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주화에 대한 거대 담론이 소멸한 또 다른 이유
『서정성과 정치적 상상력』에서는 거대담론이 소멸한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마르크시즘이 소멸한 이유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이다. 민주화에 대한 거대 담론이 소멸한 이유는 87년도에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져서이다. 하지만 형식적 민주화가 곧 실질적 민주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민주화에 대한 거대 담론이 소멸한 또 하나의 이유로 ‘불의의 다각화, 지능화’로 저항해야할 대상이 불명확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는 박노해 시인의 「시대 고독」에서 잘 드러난다.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한 시대의 악이
한 계급에 집약되어 있던 시절의 투쟁은
얼마나 힘겹고 다행인 시대였던가
고통의 뿌리가 환히 보여
선과 악이 자명하던 시절의 자기결단은
얼마나 슬프고 충만한 시대였던가
세계의 악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시대
선악의 경계가 증발되어버린 시대
더 나쁜 악과 덜 나쁜 악이 경쟁하는 시대
합법화된 민주화 시대의 저항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구조화된 삶의 고통이 전 지구에 걸쳐
정교한 시스템으로 일상에 연결되어 작동하는
이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에는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
옮음도 거짓도 다수결로 작동되는 시대
진리는 누구의 말에서나 반짝이지만
그것을 살고 실천할 주체가 증발되어버린 시대
혁명의 전위마저 씨가 말라가는
이 고독한 저항의 시대는
-박노해, 「시대고독」전문,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 걸음, 2010
위의 시에 나타난, 형식적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신자유주의로 인한 자본의 독식과 민중의 소외 등으로 실질적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 저항하는 시를 쓰는 새로운 시인을 찾아 읽는 것은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2. 미적 자율성과 정치성은 반비례 관계가 아니다
시인의 삶을 살다 지난 2012년 돌연 정치인으로 변신한 도종환 의원(새정치민주연합, 초선)은 3년 전 처음 국회에 입성한 날을 잊지 못하고 있다. 사무실에 검은 리본이 달린 근조화분이 배달됐던 것이다. ‘시인 도종환’은 이제 끝났다는 의미에서다. 그래서 도 의원은 지난 3년간 그 화분을 책상위에 올려놓고는 ‘정말 나는 끝났는가’ ‘초심을 잃지 않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매일 자신에게 반복하고 있다고.
도종환 시인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무렵 잡지 <좋은 생각>의 칼럼에 위의 일화를 직접 쓴 글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좋은 생각>의 칼럼을 직접 인용하고 싶었으나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좋은 생각> 최근 호들이 없으므로 찾을 수 없었다.)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면, 시인으로써 죽은 것인가. 정치성을 띄는 것이 미적 자율성의 ‘죽음’을 의미할까. 이런 물음들에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미적 자율성과 정치성은 반비례 관계가 아니다.
2.1.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통합적 시의 제시 - 박혜인, 「노동절 전야제」
이에 대한 근거는 『서정성과 정치적 상상력』의 「전형기의 피로, 수사학의 탕진」제 1장 “문학과 정치에 대한 지루한 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통합된 인간형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제시하는데 나는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여러 차원의 인간이 한 인간 속에 조화롭게 공존하는 상태“, ”윤리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미적 인간이며 동시에 정치적 인간, 자신 속에 여러 층위의 자신이 소통하는 협업적 인간“으로서 나는 감히 나 자신의 시를 예로 들고자 한다.
오후 6시, 아직 날이 밝은데
낮달이 떴다
평일 저녁 고된 노동을 마치고
스타렉스를 타고 관광버스를 타고
속속 도착하는 노조 동지들
경찰들이 국채보상공원을 둘러싸자
순간, 긴장!
누군가가 경찰에게 쌍욕을 던진다
나는 상현달보다 크고 보름달보다 작은 저 달의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사회자의 진행을 듣고는
노동절, 로 3행시를 지어본다
건설 노조 아재들이 양반다리로 앉아
담배 연기를 흩날린다...
기침!
한 아재가 구운 계란을 나눠준다
계란달,
저 달의 이름은 이제부터 계란달이다
-박혜인, 「노동절 전야제」전문, 2015
위의 시에서 화자는 노동절 전야제에 참여하는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낮달을 보며 “상현달보다 크고 보름달보다 작은 저 달의 이름이 뭔지 생각하”는 미학적 행위를 하고 있다. 정치적 인간인 동시에 미학적 인간인 것이다. 이 시를 쓸 당시의 나는 알바 노조 조합원으로 대구 국채보상공원에서 열린 노동절 전야제에 참여하고 있었다. 행사가 진행되면서 늦은 저녁이 되자 배가 슬슬 고팠고, 노조 동지가 나눠주는 구운 계란을 반갑게 받아드는 순간, 그 달의 이름인 계란달이 떠올랐다. 아마 낮달을 보면서 계란을 먹는 경험을 처음으로 그 당시에 했기에 그러한 명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먹을 것을 나눠먹는 작은 연대 행위가 마법적이고 황홀한 서정성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문학이 정치성을 띌 수 있는 것과 마찬가로, 정치도 미학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문학과 정치는 한 쪽이 한 쪽에 우위를 점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유기적 관계이다.
2.2. 문학과 정치의 유기적 관계 - 송경동,「혜화경찰서에서」
위의 시를 쓰기 전에, 문학과 정치의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대한 예시로 생각한 작품은 송경동 시인의 「혜화경찰서에서」이다.
영장 기각되고 재조사 받으러 가니
2008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
핸드폰 통화내역을 모두 뽑아왔다
난 단지 야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혀왔을 뿐인데
힐금 보니 통화시간과 장소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다
청계천 탐앤탐스 부근......
다음엔 문자메씨지 내용을 가져온다고 한다
함께 잡힌 촛불시민은 가택수사도 했고
통장 압수수색도 했단다 그러곤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웃는 낯으로 알아서 불어라 한다
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
일년치 통화기록 정도로
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
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
나를 평가해보겠다고
너무하다고 했다
내 과거를 캐려면
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아야지
저 바닷가 퇴적층 몇천 미터는 채증해놓고 얘기해야지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이게 뭐냐고
-송경동, 「혜화경찰서에서」전문,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09
위의 시에서는 경찰들의 압수 수색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나 사랑이 없이, 인간을 조사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을 비판하는데, 그 수단은 서정성이다. 위의 시에서처럼 서정성이 정의롭지 못한 정치에 대한 비판 수단으로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3. 결론 - 정치와 문학의 상호 영향과, 이들에 대한 시인의 의무
문학에서의 정치적 감수성은 불의에 대한 '분노'와 불의를 당한 이들에 대한 '연민'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는 곧 '연대'로 이어진다. 깨어있는 사람들의 연대는 곧 정치적 행동과 정치적 변혁으로 승화된다. 문학이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정치가 문학에 끼치는 영향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시 「노동절 전야제」와 같이, 작은 연대 행위가 마법적 서정성으로 바뀔 수 있는 예를 보았다.
이처럼 정치와 문학의 관계는 한 쪽이 한 쪽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양 방향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나가는 관계이다.
'분노'와 '연민', 더 나아가서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감수성이 있는 시를 쓰는 것은 시를 쓰고 있는 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 작은 한 걸음이 집회 현장에서 먹을 것을 나누는 작은 연대 행위를 서정성으로 승화시킨 「노동절 전야제」이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사는(生)것임이 나의 시론이다. 브레히트가 노래했듯이 "서정시가 어려운 시대"에 나는 살고 있다. 이 시대에 그러한 시를 쓰는 것은 당연히 시인으로서 의무이다. "상현달보다 크고 보름달보다 작은 저 달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시인의 마땅한 의무 이듯이.
첫댓글 갈필님의 시인적 자의식에 동감합니다. 예리하면서도 풍성한 글들 기대합니다.
현장과 언어와 마음이 따로 놀지 않는 것! 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