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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은 본관이 초계정씨(草溪鄭氏)로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대사간·부제학 등을 지냈고, 광해군의 실정을 낱낱이 적어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어 제주도에 10년간 위리안치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서 화의(和議)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을 나가 절을하며 굴복하자 자결을 하려다 실패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덕유산에 칩거하다가 죽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런 연유로 충절의 신하로 존경 받았다. 하지만 정온의 고손자는 정희량(鄭希亮)으로 영조의 즉위에 반대하여 이인좌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동계고택은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위치하며 가옥의 뒤로 금원산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다. 1820년 후손들에 의해 중창하였고 안채·사랑채·동행랑채·고방채 등 4동이 전한다. 안채는 남향으로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전·후퇴가 있는 두 줄 겹집이다. 사랑채는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남향으로 있다. ㄱ자형 평면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 반이며 ㄱ자로 꺾여나온 내루(內樓)가 반 칸 규모로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기단이 낮고 툇마루가 높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 왼쪽 중문을 통해야 하며 중문채는 3칸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안채 사이에 내정(內庭)이 있고 내정 양쪽에 부속건물이 딸린다. 서측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고방채가 있고, 그 뒤편에 내측(內厠) 이 있다. 마당 동측에는 4칸 규모의 동아래채가 있다. 안채 향원에 삼문(三門)을 짓고 그 안에 전퇴가 있는 3칸 규모의 사당을 두었다.
대문채에 인조가 내린 정려(旌閭) 현판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과, 사랑채 마루벽에 정조가 지은 어제시(御製詩) 현판이 걸려 있다. 남쪽 지방임에도 북쪽 지방처럼 안채가 겹집으로 지어졌고 내루에 눈썹지붕이 설치되어 있어 특이하다. 사랑채에는 모와(某窩)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있는데 1909년 의친왕 이강(李堈)이 구한말 승지를 지낸 정태균(鄭泰均)과 인연으로 40일 동안 머물며 남긴 친필이다.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온선생가옥 [鄭蘊先生家屋] (두산백과)
[한국의 명가 명택 9] 경남 거창 정온(鄭蘊 )종택
혁명 기상 충만한 强骨 집안
,금색 원숭이의 정기가 뭉쳐 있다’는 뜻의 금원산(金猿山)을 배경으로 한 동계(桐溪) 정온 종택은 그 강강(剛剛)한 기세가 무림 고수가 살기에 적당한 집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바로 이 집에서 조선 후기 최대의 반란사건 주도자 정희량을 배출한 것을 우연한 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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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볼 때 낙동강을 기준으로 하여 강 왼쪽을 경상좌도라 하고 강 오른쪽을 경상우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오늘날 경상남도 지역은 옛날에 경상우도로 불렸다. 경상우도에서 손꼽을 수 있는 명가 중 하나가 선조, 광해, 인조의 세 왕대에 걸쳐 활동한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년) 집안이다.
경상좌도의 집안들이 대체적으로 퇴계 이황의 학풍을 계승하였다면 우도의 집안들은 남명 조식의 학풍을 계승하였는데, 동계 정온은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남명의 학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동계 정온 종택이 자리잡은 경남 거창은 ‘울고 들어가서 웃고 나오는 곳’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산꾼들의 귀띔에 따르면 거창 지역은 산세가 높고 험해서 들어갈 때는 심란하게 보이지만, 지내다 보면 인심도 좋고 먹을 것도 많아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동계 고택은 거창 버스터미널에서 이름난 명승지인 수승대(搜勝臺) 쪽으로 방향을 잡아 택시로 15분 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 수승대 바로 못 미쳐서 좌측길로 접어들면 강동(薑洞)마을이 나타나고 마을 정면 중앙에 동계 고택이 있다.
동계 고택으로 접근하는 순간 그 주위 산세와 고택에서 풍기는 인상이 범상치 않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무림(武林) 고수가 살기에 적당한 집이라는 이미지를 풍긴다.
사람마다 각기 풍기는 첫인상이 있듯 집들도 풍기는 인상이 제각기 다르다. 온화한 느낌을 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장중한 느낌을 주는 집이 있고, 왠지 모르게 풍족하고 여유 있는 느낌을 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산만하고 칙칙한 느낌을 주는 집도 있다. 나는 답사를 다니면서 집마다 지닌 각기 다른 개성을 비교해 보는 데서 남모르는 재미를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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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한 바위산인 금원산
그런데 동계 고택에서 ‘무림 고수가 살 만한 집’이라는 인상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금원산(金猿山) 때문이다. ‘금색 원숭이 정기가 뭉쳐 있다’는 뜻을 지닌 금원산은 백두대간이 덕유산으로부터 지리산으로 뻗어 내려가다가 중간에 뭉친 산이다. 금원산은 해발 1360m의 비교적 높은 산으로 암벽이 노출된 강강(剛剛)한 바위산이다. 오행(五行)으로 보면 화기(火氣)와 금기(金氣)가 4 대 6으로 섞인 화금체(火金體) 산이라 할 것이다.
동계 고택을 마주 바라보았을 때 무엇보다 고택의 좌측 뒤로 4∼5개의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은 금원산이 쳐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엄숙함 내지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 문경의 봉암사가 자리한 대머리산인 희양산이 주는 인상과 비슷하다. 양쪽 다 터 뒤쪽으로 높은 바위산이 뒤에 받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아무튼 동계 고택의 태조산(太祖山)에 해당하는 금원산은 함부로 말 붙이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엄숙함과 함께 과묵한 무림 고수의 품격을 풍긴다. 한마디로 강기(剛氣)다.
유명 고택을 답사하는 가운데 금원산과 같은 화금체의 바위산이 조산으로 뒤에 받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도를 닦는 절터라면 모를까, 보통 사람이 사는 집터로는 이런 곳을 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의 정기를 흡수하기 벅찬 일반인에게는 금원산과 같은 강기(剛氣)는 단순히 강한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을 ‘때리는’ 살기(殺氣)로 변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지기(地氣)가 지나치게 강한 곳에 집을 짓고 살면 밤에 꿈자리가 사납거나, 때때로 가위에 눌릴 때도 있고, 성격이 포악해지거나, 시름시름 아파서 결국에는 병이 드는 경우가 많다. 1∼2년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 하더라도 3년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버티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런 장소는 절터나 수도원이 들어서야 제격이고, 그도 아니면 아주 기가 강한 사람만이 그 터의 기운를 누르면서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강한 금원산을 조산으로 하여 동계 고택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양중음(陽中陰)의 이치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주역의 팔괘(八卦) 중에 이괘(離卦; )가 양중음을 상징하는데, 단단한 양의 한가운데 부드러운 음이 내재한다는 뜻이다. 단단한 껍데기 속에 부드러운 속살이 있는 빵과 같은 이미지다.
그런데 이 부드러운 속살에서 묘용(妙用)이 많이 나온다. 동계 고택은 이 속살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보면 틀림없다.
금원산에서 시작된 기운은 한참 내려오는 과정에 마침내 그 성난 노기(怒氣)를 풀고 야트막한 흙동산으로 결국(結局)을 이루는데, 바로 그곳에 동계 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강함에서 우러나는 부드러움, 이곳이 양중음의 전형적인 자리이며 명당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호남의 3대 수도터 중의 하나로 꼽히는 전북 변산의 월명암(月明庵)도 이런 양중음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