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2월1일이며,음력으론 10월10일로, 진주목사 양계 정호인의 묘제날이다,
公계서는 선조대왕 30년 정유(丁酉) 8월 19일 정축(丁丑) 해시(亥時)에 영천 북 입암촌(立巖村) 외가에서 호수 정세아(湖수 鄭世雅)의 3남 용양위 부사과 휘 안번(安藩)의 장남으로 출생 하셨다,
*公은 어릴때 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5세때 이미 글을 깨우쳐서 조부 호수公의 사랑을 듬뿍 받아 조부님 아래에서 문장을 배웠고 7세가 되던 해에 호수공의 명으로 달성현 황성리에 손모당 문하에서 수학했다,
*공께서 손모당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할 때에 그의 명성이 자자하여 한강 정구선생의 친찬을 받으며 선생의 문하생들도 부러워 했고 특히 한강선생 문하생인 대암 최동집(臺巖崔東集) 형제등 많은 문생들과 교우했으며, 손모당선생 문하에서 長을 맏아서 수행했으며, 글공부에도 더욱 힘을셨다,
*손모당,선생 아래에서 수학하던 광해2년 1610년 손선생님의 권유로 공이 겨우 14세 때에 별과 향시에 급제하고, 1612년 윤11월초3일에 조부 이신 호수공의 상을 당하시고, 상을 마친 1616년 5월에 월성손씨 충의위 손노(孫魯)의 따님에게 장가 드시고, 곧 바로 10월에 진사시에 29인 중 제3등으로 뽑혔셨다, 이 때가 광해10년 1616년 10월이다, 그러나 공은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럽 다는 이유로 공은 "인륜의 기강이 무너졌도다,"하시고, 문을 닫고 발자취를 거두고 書史로써 즐겼다,
*광해11년 1619년에 공께서 입암에 가서 여헌장선생을 찿아 가셨다, 그후 인조원년 1623년에 인조 반정이 성공되니 이 때에 1627년9월에 드디어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 장원을 하셨다,
공께서 성균관 학유 때인 1630년 모월에 용양위 부사과공이 상을 당하여 낙향 하시고,연이어 다음 해인 31년에 모친 권씨의 상을 당하셨다,
이 때에 연이언 상중이라, 류사월,도락음,양계원,최대암,정쌍봉,선생등등 상중의 정양계가 몸이 많이 허약 해 졌다는 걱정의 위문등을 하였다,<<각각 유고집>>
*공은 상을 마치고, 上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성균관 박사,전력,종사관등을 승진 하시고, 자청하시어 양산군수에 나아가,군민을 위한 주군이 되시니, 군민들이 떠난 공의 공로를 선정비를 세웠다,
여러 군을 거처서, 드디어 진주목사에 가시니, 여러 종인들의 권유로 더디어,우리 영일정씨 족보를 진주관사에서 오천정씨 세보(기축보)를 공의 녹봉(월급)으로 편수 하시고, 여러 종인들의 도움으로 임고서원에서 목판본으로 책편 하였다,
*그리고 공의 종제 덕기(삼휴 정호신)이 상을 당하니, 삼사에 다가 교채를 청하니,上이 허락치 않아 뜻을 못 이루니, 공은 마음의 병고가 생기고,또 연이어 동생 어봉(정호문) 마져 상을 당하여, 교채 해 줄 것을 청하였지만 역시 上께서 허락치 않아 뜻을 못 이루시니, 병이 더욱 심하여,1655년 모월 모일에 공이 관사에서 돌아 가시니,,,수 많은 선비들의 제문이 눈물로 얼룩지며, 공의 아버지가 계시는 울주에 장사 하였다, 최대암(최동집) 만사에서, "공의 부모가 울주에 있는 것을 알고 있어니, 그대가 저승에 나의 형이 있는것을 아시니, 내가 6십 인생을 더 살고 있더라고 전해 주시겠나," 했다,
*여기는 양계공 호인의 3남중 장남이신 무공랑 휘 시행(時行)의 산소 이므로, 이 분이 부군 목사공이 돌아 가시니, 세상에서 보기가 드문 효자로서 부군이 상을 당한 후 부터 식음을 삼키지 못하시며 슬프 하시다가, 병이 드시고, 공의 동생 정학암(학암 정시연)과 정취성당(취성당 정시간)이 직접 정승을 다 하여 약과 미음을 들게 하였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 가시니, 영천 西 늘밭에 장사 하였다,
*초헌관은 용양위부사과 부터 14대 주손이신 전 울산대학교 교수 정윤극(훈수공 종손)이시다,
후손 들은 400년 다가오는 오늘 까지 정승을 다 하여 잔을 드리고,,,,,
*통덕랑 학암 정공 이라, 이 분이 갈암이선생(이현일)의 절친했던 교우 이신 학암공 정시연(鄭時衍)이시다, 양계공의 둘째 아들로, 갈암선생의 아들 이재와 공의 종손자 이신 훈지수공(정만양,정규양)의 학문을 가리키신 분으로, 학문의 깊이가 폭넓어서 갈암이선생께서 공의 소문을 듣고 찿아와 강론하고 선생의 아들의 학식을 바로 잡아 줄것을 청하였다,
*선생의 주손이 초헌하시고, 큰집 후손(무공랑)이 축관을 하시고,,,,
* 양계공께서 울주에서 영천 늘밭에 오신것은 월성손씨께서 돌아 가시며,이곳에 이장 합폄 하였였다, 또 이 늘밭에는 무공랑의 장남 생원 양곡공 정석(碩耉)와 무공랑의 3남 이신 돈와공 석우(碩佑)가 계시고, 그 이하 후손도 몇몇분이 여기에 계십니다,
*음력 10월16일은 당지산(공조 판서공 배위 영양이씨와 그 아들 장남 이신 사정공(정위)) 내외분이 계시고요,,,
*다음날인 10월17일에는 삼귀제(2파조,영산유학교도,휘 문예.내외분과 2파조의 장손자 찰방공(정이휘)내외 분이 계십니다,
*???,후손들이 많이 참석 하여 주시기를 청하며, 이만 줄입니다,
*끝까지 필독 하심에 감사 드림니다,
첫댓글 진주목사 양계공 호인 선생께서 만드신 오천정씨 족보 필사본이 저희집에 한권 있습니다.
필사본이라면 아주 귀한 책입니다,
오천정씨족보 상,하,로 된그 책은 1649년 진주관아에서 편찬된 자료로, 영천임고서원에 가져와서 여러 종인분들이 목판을 하여 인쇄,책편 한 것으로 당시에 참여하신 분들 중에 필사한 것으로 생각됨니다,
물론 진주목사께서 여러권을 필사하여 임고서원에 보내긴 했으나, 현재 남아있는 필사본이 있는지는 보지 못하였지요, 현재 남아있는 그 책은 목판본으론 남아있을 것이나, 가지고 있는 책이 필사본이라면 그 책을 복사 한 것이라도 가지고 싶군요,,, 필사본이라면 정말로 귀한 책입니다,,, 귀하게 간직하세요,,
페이지는 日 月로 상 하로 두권인 것을 한권으로 만들어 집안에 조카가 아제도 한권 가지고 계십시오 . 해서 가지고 있는데 소중하게 보관해야겠네요. 양계공 호인 선생님 책은 집안에서 만든 것이 없습니까? 족보도 만드시고 훌륭한 분이라서 한번 읽어 보고 싶어서요.
양계선생문집이 있습니다,
@비봉(義錄) 보내 드린다고,저가 쪽지로 주소 부탁드렸는데요,~ 주소만 알려주세요, 드릴께요
오늘 도착했지요?
@(원보)정정용 보내주신 책을 잘 받았습니다.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책을 잘 만드셨네요. 저도 양계 정호인 선생에 대해서 궁금했는데 이제 책을 읽어보게 되어서 감개가 무량합니다.포항 남성재 시제때 뵙고 싶습니다.
포은 몽자 주자 할아버지는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