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의 생사윤회, 염불로 해탈하다
정토종 제8조 연지(蓮池) 대사 - 김성우 작가
염불수행은 하근기가 아닌 상근기가 닦는 원돈법문
사람들이 염불수행을 하근기나 하는 수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400여년 전 연지 대사(蓮池大師, 1535~1615)가 염불법을 펼치던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지만, 앞에서 연지 대사께서도 설했듯이 염불행은 하근기는 커녕 지혜와 공덕을 겸비한 상근기만이 믿고 받아지녀 닦을 수 있는 가장 원만하고도 단박에 성취할 수 있는 원돈(圓頓)법문인 것이다. 대사는 〈아미타경〉을 풀이한 〈미타경소초(彌陀經疏抄)〉에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수많은 공덕을 한꺼번에 다 갖추는 것이고, 아미타불 명호만 부른다면, 이는 온갖 수행법을 빠짐없이 갖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사께서는 염불수행법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두루 포함하고 육바라밀을 빠짐없이 갖춘 법문이라고까지 하였다.
불자들에게는 〈죽창수필(竹窓隨筆)〉의 저자인 운서주굉(雲棲株宏) 스님으로 더욱 유명한 정토종 제8대 조사인 연지 대사의 삶을 따라가 보면 염불법이 왜 가장 원만하고 단박에 성취할 수 있는 원돈(圓頓)법문인지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 연지대사
어려서부터 염불 배워 불살생 실천
1535년, 명(明)나라 세종 당시 항주 땅에 태어난 대사의 속성은 심(沈) 씨이며, 17세에 이미 제반 학문을 마치고 남을 지도할 정도로 총명하였다. 문장은 물론 덕행(德行)까지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불연이 깊어 친구의 할머니로부터 염불을 배워 어린 시절부터 살생이라고는 벌레 하나도 죽이지 않으셨다.
대사의 나이 27세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시고, 29세에 부인이 죽었으며, 31세에는 모친마저 돌아가셨다. 인생에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염불심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도 세연(世緣)이 아직 남아서인지 재혼하여 18세의 탕(湯)씨 부인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부부인연도 잠시, 1년 후 32세 되던 해에 성묘를 하러 가서 풀이 우거진 무덤을 바라보며 ‘인생이란 어찌하여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일까.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법은 없는가?’하는 한 생각이 일어 불문에 출가하여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진리를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성묘를 끝내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 부인에게 차(茶)를 가져오라 하여 같이 마시고 나서 찻잔을 깨뜨리고는 웃으며 “흩어지지 않는 인연은 없소” 하고는 출가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부창부수(夫唱婦隨)인지 그 부인 또한 “저도 낭군님을 따라서 출가를 하겠사오니 앞에 가시면 저는 모든 것을 정리해 뒤에 가겠습니다”라고 화답하였다. 훗날 탕씨 부인은 47세에 연지 대사의 은사이신 성천(性天) 화상에게 출가하여, ‘주금’이란 법명을 받았다. 주금 스님은 58세 되던 해에 효의암(孝義庵)을 창건해 비구니 총림(叢林)을 개설, 덕 높은 비구니 스님들을 많이 길러내어 큰 공덕을 지었다.
임사체험 통해 견성만으로 생사해탈 어려움 절감
이렇게 부인에게 극적인 이별을 고한 대사께서는 그 즉시 남방의 오대산 성천 화상에게 출가하였다. 연지 대사는 그곳에서 1년을 머물고서 여산(廬山)의 변융(編融) 선사를 뵙고 수행법을 물으니 이렇게 일러주었다.
“일체 명예와 영리를 탐하지 말고 오로지 힘을 다하여 오직 일념(一念)으로 도(道)를 판단하여야 하니 명(命)이 다하도록 계행을 굳게 지킬 것이며 오직 염불수행을 행할지어다. 생사고해(生死苦海)를 신속히 벗어나 신속히 정각(正覺)을 성취함에는 염불보다 더 좋은 법은 없는 것이니 마땅히 힘써 행할지어다.”
선사의 가르침대로 여실히 수행을 해나가다가 얼마를 지난 후, 연지 대사는 산동 지방을 지나가다가 홀연히 마음이 열려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오도송을 읊었다.
“20년 전 일이 의심스럽다 하여/ 30리 밖에선들 무슨 기특한 일 만나랴/ 선과 악이 모두 꿈인 걸/ 마(魔)와 부처 공연히 옳다 그르다 다투네.”
염불수행으로 마음이 밝아지자 드디어 본래성품을 깨달아 초견성(初見性)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명심견성(明心見性)도 어렵고 어려운 일이지만, 견성했다 하더라도 미혹과 업장을 완전히 끊지 못해 여전히 생사윤회를 거듭하는 구도자가 대부분이다. 이런 사실은 연지 대사의 임사(臨死)체험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대사는 견성체험 이후, 강소 땅 와관사라는 절에서 주석하던 중 우연히 병에 걸렸는데, 병이 낫지를 않고 점점 심해져 마침내 숨이 끊어지고(絶命) 말았다. 그런데 대중이 다비를 하려고 시신을 관 안에다 넣고 운반하려고 하는데, 관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대중이 관을 열고 보니 연지 대사가 아직 살아계시더라는 것이다.
대사께서 깨어나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당신은 그동안 도(道)를 깨쳐 안심하고 살아온 것인데, 이제 이러한 죽음을 당하고 보니 그런 정도의 도력(道力) 가지고는 생사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임을 크게 깨닫고 앞으로는 오직 염불수행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염불로 호랑이 조복시키고 가뭄에 단비 내려
그리하여 운서(雲棲)산을 찾아가 그곳에서 평생 염불수행을 하고 갈 것을 발원하고, 송나라 때 호랑이를 조복(調伏) 받으셨다는 복호 선사가 지은 암자에서 살기로 하셨다. 그런데 그 산중에는 호랑이가 많아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매년 수십 명이 호식(虎食)을 당했고, 그 지방 사람들은 해만 지면 삽작의 문을 걸어 닫고서 출입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말을 듣고도 연지 대사는 홀로 그 깊은 골짜기에 있는 암자를 찾아가셨고, 거기서 며칠 동안 높은 소리로 경을 독송하고 염불을 하고 많은 고혼(孤魂)을 위해 시식(施食)을 하니 그 후부터는 일체 호환을 당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이 어찌 염불의 위신력(威神力)과 가피력(加被力)이 아닐 것인가. 이 일로 그 고을 사람들은 연지 대사를 위대한 도인으로 믿어 받들게 되었는데, 여기에 또 하나의 이적이 일어난다.
연지 대사가 운서산에 주석한 지 얼마가 지나 날이 가물어 곡식이 말라 죽고 산천에 초목까지도 시들 정도여서 온 농민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과 그 지방 관리들과 유지들이 모여 연지 대사가 계신 암자에 찾아가서 무수히 예배 드리고는 비가 오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대사는 “나는 단지 염불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며 아무런 도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기까지 찾아오신 성의를 생각해서 염불이라도 해드리겠나이다” 하시고는 목탁을 들고 그분들과 같이 들로 내려 오셨다. 가물어서 먼지가 푸석푸석 나는 논과 밭을 다니시면서 목탁을 치며 높은 소리로 “나무 아미타불”을 부르시면서 한시 바삐 비를 내려달라고 기원을 하셨다. 그랬더니 갑자기 먹구름이 온 하늘에 가득히 덮이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치면서 바라고 바랐던 비가 오기 시작했다. 흡족하게 비가 내리자 농민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했다. 이를 계기로 연지 대사의 도력은 온 천하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나라에서도 대사를 위해 절을 하나 크게 지어 드렸다 한다.
부처님 말씀과 행만 실천
연지 대사는 그 후 정토총림을 만들어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을 교화해 문하인만 천여 명이 넘었다고 하며 도력 높은 제자들이 14명이나 되었다. 스님의 저술로는 유심(唯心)으로 종지를 삼아 사(事)와 리(理)를 융회하며 아미타경을 해설한 〈미타경소초〉와 선정쌍수(禪淨雙修)의 관점에서 고인들의 기연과 어록을 기록한 〈선관책진〉, 염불과 참선, 보살행 등의 일상 수행법을 안내한 〈죽창수필〉 등 20여 종이 유명하다.
평생 분수에 넘친 생활을 하지 않아서 일찍이 ‘자신을 경책하는 32가지 조항(三十二自警)’을 지어, 늙을 때까지 스스로 빨래하고 요강을 치우며 시자를 힘들게 하지 않았던 스님은 늘 평등한 대비심으로 대중을 교화했으며,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부처님의 일과 행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성품 깨닫고 염불로 보림하면 윤회 벗어나
그렇게 연지 대사의 세수가 80에 이르자, 세상 인연이 다 되어 임종의 때가 되었다. 하루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간절히 당부하셨다.
“너희들은 앞으로 모든 생각을 다 버리고서 오직 정토수행에만 전념하거라. 아미타불 일념에 무량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며, 한번 왕생하게 되면 일체의 모든 원을 다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오직 왕생극락만을 위하여 살아가야만 한다. 왕생을 위해서는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지성껏 염불을 해야만 하느니라.”
대사는 이렇게 유훈을 내리신 후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염불하시고는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연지 대사의 구도기를 살펴보면 견성하고도 보림(保任)을 잘 해서 남은 습기(習氣)를 제하지 못한다면 윤회를 벗어나기 어려운 반면, 성품을 깨닫고 나서 염불로 보림하면 생사해탈이 훨씬 수월함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연지 대사의 ‘권염불문勸念佛文’을 통해 염불법의 수승함을 믿고 ‘발보리심 일향전념 아미타불’하시길 간절히 발원한다.
“우리 모두에게 두루 염불을 권하오니, 발등에 불 떨어진 것처럼 시급히 염불하여 아홉 품계의 연화에 왕생합시다. 연화가 피어나면 부처님을 뵈올 수 있고, 부처님을 뵈면 법문을 들을 수 있으며, 마침내는 궁극의 불도(佛道)를 이루어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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