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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50. [역경의 열매] 권태일 (1-20) ‘국민마을 건설’ 기도… 4163번째 날의 기적
11년의 기도, 응답되다
숨이 막혔다. ‘사랑의 국민마을’ 건설을 위한 연속기도 4163일, 햇수로는 11년 8개월 동안 기도해 왔지만 가시적인 확신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헛바퀴 같은 세월이었다. 그 헛바퀴만 돌던 공회전 기도에 드디어 기어가 덜커덕 걸리는 응답소리가 들렸다. 바로 이 응답소리를 찾아 나는 그 기어의 키를 쥐고 있는 한 사람, 전재명씨를 단숨에 만났다. 바로 그날이 지난 9월 5일 사랑의 국민마을 건설을 위한 연속기도 4163일째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이미 제주도 레저타운을 기획했고, 충북 제천에 베티 신부 일대기를 테마성지로 만드는 일도 기획해 왔다. 이 외에도 여러 도시 건설과 테마파크에 깊숙이 관여해왔던 국내의 몇 안 되는 도시건설 전문가였다. 그동안 나는 보통사람들이 평소 생각지도 못하는, 또 평범하게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사랑의 국민마을이라는 첨단 복지마을 생활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11년이 넘도록 기도해 왔다. 따라서 이 분야 전문가를 만나게 된 게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기쁘고 설레었다.
나보다 어렸지만 백발의 그에게선 전문가적 분위기가 풍겼다. 그동안 내가 구상하고 생각해 왔던 ‘사랑의 국민마을’의 기본 이념과 정신을 구현할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없이 부르짖어 왔던 열정의 덩어리에 새롭게 불을 붙일 수 있는 불씨를 마련했다.
그는 나를 보는 순간 이 ‘사랑의 국민마을’이 자기가 만든 구상인 것처럼, 아니 자기의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목사님, 이 사업은 그냥 사업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생명을 건 사업이라면 나에게는 필생의 사업입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과 또 추진하고 있는 일들을 설명했다.
그리고 금전적인 부분은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나와 필생의 사업이라는 협약식을 맺자고 오히려 나를 조르기 시작했다. 자신도 나에게 할 수만 있으면 모든 것을 바쳐 같이 동참하겠다고 했다. 그가 나에게 모든 것을 바쳐 힘이 되겠다는 이 열정의 모습에 100만 원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나는 전씨의 이 열정의 모습에 가슴이 뛸 뿐 아니라 4163일을 기도해온 공회전 기도가 덜커덕 응답으로 이어지는 기어 기도가 된 것에 대하여 너무나 흥분되기만 했다. 2011년 9월 10일 함께하는 사랑밭 직원들 앞에서 사랑의 국민마을을 위한 협약식을 가졌다. 보기에는 여느 협약식과 다를 바 없었지만 나와 그는 거대한 나라를 건설하듯 설렘과 감격으로 가득 찼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이룰 때까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아프리카 개척선교사 리빙스턴의 명언이다. 나는 이 명언을 나의 행동신조로 여기며 24년을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5)는 말씀을 110% 이루고 싶은 열망으로 달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 매순간 너무나 감사하고 감사하다. 자다가 일어나 한참을 웃다가 다시 잠을 청하고 또다시 너무나 감사하여 한참을 자다가 또다시 일어나 웃다가를 반복하는 일이 잦을 정도로 매순간 감사가 사무친다. 어찌 나에게 11년을 넘게 기도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셨단 말인가? 하나님, 그분은 내 목숨이고 생명이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
* [역경의 열매] 권태일 (1) '국민마을 건설' 기도… 4163번째 날의 기적
* [역경의 열매] 권태일 (2) 별들이 가르쳐준 진리 ‘더불어 빛날 때 더 아름답다’
* [역경의 열매] 권태일 (3) 껌팔이·짜장면 배달에도 ‘위인의 꿈’은…
* [역경의 열매] 권태일 (4) 완벽주의·내성적 성격… 약점을 성공 디딤돌로
* [역경의 열매] 권태일 (5) 부대원들의 영혼 구원한 대대장의 예배 인도
* [역경의 열매] 권태일 (6) ‘절대 긍정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치유의 기적
* [역경의 열매] 권태일 (7) ‘뇌물’의 부끄러움에 사표 던지고 새삶 도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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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55년 경북 성주 출생, 총회신학교 목회학과 졸업, 미국 베다니대학 철학박사 수료, 실버홈 이사, 중보기도단 7000클럽 상임회장, 함께하는 사랑밭 이사장, 월드쉐어 이사장, 사랑밭 새벽편지 이사장, 사회복지법인네트워크 이사장, 한국사회복지미래경영협회 이사장
***[역경의 열매] 권태일 (2) 별들이 가르쳐준 진리 ‘더불어 빛날 때 더 아름답다’
나는 1955년 경북 성주군 초전면 봉정동 654번지에서 아들 셋, 딸 셋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수로 일하시다가 침구학원을 다녀 침을 놓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읍내 중학교 뒤 조그마한 집에서 진료를 했는데 환자들이 50m 정도나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용하다고 소문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간호사가 되어 환자들을 돌봐주었다. 나는 죽어도 뜸을 뜨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붙잡아놓고 시범을 보이는 조교가 됐다. 막내였던 나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어릴 때의 기억은 그리 많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술을 너무나 많이 좋아하셨던 탓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누님 두 분이 이미 결혼하였고 남은 4남매를 어머니 혼자 기르시느라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어깨너머로 침술을 전수받아 농한기에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 침을 놓아주었다. 참으로 용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많은 이들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대체적으로 아이들이 놀다가 팔이 빠지거나 입이 돌아가신 분들은 100% 치료해주는 명의로 소문이 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우리 동네는 50가구 정도가 집성촌으로 모여 살았다. 동네 사람들은 어느 집 숟가락과 밥그릇이 몇 개인지를 알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명순이라는 아이와 엄마가 이사를 왔다. 어머니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이보게, 명순이네는 쌀이 없어 물만 먹고 불을 때서 밥 해먹는 척한다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평소 친구들과 윷놀이를 하기 위해서 자주 모이곤 했었는데, 그날 저녁에 다 같이 모여서 친구들에게 제안을 했다. “야 친구들아, 명순이네가 양식이 없어 굶는다는데 우리 쌀 한 띠빙(뚜껑)씩만 가져와 모아서 전달해주자”고 제안했다. 친구들은 흔쾌히 동참하겠다고 하여 그 이튿날 저녁에 쌀을 가지고 왔다. 어떤 애는 봉지에 넣어오기도 하고, 어떤 애는 부모님께 얘기하지도 않고 호주머니에 넣어와 한 움큼씩 꺼내 놓기도 하였다.
모두 모으니 서너 되가 되었다. 뭐라고 위로의 글을 썼는데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십자편지를 만들어 쌀 위에 꽂았다. 그리고 그날따라 캄캄한 그믐 때라 간솔(소나무 진액이 나온 가지)에 불을 붙여 친구 몇과 함께 명순이네로 가서 문 앞에 살금살금 걸어가 그 쌀을 놓고 돌아왔다. 그날만은 세상에서 제일 부자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잤다.
이튿날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명순이 엄마가 며칠 후 꽁치 조림에 우리가 전해준 쌀로 밥을 해서 우리를 대접했다. 우리가 보낸 쌀인 줄 알면서도 쌀밥이 귀할 때이기도 하지만, 어린 마음에 생각이 짧아 꽁치 조림에 쌀밥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명순이 엄마가 친구들을 불러 앉혀놓고 “내가 너희들 앞에 할 말이 없구나. 내가 너희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무엇일까? 저녁에 우리 집에 오면 내가 동화도 들려주고, 위인들의 이야기도 해주마. 내일 저녁부터 오너라”고 했다. 명순이 엄마의 마음에 짠함이 보였고, 표현할 수 없는 아스라함이 밀려왔다.
친구들과 나는 돌아오는 길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을 가누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있었다. 저 별들이 나에게 말을 했다. ‘세상에는 너 혼자 사는 것이 아니란다. 어울려 사는 것이지. 마치 우리가 이렇게 어울려 하늘에서 반짝이는 것도 혼자라서가 아니라 여럿이서 어울려 다정한 모습에 기분이 좋아 반짝이는 거야’ 하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3) 껌팔이·짜장면 배달에도 ‘위인의 꿈’은…
우리는 매일 저녁 명순이네에 갔다. 명순이 엄마로부터 동화와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링컨, 강감찬, 을지문덕, 유관순, 나이팅게일 등 위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줄 때마다 우리는 주먹을 쥐기도 하고, 머리가 쭈뼛쭈뼛 서기도 하고, 땀을 흘리기도 했다.
당시는 흑백TV도 동네에 한두 대밖에 없었다. 라디오도 없어 여러 친구가 귀를 들이대고 들었다. 그럴 때 동화와 위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액과외였다. 지금의 홈스쿨링을 이미 45년 전 나는 참으로 효과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명순이 엄마는 부부 교사였다. 한데 남편이 위암으로 사망한 이후에 시어머니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며느리 때문에 아들이 병들어 죽었다는 것이다. 핍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외딸을 데리고 집을 나와 떠돌다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했고, 애국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고생을 해야 했다. 대체로 위인들은 어린 시절 신문팔이나 껌팔이 등을 하며 수많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나는 그 위인들처럼 되고 싶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중학교 때 충북 제천에 있는 한 고아원까지 찾아가 아이들을 보고 돌아왔다. 당시 시골에만 있던 내가 제천까지 간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후 방학 때 서울에 가서 껌팔이를 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방학 때는 서울에 올라가 짜장면 배달을 했다. 이 또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 코스를 밟아가는 과정으로 여겼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곳이 있다. 서울 남가좌동에 있는 가좌반점이라는 곳이다. 거기에서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배달통을 들고 가다가 엎어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음식 그릇을 대충 거둬 식당으로 돌아갔다가 주방장에게 국자로 머리를 수없이 얻어맞았다. 그때도 나는 참았다. 이유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이 나의 머릿속에는 오직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교육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이후 45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 그리고 지금의 내 가치관을 보면 환경과 시간만 달랐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중학교 때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다. 당시 국회의원에 나서는 사람들은 마을회관을 지어주고, 다리를 놓아주었다. 정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리고 머리가 좀 큰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좀 현실적으로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가고 싶었다. 당시는 육사 출신이 거의 고위직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나의 가치관은 조금씩 현실화로 이어져 갔다.
특히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옷을 입고 다닐 때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구겨짐 없이 입고 다니려고 애를 썼다. 바지가 구겨지는 것이 싫어 의자가 있어도 앉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중·고교 때는 뒷자리에 소위 ‘노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했다. 홍길동과 같은 의로운 건달이 되고 싶었고 그 친구들은 별 상스런 욕을 다 했지만 나는 농담으로도 욕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이런 기억을 돌이켜보면 나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에 대하여 완벽하려고 그렇게 애를 쓴 것은 절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강권적인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4) 완벽주의·내성적 성격… 약점을 성공 디딤돌로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은 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겠지만 유별나게 나는 이 성경 말씀을 볼 때마다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닌가. 모가 난 성격으로 치면 정 맞은 돌처럼 사방팔방에 모가 나 있고, 아는 것이라고는 별로 없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교회를 가도 누가 아는 척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참으로 쓸모없는 존재가 바로 나 아닌가. 이렇게 수많은 허점과 결점으로 가득 찬 쓰레기 같은 나였다.
하지만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을 보고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약점이나 부족한 부분들을 주신 이유는 바로 그 약한 부분과 부족한 부분을 디딤돌로 하여 성공의 발판을 만들어가라는 주님의 명령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믿지 않을 때에는 내가 못났기 때문에, 내가 만일 돈을 많이 벌면 나보다도 잘 나고 멋있고 학력 좋은 이를 비서로 쓰겠다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는 이것까지도 응답해 주시는 전능의 하나님이면서 자상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나는 부산으로 갔다. 부산 보림극장 앞에서 리어카 책장수를 하고 있던 매형을 돕다가 나중에 독립했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계속 리어카 책장수를 했다. 부산진역 앞에서 경남여고 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헤매다가 저녁에만 리어카에 책을 싣고 와 판매했다. 부산의 날씨가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어찌나 바람이 센지 모진 추위에 책을 팔면서 인생 고난의 스펙을 또 하나 쌓게 되었다.
스물한 살 나이, 책은 잘 팔리지 않고 날씨는 춥고 손발은 시렸다. 옆의 어묵장수에게서 어묵을 사먹었지만 잠시뿐이었다. 너무나 내성적이어서 나의 힘든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도 못했다. 어떤 때는 돈이 없어 용두산공원을 배회하다가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바른 곳에서 쪼그려 자기도 했다.
하역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노무자수용소에서 하루 100원씩 내고 잠을 잤는데 그것도 사람이 많으면 잠을 자지 못하기 일쑤였다. 비록 내성적이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나의 이 고난이 성공의 스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사람 4명이 있다면 긍정적인 사람, 고난을 찾아가는 사람, 부지런한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특히 영장을 받고 군 입대를 할 때도 나는 훌륭한 사람은 눈물을 함부로 흘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3년 고생을 통하여 나는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다짐을 하며 왜관역에서 기차를 탔다. 같이 군대 가는 동료들은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나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아예 가족들을 오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의 슬픈 모습이 내일을 향한 나의 의지를 꺾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 당시에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냉혹하리만큼 자기관리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5) 부대원들의 영혼 구원한 대대장의 예배 인도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천주교인이었다.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에다 견진성사까지 받았다. 그런데 군에 입대한 뒤 천주교회를 찾았지만 개신교회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강원도 철원 관인지역의 638포병대대에 배치되었다. 흔히 군대 갔다 오면 사람 된다고 하는데, 나야말로 군대 가서 소위 팔자를 고친 사람이다.
군에서 세 가지를 얻었다. 먼저 소위 ‘포다리’라고 해 포병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면서 사회에 나와서 극심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을 얻었다. 둘째는 상급자들로부터 수없이 맞아가며 일을 신속하고 꼼꼼하게 하는 것을 배웠다. 셋째는 천만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성령체험을 하게 됐다.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 올라간 지 얼마 안 돼 우리 부대에 강모균 대대장이 부임했다. 군대의 엄한 규율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대대장은 그야말로 하늘같은 존재였다. 한데 그는 전직 대대장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단 그는 교회 집사로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소령 때 간암에 걸렸던 그는 엄청난 고통 중에 있다가 어느 날 부흥회에 참석해 씻은 듯이 치유 받았다. 이후 그는 소위 교회에 미친 사람이 돼 있었다.
그는 대대장 부임 후 전 부대원들의 식사를 자유배식으로 바꾸었다. 중간에서 고참들이 맛있는 것을 빼가는 것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그리고 저녁 9시만 되면 취침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그러자 일석점호를 하기 전 한 시간 동안 매 맞고 기합 받고 극심한 욕설에 시달려야 했던 고통이 없어졌다.
그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직접 예배를 인도했고, 수요일에는 외부 목사님을 모셔와 예배를 드렸다. 금요일에는 철원에 있는 대한수도원에 가서 철야를 하고 토요일에 내려와 주일예배 준비를 하셨다. 대대장이 부대 안을 예배 드리고 찬송하는 분위기로 바꾸어 버렸다. 특히 정초 연휴에는 유명한 부흥강사를 모셔와 사흘간 부흥회를 열기도 하셨다.
어느 날 천국을 다녀온 성결교단의 이경순 목사님을 모셔 부흥회를 했다. 이 일로 부대원들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그 전에는 담배가 없어 쓰레기장에서 담배꽁초를 모아서 종이에 말아 피우고, PX에서 술을 사다가 밤만 되면 술파티를 열기 일쑤였다. 그리고 고참들은 술에 취하면 부하들을 화장실 뒤로 끌고 가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이 일과였다. 하지만 부흥회 후에는 그렇게 모자라던 화랑 담배가 관물대에 서너 갑씩 남아돌았으며, 저녁이 되면 찬송과 기도 소리가 내무반에 울려퍼졌다. 너도나도 하나같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슴 가득 채웠다. 기합과 구타가 난무하던 부대 안 전통은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가 됐다.
바로 그때 나는 성령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믿음생활을 하며 군 생활이 그렇게 신바람 날 수가 없었다.
이후에 나는 중대 교육계와 군종병 역할을 맡게 됐다. 아무리 힘든 교육을 받아도 성령 받은 이후에는 언제나 기쁨이었고 신바람이었다. 무엇보다도 큰 소득은 당시의 그 대대장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2001년에 설립한 사단법인 ‘중보기도단 7000클럽’을 만들어 실무회장을 맡고 계신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의 만남이 30년 넘게 이어진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인가. 더구나 그 만남으로 힘을 얻고, 도움을 받고, 천국을 바라보며 손잡고 갈 수 있는 믿음의 동행을 할 수 있다는 것,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든든하지 않은가.
***[역경의 열매] 권태일 (6) ‘절대 긍정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치유의 기적
군 생활 중 만난 강모균 대대장을 믿음의 아버지로 30년 동안 모실 수 있다는 것은 평생의 감격이다. 교회 장로가 되신 그분이 한결같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 든든하다.
특히 강 장로님은 중보기도 클럽을 하시면서부터 하루 15시간 동안 난치병을 앓거나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를 하신다. 바쁘게 살아가면서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일이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그것도 무려 하루 15시간씩이나. 나는 그런 분을 믿음의 아버지로 모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분은 언제나 내 믿음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신다. ‘중보기도단 7000클럽’ 실무회장으로 계시는 나의 영원한 대대장님이시다. 그분은 특별한 체험을 가진 분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분은 하나님께 간암을 고침 받은 뒤 완전히 달라졌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진하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강하게 하나님을 사모하게 됐다. 그 이후에 그분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3년 동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피부병을 기도로 치유 받게 된 사건이다.
5년 전쯤 강 장로님의 몸에 조그마한 딱지가 생긴 뒤 가려워 긁었다. 그런데 그게 피부병으로 바뀌어 온몸으로 번졌다. 병원을 다녔지만 얼굴이 붓고 붉은 반점이 몸 여기저기 생겼다. 백약이 무효였다. 거기다 진물이 얼마나 많이 나는지 하루에 세 번이나 바지를 갈아입어야 했다.
약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신 강 장로님은 나에게 기도를 요청했다. 나는 그분께 “남을 위해 기도를 해주시는 장로님에게 지독한 병에 걸린 데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해줬다. 강 장로님은 그 길로 경기도 파주의 오산리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하기 시작하셨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이틀째 기도를 하고 나자 씻은 듯이 진물이 그쳤다. 하나님께서 일단 예표를 보여주셨다. 하지만 이후에 또다시 진물이 났다. 좌절하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서 좌절하는 것을 봐왔던 터였다. 나는 그분께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입니다”라고 용기를 주었다. 절대 긍정의 예수님 말씀을 계속 선포하게 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라는 누가복음 19장 23절 말씀을 강하게 주지시켰다. 그래도 효력이 없었다. 3년이 넘어가도 기도를 하면 할수록 강 장로님의 피부병은 점점 심해졌다. 이제는 손과 발이 붓기 시작했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이들을 위해 자기 일처럼 기도에 매달리시는 분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닥친단 말인가. 그리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왜 이렇게 더 심해진단 말인가. 자칫 좌절하고 낙심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님이 교회학교 봉사를 마치고 모든 교인들이 귀가한 후 교회에 혼자 앉아 감사기도를 하고 있었다. 온몸이 가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참 팔을 긁다가 팔을 내렸는데 소매 안에서 뭔가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눈을 의심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진물이 너무 많이 나 손발에 붕대를 감아야 했는데 갑자기 진물들이 멎고 딱지가 되어버렸다. 3년 만에 일어난 욥의 기적이 장로님에게 나타난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이 현실이 됐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7) ‘뇌물’의 부끄러움에 사표 던지고 새삶 도전장
누구나 단 한 번의 삶을 산다. 현존하는 인물 중 강모균 장로님보다 더 기준 잡힌 삶을 살려고 애쓰는 이를 나는 보지 못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때로는 그 이상까지 온전히 타인의 고통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분의 절대적인 기도의 지원이 있기에 나는 지금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소리칠 수 있다.
목회를 하기 전 갑자기 답답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를 부탁하고 싶을 때가 더러 있었다. 한데 교회 담임목사님이나 구역 성도에게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참으로 난처했다. 그래서 화재신고 119에 하듯이 ‘긴급 중보기도 119’를 설립해야겠다는 평소의 소원이 있었고 드디어 2001년 5월 17일 ‘중보기도단 7000클럽’을 창립하게 되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님이 총재직을 흔쾌히 승낙해 주셨고, 신현균 목사님이 대표회장을 맡아 주셨다. 큰 어른 두 분이 힘을 모아주셔서 나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되었다. 특히 신 목사님께서 소천하신 후엔 다음 대표회장으로 윤석전 목사님이 흔쾌히 용기를 내주셨다. 이로써 중보기도단은 큰 힘을 얻었다. 이런 어른들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지혜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이라고 확신한다.
이에 그동안 대쪽 같은 믿음으로 일관해 오신 강 장로님의 절대적인 하나님 중심 믿음이 고스란히 녹아든 국내 유일의 중보기도단 7000클럽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연 13만건, 월 1000건이 넘는 기도가 요청되고 하나님의 응답이 이뤄지고 있다. 중보기도를 진행하는 중에 엄청난 이적과 기적들이 속출하고 있다. 각종 난치병 환자가 치료되고 우울증에서 고침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실수로 농약을 먹은 전도사님이 치료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초대교회의 기적들이 넘쳐나고 있다.
수많은 일들이 있고 사업이 있지만 중보기도단 7000클럽이 설립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너무나도 감사하다. 특히 기도응답 중에는 마음에 소원만 해도 눈앞에서 즉시 응답되는 경우도 있고, 기도한 후 한참 있다가 응답되는 경우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절묘한 기도응답에 대해 간증하고 있다.
3년 만기를 채우고 병장으로 제대한 나는 곧바로 숙모가 운영하는 실크공장에 자재담당으로 취직을 했다. 약 2년간 참으로 열심히 믿음생활을 지키며 일했다. 그런데 자재담당을 하다 보니 거래처에서 자신의 물건을 팔아달라며 이런 저런 선물과 뇌물을 손에 쥐어주는 경우가 있다. 처음엔 무의식적으로 이런 걸 한두 번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점점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젊은 나이에 이런 뇌물을 받아 무슨 성공을 할 것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던 내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의 상황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런 갈등 속에 결혼을 했고 3개월도 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며 정신 나간 놈이라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수 없었다.
직장을 뛰쳐나온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하루에 10만원 이상을 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한 책 세일즈맨 때문이다. 땀 흘린 만큼 수익을 올린다는 그의 자랑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소정의 교육을 받고 책 판매를 하러 나섰다. 하지만 의욕만 앞섰지 쉽지 않는 일이었다. 고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고난은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값진 열매로 맺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8) 고난속에 핀 꿈… 소외이웃 위한 ‘사랑의 국민마을’
9년간 세일즈를 했는데 4년 반 동안은 참으로 힘들었다. 제대로 끼니를 때울 수 없을 정도였다. 초창기에는 빚 때문에 아내를 친정에 보내고 경기도 성남에서 도피 생활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음속에선 국회의원이나 사업가가 돼 ‘사랑의 국민마을’ 이라는 소외된 이들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자라나고 있었다.
당시 아내는 나를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여겼다. 흰 종이에 이곳에는 양로원, 저곳에는 정신개조원, 다시 이곳에는 청소년수련원 등을 그려주며 꿈을 얘기하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당장 끼니도 해결하지 못할 뿐더러 빚 때문에 도망 다니고 있는 신세에 웬 얼토당토 않은 꿈인가 말이다. 아내 눈에는 그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나에게는 문제 되지 않았다. 나는 그 꿈을 향해 줄기차게 앞만 보고 달릴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품었던 나누며 살겠다는 마음이 든든한 기초가 되어 요지부동이었다. 실제로 흰 종이에 그린 꿈이 비전이 되었고 그 비전은 하나하나 실체로 눈앞에 만들어져갔다. 사도 바울이 천국을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처럼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지난 시간들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나는 한 가지씩 차근차근 이루어내는 기쁨으로 어느덧 23년을 가볍게 올 수 있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고 엄정하다. 그분은 수많은 훈련을 시키신 후 쓰신다는 사실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고 무릎을 치게 된다. 세일즈맨으로 4년을 지냈을 즈음 나는 소위 나일론 신자로 전락했다. 군대에서 지녔던 불같은 믿음이 세상으로 빠져들면서 교회와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나의 마음을 한 순간 회전시켜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문득 교회를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복음서점에서 톰슨성경을 사서 큰딸 효정이를 데리고 인천 부개동에 있는 작은 교회에 갔다.
교회에 들어가 앉아 고개를 숙이는 순간 “목사가 되라”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또렷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럴 환경이 아니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목사가 되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때부터 다른 기도를 하려고 하면 도저히 기도가 되지 않았다. 그 날부터 예배 때면 시작부터 끝까지 졸다가 와야 했다. 무려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축도 때 겨우 깨어서 나오다보니 목사님 보기가 민망해서 그 교회에 출석할 수가 없었다. 믿음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작은 개척교회에서 2년 동안 출석하다가 당시 살고 있던 인천 일신동 보육원의 교회에 나갔다. 그곳에는 아이들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마음이 움직였다. 지난 날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작은 꿈이 솔솔 피어났다.
1986년 11월초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결정적 사건이 생겼다. 무심코 그리고 조용히 일어난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됐다. 안마기 세일즈를 마치고 서울 충무로에서 명동으로 연결되어 있는 육교를 넘다 구걸을 하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박스를 깔아놓은 채 한 아이를 재우고 한 아이는 품에 안고 고개를 푹 숙인 엄마였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아주머니, 왜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왔습니까?” 묵묵부답의 여자는 고개만 더 깊이 숙였다. 가까운 매점에서 음료수와 빵을 사가지고 와서 재차 물었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돕고 싶어서 그럽니다.” 비로소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9) 가난 속에 깨달은 진리 “가난할수록 더 나누라”
육교에서 구걸을 하는 그 아주머니의 사연이 참으로 기구했다. 사고무친의 고아로서 시골로 시집 가 아이 둘을 낳고 쫓겨났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뒤 그렇게 된 것이다. 두 아이를 의탁할 곳이 없었던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그리고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내 삶의 목표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내가 하고 싶어 하던 새로운 삶의 목표가 선명히 보였다. ‘그래 이들을 위해서 살자.’ 이때부터 시간만 나면 쌀과 반찬거리를 사들고 그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그러던 중 마음 한 구석에 ‘이 아주머니와 같이 어처구니없이 어려운 이들이 어찌 이 사람뿐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시 세일즈맨 4년 반을 넘을 즈음 그날그날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교회를 다시 나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주머니를 만났다. 이 일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순간부터 나의 꼬인 세상 일이 한 가닥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니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시 73:28)라는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았다. 당시 나는 오늘 벌어서 이 집 도와주고, 내일 벌어서 저 집 도와주는 일을 했다. 사회복지 용어로 ‘재가복지’를 하게 된 것이다. 정부나 어느 기관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그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소위 돕는 일에 미쳤다. 마약을 한 번 먹으면 뭐가 뭔지 모르고 두 번 먹으면 얼떨떨하고 세 번 먹으면 중독이 된다는데, 나는 화상 입은 아주머니를 시작으로 한 번 돕고 두 번 돕다 보니 그만 나눔에 중독이 되어버렸다.
나는 봉지쌀을 사다 먹으면서 다른 집에는 쌀을 한 말씩 사다 주었다. 그래도 그 일이 그렇게 좋았다. 주위에서는 “제 치다꺼리라도 제대로 하지”라며 비웃었지만 나는 전혀 상관치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화상을 입은 아주머니를 만나면서 내 혼을 완전히 고정시키셨다. 왜 그렇게 힘이 나고 재미있는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주일이면 보육원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거나 용돈을 주면서도 기쁨을 쌓아 나갔다.
약 2년 동안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서 나누는 재가 복지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월세방을 살던 집 주인이 “이 근처에 어려운 할아버지 한 분이 있는데 도와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즉시 만났다. 노인의 사정이 딱했다. 친자식이 없어 들인 양아들이 효도는커녕 사업을 한답시고 재산을 있는 대로 다 탕진해버렸다. 결국 이리저리 떠돌던 노인은 인천 일신동 지하방에서 생활하다 그마저도 여름 수해로 물에 잠겨 버렸다. 돕는 일에 불이 붙은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일신동 재개발구역 인근의 비닐하우스를 35만원에 구입해 노인의 거처로 만들어 주었다.
꽃이 피면 벌과 나비가 달려드는 법인가. 그 노인이 생활하는 곳에 여기저기서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었다. 지금 운영하는 여러 시설의 모태인 ‘즐거운 집’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거처 없는 노인, 장애인, 고아 등이 어울려 생활했다. 당시에는 사회복지라는 용어조차도 모르고 그냥 저들의 고통을 만분의 일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의 일과는 1인 3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10) “목사가 되라” 음성에 낮엔 세일즈 밤엔 신학교
낮에는 세일즈를 하고 밤에는 신학교를 다녔다. 짬짬이 시간을 내 늘어가는 ‘즐거운 집’ 가족들이 함께 살 집을 지어나갔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길에 버리는 장롱이나 문짝들을 수거해 시간이 날 때마다 판잣집을 지어 갔다. 재개발 지역의 빈 집을 개조해 한 때는 방을 50개나 만들었다.
당시 주일이면 가족들과 함께 시온보육원의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두 명일 때는 괜찮았지만 10명이 넘어 20명에 육박하자 가족들끼리 싸우거나 되는 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보육원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도 보육원 원장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없이 한두 곳 다른 교회에 출석해 보았지만 믿음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3년 전 “목사가 되라”는 주님의 음성이 새삼 내 귓전을 울렸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성경의 그 수많은 사람들을 불렀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실 때 이런 환경으로 몰아가셨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오랜 시간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시킨 후 부르셨단 말인가?
출애굽기 3장의 “모세가 양떼를 몰고 호렙산에 이를 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나타내시며 떨기나무 옆으로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고 모세에게 보이며 하나님께서 내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가 선 곳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과연 내가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설레고 두려운 마음을 부여안고 쉽지 않은 결심으로 나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다는 것은 일생을 나를 위하여 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과연 내가 남을 위하여 내 몸을 바칠 수 있다는 말인가? 수없는 의문과 주님의 명령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매일 야간신학교를 다녔다. 멀리 있는 소위 좋은 신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당장 챙겨야 할 가족들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나로선 가족을 돌보는 차원을 넘어 이제는 가족이 내 몸이 되어 버렸다. 잠시도 이들을 떠나서 생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서부터는 곧잘 게으름을 피우던 내가 마냥 부지런해지고 열심을 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기자가 찾아왔기에 취재에 응했다. 모 일간지 1989년 12월 15일자 사회면에 나에 관한 기사가 크게 나갔다. 그리고 이듬해 MBC TV의 ‘인간시대’에도 나가게 되었다.
이 때 또다시 하나님께서 지혜를 하나 주셨다. 2년 전부터 재가복지를 하던 중 후원신청서를 만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월 1000원이면 누구든 쉽게 참여할 줄 알았는데, 많은 이들이 하찮게 대해 자존심이 상해 포기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많은 이들이 직접 즐거운 집에 찾아와 돕겠다고 하는 마당에 후원자를 얼마든지 참여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후원신청서를 내놓자 너 나 없이 참여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권유해 순식간에 후원자 2000명이 생겨났다. 이에 용기를 얻어 더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런 차에 또 하나의 사건이 생겼다. 제2의 사명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었다. 32세 된 병색이 완연한 한광훈이라는 형제가 찾아와 수술을 하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내용인 즉,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중풍까지 걸리자 어머니는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가고 자기 또한 후천성 심장병으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다리가 퉁퉁 붓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미천한 나를 이용해 또 하나의 ‘거사’를 도모하셨다.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역경의 열매] 권태일 (11) 어느 심장병 젊은이의 슬픈 죽음에 새 소명이…
심장병 수술을 하게 도와달라며 찾아온 젊은이를 대하고서 참으로 난처했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오죽 급했으면 나한테까지 왔을까 싶으니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도와줄 수가 없었다. 세일즈를 하면서 번 돈으로 30여명의 ‘즐거운 집’ 가족과 함께 판잣집에서 하루하루 근근히 살아가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계세요. 좋은 방법을 찾아서 연락할게요.”
한광훈이라는 젊은이를 돌려보내고 나자 가슴에 무엇이 걸린 듯 불편했다. 내 책임을 회피했다는 자책감과 죄책감 같은 걸 떨칠 수 없었다. 그때의 그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젊은이가 왔다 간지 사흘 만에 그의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충격이었다. ‘병원에 입원이라도 시킬 걸,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살릴 수 있는 한 젊은이를 내가 죽인 건 아닐까….’ 후회스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음을 겨우 추슬러 인천 도화동 그 젊은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놀랍고 기가 막혔다. 전쟁에 폭격맞은 듯한 집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판잣집보다도 못했다. 그 곳에서 그 젊은이는 쪼그린 상태로 죽어 있었다.
부랴부랴 장례용품 파는 곳으로 달려가 관 하나를 사와 젊은이의 시신을 수습했다. 나를 따라온 서광원 형제는 눈물을 훔치며 쫓아나갔다. 그는 동사무소로 달려가 이렇게 비참한 상황인데도 어떻게 돌보지 않았느냐고 소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부평 화장터에서 화장을 한 뒤 뼛가루를 뒷산에 뿌렸다. “긍휼의 주님이시여, 한광훈 형제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가 천국에서는 주님 품 안에서 안식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소서…”
화장터를 벗어나오는 내 심정은 참으로 착잡했다. 비포장도로에 일어나는 뽀얀 먼지 사이로 그 젊은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또 다시 온 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 들며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육교 위에서 구걸하는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 가슴에 담았던 사명을 다시 한번 다졌다.
그때부터 나는 한 마디로 나눔에 미쳤다. 그 젊은이처럼 고통당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게 해야 한다는 결의로 스스로를 단단히 무장시켰다. 그 젊은이가 겪었을 고통이 나에게 전이돼 온 몸을 뒤흔들었다. ‘기필코 이런 사람들의 고통을 내 힘으로 덜어주리라.’
그러면서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죄책감이 완전히 사그라들지는 않았지만 내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누구에게라도 소리 높여 강조할 수 있게 됐다. 내가 하는 일이 바로 주님의 뜻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됐다. 무한책임을 감당하겠다는 각오가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래, 나의 수고로 한 명이라도 고통당하는 이가 줄어든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장한 종이라고 칭찬해주지 않겠는가.’ 빈곤과 질병, 장애와 외로움 등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은 나의 가족이었다.
세일즈를 하면서 후원자 모집에 발 벗고 나섰다. 버스나 기차에서 물건을 팔듯이 고통당하는 이들을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오직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일념만 있었다. 한 젊은이의 죽음을 계기로 가슴속 열정이 활활 타올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2만명 가량을 후원자로 가입시켰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기적이었다.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내 생각을 고정시키고 이끌어가시는 것이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역경의 열매] 권태일 (12) 버림받은 이들의 어머니가 된 아내 홍현송 사모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어렵사리 ‘즐거운 집’을 열고서 본격적으로 나눔의 삶에 투신한 뒤 나는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온몸으로 붙들었다. 죽음과도 같은, 아니 죽음보다도 더 처절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과 살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돼야만 했다.
그래도 어려웠다. 말이 고통당하는 이들과 같이 사는 것이지 그들과의 공동체 생활은 참으로 쉽지 않았다. 대부분 거리를 헤매던 그들인지라 자신의 육신 하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다. 하나에서 열까지 챙겨주고 관리해주지 않으면 안 됐다. 열심히 한다고 해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고가 터졌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아픈 기억 때문에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이들은 가슴으로 감싸 안으며 함께 아파해야 했다. 지난날 입었던 각종 상처와 그로 인한 증오로 울부짖는 이들에겐 두 손을 맞잡고 함께 울어줘야 했다. 무엇보다 욕심과 악습이 몸에 밴 이들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살기는 참으로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하셨던 것인가.
나의 사역을 말할 때 아내 홍현송 사모를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야간 신학교를 다닐 때 아내는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내가 종일 밖으로 나돌아야 했으니 젊은 나이에 가정을 혼자서 책임져야만 했다. 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겠다는 일념으로 미쳐 있었으니 말이다. 감사하게도 아내는 남편의 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지금도 가끔 지난날을 회고하면 주위 사람들이 “사모님이 더 훌륭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야 내 일이니까. 내 사명이니까, 내 운명이니까 그런다 치지만 아내는 그게 아니었다. 남편 잘못 만난 ‘덕분’에 생고생을 해야 했다. 전과자에서부터 알코올 중독자, 각종 장애인, 살 곳을 잃은 여인과 아이들…. 아내는 이들의 사연을 들어주면서 때로는 이들과 같이 울고 싸워야만 했다. 하루 24시간을 이들과 더불어 생활해야 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일은 진행됐다. 하지만 열정 하나만으로 그런 일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가족들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한데 내 형편으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탓에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나가는 가족들이 생겼다. 그러면 이들을 찾아 나서 길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때 내가 가진 재산이라곤 달랑 집 전세금 300만원뿐이었다. 이 돈까지 빼서 계속 판잣집을 보완하면서 생활비로 썼다. 나와 아내의 절박한 심정을 누가 헤아리겠는가만 우리 부부는 우리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만은 우리를 감찰하고 계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분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도우셨기에 지금까지 24년을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사역을 하게 되면 부부가 같이해도 쉽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공동체 관리는 거의 아내 혼자서 떠맡았고 나는 더 어려운 이들을 찾아 다녔다. 그럼에도 아내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래서 지금의 사역에서 조금이라도 칭찬을 받을 게 있다면 당연히 아내 몫이다. 밤늦게 집에 들어가서 파김치가 돼 쓰러져 자고 있는 아내를 보고 눈물 글썽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여보, 정말 고맙소.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하오!”
***[역경의 열매] 권태일 (13) 1000일 기도 끝에 ‘즐거운 집’ 판잣집을 벗다
고난 없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고난을 당할 때면 억울해하다가 그게 걸림돌이 되어 폐인이 되는 이들이 더러 있다. 반면 그 일을 승리의 디딤돌로 삼는 이들도 있다. 나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 선한 마음으로 고난에 맞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심에 나로선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는 구절로 모든 일에 말씀을 앞세우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다.
비록 온전히 따르지는 못했어도 말씀을 앞세운 모든 일들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 하지만 하나씩 이루어져 가는 일을 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히 확인했다. 인천 일신동 재개발지역에 있는 ‘즐거운 집’이 동양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은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처럼 처절했다.
나는 즐거운 집 가족들을 위해 비닐하우스나 판잣집을 연이어 짓다보니 제법 전문가의 경지에 들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건물은 언감생심 제대로 지을 꿈도 꾸지 못했다. 도면도 볼 줄 몰랐고 땅을 어떻게 사며 또 어떤 건축업자가 일을 해야 하는지 완전 무지했다. 그런 내가 1992년 2월 한 푼의 돈도 없이 즐거운 집 이전을 위한 연속기도를 기약 없이 시작했다.
역시 기도의 힘은 놀라웠다. 그 해 9월에 동양동에 땅 340평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건축설계사를 하시는 박성주 집사님이 설계도와 함께 조감도를 주셨다. 나는 며칠 동안 그 조감도를 안고 들떠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곤 조감도를 곳곳에 붙여 놓고 연속기도를 이어갔다. 하나님의 응답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땅을 살 수 있게 해 주시더니 설계를 하게 하시고, 건축업자를 만나게까지 해주셨다
단계별 기도 응답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나를 힘차게 흔들어 나의 믿음을 테스트하셨다. 하지만 갓 신학교를 들어간 나로서는 하나님의 깊고 크신 뜻을 알지 못했다. 그때부터 믿었던 사람들이 소리 없이 떠나갔다. 먼저 같은 신학교를 다니던 건축업자가 떠났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운운하던 그는 심적·물적인 큰 피해를 끼치고 떠나버렸다. 이어 한 봉사자의 남편이 건축을 맡았다가 그마저 갑자기 소식을 끊어버렸다. 그 다음 “건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반드시 자신이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던 한 장로님은 기초공사만 하고는 떠났다. 그때 나는 참 많이 울었다. 길을 걸어도 눈물이 났고, 하늘을 봐도 눈물이 났다.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붙잡고 울었다. 그냥 눈물이 났다. 한마디로 온전한 내 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엄청난 고난을 이기게 해 주셨다. 문제해결의 가능성이 단 1%도 안 된다고 여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순식간에 역전의 상황을 만들어주셨다. 그때의 상황을 차마 지면으로 밝힐 수 없어 안타깝다. 어쨌든 절대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반드시 지을 수 있는 상황으로 반전됐다. 결국 즐거운 집은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 사탄의 방해를 뚫고 완공됐다.
내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 갈 만큼의 고통을 남기고 4명의 직분자가 떠난 뒤 신학교 동료 양창규 목사(당시 강도사)가 헌신적으로 수고해 감격적인 완공을 이루었다. 단 한 푼도 없이 즐거운 집 이전을 위한 기도를 시작해 1000일을 경과한 끝에 작품을 만들어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어디를 가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한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시작한 기도가 결실을 맺었다. 1000일 기도 감사예배를 드린 그 날, 1994년 12월 5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14) 합력하여 선을 이룬 ‘사랑밭’ 공동체 동역자들
즐거운 집이 완공되기까지 나를 괴롭히고 떠난 이들은 수십 명이나 되었다. 거기다 즐거운 집이 들어서는 지역의 주민들의 반대도 극렬했다. 입구의 도로를 끊고 관공서에 진정을 해 수차례 공사가 중단됐다. 그러다 보니 완공까지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그들의 방해 공작은 여리고성보다 견고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편이었다. 그분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아니하셨다. 그분은 나를 힘들게 한 이들을 한 명씩 정리해 주셨고 당당히 즐거운 집을 건립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는 말씀을 지표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결국의 하나님’을 많은 사람들에게 힘주어 말한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힘든 일이 와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러면 그분은 결국에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힘차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는 말씀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루어내셨다. 그때의 상황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엄청난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공동체생활은 이어졌다. 그러면서 1987년 자연스럽게 구제선교 기관인 ‘함께하는 사랑밭’의 모체인 ‘한국사랑밭회’가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봉사자들이 힘이 되어 주었다. 규모가 조금씩 커지면서 잠시 와서 봉사하는 무급 봉사자뿐 아니라 유급 봉사자도 필요했다. 당시 유급 봉사자에게 월 10만∼20만원밖에 주지 못했지만 그들은 기꺼이 참여해줬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함께하는 사랑밭은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지금 4개 시설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우리 가족이 무의탁 노인, 고아,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것 자체에 감격하고 감동했다. 기꺼이 자신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며 함께해 주었다. 지난 25년 동안 함께 울고 웃으며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힘이 되어준 분들이다.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하겠다고 나서 사랑밭 역사와 함께 한 박서희 해피홈 원장, 고향 친구로서 힘든 길을 함께 가겠다며 힘이 된 이옥주 함께하는 사랑밭 관리이사, 처녀 시절 험악한 피부병을 앓으며 하나님을 만난 뒤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살겠다고 자청한 임광심 사회복지법인네트워크 사무국장, 언제나 부르면 순종해 달려오는 중증장애인시설 브솔시내 정순옥 원장, 맡은 책임에는 밤잠을 자지 않고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치고자 무장된 김에스더 다문화센터 관장, 집안일보다 사랑밭일을 더 챙기는 최순자 해피홈 사무국장, 한시도 맡겨진 일을 벗어나지 않고 충성된 일꾼으로 일하는 양로원 나솔채 심우순 국장 등이다. 이들은 저마다의 삶을 포기하고 모여 평생을 가게 된 생명 같은 동지다.
또한 나에게 영적으로 큰 힘이 되어준 분이 계신다. 나의 영적 아버지 강모균 중보기도단 7000클럽 실무회장을 비롯해 문제의 현장에 언제라도 달려가 자신의 일보다 더 챙기시는 노용삼 실버홈 이사장, ‘돈은 똥’이라고 말하며 언제나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해 주시는 권호경 월드쉐어 회장 등이다. 나는 이 분들에게 감사, 감격할 뿐이다. 여기에다 나는 많은 팀장들과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역동적으로 함께하는 사랑밭을 일궈가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역경의 열매] 권태일 (15) 88 서울올림픽으로 눈뜬 中 조선족 복지선교
한국사랑밭회를 세우고 나자 하나님께서는 발길을 중국으로 이끄셨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더 잘 사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 행사가 중국 전역에 TV로 방영되자 조선족들의 시각이 바뀌었다. 그러다 90년대에 들어서자 중국의 개방과 함께 동북지역의 조선족들은 너도나도 한국에 가서 일하는 것을 꿈꾸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사기꾼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해 조용한 조선족 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한국에 보내준다며 1000만원, 2000만원씩을 받아 챙겼다. 그들이 10여년 동안 안 먹고 안 쓰고 모아야 되는 거금이었다. 이때 한 선교사의 소개로 옌지(延吉)를 가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 조선족들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했다. 내 어릴 때 고향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룽징(龍井)의 해란강과 비암산을 보고 난 다음 투먼(圖門)에서 북한을 바라보자니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애국심과 민족애 등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옌볜(延邊)지역을 다니며 수많은 나눔의 행렬을 이어갔다.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쓰시는가 싶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필요한 곳에 이 몸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한번 시작하면 내 몸의 진액이 다할 때까지 포기할 줄 모르는 열정을 품게 된 나는 시간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물론 나 혼자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60∼70년대 한국 농촌에서 소가 재산이었던 것이 생각나 그 곳 어려운 가정에 소를 사주었다. 옌지시에 흥안향 경로원을 지었고, 훈춘(琿春)시에 경신진 경로원을 지었으며, 수재원을 설립해 가정형편이 어려운 우수 학생을 매년 70명씩 뽑아 학비와 생활비 일체를 지원했다. 생활이 곤란한 500가정 1500명에게 매월 생활비를 지원했다. 옌지에 사단법인 봄비 애심회를, 훈춘에 사단법인 햇빛 애심회를 각각 설립했다.
또한 한국에서 중국 유학 붐이 일어난 2000년대 들어서 베이징에 수재원을 만들어 한국의 고아와 편모가정 아이들 7명을 모아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며 공부하도록 했다. 중국의 지친 영혼들을 위해 한인교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유학생과 한인 사업가들이 이 교회에서 성령체험을 하고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나의 열정을 기억하셨는지 중국인 양아들을 얻을 수 있는 축복을 주셨다. 진건이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가난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고 아파트 경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인 같지 않게 눈에 띄게 친절하고 나의 어릴 때 꿈과 같이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나는 그를 수재원에서 생활하며 대학공부를 하도록 했다. 그는 친절하고 순종적이면서도 의지 또한 강했다. 내가 중국을 19년 동안 왕래하면서 얻은 가장 큰 보람은 바로 진건이를 자립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도 중국에 가서 그를 만나게 되면 참으로 든든하고 기쁘다.
지난주 함께하는 사랑밭과 관련 기관 및 단체에서 일할 7명의 집사를 임명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아픔을 참고 극복한 뒤의 열매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이 앞을 가렸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이 그 밑바탕이 됐다. 공황장애로 비행기에서 뛰어 내리고 싶은 고통을 겪기도 했다. 매일 밤 온 몸에 파스를 덕지덕지 발라야 하는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셨다.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저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질 뿐이다. 아, 나의 하나님, 나의 힘이 되시고 나의 위로가 되시는 나의 하나님. 나는 전심으로 나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16) ‘꿈은 이루어진다’ 나눔의 손길 전 지구촌으로
판잣집을 지어 즐거운 집을 운영할 때 하나님께서는 느닷없이 ‘아프리카를 축복의 땅으로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하셨다. 그런데 그 꿈이 중국 사역을 시작한 뒤 좀 더 구체화됐다. 그러면서 다른 선교단체와 함께 아프리카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200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단법인 ‘월드쉐어’를 설립하게 됐다.
제3세계 빈곤 국가를 지원하기 위해 전에는 미국에서 모금하여 한국으로 보내왔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 법인을 세워 ‘미국에서 모금하여 전 세계를 지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현실적인 눈으로는 어렵게 보이지만 나는 그 꿈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축구대회가 열렸을 때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맞다. 좌절하지 않는 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나는 내 꿈을 꿈으로 끝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일했다. 전 세계의 고통당하는 이들을 향해 나눔의 손길을 뻗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당시 영화 빠삐용의 한 장면은 내 머릿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각인돼 있었다. 살인했다는 누명을 쓰고 절해고도 외딴섬으로 유배된 주인공이 어느 날 꿈에 재판관 앞에서 무죄라고 외쳤지만 재판관이 “네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건 알지만 ‘시간 허비죄’에서는 벗어날 길이 없다”고 하는 장면이다. 적어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허비한 죄만큼은 짓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지금까지 달려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월드쉐어를 세우고 홈리스 사업을 시작했다. 노숙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센터를 세워 운영하면서 기부 시스템을 갖췄다. 현재 10만 회원을 목표로 김희기 센터장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다. 이어 한국에서도 당국의 허가를 받아 한국 월드쉐어가 만들어졌다. 현재 30여 국가에 40여 그룹홈을 운영하고 있고, 진흙탕 물로 연명하는 지역에 100개가 넘는 우물을 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안수술과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긴급재해가 발생하는 곳이면 곧바로 출동하는 등 쉴 새 없이 뛰고 있다.
특히 지난해 11월 28일부터 4박5일 동안 태국 방콕에서 의미 있는 행사를 열었다. 국내 기관으로는 처음으로 그룹홈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들을 위한 ‘국제보모 동아시아워크숍’을 세계교육문화원과 함께 개최한 것이다. 참석자들이 하나같이 은혜와 감동으로 울고 웃으며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저마다 가슴속에 내일을 향한 새로운 비전을 담았다.
또한 아이티의 강진, 중국 쓰촨성의 강진, 그리고 일본 후쿠시마 지역의 쓰나미와 강진 등 재난 지역으로 달려갔다. 물론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한 곳이 생기면 달려갈 것이다. 앞으로 월드쉐어가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보람 있는 일을 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든지 함께 손을 잡고자 한다. 타인을 위해 일한다는 것, 이웃에게 힘이 된다는 것,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말씀하셨다. 월드쉐어와 함께하는 이들이야말로 주님의 명령을 삶의 최전선에서 실천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쓰레기를 주워서 모은 500만원으로 물이 없는 지역에 우물을 팔 수 있게 한 분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앞두고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 1억원을 선뜻 내놓으신 분도 있었다. 뿐인가.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 넘게 시간을 내 아프리카로 날아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료하는 의사들도 있다. 전 세계 고통당하는 이들을 향한 뜨거운 열정, 결코 식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바로 그 실천의 장이 월드쉐어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17) “예수 사랑나눔을 닮자” 흉내쟁이 별명 얻어
‘함께하는 사랑밭’은 초창기부터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 기대 이상으로 할 일이 많아지면서 규모가 일취월장 커졌다. 이에 따라 내 힘으로 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진정으로 사심 없이 함께할 분을 찾게 되었다.
그동안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가까이에서 힘을 주신 분들이 계셨다. 바로 그 분들이 지금의 사랑밭을 일구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이사장을 역임하신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님과 김용준 전 대법관님, 수원시기독교협회장 이재창 목사님, 성막을 가장 사실적으로 건축하신 김한배 광은교회 목사님 등이다. 언제나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하시는 예수마을교회 장학일 목사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무 우순태 목사님도 큰 힘이 되어주셨다. 중국 연변과학기술대에서 15년간 헌신하신 김기일 교수님은 지금 함께하는 사랑밭의 회장을 맡아 든든한 동역자로 나서주셨다. 이렇게 힘이 되어 주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에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리고 백만원군을 거느린 것보다 든든하다.
특히 10년 넘게 한결같이 힘이 되어주신 인천 대은교회 담임목사 전명구 감독님에게는 각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감독을 지낸 그 분은 세계 제일의 복지시설을 지향하는 사회복지법인네트워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때 선뜻 이사장님이 되어주셨다.
며칠 전, 무척 추운날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사람이 살면서 재물을 얻는 것보다 가까운 친구를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내 주위에 이렇게 믿음의 동역자들이 많다고 생각하니 그저 감격일 뿐이다.
언젠가부터 서예를 좋아하게 된 나는 ‘해처럼 살자’와 ‘나는 주의 일을 하다 죽고 싶다’는 붓글씨를 써서 수천 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처럼 나는 하나님 일이 왜 이리 좋은지 단 일초도 헛되이 살고 싶지 않다. 어릴 때 나는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을 닮고 싶었다. 근래엔 스티브 잡스의 ‘모방쟁이 흉내쟁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일구신 조용기 목사님 흉내를 낸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흉내만 내는 줄 알지, 내 나름대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잘 모른다. 존경하는 이를 닮아가려고 숱한 밤을 새우며 가슴을 치고 눈물로 울부짖었다. 내 몸의 진액을 다 뽑아내며 몸부림치며 살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시고 열심을 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동안 나는 체면보다는 고생하기를 좋아했고, 행동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기를 애썼다. 그리고 명예나 이익보다 작지만 내실있는 사역이 되기를 힘써왔다. 그리고 뜻을 이룬 후에 평상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는 이들을 수없이 보며 교훈으로 삼아왔다.
무엇보다 같이 생활하는 무의탁 어르신, 장애인, 보육원 아이들을 보고 낮추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저들이기에 내가 저들을 돌보아야 했다. 저들을 생각하면 내가 저절로 낮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과 함께하려면 저들과 같은 눈높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곤고해질 때 저들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저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양로원에서 생활하는 저들은 추위를 피해 잠 잘 곳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고,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저들은 아빠 엄마를 수천 번 불렀지만 끝내 외면당했으며, 중증장애인 시설에서 생활하는 저들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부축해줄 이를 찾지 못했다. 나는 저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을 생각하면 사명감이 불 일 듯 일어난다.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생각하니 너무나 감사하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18) 빚더미 도피중에도 꿈꾼 ‘사랑의 국민마을’ 청사진
성도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떠올릴 때면 항상 번쩍 정신이 들게 된다.
빚 때문에 경기도 성남으로 도피해 있을 당시 나는 아내에게 나의 미래 청사진을 종이에 그려서 보여주곤 했다. 그러면 아내는 너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가족과 생이별 해 있으면서 고아원과 양로원을 비롯한 각종 시설을 만들겠다는 황당무계한 계획을 세우는 데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에 이미 미래를 향한 희망의 불씨를 피우고 있었다.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최첨단 시설을 세우겠다는 꿈의 불씨였다. 나는 나의 이 꿈을 ‘사랑의 국민마을’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이 꿈은 나혼자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뜻, 그들의 의지와 지혜를 모아야 이뤄낼 수 있는 거대한 사업이다. 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관공서와 단체가 협력해줘야 하는 새로운 개념의 복지 프로젝트였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진정성을 갖고 있으면 꿈은 이루어지게 돼 있다. 앞에서 밝혔지만 도시 건설 마스터플랜의 전문가 전재명씨를 만난 것은 분명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요나단을 만난 다윗과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로 4289일째 국민마을 건설을 위한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 무려 11년 9개월을 넘기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50년 후면 나는 우리나라 거의 모든 시설이나 공동체, 마을이 사랑의 국민마을과 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은 믿음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비전을 상황에 맞게 먼저 제시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너희는 가서 제자 삼으라”는 말씀을 이루는 현장이다. 믿는 자들이 보여주는 선한 행동이 모여 위대한 작품으로 연출되는 곳이다. 나는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으로 믿는다.
다음 주부터 이 사랑의 국민마을의 실제적인 개념 정리와 마스터플랜이 실질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뜻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나는 요즘 미국의 거부로서 체계적으로 자선사업을 하고 있는 빌 게이츠와의 만남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가 꿈꾸는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분명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사랑의 국민마을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나의 꿈이 그의 꿈일 것이다. 세계가 가족이라는 개념이 정리되지 않고서는 이 사업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빌 게이츠와 한시라도 빨리 만나 이 사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허무맹랑하다고 여기는 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계획과 꿈이란 게 처음에는 다 이렇게 시작해서 이뤄지지 않았나 싶다. 현대그룹을 일군 고 정주영 회장이 예전의 100원짜리 지폐에 있는 거북선을 보여주며 배를 만든다고 했을 때 한 고급관리가 그런 일이 있으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그 꿈을 성취해 우리나라를 세계 제일의 조선 강국으로 만드는 초석을 놓았다.
나는 요셉에게 무모한 꿈을 꾸게 하신 뒤 거짓말 같이 그 꿈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눈길을 주고 있지 않은가!
***[역경의 열매] 권태일 (19) ‘나’를 넘은 ‘우리들’의 눈물·역경이 있었기에
어렵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사역을 지금껏 해오면서 수많은 사람이나 기관, 단체의 도움을 받았다. 그 중 특별한 도움을 받은 기관이 있다. 한국사회복지 미래경영협회이다. 전 사회복지사협회 회장 최성균 장로님이 사회복지사들의 자질 향상과 한국 사회복지의 발전을 위해 다각도로 연구하는 기관이다. 한국 사회복지의 표준을 제시하고자 평생을 사회복지계에 헌신한 그분이 자신의 노하우를 온전히 쏟아 세운 이 기관은 음으로 양으로 나의 사역을 지원했다.
미지의 길을 앞서 나아가려면 남다른 용기와 인내, 의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다부진 희망을 가져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그 길을 걷다보면 때론 무모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다. 내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고통당하는 이들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꿈은 내 개인의 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어린이 보육시설 해피홈과 중증장애인 시설 브솔시내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 최근에는 인천 박촌동에 나솔채라는 양로원을 열었다. 선진 복지시설의 모델로 삼을 작정이다.
이 시설은 기존 사회복지시설과 차별화되는 몇 가지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 먼저 냄새가 나지 않는다. 허다한 시설이 냄새로 고생하는데, 이곳은 냄새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 그리고 봉사자들의 면면이 너무 고결하다. 온전한 주님의 마음을 소유하고자 하는 이들은 매일 수용자들과 더불어 예배를 드린다. 거기다 시설 전체에 예술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누구든 이곳을 찾으면 차원 높은 시설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는 국내 제일을 넘어서 세계 제일의 시설을 지향하고 있다.
얼마 전 인천사회복지협회 유필우 회장님이 이곳을 방문해 놀라움을 표시하시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이 칭찬이 함께하는 봉사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로 연재된 ‘역경의 열매’가 나의 열매로 끝난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나’라는 주어가 당신과 이웃 그리고 저들이라는 2인칭, 3인칭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이어져야 마땅하다. 나는 대부천교회를 지으시고 평생을 헌신한 한준호 장로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만이 하늘에 쌓인다”고 하신 말씀을 항상 가슴에 담고 있다.
나의 사역체 중에서 유달리 애착이 가는 게 ‘중보기도단 7000클럽’이다. 이 7000클럽이 탄생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어느 날 20년 지기인 나의 멘토 강춘오 목사님께서 전화를 걸어와 기도를 부탁하셨다. 내가 평소처럼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그분이 “지금 당장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머리가 너무 많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나는 간절하게 치유와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의 능력은 놀라웠다. 며칠 후 그분이 다시 전화해 “그때 만일 기도를 받지 않았다면 아마 뇌출혈로 쓰러졌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게 중보기도단 7000클럽이 만들어지게 된 동기다. 10년이 지난 지금 7000클럽은 기적의 산실이 됐다. 지금까지 13만여 명이 기도를 요청해오고 3만여명이 응답을 받았다.
나는 사역을 해오면서 수시로 내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기 위해 기도한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는 나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재능을 주셨다.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 재능으로 마음껏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순간순간 감사하고 감격한다.
***[역경의 열매] 권태일 (20·끝) 25년 나눔사업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하였는가고 묻곤 한다. 그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인내를 보여주기 위하여 서예와 동양화를 그릴 수 있게 해 주셨고, 후원자들에게 현 상황을 전할 수 있게 글쓰는 재능을 주셨다. 디자인에 남다른 지혜를 주셔서 뛰어난 복지시설로 만들게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잠 19:8)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재능에 힘입어 ‘오늘의 능력말씀’과 ‘사랑밭 새벽편지’라는 메일링 서비스를 10년 전 하게 됐다. 200만이 넘는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에 감동을 엮어내고 있다. 황산 테러로 고통당하는 27세 소녀에게 희망을 주었고, 식도가 없어 고통당하는 해나를 위해 수술 준비를 하고 있으며, 20세에 폐암이 걸린 뒤 암세포가 머리에까지 전이된 미혼모 민지 엄마에게 삶의 희망을 줄 수가 있었다. 오늘도 이 편지는 매일 새벽 따끈따끈한 감동을 실어 배달되고 있다.
내가 해온 25년의 사역을 농축해 지면에 실었다. 내가 하는 일의 핵심을 말하라면 ‘7차원의 영적세계’라고 주장하고 싶다. 1차원이 선이고, 2차원은 평면이고, 3차원이 입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나는 4차원을 식물의 세계, 5차원을 동물의 세계로, 6차원은 사람의 세계로 정리한다. 그래서 6차원의 사람이 4차원의 식물이나 5차원의 동물에게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거나 그들로 인하여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 6차원인 내가 6차원인 사람에게 무슨 해결을 받으려고 하지만 이 또한 사람의 나이와 환경, 다른 개체로서의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그렇다면 결국 6차원인 사람은 7차원의 힘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7차원의 영적세계’이다. 나는 이 7차원의 영적세계로 인해 참으로 많은 기적을 체험해 왔다.
사회복지법인을 세우기 위해 ‘5억원 마련을 위한 150일 작정기도’에 돌입해 많은 사람의 비웃음을 오히려 비웃으며 정확하게 5개월 만에 5억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 푼의 돈도 없을 때 ‘즐거운 집’ 이전을 위한 연속기도를 통해 1000일 만에 새롭게 신축할 수 있었다.
이뿐이 아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경을 헤매던 중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다. 성신클럽 부흥사연수원에서 강사 목사님으로부터 3㎝나 짧은 내 한쪽 다리가 길어지는 체험을 하며 회복한 것이다. 그 이후 나 자신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서 신유사역을 강력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목 디스크가 치료되고 18년 앓던 우울증이 사라지는 역사가 줄을 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일반 목회를 시작한 지 7년이 지났다. 나는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에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싶다. 아니 목숨을 걸고 싶다. 바울은 죄수의 몸이었지만 로마로 끌려가는 배 안에서만큼은 백부장 율리오보다도, 선장과 선주보다도 더 높은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또 빌립보 감옥에서 비록 쇠고랑에 묶여 있었지만 오직 기도로 감옥을 선교지로 만들었고, 간수들의 집에까지 가서 그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앞으로 내 삶의 목표는 확고하다. 내가 있는 자리, 내 생각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건강이 따라주는 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 몸을 던져 아버지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한다. 그래서 함께하는 사랑밭을 비롯한 모든 기관들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로 이들 기관이 계속 성장하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자고 제안하고 싶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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