황희 정승이 항상 말씀 하시기를 김생은 "작게 될 사람이 아니다" 하며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반드시 의관을 정제한 뒤에라야 공을 보았다. 1441년(세종 24)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처음 벼슬에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1445년(세종 28) 황해도 도사에 승진하고 1447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및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449년 전라도 도사 1452년 승문원 교리(承文院敎理)가 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사헌부 지평이 되어 이듬해 함안사람 최옥산의 옥사를 잘 다스리니 임금이 "김국광이 아니었으면 무죄한 백성을 죽일뻔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어 성균관 사예를 제수받았고 왕명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 후 부승지, 참의를 거쳐 1461년 병조참판에 승진되었는데 「事知第一」이라는 네 글자를 내리어 포상하고 문무전재라고 칭찬하였다. 1464년(세조 10)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승진되고 1466년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듬해 우참찬이 되고 병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게 하였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고 특명으로 도승지를 겸직하였다. 이 때 길주 적 이시애가 백성을 선동하여 감사, 절도사, 수령을 다 죽이고 반역하였는데 이를 평정한 공으로 정충출기적개 2등 공신에 오르고 좌찬성에 승진되었다. 1469년(예종 2) 우의정(右議政)에 승진되고 편집중인 경국대전을 집대성하였다. 1470년(성종 2)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 1등공신에 녹선되었으며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封)해졌다.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다.
의정공(議政公) 국광(國光)은 광산김씨로는 처음으로 좌의정을 하셨다.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신도비명에 찬(撰)하기를 『광산에 모인정기 대대로 호걸과 영웅이 나는 도다 공이 이에 큰 영걸이다 그 소리 크게 떨쳤도다 공은 경제 포부를 가졌고 공이 국책을 시설코자 하였도다. 광묘를 만났으니 천년만에 한 번 있을 기회로다 은대에 뽑혔고 사마에 어른이로다 시정을 조치함이 모두 다 적당하니 어디를 간들 옳지 않으리오 계책을 임금께 아뢰니 오히려 군진의 벗이 유악에서 운주하니 장자방 같은 사람이라 깊숙한 상부와 드높은 기린각에 단청이 빛나고 신흘이 엄연하다 충성과 근면이요 공훈과 인덕이로다 백성은 귀서같이 생각하고 나라에서는 주석같이 믿었도다 하늘이 돕지 아니하여 거연히 불행하였도다 한나라 개국공신 같은 공은 남았으나 위징같은 명감은 들을 수 없네 당저 슬퍼하여 부의와 제문을 내리었네 웅진강이 희고 계룡산은 푸르도다 연산의 한 언덕이 공의 현당이다 풍성한 비 서 있으니 영원토록 빛나리라 나의 아첨함이 아니라 후세에게 계고 함이로다』
配는 정경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니 영의정(領議政) 황희(黃喜)의 손녀이다.
묘(墓)는 논산시 두마면 왕대리에 있으며 충청남도지정문화재자료 제308호이다.
22세 김겸광(金謙光)(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1419∼1490) 72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위경( 卿), 호는 서정(西亭), 아버지는 증영의정(贈領議政) 철산(鐵山)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부사 명리(明理)의 딸이다.
1441년(세종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3년(단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 23인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한림(藝文館翰林)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감찰, 정언, 병조좌랑, 정랑, 장령을 역임하였고 1460년(세조 6) 북쪽 오랑캐 낭이승합(浪伊升哈)이 변방을 침범 하였을 때 체찰사(體察使: 나라에 난리가 났을 때 재상이 임금을 대신하여 겸임하던 軍職의 하나) 신숙주(申叔舟)의 종사관으로 오랑캐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또 건주위(建州衛) 이만주(李滿住)의 도당을 토벌하는데 크게 공을 세워 통훈대부에 승진되고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임명되었다. 그 후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오르니 그 때 형 국광(國光)이 호조판서로 세조의 은총이 두터웠는데 임금이 모자를 벗기고 꽃을 꽂아주며 "그대가 벼슬은 형보다 낮으나 현량한 것은 형보다 낫다." 하고 술을 권할 만큼 총애를 받았다. 1463년(세조 9)에 우승지, 1465년 호조참판, 이듬 해 평안도절도사, 개성부윤, 1467년 예조판서 겸 의금부사가 되고 1468년에 상시관(上試官)이 되어 인재를 많이 뽑고 1469년에 예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고 겨울에 성종이 즉위하자 1471년 임금을 보필한 공으로 순성명량좌리공신에 녹훈되고 광성군(光城君)에 책봉되었다. 1475년(성종 7)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우참찬(右參贊), 좌참찬(左參贊), 세자 우빈객, 좌빈객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공안공(恭安公)이며 부조(不 )의 은전을 받았다. 신도비(神道碑)는 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이 찬(撰)하였는데 "몸은 하나로되 쓰이는 것은 백가지요, 들어오면 재상이요 나가면 장수로다"하였다.
配는 정경부인 진주유씨(晋州柳氏)는 조졸(早卒)하고, 繼配는 정경부인 삼척진씨(三陟陳氏)요 三配는 문화류씨(文化柳氏)이다.
묘(墓)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23세 김극뉴(金克忸)(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1436∼1496) 61歲.
조선 전기의 문신. 字는 의백(義伯),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국광(國光)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장수황씨로 전첨 보신(保身)의 딸이다.
처음 벼슬은 음사로 청진전직이 되었다가 찰방이 되었고 남원으로 옮겼다가 1468년(세조14) 춘장방 문과에 병과 23인으로 급제하여 종부시정을 거쳐 의빈부 경력이 되어 광릉군 이극배의 종사관으로 승진되어 남방의 기근을 구제하는데 매우 공평하고 안정되게 하였다, 그 공로로 절충장군에 승진되어 오랫동안 판결사로 있다가 병조, 예조, 형조, 공조의 참의를 거쳤고 서추(西樞: 武班)도 겸했다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고 덕종추존시 대사간으로서 헌납 김일손 등과 함께 비례라고 역쟁하니 공의가 옳게 여겼고 연산조에 또 김일손 등과 소능(昭陵: 文宗王妃權氏陵) 복위를 헌의(獻議)하였다.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과 동지성균관사와 광원군(光原君)에 추증되었다.
묘(墓)는 순창군 마흘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與地勝覽)
23세 김극수(金克羞)(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경력공)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국광(國光)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장수황씨 보신(保身)의 딸이다.
천품이 총민하고 덕행이 있어 학문이 일찍 성취되었으며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올라 익위사세마에 제수되었고 원종공신 회맹제에 참여하였다. 군자감판관을 거쳐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으로 재직중 아버지의 상사의 애통함이 지나쳐 복을 마치지 못하고 이듬해 서거하였다.
묘(墓)는 논산시 양촌면 석서리에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 김충윤- 토정 이지함의 고모부
23세 김극핍(金克핍?)(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공안공파/평정공)(1472∼1531) 60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자성(子誠), 아버지는 공안공(恭安公) 겸광(謙光)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삼척진씨(三陟陳氏)로 사직 계손(繼孫)의 딸이다.
1489년(성종21)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8년(연산 5) 식년시 문과에 3등 23인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었고,검열, 봉교, 전적, 예조좌랑, 수찬, 지평, 예조정랑이 되었다. 이 때 연산군의 정란(政亂)으로 언관(言官)을 주찬(誅竄)하자 고산현(高山縣)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이 즉위하자 귀양에서 풀려나와 교리가 되고 장령, 부정으로 옮겼고 승문원 교감(校勘)으로서 연산일기를 수록하는데 참여했고 그 후 사간, 집의 제용, 선공감정에 올랐고 직제학, 동부승지, 우승지,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 좌승지, 도승지, 공조참판, 충청도관찰사, 한성부우윤, 이조참판, 좌참찬, 병조판서, 세자좌빈객, 우찬성, 좌찬성 겸 세자이사에 이르렀다. 항상 음흉한 무리들의 횡포와 방자함을 임금에게 직언으로 간하여 출척(黜斥)할 것을 아뢰고 흉당들의 원한을 받았다. 1530년(중종 25) 김안로, 허항, 등에게 몰려 관작을 빼앗기자 단식 끝에 발병하여 서거(逝去)하였고 1537년(중종 32) 김안로 등이 사사(賜死)된 후 다시 복관(復官)되었다.
용모가 단아하고 식견이 풍부하였으며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교만하지 않았다.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 광악군(純忠輔祚功臣崇祿大夫光嶽君)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평정공(平靖公)이다
묘(墓)는 양주군 주내면 마전동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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