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시풍속
일 년을 주기로 반복적으로 행해오던 세시풍속들이 있다.
세시풍속에는 민속신앙을 포함한 문화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지(冬至)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그러면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다.
또한 동지는 생명력과 빛이 다시 부활하는 날이다.
음력으로 11월에 드는 동짓달은 12지의 첫 번째인 쥐의 달, 즉 새해의 첫 달로 판단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기준이 아닌 자연의 기준으로 한 해의 시작은 동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해서 기념하기도 하였다.
궁궐에서도 동지에는 왕에게 하례를 올리는 날 중 하나였다.
또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기도 하였다.
동지에는 관상감에서 만든 새해의 달력을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이것은 단오날 부채를 나눠주는 풍속과 아울러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 년 동안 무사안녕을 빌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팥죽을 쑤어 먹는 것이다.
팥의 붉은 색은 음양중 양(陽)의 색깔로 음(陰)한 귀신을 쫓는 색으로 우리는 생각해왔다.
이날 팥죽을 먹지않으면 쉽게 늙고 잔병이 생기며 잡귀가 성행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해서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불렀다.
섣달 그믐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수세
이날은 온 집안에 불을 밝히고 잠을 자지 않고 새해를 맞이한다. 이것을 수세라고 한다.
송구영신의 의미이자 도교의 수경신 풍속의 영향이기도 하다.
동지 이후 경신일은 6년에 한 번 드는데
42년 동안 경신수세를 7번 하면 몸속의 삼시신이 사라져서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불교와 도교의 혼합문화라고도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졸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고 놀리기도 한다.
폭죽 / 연종포
조선시대에는 섣달그믐에 재앙을 쫓기 위한 연종제(年終祭)로 나례의식을 펼쳤는데,
민간에서는 대나무를 태워 요란한 소리를 내는 폭죽이나 대총, 지포인 딱총을 놓기도 하고
궁중에서도 연종포(年終砲)를 터뜨렸다.
이렇게 하면 집안에 숨어 있던 잡귀들이 놀라서 도망가고 무사태평(無事泰平)하다는 것이다.
묵은 세배
이날은 묵은설이라 하여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어른들에게 (묵은) 세배를 드린다.
일부지역에서는 저녁 식사 전에 하기도 한다.
또한 만둣국 동치미를 조상께 바치고 먹는 지역도 있다.
제야의 종
지금은 서울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108번 치던 것을 33번으로 줄여 타종하고 있다.
이것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송구영신을 기념하고 있다.
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설날노래를 외국인에게 알려주는 것은 어떨까!
설날은 가을 한가위와 함께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이다.
아침에 조상에게 제사(차례)를 지내고
웃어른들을 찾아 뵙고 인사(세배)하며 덕담을 나누는 풍습이 있다.
설날이후 3일 동안은 길에서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덕담을 나누었다.
그 내용을 보면 '새해에 건강하세요' 하고, '승진하세요’, '득남하세요’, '돈 많이 버세요' 등이 있다. 요즘은 거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로 통일된 느낌이다.
자연으로 봐서 설은 애매한 날이자, 불규칙한 날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준으로 한 해의 시작인 설에도 다양한 풍속이 있다.
이슬람력처럼 민족이나 종교에 따라
지금의 태양력이나 태음력과는 다른 설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역법은 인간의 역사속에서 다양한 모습과 기준을 가지고 변화해왔다.
설날에 우리는 차례를 올리고, 설빔을 입고, 세배를 올리고, 연하장을 보내고, 악귀를 쫓는 부적을 문에 붙이고,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등의 세화를 보내는 등의 전통이 있었다.
차례와 세배를 하는 것은 지금도 행해지나 나머지는 대부분 사라져가고 있다.
또한 한 해의 운세를 점치기도 하였고, 연날리기를 하면서 액을 날려보내기도 하였다.
또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복조리를 구입하고 흰 떡국을 먹는 것도 설날의 풍습이다.
원래 떡국에는 꿩고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꿩고기가 귀해지면서 닭고기를 사용하였는데,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식 세시풍속이 주를 이뤘다면,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식 세시풍속으로 변하였다.
1896년 이후 양력을 사용하면서 한때는 음력설이 사라질 뻔 하기도 했었다.
민속의 날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던 날도 있었지만
1989년 다시 설날이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관원들이 대궐에 나가 새해 문안을 드리고,
전문(箋文)과 표리(表裏:거친 무명 또는 흰 명주)를 바치고
정전(正殿)의 뜰로 나가 조하(朝賀)를 올렸으며,
지방인 8도에서는 지방관들인 관찰사· 병사(兵使)· 수사(水使)· 목사(牧使)는
전문과 방물(方物)을 바쳤다.
전문(箋文) : 나라에 길흉사가 있을 때 올리는 글.
설날 아이들이 입는 새 옷을 세장(歲粧 = 설빔)이라고 한다.
경제가 어려운 시절 아이들에게 설날은 손꼽아 기다리던 날 중 하나였다.
설날 대접하는 음식을 세찬(歲饌)이라고 하는데 주로 떡국을 먹는다.
그 밖에 만두 약식 인절미 빈대떡 강정 식혜 수정과 등도 즐긴다.
설날 이른 아침에는 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두는데 이것을 복은 담는 ‘복조리’라고 한다.
설날의 놀이로서는 남녀가 방 안에서 다 같이 윷놀이를 하고,
젊은 부녀자들은 널뛰기, 남자들은 연날리기를 한다.
야광귀
설날밤 야광귀가 하늘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어보고 맞으면 신고가는데 신발을 잃은 사람은 그 해에 재수가 없다고 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정월대보름에 이런 풍습이 있다.
이날은 밤에 신발을 감추거나 엎어 놓는다.
또 체나 키를 지붕에 매달아 놓거나 저녁에 고추씨와 목화씨를 태워 독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재수없어!
설날에 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었다. 재수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바느질을 하면 안되고, 문종이를 바르면 안된다.
일년이 힘들고 복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를 치우면 재물이 사라진다고 여겼다.
곡식을 팔거나 남에게 주면 집안의 복이 나간다고 여겼다.
이렇게 다양한 징크스가 존재했다.
입춘
입춘은 24절기 가운데 첫 절기로,
새해 봄의 시작을 상징하는 날이다.
따라서 이날을 기념하고
한 해 동안 좋은 일이 많이 있기를 바라는 여러 가지 풍습이 있었으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부 가정에서 대문에 입춘축만 붙이는 정도만 있고,
대부분의 풍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입춘축(立春祝)
다른 이름으로 춘축(春祝)· 입춘서(立春書)· 입춘방(立春榜)· 춘방(春榜)이라고도 한다.
입춘이 되면 각 가정에서는 복을 비는 의미로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인다.
입춘축은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자기가 붙이고,
글씨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남에게 부탁하여 써서 붙인다.
입춘이 드는 시각
즉, 날짜가 바뀌어 입춘날이 되는 시점에 맞추어 붙이면 좋다고 하여 밤중에 붙이기도 하지만
상중(喪中)에 있는 집에서는 써 붙이지 않는다.
입춘날 입춘시에 입춘축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여
입춘축이 벽사의 의미로 붙여짐을 알 수 있다.
입춘축을 쓰는 종이는 글자 수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가로 15센티미터 내외, 세로 70센티미터 내외의 한지를
두 장 마련하여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외에 한지를 마름모꼴로 세워
‘용(龍)’자와 ‘호(虎)’자를 크게 써서 대문에 붙이기도 한다.
입춘축으로 사용되는 문구는 매우 다양하며 대개 정해져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 등 이 있다.
입춘대길 : 입춘이니 한해 좋은 일만 많이 있기를 바란다
건양다경 : 양(陽)을 세우고 경사가 많기를 바란다
개문만복래 : 문을 여니 온갖 복이 들어온다
소지황금출 : 땅을 빗질하니 황금이 나온다
전북에서는 입춘축 붙이는 것을 “춘련(春聯)붙인다.” 하고,
이를 붙이면 “봉사들이 독경하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또 써 붙이지 않고 그냥 글귀를 외워도 좋다고 한다.
춘첩자(春帖子)
옛날 궁궐에서 입춘이 되면 내전 기둥과 난간에 문신이 지은 글 중에 좋은 것을 뽑아
연잎과 연꽃 무늬를 그린 종이에 써서 붙인 것으로,
경운궁 중화전 내부 기둥에 붙어있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의하면,
입춘이 되기 열흘 전에
“승정원에서는 초계문신(抄啓文臣)과 시종신(侍從臣)에게
궁전의 춘첩자를 지어 올리게 하는데,
패(牌)로써 제학(提學)을 불러 운(韻)자를 내고 채점하도록 한다.” 하였다.
초계문신(抄啓文臣) ; 당하문관 중에서 문학에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다달이 강독·제술의 시험을 보게 하던 사람
입춘부(立春符)
입춘날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주사(朱砂)로 벽사문(辟邪文)을 써서 대궐 안으로 올리면
대궐 안에서는 그것을 문설주에 붙이는데, 이를 입춘부(立春符)라 한다.
입춘하례(立春賀禮)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 입춘하의조(立春賀儀條)에 의하면,
입춘날에 백관이 대전에 가서 입춘절을 축하하면 임금이 그들에게 춘번자를 주고,
이날 하루 관리에게는 휴가를 주었다.
목우(木牛)
함경도에서는 입춘날 나무로 만든 소를
관청으로부터 민가의 마을까지 끌고 나와 돌아다니는 의식을 가졌는데,
이는 흙으로 소를 만들어 겨울의 추운 기운을 내보내는 중국의 옛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행했다고 한다.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습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보리뿌리점[맥근점(麥根占)]이라 하여
농가에서는 입춘날 보리뿌리를 캐어보아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데,
보리뿌리가 세 가닥 이상이면 풍년이고,
두 가닥이면 평년이고,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경기도 시흥· 여주, 인천에서는
입춘 때 보리뿌리를 캐어 보리의 중간뿌리[中根]가 다섯 뿌리 이상 내렸으면 풍년이 들고,
다섯 뿌리에 차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충남에서는
입춘날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이 그해 풍작이 된다고 한다.
입춘날 날씨가 맑고 바람이 없으면, 그해 풍년이 들고 병이 없으며 생활이 안정되나,
눈이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입춘날 망치질을 하면 불운이 닥친다고 한다.
또 입춘날 여인이 남의 집에 가면 그 집의 논밭에 잡초가 무성하게 된다고 믿어 조심하였다.
또 이날 집안 물건을 누구에게도 내주는 일이 없는데,
만일 집 밖으로 내보내면 그해 내내 재물이 밖으로 나가게만 된다고 한다.
입춘절식
『경도잡지』와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경기도 산골지방(畿峽)에서는 햇나물을 눈 밑에서 캐내어 임금께 진상했다.
궁중에서는 이것으로
오신반(다섯 가지의 자극성이 있는 나물로 만든 음식)을 장만하여 수라상에 올렸다.
오신반은 겨자와 함께 무치는 생채 요리로
추운 겨울을 지내는 동안 결핍되었던 영양소를 채소를 통해 공급한 것이다.
민간에서는 이것을 본 떠 입춘날 눈 밑에 돋아난 나물을 뜯어다가 무쳐서
입춘 절식으로 먹는 풍속이 생겨났다.
춘일 춘반(春盤)의 세생채라 하여
파· 겨자· 당귀의 어린 싹으로 입춘채(立春菜)를 만들어 이웃 간에 나눠먹는 풍속도 있었다.
경남 창녕군 영산에서는
이날 새알심을 넣지 않은 팥죽을 끓여 먹고 집안 곳곳에 뿌려 벽사(辟邪)를 한다.
충청도에서는
이날 보리뿌리가 내리기 때문에 보리밥을 먹어야 좋다고 하여 보리밥을 해 먹는다.
함남 북청에서는
이날 무를 먹으면 늙지 않는다고 하여 무를 먹고,
잡곡밥은 먹지 않고 흰쌀밥을 먹으며,
이날은 나이 먹는 날이라 해서 명태순대를 해 먹었다.
정월 대보름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상원조에
“이날 온 집안에 등잔불을 켜 놓고 밤을 새우고 마치
섣달 그믐날 수세(守歲)하는 예와 같다”고 적고 있다.
원래 달은 음(陰)으로 달-여성-대지 등을 상징함으로써
풍요기원의 원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테면 만월(滿月) 때에 여신에게 대지의 다산 또는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다.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이란
중원(中元 : 음력 7월 15일, 백중날)과 하원(下元 : 음력 10월 15일)에 대칭이 되는 말로서
이것들은 다 도교적인 명칭이다.
이날은 우리 세시풍속에서는 가장 중요한 날로 설날만큼 비중이 크다.
우리나라 세시풍속의 20% 이상이 정월대보름날에 행해지고 있다.
유래
보름의 유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나타나 있다.
까마귀가 소지왕을 인도하여 위급을 면하게 했고,
그 후로 매년 첫 번째 돼지·쥐·말날에는 백사를 삼가고 감히 동작을 아니하며,
15일을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지내니 지금에도 행하고 있다.
까마귀는 후대에는 불길한 새가 되었지만,
상대(商代)에는 태양의 상징이기도 한 영조(靈鳥)였다.
『삼국유사』 이래의 오기일의 까마귀제사, 까마귀밥들은
그러한 고대의 까마귀 모습의 한 잔영이다.
삼족오는 고구려와 태양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지금은 일본축구협회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경주부조(慶州府條)에서 위 기록을 인용하며,
삼가는 날들을 여기서는 신일(愼日)이라 기록하고
속말로는 달도라 하니 삼간다는 뜻이라고 했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도
“동방 옛 풍속에 세수와 정월 첫 번째 쥐날과 말날, 2월 1일을 신일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세수(歲首, 1월 1일)·첫 번째 쥐날·말날·돼지날·대보름·2월 1일들이 다 신일이고 달도이다.
이 신일이나 달도라는 말들은
이 명절과 뜻있는 날들에 마음이 들떠서 좋아하지만 말고,
삼가고 조심성 있는 마음가짐을 일깨우던 뜻에서 나왔다 하겠다.
정월대보름의 음식
약밥·오곡밥, 묵은 나물과 복쌈·부럼·귀밝이술 등을 먹는다.
정월 대보름의 시절음식은 시절음식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속신적인 부분과 많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귀밝이술[耳明酒]은
대보름날 아침에 데우지 않고 찬 귀밝이술을 한 잔 마시는데,
이것은 귀가 밝아진다는 의미 외에 일 년 내내 좋은 소식만을 들을 수 있다는 의미도 있다.
부럼깨기는
『동국세시기』에
“상원 이른 아침에 날밤·호두·은행·무 등을 깨물면서
일년 열두 달 무사태평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고 축수하니
이것을 이굳히기[固齒之方]라고 한다.”고 했다.
이굳히기는 중국·일본에서도 널리 전해 왔으며 설날에 행해지고 있다.
부럼은 지금도 전국적으로 성행된다.
찰밥과 약밥을 먹는 풍속도 있다.
찹쌀을 쪄서 대추· 밤·기름·꿀·간장을 섞어서 함께 찌고
잣을 박은 것을 약밥[藥飯]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제사를 지낸다.
전남에서는 찰밥이나 약밥은 시루에 쪄서 성주신에게 올리기 때문에
성주밥 또는 시리(시루)밥이라고도 한다.
호박고지·무고지·가지나물·버섯·고사리 등을 여름에 말려 두었다가
대보름날 또는 정월 열나흗날에 나물로 무쳐 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김이나 취로 밥을 싸서 먹는 것을 ‘복쌈’이라고 한다.
이들은 다 오곡밥의 반찬으로 풍성하게 담아 먹는 것이다.
평남 순천에서는 대보름날 국수발 같이 명이 길어지라는 뜻에서
명 길이 국수를 먹는다고 한다.
지신밟기
정초부터 대보름 전후에 동네 농악대가 집집을 돌며
즐겁게 놀고 축원해 주는 것을
지신밟기(전국)·매구[埋鬼, 호남]·걸립(乞粒, 중부) 등으로 다양하게 불러왔다.
그러나 평안도·함경도 등 북쪽에는 농악대들이 없었으니 지신밟기도 없었다.
지신밟기는 주산 > 당산 > 집돌이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집돌이는 대체로
대청 > 큰방 (성주) > 각 방 > 부엌(조왕) > 우물 > 장독 > 마굿간 > 뒷간 > 문
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동제(洞祭)
첫 보름달이 뜨는 시간에
여신에게 대지의 풍요를 비는 것이 우리나라 동제(洞祭)의 주류였고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제(洞祭)는 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화합을 다지는 시간이다.
동제에는 선출된 제관이 축문을 읽는 유교적 정숙형이 제일 많고,
여기에 몇 년 걸이로 무당굿이 따르는 것을 동해안 지역에서는 흔히 별신굿이라고 한다.
줄다리기
첫 보름달이 뜨는 밤에 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암줄(서, 여자편)과 수줄(동, 남자편)의 고리를 거는 일을 그렇게 여기는데,
여기에서 암줄편인 여성편이 이겨야 대지에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다.
줄다리기는 그 종류에 따라서 진행 과정이나 내용이 복잡하고 다양하다.
고싸움놀이
줄다리기의 한 전초전으로서
최근까지 전남의 장흥·강진·영암 등에서 대보름 줄다리기에 앞서서 행해졌다.
이것은 보통 줄다리기의 줄 머리부분의 둥근 고를 맞대어 상대방을 깔고 누르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끝나면 두 고를 연결해서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차전놀이
‘동채싸움’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경북 안동에만 전승하는 대보름의 대형 민속놀이이다.
수백 명 장정의 머리꾼들이 팔짱을 끼고 어깨로 밀고 나가는 뒤로
동채꾼들이 메는 동채 위에 탄 대장의 지휘로 전진 후퇴를 하다가
적의 동채를 눌러서 땅에 대면 이기는 승부이다.
석전(石戰)
두 편으로 갈라서 돌을 던져서 싸우고, 이기는 편에 풍년이 온다고 했던 대보름의 편싸움놀이다.
한·중·일에 다 있었고, 한국은 고구려에서부터 역사상 기록도 많았으며,
전국적으로 성행하다가 1930년대에는 소멸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보름새기
대보름날 잠을 자면 눈썹이 샌다고 해서 잠 안자기 내기를 하는 곳이 있다.
충청북도에서도 열나흗날 밤 ‘보름새기’를 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사자춤
함경도 북청에서는 동네마다 사자춤이 있어서 유명하다.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동네의 잡귀를 쫓고 안과태평을 빌었다.
사자춤은 중국·일본에도 많고, 사자는 부처님 사자(使者)로 여겨지며,
봉산탈춤 등에도 나오고 있다.
기 세배
주로 대보름에 마을의 상징인 농기(農旗)와 농악대들이 모여서
그 서열에 따라 인사를 하는 의식이 기세배 즉, 깃발 세배이다.
기 세배는 전북에서 많이 전승되는데
이때 각 마을의 농악대들이 서로 연주를 뽐내는 농악 경연도 벌어진다.
서열이 불분명해서 서로 먼저 인사하라고 실랑이가 벌어져서 기싸움이 되는 수도 있다.
이 깃발 싸움은 상대 농기 위의 꿩깃을 빼앗으면 이기는 곳(전북 김제)도 있고,
서로 부딪쳐서 먼저 부러뜨리면 이기는 곳(전북 남원·경남 영산)도 있다.
방생
14일 밤에
부인들이 붕어나 자라를 사서 강에 놓아 주고 종이를 태우며 축원을 올리는 일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이것을 방생(放生)이라고 한다. 3
월 삼짇날, 8월 보름에도 한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는
“깨끗한 종이에 흰 밥을 싸서 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슴[魚鳧施]이라 한다.”고 했다.
글자 뜻으로는 물고기나 오리에게 베푼다는 것인데,
대보름에 액막이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쥐불놀이
『동국세시기』 정월 상자일조(上子日條)에
“충청도 풍속에 떼를 지어 횃불을 사르는데 이를 쥐불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정월 대보름 또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많이 한다.
이렇게 하면 논두렁의 잡초와 병충을 없애고,
재가 거름도 되고, 논두렁이 여물어지고 농사가 잘된다고도 한다.
달집 태우기
달은 풍요의 상징이고
불은 모든 부정과 사악을 살라버리는 정화의 상징이다.
달과 관련된 풍속으로
청소년들이 짚이나 솔잎, 나무들을 모아서 언덕 위에 쌓고
조그만 오두막이나 큰 다락 등의 달집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는 달이 뜨기를 기다려서 불을 지르고 환성을 지른다.
달집 속에 대나무들을 넣어서 터지는 폭음으로 마을의 악귀를 쫓기도 한다.
달집이 탈 때 고루 잘 타오르면 풍년이고,
다 타고 넘어질 때 그 방향과 모습으로 흉풍을 점치기도 한다.
나무 시집보내기
정월 열나흗날이나 대보름에
감 대추 배 등 과일나무의 가지 친 사이에 돌을 기워 두면
열매가 많이 열린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의 상원조와 단오조에도 이 기록이 보인다.
지금도 각 지방에 전승하며 중국 일본에도 유사한 풍속이 있다.
복토훔치기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잘 사는 집 대문 안의 흙을 훔쳐다가 자기 집 부뚜막에 바르는데,
이것을 ‘복토훔치기’라 한다.
다리밟기/답교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다리[橋]를 밟으면 다리[脚]가 튼튼해진다고 해서 성행하였다.
서울의 경우 개천 12다리를 건너면 1년 12달의 나쁜 기운을 몰아낼 수 있다고 여겼다.
연날리기
‘액막이연’이라 하여 정초부터 날리던 연을 대보름날에는 날려 보낸다.
이때 연에 ‘송액(送厄)’ 또는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의 글귀를 써서 하늘 높이 띄우고,
연줄을 끊는다.
연은 한없이 날아가 버리고, 그 연의 주인이 지닌 액은 다 사라진다고 한다.
대보름 이후에 연을 날리면 액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보아 욕을 먹기도 하였다.
더위팔기
대보름날 아침에 더위팔기를 한다.
이날 아침에 사람을 보면 급히 이름을 부른다.
대답하면 곧 “내 더위 사가라.” 한다.
이것을 ‘더위팔기’라 하고 이렇게 하면 그 해에는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