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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아시아 기독교 유입 역사(한중일)
※편집자(주☞찾아보기
https://cafe.daum.net/susanaghoe/edNG/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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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반도 기독교 전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서서히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이기 시작한다. 서쪽에선 동방을 향해 죽음의 바다(주7)를 정복하고 사막을 건너 황금과 향신료(주6)를 찾아 수탈과 침략으로 마리아(?)像을 세우며 서녘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고 동쪽으로부터는 잠자는 해의 바다를 넘어 눈부신 아침을 맞게 된다.(주5)
※편집자(주5☞잠자는 해의바다 - 서쪽으로 천주교가 전파되고 동쪽으론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먼저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오기까지의 주변정세를 살펴보고자 한다.
◉부제1 : 支那(중공)의 천주교 전래
635년- 경 당의 황제 태종(太宗)은 아가본(아브라함의 支那명)이라는 네스토리안 선교사의 말씀을 받고 파 사사(波斯寺)라는(주9☞) 교회당을 세우게 된다. 당의 경교(景敎) (기독교를 뜻하는 말로 ‘광명의 종교 라 함’) 번성기는 714-781년 전후이며
781년- 이 당시의 한반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키 위해 당나라와 외교가 빈번한 시기임을 유추해 보며 또한 모든 학문을 전승하길 원한 사대주의 사상으 로 인해 이 당시의 支那 내의 선교현황을 736자로 支那말과 시리아 어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가 1625년 발견 되고 똑같은 모조비가 191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되고 ※편집자(주9☞
AD781년 당나라 장안의 경교(景敎)사원인 대진사에 건립된 비석, 支那에 전래한 경교의 교리와 역사를 적어 그 유행을 기념한 내용
▲대진탑 시안주지의 탑곡천 루관태사 근처 지금은 사찰로 사용됨 모조탑 (1907 비림 박물관으로 옮김) 비신높이 197cm 전체높이 279cm 이 비석은 1623년- 명나라 희종때 장안에서 서남쪽150리 떨어진 주지현 오군성 대진사 경내서 발견
支那에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전래한 635년부터 약 150년간 있었던 선교활동 및 교세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석비이다. 높이 2.76m, 하부의 너비 1m, 두께 0.27m이다.
경교의 존재는 支那 내에서도 오래도록 잊혀져 있다가 명(明)나라 말기
1625년에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서쪽에 있는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의 대진사(大秦寺) 유적에서 당대(唐代) 경교와 관련된 돌비석이 출토되고 그 비문[大秦景敎流行中國碑] 해독이 이루어짐으로써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20세기에 들어 백희화(伯希和)에 의해 감숙(甘肅)성의 돈황(燉煌) 명사산(鳴沙山) 석실에서『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일신론(一神論)』,『선원지본경(宣元至本經)』 등의 경교 관련 문헌들이 발견됨으로써 경교의 실체는 새롭게 인식되었다. 대진사에서 출토된 돌비석에는 측면에 65명의 경교 승(僧) 이름이 시리아 문자로 적혀 있고, 비 상단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꽃과 구름, 그리고 무지개가 그려져 있는데, 총32행 1780자로 된 비문을 통해 당대 경교의 역사와 교세 및 교리의 대체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비문 기록으로 보아
당시 페르시아[波斯]인으로 대진사(大秦寺)의 승려였던 경정(景淨, Adam)이 비문을 작성하고 덕종(德宗, 779~805) 건중(建中)2년(781년) 1월 4일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아로펜 일행이 장안에 들어왔을 때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에게 영접토록 하고 경서를 번역케 하여 교의를 알아본 연후 전도를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으며 경사(京師)에 있는 의녕방(義寧坊)에 경교 사찰을 짓게 하여 포교를 지원하였다 한다. 또한 이후 고종(高宗, 650~683재위), 현종(玄宗, 712~756재위), 숙종(肅宗, 757~761재위), 대종(代宗, 762~779재위), 덕종 등의 몇몇 황제들의 후원 아래 상당한 번창을 누렸으며, 주(州)마다 경교 사찰을 세우고 나름대로 교세를 가지고 포교 활동을 벌여, 그 결과 7~8세기에는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중국에 있었음을 비문은 전하고 있다. 이 석비는 당대(唐代)인 781년에 경교도 사즈드보제드가 건립한 것으로, 845년의 ‘박해령(迫害令)’ 후에 매몰된 것으로 추측된다. ‘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9자를 3행으로 새긴 전액(篆額)을 포함한 이수(촬首) 부분과 비문을 새긴 부분으로 되어 있다. 1800여 자의 한자와 50여 어의 시리아 문자로 되어 있고, 한자는 대진사의 승려 경정(景淨)의 찬(撰)에 여수암(呂秀巖)의 서(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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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진상(眞常)의 도(道)는 현묘(玄妙)하여 이름짓기 어려우나 그 공용(功用)이 소창(昭彰)함을 보아 감히 경교(景敎)라고 칭한다” 는 경교 이름의 어원이 나타나있다. 이 비는 현재 시안의 비림에 전시되어 있다. 시안(장안)은 실크로드 동쪽 끝, 혹은 출발지이다. 개원문(開遠門)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데 개원문이란 ‘먼 길 떠나는 시작을 알리는 문’이란 뜻이다. 문에 들어서면 낙타 등에 짐을 가득 싣고 서쪽으로 길 떠나는 대상을 형상화한 ‘실크로드 기점 군상’이란 석조물이 있다. 시안은 동서문명의 접합지라는 입지조건 외에, 실크로드 개척과 얽힌 숱한 연고를 지니고 있다. 동서문명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여러 유물들 가운데 支那 최대의 ‘석조문고’라는 비림(碑林)은 비석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역대 명필들의 글을 새긴 석비 1095기가 소장되어 있다. 그 중 2호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있다. 781년 세운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유물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 기독교의 전파상을 알려주는 보물이다.
특별히 627년 당 태종이 즉위하고 635년 공식적으로 경교 선교사가 당나라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미 당나라에는 장안을 중심으로 외국에서 온 경교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바로 644년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양만춘 장군이 이끄는 병사들과 안시성에서 교전을 벌여, 눈에 화살을 맞고 패한 인물이다. 그리고 당시 백제는 한때 단순히 한반도 서쪽 국가가 아닌, 중국 정사 중 하나인 양서(『梁書』)에 기록된 대로 '22개 담로'를 중심으로 중국 땅과 현 일본까지 그 영역을 지니고 있던, 반도 일부-대륙 일부-해양을 아우르는 글로벌 국가였다. 한반도에서는 이렇게 중국 대륙과 일본에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일본서기 신대(神代)에 일본의 출발이 비로소 '담로에서부터였다'는 암호가 슬쩍 기록된 것은, 훗날 누군가가 일본 기원의 진실을 밝혀 주기를 기다리는 저자의 결정적 암호처럼 느껴진다.
백제가 660년 멸망했을 당시 많은 피난민이 倭(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富山昌德의 기록(『日本史
중의 佛敎와 景敎』, 東京大出版會, 1969, 46-47)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삼국에 경교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741년- 경 에는 1만명의 당군을 인솔하고 파밀 산맥을 넘어 티베트를 방어하고 아랍의 침략을 봉쇄한 당 유수의 명장 고선지
(한국인) 장군이 활동하던 시대이다. 16,000피트 산맥을 넘어 2,000마일 사막을 1만의 대군을 이끌고 넘어감은 군사 역사 사의 또 하나의 비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몽고의 징기스칸은 근동으로 진출 모슬렘국가를 침공 십자군이 매번 탈환치 못한 성지 예루살렘을 간단하게 점령하여 기독인들에 순례를 자유롭게 함,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구의 천주교는 사절을 파송 다수 중 루부르크 선교사는 압록강까지 왔다가 보고 들은 바를 교황청에 기행문을 포함한 편지 속에 카울레(Caulej 고려)라는 말로 한반도를 소개하여 후에 Coree로 세계 속에 한국을 소개하고 한국의 고유 명칭이 되는 계기가 됨.
845년- 회창법란, (황소의난)등으로 支那내 대진교는 멸절 ○960-1127 송나라
원대(元代)에는 경교가 ‘야리가온(也里可溫)’이란 이름으로 다시 유행하기도 하였다.
1253년- (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뤼브뤼키가 몽고 카라코룸서 한국에 관해] 소개 편지를
로마 교황청에 보내어 한반도에 대해 유럽 열강들에 눈에 뜨게 하였다.
1333년- (충숙왕 복위2년) 교황 요한 22세 사절단 고려파견(친서 필사본 발견)
1839년- 인류역사에 가장 추악한 전쟁 아편전쟁 ※편집자(주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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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2 : 倭 (일본)의 천주교 전래
1485년- 일본이 유럽에 소개된 것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원제:세계의 불가사의)에의해서입니다.
※편집자(주☞ 지팡구 : 일본국(日本國)의 중국어 발음(지펀구) 마르코 폴로가 음차로 적은 것. 이것이 변하여
Japan이 됨
우리가 알고 있는 왜구(倭)들은 일본 기타큐슈, 세도나이카에 근거지를 두고 14C-16C걸쳐 조선 중국 연안을 노략질하며 또는
무역으로 활발한 해상 활동으로 남만의 무역선을 불러드림.
1499년- 7월 가톨릭교도들이 대거 개신교로 넘어가 교세적 확장이 되자 로마 교회는
1543년- 최초의 남만(포르투갈) 선박이 규슈. 가고시마에 표착 소총을 전해 줌으로 아시아의 강탈의 씨가
심겨지게 됩니다.
1543년- 예수회를 스페인, 포르투갈 사람을 중심으로 조직 전 세계로 선교에 몸 바치게 됩니다.
그 중심인물 중의 한사람인 사비에르는
1543년- 예수회를 스페인, 포르투갈 사람을 중심으로 조직 전 세계로 선교에 몸 바치게 됩니다. 그 중심인물
중의 한사람인 사비에르는
1541년 극동에 파견되어 인도 고아 중국 마라카에 있던 중 살인죄를 짓고
중국의 해적선을 타고 망명한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 신학을 공부하게 하고 그 후 2년 뒤 1549년
가고시마에 자비에르는 야지로를 동반하여 선교하게 됩니다. 당시의 통치자 오다 노부나가의 관용
아래서 상당한 선교의 결실을 맺음
필자가 생각건대 이 시대는 군웅 활거 시대인 무라마치 말기시대인 센고쿠 시대(1493-1573)로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로 이루어지는 시기로 이들에게는 가장 요긴한 것은 신무기인 소총을 구하기 위해선 카톨릭과 적당한 거래(선교)가 균형이 있던 시기라 사료됩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시대에도 불교도의 정치적 위협 속에서 기독교를 선호한 통치자의 심리라 할까. 히데요시는 한반도를 침략하기에 앞서 여러 신부를 만나 중국과 한국을 곧 정복하면 반드시 전역에 걸쳐 교회당을 건립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신앙토록 할 것 이다 며 두 통의 서명이 찍힌 문서를 주며 한통은 서구의 기독교 제국의 왕들에게 보내 달라고 전언 서구의 한반도 침범을 견제하고
1592년- 분로쿠. 게이죠의변(임진왜란) 시 침략군인 약10%가 기독교인이었다는 통계 개신교 선교사로 최초
입국한 찰스 구쯜라프는 “왜란당시의 일본 장군들과 사병들 대부분이 기독교인 이었고” 기록을
남김 히데요시는 7년의 긴 전투에서 기독교를 믿는 지방 영주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 함.
Irony 한 것은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하기 위해 예수회 신부들과 군비에 대해 모의하고 명나라 또한 조선을 돕기 위해 명의 총사령관은 예수회의 마테오리치를 초청하여 조선내의 군사작전을 포괄적으로 진단한바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위정자들은 참담한 모습으로 험산준령으로 숨어들고 도처에서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의병이 봉기되어 결전하고 명나라의 후원으로 왜병들은 울산과 웅천을 잇는 18개 성으로 퇴각하고 곰내에 머물던 고니시는 일본의 예수회 교구장인 베드로 고메즈에게 종군 신부를 요청 역사상 최초로 한국 땅을 밟는 기독교성직자 포르투갈 신부인 세스페데스와 일본인 신도 후판이 1596년 한반도에 발을 딛게 됨. 이 당시의 친필 서간문이 헌제도 포르투갈의 [아쥬다] 고문 도서관에 보관중이라 함.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인들과 접촉할 여건이 되지 못했고 약 6개월간 성중에서 성례를 베풀고 일본에 돌아와 수많은(조선?) 포로들이 무자비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매매 되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불의로 저주] 함.
1600년- 0419 윌리엄 애덤스(잉글랜드 출생) 표류 일본상륙 배 기술로 이에야스 요청 80t급 건조
1607년- 120톤급 건조 사무라이 칭호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함
1627년- 텔테브레(네덜란드) 3명 표류 제주도 상륙(한국명 박연)(훈련도감 일함)
병자호란(1636 1208-1637 0130) 전투중 텔테브레만 생존
1653년- 헨드릭 하멜일행 새매호 제주도 상륙 (텔테브레 통역) 1666년- 22명(7년간 억류) 중 7명 탈출 일본으로 가 1668년 자카르타를
거처 네덜란드 귀향 14년 억류기 하멜표류기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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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11☞일본 천주교의 유입 역사
'가톨릭으로 시작된 선교역사..핍박 속에서도 열매 맺어'
1549년 인도에서 3년 동안 선교사로 일한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일본으로 발을 돌려 예수회선교단을 설립했다. 이것은 남큐슈 지방에 3명의 일본인 선교사와 두 사람의 목사에 의해서 로마 천주교의 첫 깃발을 올리는 효시가 되었다. 비록 자비에르는 일본에 2년밖에 체류하지 않았으나 일본선교에 대한 불붙는 열망과 헌신적인 봉사로 군부와 평민들의 호응을 받아 포교에 전력하였다.
당시는 장기간의 내란과 불교계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용기와 살 기력을 잃었던 일반시민들에게 무엇인가 희망을 주는 변화가 절실한 시기였다. 불교는 평민들의 이러한 요구를 채워 주지 못했음으로 이 천주교는 새로운 약속을 주게 되었다. 이 천주교 선교사들은 신선한 종교관과 또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것들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천주교가 소개된 이래 30년간 천주교는 과격한 방법으로 교세확장을 시도하였다. 즉 그들은 불교와 신도를 이용하여, 영주들로 하여금 서로 경쟁하게 하여 훈장을 수여함으로 천주교를 믿게 하여 소위 기리스탄(중세 일본의 가톨릭 신자)을 만들었다.
1582년 권력을 잡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기 시작하여 1587년에는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하였다. 이후에 히데요시는 조금 누그러져 너무 과격하지 않는 한 묵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6년후 도미니칸과 프란시스칸 선교사들이 마닐라에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천주교 포교금지령을 무시하고 일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간에 싸움이 시작되자 히데요시는 다시 이들을 엄하게 다스리게 되었다.
이 때 스페인 함대가 영토확장을 노린다는 소문을 퍼뜨림으로 히데요시는 전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26명의 신자가 십자가에 처형되어 순교했다. 그 후 30년 간 계속 박해와 처형이 있었다. 1614년에서 1635년 사이 28만명의 신자가 처형당했다.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다시 불교로 돌아갔다.
1637년 시마바라에서 종교탄압(에도막부 가혹한 세금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봉기가 있었고, 그 결과 37만명의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도쿠가와 장군시대에는 특별순찰대가 조직되어, 자기 지역에 크리스천이 있는 지 없는 지 조사하여 불교 승려들을 통해 보고하도록 하였다. 신자들은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사진을 밟고 신앙을 버리든지 아니면 처형당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250여 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853년까지 로마 가톨릭교는 일본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1853년 페리 제독이 들어왔을 때 일본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858년 미국과 상업조약이 체결되었고, 1859년 외국의 배에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4개월 후 7명의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오게 되었다. 아직도 외국문화에 대해서는 폐쇄적이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1872년 요코하마에서 첫 세례식이 있었다. 1873년 개신교의 모든 교단은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기독교 금지령이 해제된 후였으므로 주로 몰락한 사무라이들과 중상류층에게 전도하였다.
1883년에서 1889년 사이에는 개신교의 급성장이 있었다. 그들은 성경과 기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반서구운동으로 주춤하는 곳도 있었다. 또한 신신학과 이성인본주의의 도래로 다소 시련을 겼었으나 오히려 바로 믿고자 하는 자들을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하였다. 금세기 초 3차 선교사 회의에서 각 교단 사이에 서로 협력과 화해가 이루어졌다. 1911년 기독교단이 설립되었으며, 개신교는 새로운 성장기를 맞았다.
1930년 극우파와 과격파 군부에 의해 기독교는 또 다시 시련을 맞게 되었다. 그 결과 1940년대에는 많은 목사들과 지도자들이 투옥되었다. 1941년에는 정부의 탄압에 의해 각 선교 교단의 관계가 두절되었고, 일본기독교단이 형성되었다.
1945년 패전 후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점령군의 통치와 천황의 신 부인으로 인해 기독교회는 새로운 성장기를 맞이했다. 이 때부터 일본은 천주교를 포함하여 34만명의 신자가 매년 4%씩 증가 추세를 보였다. 지금은 신구교 합쳐서 약 100만명의 신자가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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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독교 역사,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온 것이 1549년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이였다. 당시 세력가인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서 비교적 자유롭게 받아졌는데 70년후 기독교가 금지될때까지 80만명의 신자로 불어났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1500만에서 2000만으로 생각한다면 놀라운 숫자의 크리스챤이였다.
일본은 죠몽시대에 선조숭배라는 독특한 영혼순환개념을 형성하게 되면서 매우 독특한 민족성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 러나 이러한 사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전래 70년만에 80만명이나되는 신자로 부흥된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그후 전대미문의 기독교 박해를 통하여 일본은 두번 다시 일어설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가 파괴되고 말았다.당시 기독교 박해의 이유를 여러가지로 생각할수 있지만 기독교 국가인 서양제국의 침략을 두려워한것과 기독교가 세상의 지배력을 최종적으로 부정한것에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즉 기독교가 들어옴으로 인하여 당시 일본문화와 사상이 와해되고 국가 지배체제가 붕괴되고 나아가 일본 정체성 자체가 소멸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였다.
○역사로 본 일본인 박해로 인한 순교자가 20-30만명정도 나왔다는 것은 당시 크리스챤 3명중 1명이 순교를 당한샘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볼때 일본 크리스챤들도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일제군국시대 신사참배에서는 한명의 순교자가 없었는가? (간접적으로 순교한 사람들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저항해서 순교한 사람은 없음) 그 이유는 도꾸가와 막부의 철저한 기독교박해의 정책에 있다고 할수 있다. 세계교회사에 그 예를 볼수 없을 만큼 잔인한 박해가 무려 300년 계속 되었는데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박해 때문에 일본인의 심성이 현재의 일본인처럼 이상하게 변해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1587년- 바테렌 (선교사)추방령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크리스트
교 포교를 용인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규슈 평정(九州平定)을 마친 뒤 지쿠젠(筑前)의 하 코자키(箱崎)에 체제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나가사키에 예수회 깃발이 세워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놀란 히데요시는 『덴쇼 15년 6월 18일 각서』(天正十五年六月十八日付覚)에 이어, 다음날 인 음력 6월 19일(7월 24일)에 포르투갈측 통상책 임자(카피탄 모르)인 도밍고스 몬테로와 선 교사 코엘료가 나가사키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하던 무렵에 선교사 퇴거와 교역의 자유를 선언 한 문서를 전하고 크리스트교 선교의 제한을 표명하였다.
○1587년- 반천련(바테렌) 선교사 추방령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일본은 神國(신도의 나라)이므로 기독교국에서 사법(邪法)을 전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2. 그들이 일본인을 신자로 하여 신사(神社), 불각(佛 閣 )을 파괴하는 것은 전대 미문의 일이다.
3. 반천련(파르테-신부)이 그 지혜의 법(기독교 교리)으로 자유로이 신자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본의 불법
(佛法)을 파괴하는 이상, 일본 땅에 그대로 둘 수 없다.
○1626년- 박해의 5가지의 방법
1) 테라우게 제도 : 모든 주민은 종교와 관계없이 절에 소속 되어야 했다. 등록한 절 에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증명을 받아
야 했다. 이 제도가 무려 30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러한 습관이 남아있다.
2) 종문 개명 : 테라우게제도와 함께 지역별로 종문개명장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여기에 기록하게 되었다. 절의 허가가 없
이는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기독교 박해 정책에 의해서 불교도의 국가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3) 후미에(그림밟기) : 매년1회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초상을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 을 적발 해내려는 것이였다. 이 제이
처럼 잔인한 박해가 없었다. 어떤 선교사는 고문과 박해로 말미암아 신앙을 버리고 불교도가 되어버린 자들도
있었다
4) 5인조제도 : 농민들 5가구를 한조로 조직하여 세금 범죄등을 감시하고 기독교를 감시하 는 제도로 서로 감시하여 밀고
와 연대책임을 지게하였다. 일본인의 심성이 깊이 상처받은 제도였다. 일본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
겟다. 혼내(마음)와 다 테마에(외면)가 다르다. 희노애락의 표정이 없다고 표현되는 것이 이로 부터 생겨 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기리시단(크리스챤)류족 개명 : 만약 기리시단이 발견되었을때 그의 친족들도 기리시단 과 동일 하게 보고 남자의 경우
7대 까지 여자의 경우 4대까지 일반인들과 구별하 여 특별감시하에 두었다. 무라하찌분 이라고해서 장례식
이나 화재가 났을 경우만 제외하고 사람들과의 접근이나 교제를 금지시킨 제도이다. 사회로부터의 완전 따 돌림.
이웃과 일절 교제가 단절 된 다는 것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에 있 어서는 매우 가혹한 형벌이 아닐수 없다.
흔히 이지메(따돌림)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형벌에서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이때의 영향으로 오늘까지 일본인의 심성(DNA)에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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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시탄(일본어: 吉利支丹 (キリシタン), 切支丹, 포르투갈어: cristão(크리스탕)에서 유래)은 막부시대 일본의 크리스천 즉,
기독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기리스탄
○「村八分(무라하찌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마을에서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나 가족이 마을 사람들의 의논
하에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메시기리와 스지기리
에도시대 265년간 유행하다보니 그들은 이유 없이 살해하는 DNA가 되었다.
※편집자(주☞에도시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에 막부(幕府)를 열어 통치하기 시 작하여 도쿠가와 요시노부
(德川慶喜)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기까지의 시대 (1603~1867)
○다메시기리(ためしぎり) 試し切り · 試し 斬り (새 칼을 마련하면 잘 드나 시험(試驗) 하기 위해서 볏짚, 짐승이나 사람을 베어
보는 살인연습
○스지기리(節切り / すじきり)' 사무라이 일본도(日本刀にぱんとう) 칼날을 잘 드는지 시험하 기 위해서 지나가는 행인을 칼로
베고 주로 밤에는 전쟁연습이나 무술 연습으로 무고 한 백성들을 죽였다.
○다메시기리와 스지기리는 일본국민들에게 절대복종 습관에 DNA가 됨
○평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비굴해야 했으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용서를 구하는
○도게자(土下座どげざ)[옛날 귀인이 행차 때 땅에 엎드려 조아림. 일본의 예법 중 하나
과도한 인사 습관과 눈만 마주치면 고개 숙이는 저자세, 정치인들에게 항의하지 못하고 위정자는 내각과 국민을 무시하는 정책을 펴는 이유가 다 잔인한 다메시기리의 습성 DNA가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외국인이나 자국인들 까지도 인권에 대한 개념이없는 이들이다.
○이러한 DNA 잔인한 버릇이 중일전쟁시 난징서 100명의 목을 누가 빨리 베는지 내기하고 신문에 기사화되고 30만명을 살해함
○간토대지진시 6천여명을 학살하는 갓난아이를 끌어안고 절벽에서 옥쇄하는 DNA가 그들에 피속에 흐른다.
※편집자(주☞ 막부
○가마쿠라 막부 (1192~1333) 일본 역사에서 봉건주의의 기초가 확립된 시기에 일본을 지배했던 가문. 일본의
무가 (武家)정권인 바쿠후[幕府]의 창시자인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정치적 거점으로 가마쿠라[鎌倉]에
바쿠후[幕府]를 세웠다. 황위를 찬탈하기보다는 명목만 남은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 將軍],
○무로마치 막부 (1338~1573) 아시카가 막부(일본어: 足利幕府あしかがばくふ 아시카가 바쿠후)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호조씨의 가마쿠라 막부 지배에 반발해,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겐무
신정). 가마쿠라 막부는 이에 대한 역쿠데타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쿠데타를 진압하라 했으나, 아시카
가는 오히려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고다이고 천황까지 배신한 다카우지는 1338년 막부를
개창하고 정이대 장군이 되었다.
○센코쿠 시대(통일) (1467~1590) 쇼군가의 후계자 문제로 일어난 무사들의 다툼인 오닌의 난 이후 일본의 다이묘들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다투던 시기를 말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센고쿠 시대가 끝나게 되었다.
○에도막부 (1603~1867)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무로마치 막부의 통치력이 붕괴된
이래 벌어진 센고쿠 시대를 종결시킨 이래 성립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쇼군으로
떠 올랐고,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기까지의 시대
※막부(일본어: 幕府 바쿠후)는 일본에서 왕을 대신하는 지휘관의 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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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2월 스페인의 그레고리오 신부 한국에(일본 종군신부로오다)
1593년- 임진왜란시 조선인 포로 일본에 끄려가 일부 기리시단이 됨
1594년- G.de세스페데스 신부 일본군 종군 신부로 내한 웅천(청원지역)3개월머뭄
일본 나가사끼 기리시단 교회서 조선인 포로 300명 수용 <조선인 노예매매 금지 선언>
1598년- 7.4일 나가사기에서 대 회의를 열고 노예상인들에게 극단적인 종교적 파문이 선고 되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자
힘닿는 데로 구출을 모색하고 탈출시켜 신변을 보호하며 조선어를 번역하 여 각종교리를 가르침.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통일(250년 에도시대) 시작
1606년- 조선인 안또니오 꼬래아 로마로 감 <善租39年>
1629년- [후미에 재도] 230년간 배교의 표시로 예수의 초상을 밟는 것으로 수많은 일본의 기리시단
(吉利支丹)이 잔인한 방법으로 순교당하며 250년간의 침묵으로 들어가게 된다.(주11☞
○후미에(일본어: 踏み絵)(踏絵制度, ふみえせいど)란 일본의 에도 시대에 에도 막부가 금지령을 내렸던 기독교 신자(기리시탄이라고 함)을 색출해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또는 거기에 사용했던 목조판 또는 금속제의 판을 말한다. 에도 막부에서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매달린 예수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목재 또는 금속 성화상을 기독교 신자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밟고 지나가게 하여, 예수나 성모마리아에 대한 신심때문에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밟지 않으면 기독교 신자로 간주하여 체포하였다. 1612년 에도 막부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리시탄 금지령이 공포되었고, 1619년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하여 고사츠(법령을 민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게시판) 설치 등 거듭되는 기독교 탄압 정책의 맥락에서 1629년 도입되었다. 1856년 나가사키 및 시모다의 개항지에서는 폐지되었으나, 1873년 메이지 정부가 고사츠 철거를 지시할 때까지 기독교 탄압은 계속 이어졌다
1635년- 엄격한 기독교 박멸 정책과 쇄국정책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츠
※편집자(주☞엔도 슈사쿠 (1923-1996)도쿄출생 1966년 작 소설 「침묵」 은 17세기 일본 규슈 나가사키 지방에서 일어난 박해
를 배경으로, 포르투갈인 예수회 선교사 세바스티안 로드리고 신부가 숨어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배교하
기까지의 고뇌와 고통을 그렸다. 신앙을 버려야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인간이 느끼는 심리 묘
사가 뛰어나다. 동양의 일본 문화와 서양의 그리스도교 문화의 미묘한 대립을 비롯해 일본의 박해 상황을 진지
하고 생동감 있게 그렸다. 후미애 이야기 참조
「일본 기독교인들의 순교와 배교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고뇌를 처절하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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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일불수호통상 조약 조문에 따라 오우라에 교회당이 건축 되자 250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 해가 뜨는 듯 했으나 너무나
긴 세월동안 기독교는 이질적으로 토착화 되어버림.
※편집자(주☞ 1974년- 일본에 인구가 1억천만 인데 종교 인구는 1억 6천만 이라는 무절조의 신앙인들이 되고 말았 다.
※편집자(주☞ 불교도들이 부처의 상은 우상이라 하면서도 석존의 말씀보다는 우상에 예배로 전락한 것 같이 일본은
봉건주의의 긴 시간 속에서 천황에 대한 믿음 (일본은 절대적인 신은 없고 現人神숭배. 선악자모두 죽
으면 신이되니 굳이 믿을 필요없음)로 모든 샤머니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현인신으로 뒤섞인 신앙의
모습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편집자(주☞일본의 신(神)은 약8백만개로 사찰이84,000개 일본인은 아기가 태어나면 신사에가고 결혼식은 교회에서62%
장례식은 절94%에서 합니다. 의식만 있고 신앙은 없다 우지가미 신도90%(경전이없다) 종교없음70%
※편집자(주☞일본의 칠복신 : ①인도 힌두신 3개 ②중국 도교신 3개 ③일본신 1개 에비스(아이누)
※편집자(주☞일본의 칠복신 : ○하라이-신도 털어내기 ○미소기-물속 씻어냄
※편집자(주☞ 일본인의 DNA 675년간의 막부시대를 통해 테라우게 제도, 5인조제도, 후미애제도, 다메시기리와 스지기리 등으로 그들은 혼내(마음)와 다테마에(외면)가 다른 이중적이고 희로애락의 표정이 없는 이율배반적인 성격 텐션(Tension)긴장 민족이라 합니다. 메이와쿠(迷惑)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함니다 순응과 체념 무라하치부(村八分)당하기에 그래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화(和)라 합니다. 무한의 관용 무절조(無節操) 모순인데 모순 없이 존재하는 사회 과도한 인사는 스지기리 에서 살아 남기 위한 처절함의 심성이 풍습이되고 관습과 문화되어 슬픈 일본인들에 DNA가 되었죠.
○서양도 마찬가지죠 모르는 이들에게 환한 미소와 악수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함의 DNA입니다.
○앞으로 공산주의 국가 민중들이 겪을 일이다.
○한국인들이 무표정과 지나가는 행인에게 인사를 안하는 것도 칼과 총에 의한 살해에 위험이 없기 때문임.
1867년- 7. 2일 교황 비오 9세는 순교복자로서 시복한 205인 일본 기리시단 중에 조선인 9분이 그 수에 들어감.
※편집자(주11☞일본 기독교 순교역사 http://cafe.daum.net/npov1/Ah2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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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3 : 고대 한반도 기독교 전래
불국사의 다보탑 또한 이질적인 건축양식과 1956년 발굴된 불국사의 석제 십자가(주2) 더 거슬러 올라가서 김수로왕의 부인 허 황후는 서기 48년에 인도에서 시집 왔다고 했습니다.(주2) 인도와의 무역이 빈번한 것으로 확인되며 인도에 온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칼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방에서 사용하는 칼도마, 어떤 연관성을 지어보면 한반도에도 기독교의 유입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1987년 8월 경북 영주시 왕류동에서 발견된 도마의 분처상등 ※편집자(주3☞
▲경주에서 출토된 철제 십자문장식 2점(좌: 5.8×5.6cm, 우: 2.4×3.2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1956년- 불국사에서 발굴된 석제십자가와 마리아 성모상 불국사의 다보탑 또한 이질적인 건축양식과
1987년- 발견된 영주시 왕류동서 발견된 바위에 새겨진 히브리어와 도마의 분처상 더 거슬러 올라가서
김수로왕의 부인 허 황후는 서기 48년에 인도에서 시집 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인도와의 무역 이 빈번한 것으로 확인되며 인도에 온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주2) 칼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 다. 우리가 주방에서 사용하는 칼도마, 어떤 연관성을 지어보면 한반도에도 기독교의 유입 흔적 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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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698-926)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출토된 십자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우리가 즐겨마시는 차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 왕에게 시집을 오는 과정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에 이르러 차는 불교의 번성과 맞물려 절정기를 맞는데, 이 당시에는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를 마시는 것이 서민들에게도 보편적이었다.
※편집자(주☞AD 48년 인도 아요타국 왕실 허황옥 가야국 김수로왕(김해김씨 시조)과 혼인 아들10딸2 그 중 두아들을 허씨(許) 仁川李氏로 사성하여 대를 잇게함 갠지스강900Km하류로와 5000Km를 또와야 낙동강 하류에 도착한다.
이 당시 기독교와 불교도 전해진걸로 보임
허 왕후가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중요한 증거는 신어문양이다. 2000여년 전 인도의 아요디아는 고대 코살왕국 수도로써 힌두교를 부흥시킨 라마왕의 탄생지로 두 마리 물고기를 숭배하던 나라였다. 아유타국은 1세기경 북방 월지족의 지배를 받게 되자 지배층은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사천지방(촉나라)에 정착을 하게 된다.
인도 출신 브라만계급의 허 왕후는 미얀마, 운남성을 거쳐 사천성 안악에 장착한 민족의 후손으로 15세때 출생지를 떠나 중국무안에서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황해를 건너와 서기 5월(음)출발 48년 7월 27일(음) 김해 가락국에 도착하여(수행20명) 수로왕과 결혼하게 된다. 허왕후의 이동지역을 이어주는 증거가 쌍어 신앙이다. 인도 아요디아 사원, 중국의 안악(구 보주)허왕후의 오라버니 장유화상이 세운 은하사, 김해 수로왕릉에도 쌍어문양이 새겨져 있다. 한편 고향에서 갠지스강에 배를 띄워 동풍을 타고 바다로 이동하여 가락국으로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들과 함께 온 일행이 아닐까?
※편집자(주☞《삼국유사》 권 제3 탑상편 제4 금관성파사석탑조(金官城婆娑石塔條)에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금관성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읍(邑)이 금관국으로 되어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오려고 하다가 파신(波神)의 노여움에 막혀서 할수없이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물가에 와서 닿았는데, 비범(緋帆 : 붉은색의 배)·천기(茜旗 : 붉은 색의 기)·주옥(珠玉)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므로 지금도 이곳을 주포(主浦)라 한다. …(중략)… 탑은 사면으로 모가 나고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에는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매우 부드럽고 특이하여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 ”
이와 같은 내용에서 파사석탑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호계사에 있던 탑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해부사로 있던 정현석(鄭顯奭)이 “이 탑은 허황후께서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 ”고 하여 현재의 자리에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편집자(주☞참조 : http://cafe.daum.net/npov1/Ah2p/7
※편집자(주☞ 히브리어 :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되었으며 BC 3세기경에 아람어의 서부 언어로 대체되었 으나 의식어나
문학어로는 계속 사용되었으며 19, 20세기에 이스라엘의 공식어가 되면서 구어로 부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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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바위에 새겨진 기독교흔적
▲경산시 일언동 가야동서 개천공사중 발견W30Cm H60Cm어린양을 가슴에 안고 다른하나는 두손포개 가슴에 얹고 기도하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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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4 : 한반도 천주교 전래
※편집자(주13☞백제가 660년 멸망했을 당시 많은 피난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富山昌德의 기록(『日本史 중의 佛敎와 景敎』, 東京大出版會, 1969, 46-47)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삼국에 경교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고대 기록인 《續日本書記》 〈성무천황기〉에도 783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경교 선교사 밀리스(Millis)를 동반하여 천황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781년- 이 당시의 한반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키 위해 당나라와 외교가 빈번한 시기임을 유추해 보 며 또한 모든 학문을 전승하길 원한 사대주의 사상으로 인해 이 당시의 중국 내의 선교현황을 736 자로 중국말과 시리아 어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가 1625년 발견 되고 똑같은 모조비가 191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되고 불국사의 다보탑 또한 이질적인 건축양식과(주14)
석제 십자가(주2) 더 거슬러 올라가서 김수로왕의 부인 허 황후는 서기 48년에 인도에서 시집 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인도와의 무역이 빈번한 것으로 확인되며 인도에 온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칼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방에서 사용하는 칼도마, 어떤 연관성을 지어보면 한반도에도 기독교의 유입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편집자(주2☞ (1987 8월 경북 영주시 왕류동 에서 발견된 도마의 분처상등)
988년- 고려 과거제도 시행
1233년- 로마교황 요한22세 사절단 고려에파견 (금속활자 전례 추측)
1234년- 고려 금속활자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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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3년- (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뤼브뤼키가 몽고 카라코름서 한국에 관해 소개 편지를
로마 교황청에 보내어 한반도에 대해 유럽 열강들에 눈에 뜨게 하였다.
1384년- (조선) 한양천도 1389 - 쓰시마섬 정벌
1601년- 한편 중국에선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에서 <배공제조> 예절은 조화로 이해 적응식 선교 방법
채택 그 후 도미니카 선교회. 프란시스칸 선교회는 배공제조 사상을 이단 행위로 규정하자 당시
교사들이 교황청에 문의 교황 클레멘트11세 이름으로
1606년- 조선인 안또니오 꼬래아 로마로 감 <善租39年>.
1614년- 허균 중국 사신으로가 천주교기도문 계12장(端)얻어오고, 실학자 선구자인 이수광(1563-1628)
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논평한 것 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됨 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자로 저술한 천주교 관계 서적들만은 17세기 초엽부터 계속 조선에 도입될 수
있었다. 이렇게 도입된 서적들은 특히 남인(南人)학자들에게 환영되고 연구됨으로써 실학운동에
자극을 주는 동시에 서학이란 새로운 학풍을 낳게 하였다
○홍길동전 저술. 부친 허엽의 호는 '초당'인데, 바로 강릉 ‘초당두부‘를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짐
허협딸 허초희 (허난설헌) (서학 중국(한문)성경을 공부하다)
1636년- 명 다음으로 만주의 여진족 청나라가 임진왜란이 끝난지 40년 뒤인 인조 14년만에 10만 대군으로
침범 이것을 병자호란 이라함. 인조가 무릎을 꿇는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 소현 세자가 청에 볼모로
가 북경의 주교 독일신부인 아담 샬과 친교를 맺고 오랜 볼모 생활을 끝내고 환국할 때 신부는 그가
지은 천문 산학, 성교 정도 등 여러 서적과 천주상 한 장을 선물로 줌. 감격한 세자는 답신에서.
서양과학에 대한 많은 책을 펴낼 것이며 우리 백성들이 감사할 것이다며 천주상은 아직 조국에
없기에 나쁜 교라 해서 천주상을 더럽힐까 두려워 당신에게 돌려 보냅니다.....
1644년- 11. 26 세자는 북경을 떠나 2월 18일 서울에 도착하였지만 70일 만에 학질로 세상을 떠남
1627년- (인조5년)조선에 최초로온 남만인은 중국 상선의 좌초로 제주도(켈파르트(Quelpaert))선원16명중
3명이 물 구하러 왔다 붙잡힌 홀란드(네델란드)(한-아란타) 선박 홀란드라호의 승무원으로 알려
진다. 얀 얀손 벨테브레 (Jan Janszoon Weltvree) 한국명 : 박연, 데릭 히스버츠, 얀 피터스 버바
스트 1635년- 만주족이 침범했을 때 동료 두 명이 죽고 웨테레는 27년 동안의 포로 생활 중 무관으로
제직 (홍이포 제작) 57세 되던 해에 자기 동족인 핸드릭 하멜 일행을 만나 통역하게 된다.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 선박 하멜 일행은 13년간 한반도서 체류함 33명은 전라도 지역에 퍼져
비교적 자유스럽게 살아가고 부식을 위해 2-3주씩 짝을 지어 구걸하러 다닐 정도로 자유스런 포로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향수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탈주를 시도
1667년- 8월 하순경에 14년간 포로 생활을 마치고 쪽배에 의지하여 일본으로 탈출 마침내 하멜 일행은
1668년- 7월20일 고국에 도착 하멜 표류기를 출판하자 곧 홀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문판으로 번역 출간
이들의 13년간의 긴 포로 생활동안 그들이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이었을 것이다. (주12)
※편집자(주12☞하멜일행 http://cafe.daum.net/npov1/Ah2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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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년- 1742년 두차례 걸쳐 [유교적 조상 숭배는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에 서는 용납
할 수 없다.]
1770년- 이익의 제자들중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서 신앙을 실천하는 학자들 나타남 홍유한, 권철신, 정약전, 이벽등
1777년- 유학자 권철신.정약용 기독교 서적읽고 이벽씨와<서학> 연구
1784년- 이후 전래된 한국의 천주교회는 [조상 숭배가 이단이라 규정됨] 상황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체 조상에
대한 제사를 그대로 수용하자
1784년- 2(정조 8년) 사은사 일행 속에 이승훈이 파견 북경의 북당에서 공개적 세례 한국인으로 최초이기에
한국의 주춧돌을 놓는 의미에서 세례명 베드로(반석)이라 하였음.
1785년- 형조판서는 한양 진 고개 예배처소를 급수 양반은 훈방조치하고 중인인 김 범우는 모진 고역속에 충청도 산골에
정배 간 후 수주 일만에 순교함으로 한국교회 최초 순교자가 된다.
그 후 김범우 집터 위에 명동 대성당이 들어서고,
1790년- 한국 천주교인들이 북경주교 알렉산더 고베아에게 제사문제 파문을 의뢰 했을 때는 [미신임
으로 금해야함] 이라는 답변에 적지 않은 충격과 조선 정부를 자극
1791년- 천주교도인 선비 윤지충이(진산) 모친 상 때 상례를 갖추지 않고 친척인 권상연이 시주를 불
태우고 제사를 폐지하자 조선정부는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된다.
“군신, 부자, 부부의 올바른 관계를 파괴하는 사도(邪道)요, 사후의 천당과 지옥의 실재를 믿어 제사에 귀신이 흠향함을 부인하여 제사를 폐지하고 예속(禮俗)을 어지럽히는 사설(邪說)”이며, “살기를 싫어하고 죽기를 좋아하여 죽음을 영광으로 알기 때문에 형정(刑政)을 이끌어 가는 흉도(凶徒)”라고 조선정부는 단죄하여 신해박해이후 200년간 핍박이 시작된다
※편집자(주☞정조15년(1791. 11.13) 전주 풍남문 밖(윤지충 참수터에 전동성당 들어섬) 참수(부모에 대한 효가 국왕에 대한 충
으로 연결되기에 용서할 수 없는 사건) (금산)진산군은 5년 동안 진산현으로 강등 (윤지충 (바오로)권상연(야고보)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둔모 밀입국 5년 전도후 500여명의 신도가 있었다함.(천주교사)
1801년- 황사영(정약용맏형의 사위) 신유박해을 피해 제천 봉양읍(현 : 배론성지) 황심을 통해 북경교구에
보낸 밀서가 발각되 체포되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형 그 중심 내용은
① 천주교의 나라 서양제국은 조선 선교를 위한 재정을 원조 해 달라.
② 베이징(북경) 교회와 긴밀히 연락하여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허용을 쉽도록 로마 교황이
중국 황제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요청의 서신을 보내게 해 달라.
③ 조선이 계속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불허하면 조선국을 강소성이나 사천성 같은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중국 황제 휘하의 친왕(親王)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해야 한다.
④ 서양 군함 수백척과 5만∼6만명의 정예 군사를 파견해 조선을 정벌케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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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교난 박해로 이어져 중국의 신부 주문모가 최초로 순교되다.
1816년- 맥스윌과 홀 군함을 이끌고 군산부근(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진 갈곳)정박, 조대복에게 영문성경을 전함.
1818년- (線祖 18년) 버질 홀 [한국 서해안 항해] 가 출판되고
1831년- 교황 그레고리 16세 때에 북경으로부터 독립 조선교구 설정 (초대주교 : 부뤼기에르)
1832년- 화란 장로교선교사 그쯔라프 영국 배에 편승 백령도, 대청도, 고금도에 잠깐 상륙 40일간의
한반도 기행문 쓴 연고로 한반도가 세계에 또 다시 알려진다.
1836년- 1. 13일 한국 최초의 서양선교사모방 신부가 입국한다.
1839년- 기해교난,
1866년- 병인교난,
1871년- 신미교난으로 70년간 8,000여명의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은 도쿠가와 시대의 박해의 동기와 유사하다는 점이다.(주13)
1839년- 인류역사에 가장 추악한 전쟁 아편전쟁 (영국과 支那)
※편집자(주10☞아편전쟁 http://cafe.daum.net/npov1/Ah2p/20
1846년- (천) 10 -한국인 최초 사제 서품 김 대건 신부 순교 프랑스군대 항의문서 제출 <세실서한>
○일본 미국에 의해 1854년 강제 개항 ○한국은 일본에 의해 1876년 강제 개항
1855년- 다블뤼 주교 충청도 배론에 신학교 세움
1867년- 7. 2일 교황 비오 9세는 순교복자로서 시복한 205인 일본 기리시단 중에 조선인 9분이 그 수에 들어감.
1866년- 병인대박해 - 신부7명과 8.000교도 순교
1874년- 달레 - 한국천주교회사 파리에서 간행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미국) 은자(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을 미국과 영국서 발간
1888년- 7.19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4명입국(한국최초의 카톨릭수도원)
1890년- 9.30 영국 성공회 선교사 콜프 주교 입국.한국명 : 고요한<해군신부>
1892년- 8- (천)명동 대성당 정초식 거행
1936년- 5- 한국 천주교회 신사참배 결의
1941년- 천주교 외국인신부34명국내인 신부30명 일제에 체포,
1942년- 9- 외국인 선교사 전원 출국 12.20- 노기남 신부 한국최초 주교성성
1969년- 4.30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추기경 서임식(로마서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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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5 : 한반도 기독교 전래
아침의 나라에 빛이 비추인 것은 불과 100여년 주변 정세는 탐험에 시대가 끝나고 가장 오지의 나라 땅끝나라 오만과 나약함과 급변하는 주변정세와 상관없이 파당 싸움만 하던 나라 오직 한반도 만이 탐험 식민지 대상으로 남아있던 시대 그러나 [인자의 나라] 는 글을 알뿐 아니라 조선에 위정자들은 이미 이질적인 서구문화(천주교)에 이미 몸을 돌리고 그들의 발을 딛지 못하도록 조금도 틈을 주지 않자 유럽의 열강들은 동해 서해 남해를 돌며 지도를 그려 본국에 보고하고 작은 섬 하나를 약탈하고 조선에 모든 것 인양 소개를 한다.
1800년대는 세계적인 물결이 휘몰아친다 프랑스의 대혁명 한반도내에는 천주교의 전도로 200년간의 순교의 피를 뿌리고 그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명자들은 사대문을 두두리고 1800년대 말에 가서야 세계열강들에게 사대문에 쪽문을 열어주게 된다
1863년- 그쯔라프목사 중국에 돌아와 선교중 한국인 천주교 신자 김자평.최선일을 만나 종교열에 감동
1865년- 중국인 우문태를 대동 김자평의 안내로 황해도 도착. 2달간 선교 토마스 목사 백령도 선교 <스콧틀랜드선교사>
1866년- 6월 토마스 목사가 중국 선교 중 미국상선 [샤만호] 에 동승 평양 대동강 기슭에서 조선군 습격으로 성경책을 던져주고
개신교 최초의 순교에 피를 흘린다.
○ (高宗3년에 척사윤음 반포) ○병인대박해(1866 0115) - 신부7명과 8.000교도 순교
1867년- 제중 미선교사 콜벧과 마티어 목사가 각각 토마스목사의 행방을 알고자 서해안을 다녀 장산곶
백령도 대동강등서 선교하며(?) 성경반포 1871년- 4월 신미양요 척화비 세움.
1873년- 만주 우장에서 전도하던 중 존 로스목사는 이응찬, 서상륜을 전도 로스목사를 도와
1875년- J.로스 목사의 <A Korean-English Primer>와 <예수셩교문답><예수셩교요령>출간
1876년- 이성하.이응찬.백 최초의 한국 개신교 세례교인 로스선교사 제만 한인신자 85명 세례배품.
1881년- 조선정부의 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간 청년 이수정은 일본 성서 공회 총무 루미스모가의
전도를 받아 목사의 권고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
1881년- 2.2 메인주의 포틀랜드시의 엘링스톤 교회 목사인 클락박사는 목사관에서 청년들을 소집하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무었을 할 것인가? 이 강론을 계기로 Christian Endeavor(C,E)
「기독교 청정년 면려회」가 조직되고 초대회장에 Staple가 선출되었고
1882년- 누가. 요한복음이 목판으로 “로스역 번역성경” 이 인쇄되고
쇄국 정책쓰다. 서양 여러나라와 통상 수호 조약 맺고 수교 함.
영국 공사관 의사 알랜박사는 중구에 파견된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인데
◎ 민영익대사가 워싱톤가는 도중 꺼취(카우쳐대학장) 교류로 꺼취목사는 선교회에 선교 사 파송 제의로 기금 조성하여 일본주제 선교사 맥크레이와 꺼취목사 방한후 아 펜젤러부처.스크랜톤 의사와 그 모친 입국
1883년- 이수정 미국교회에 한국선교 요청. 이수정 일본 토오쿄오대회 참석 한국선교 역설 <감리교한국선교계기>
1884년- 북미 장로회 선교사 알렌의사부부 내한 갑신정변때 왕족인 민 영익이 상처로 죽어가는 것을 치료 생명을 구함을
계 기로 광혜원을 세우고 의사 양성 (세브란스 의과 대학 전신) 고종황제 어의로 임명 <황해도 소래 교회>이수정
<요코하마서 복음서, 사도행전>발행 ※로스 목사 서간도서 한인75명세례
1885년- 마가복음을 출판하게 되고
1885년- 왕립병원(광혜원)을 한국 최초 신 의료기관이 서울 재동에 개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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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5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서 젊은 신학 졸업생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이수정의 번역성경 을 들고 파송 인천에 도착. 헤른의사 부부내한. 언더우드는 광혜원 강사로 일하며 로스목 사 번역 성경을 더 쉽게 옮김 그러나 이미 서상륜의 로스
판 성경이 방방곳곳에 전해져 있 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4.10최초근대식 병원 광혜원(제중원)설립<연세대학>
(감)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라 박사도 동승했으나 사정상 86년6월에 입국
9.10 - 정동병원설립 8월 배재학당 창립. <高宗22年>
1886년- 5월31 이화학당 창립<스크랜톤부인>. 배재학당내에 협성회 조직. <천주교 금지 해제
연동여학당(정신여학교,경신학교설립.인천내리교회.의주교회설립
언더우드목사 처음 한인에게 세례베풀고 성찬식거행
1886년- 한반도에선 청년운동 단체로 먼저 배재학당내에 「협성회」가 조직
1887년- 9월27 서울에 새문안 교회<언더우드> 창립 백홍준.서상륜장로장립
영국의 밀러 목사가 미국의 C,E, 운동을 영국교회에 소개하여
C,E,를 조직하고 유럽여러나라 순방하여 C,E,를 창설 (독일,프랑스)
1887년- (감)아펜셀라박사 배재학당 세우다10.9 정동교회설립 (1902년 충청도전도여행중
해상조난 34세로 소천), (성공회) 일본에 필컬스틱감독과 중국에 스캇감독 한국선교계획 탐사함.
◎ 로스목사 (봉천주제) 최초 한국성경 출간
1889년- 호주 장로 교회 데이비스 선교사 부산 지방 중심 대대적 선교.
12.8 케나다 장로교회 페워크 선교사 파송 함경도 지방 선교
이외 재림교회.동양선교회(성결교계통).구세군 선교사 들어옴.
(침례교) 미국보스톤서 선교사 패웩<Ferwick>부처 내한
◎ 선교사 공의회 조직 <회장:헤른.서기:데이비스>
1891년- 부산초량교회 설립
1892년- 미국 남장로교 8명 선교사 전라도 선교.
중국 북부 복주에서 선교하던 미국 헐버트 선교사가 세계순방길에
오른 클락목사를 맞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C,E,를 조직
클락목사 일본 순방대 고오베,도오고오 등을 순방하여 C,E,조직
1892년- 남북미션 합동공의회 조직
1893년- 1.28 선교구역 분활 협정, 동학당기독교 배척운동 강력히 진행 백홍준장로 옥중순교
승동교회 설립, 수요예배시작
1893년- 일본에서 제1회 면려대회 개최 장소 : 신호여 ○1894 청일전쟁
1896년- <建陽1年>
1896년- (감) 미국 감리교 리이드 목사 파견 경기도 송도 중심 선교
1897년- 미국 장로회 베이드 선교사 평양 숭실 학당 설립.
1897년- <光武1年> 10.31 - 감리교 엡윗청년회 조직, 한국최초 왕실유치원 시작
학생 Y 가 세계기독학생회 (WSCF) 와 관련을 맺음. Epworth League조직
1898년- 2.20 - 장로교 여전도회 시작<평양장대현교회>.5.29 - 명동대성당 축성식
케나다선교회 조직 <원산서>한국선교 시작-평양맹아학교 최초점자교육실시
1899년- 헬라 정교회 선교사 입국. 대구동산기독병원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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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순조로운 항해에도 불구하고 1800년대의 마지막이면서 조선시대의 마지막이기도한 수난(신축교난)이 제주도에서 발생 천주교인 700여명이 피살되고 그 정점으로 더 이상 탄압할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일본에 식민지로 새로운 핍박자들을 만나기 위한 폭풍의 전야가 시작되는 짧은 정적의 시간에 틈을 비집고 한국 C.E의 출범이 시작된다
□한국 C,E, 시작 (Christian Endeavor)
1900년- 한국에 면려회가 시작된다. 새문안교회에서 면려 청년회가 조직되고 C.E는
1900년- 희랍 정교회 로국 정식 선교사 입국 <일로전쟁으로 철수> 평양외국인 학교 설립
강화조약으로 재입국했으나 혁명으로 중단 현재는 미국희랍교회 소속으로 정동에서 한인신부가 주도함
1901년- 지교회별로 조직되었으나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식민지가 되자.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서 10일간의 사경회로 민족 대각성운동이 시작되고 한국인들은 새로운 전기에 놓이게 된다
1900년- 희랍 정교회 로국 정식 선교사 입국 <일로전쟁으로 철수> 강화조약으로 재입국했으나 혁명으로 중단 현재는 미국희랍
교회 소속으로 정동에서 한인신부가 주도함
1900년- 평양외국인 학교 설립
1901년- 5 - 평양장로회 신학교 설립 <최초신학생 김종섭. 방기창>
제주도 <신축교난>-천주교인700여명 피살, 동양선교회 <OMS> 창설
합동공의회조직<장로3,조사6,선교사25>
1902년- 찬송가편집시작 각교파명칭 “예수교”로 통일 결정
1904년- 8 안식일교회 필드목사 내한 개교1910 순안의명중학설립/삼육학원 설립 ○1904 러일전쟁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식민지가 되자.
1905년- 장로교.감리회 합동공의회 조직 4. - 선교회 본부서 자유장로회 조직 허락 -교파조직준비-
1907년- 9.17 평양 장대현교회당서 장로회 조선노회 조직<선교사38.장로40.내빈3>
미남북장로교.캐나다장로교.오스트레일리아장로교 4선교부와 선교사33명 한국인장로36명
찬성원9명등. 총78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 창립선포. 장로회신경체택
첫7인 목사장립 - 서경조.한석진.송인서.양전백.방기창.길선주.이기풍
김상준.정빈양씨가 동경서 성경학교 졸업 귀국 복음전도관을 무교동서 시작
일본서 카우만.길보륜 내한하여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으로명칭 바꾸다
1922년-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개칭
1908년- 호갈드(Hoggard)씨가 창설 1910.7.2. 구세군 대한본영 건축준공
1910년- 한일합방 등으로 C.E의 활동은 유명무실한 상태이였고, 공종황제의 퇴위와 국모의 살해라는 직접. 간접적인 시대적 상황에 밀려 결비에 필요성을 통감하면서 많은 선각자들은 서구 선교사들의 신 학문과 새로운 사상인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사상과 예배를 통해 새 계명을 배우며 기독교의 교육울 통해 견문을 넓히며 독립의 필요성과 시대덕 상황이 이씨조선의 집권에 의해 오랜 세습에 억눌린 백성들은 이씨조선의 붕괴와 신학문을 접하며 폭풍전야의 정적 가운데 어떤 사고도 정리되지 못한체 조선은 공동의 적을 맞이하게 되자. 많은 이들이 주거지를 잃고 방황하며 힘의 분출구를 모색하던 이들이 교회라는 작은 공동체에 모여 그 꿈을 실현코자 모임에 필요성이 대두되며 많은 단체가 결집되고 기독학생회가 조직되어 여러차례 하령회가 개최되고 교통이 불편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일제의 일침으로 조직은 지하로 일부 스며들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조선국민회」가 조직되고 11.30일에는 동경에서 기독청년지가 창간되며 웅변대회가 열리며 서서히
1919년- 3.1일 교회의 선각자들에 용트림이 시작되고 민족의 대서사시인 독립만세가 전국에서 일어나자 일본은 단하나의 백성들에 집합소인 예배당을 80여개소를 파괴하자 기독청년의 활동이 잠깐 추 츰하면서 진압되자 체게적인 필요성과 확실한 구심점에 필요성을 느끼며 내실을 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직접 전도없이 전교된 한국 기독교는 그 당시의 세계적인 흐름과 인간에 의식 이 변화됨을 볼 수 있다. 세계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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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대한민국 건국
1923년- 12월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에서 3대 결의 사항이 채택되었는데 그 내 용을보면 외지의 한국동포를 구하자는 내용이 시사 하는 바와 같이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미명아래 포로 아닌 노예로 수만리 타국에서 노예가 되어 망국의 한을 품고 사라져가고 있었다.
1925년- 에는 자체 기관지 「진생」을 발간하므로 좀더 구체적으로 백성과 호흡하는 C.E로 거듭나며 제1회 하령회를 연희 전문대에서 하기대회를 개최하자 5,300명이나 참가하자 또 다시 일본 경찰에 탄 압이 시작되어 각 학교 기숙사를 기습하여 검거 선풍이 일어나자 학생들은 맹휴, 백지 답안으로 맞서자 일본은 종교에 힘을 새삼 깨닫고 그들에 신을 구체화 시켜 한반도에 억지로 그들에 신을 믿게하며 신상에 강제 참배케 하자 당시
1990년대 초반의 서구 열강들에 틈을 보아 아시아에 진출한 일본은 기독교에 자유를주며 눈치 보다 유럽 열강들이 자국이 전화로 휩싸이자 오만과 나약한 한반도를 식민화 시키려던 일본은 기독인들의 거국적인 저항에 부딪히자 기독교 제거 구실을 찾게된다. 그들은 이미
1641년- 도쿠가와 시대가 쇄국정책으로 [반천련추방령] 으로 엄격한 기독교 박멸정책과1650년- [후미애 재도] 배교의 표시로
예수의 초상을 밟는 것 230년간 250년간 침묵시킨 경험이 있었기에 기독 교의 반사적인 생각을 알고 있었다고 사료된다.
1912년- 1919 중화민국
혼돈한 와중에도 우리들에 청년들은 장차 닥쳐올 환란을 어떻게 대처 하였는가.
1925년- 학교의 기독교육을 제한하고 일본의 수신도덕(천황의)을 가르치도록 밑밥을 던지고
1925년- 10. 15 남산에 조선신궁이 세워지고 천조 대신과 명지천황을 참배케 하였고
1930년- 부터 전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그들이 바라는 계획대로 전국은 수습되었다
1936년- 5월 25일 천주교는 “신사는 다른 신들을 위하는 곳이므로 참배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당시 이태 리와 일본의 친선 및 이유로 교황청 포고령 반포로 천주교회와 학교들에게 신사참배를 허용
[참배는 종교적 행사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그 참배는 허용한다.]
1938년- 10월 5일-13일 감리교는 제3차 연회에서 신사참배 승인을 가결 총리사 양 주삼 박사는 [기독교회로서 정치문제 직접적
으로 정당하게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회의 신자인 동시에 국가의 신민인 것을 망각해서
는 안 됨. 지금은 내선일체이다...]
1938년- 이후엔 암흑기와 같은 시대가 오고 많은 이들이 암 5:13「그러므로 이런 때에 智慧子가 잠잠하나니 이는 惡한 때문이라」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앞에 “오직 나만이 남았나이다” 라며 절규하자 왕상 19: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한국교회』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릅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기독교 독립운동
1936년- 12월 29일 성결교회서도 신사참배를 승인하고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해산
1936년- 1월17일 안식교 또한 순안 의명중학교 선교사 Lee H.M 교장 신사 참배 허락. [신사참배는 국가적인 행사]라며 참배를
선언하여 그들은 교회를 보존하고 성도(?)들은 환란을 면하게 되었지만
1936년- 5월 25일 천주교는 “신사는 다른 신들을 위하는 곳이므로 참배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당시
이태리와 일본의 친선 및 이유로 교황청 포고령 반포로 천주교회와 학교들에게 신사참배를
허용 [참배는 종교적 행사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그 참배는 허용한다.]
1936년- 12월 29일 성결교회서도 신사참배를 승인하고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해산
1937년- 8월 일제는 면려 청년회를 치안 유지법 저촉된다하여 해산하기를 종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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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 9. 19일에 일제는 면려연합회를 강제 해산을 단행 C.E20년의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한국 C.E는 지하조직으로 스며들고 망명하여 타지에서 젊음을 불사르며 신앙에 자유를 위해 대한 독립을 위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산화해가고 평양 신학교가 폐교되고 당시 한국 기독인의 70%을 가졌던 장로교의 청년 면려회 해산과 더불어 사회와 농촌 활동에 적극적이던 YMCA가 일본YMCA로 병합으로 인해 사실상 그 기능이 마비되자 한국내의 청년 운동은 상실되고 말았다. 이 후로 많은 이들이 구심점을 잃고 만주로 중국으로 서구로의 망명 또한 강제 징병으로 한국판 디아스포라 되어 아직 복음이 없는 오지로 끌려가고
1938년- 9월 9일 평야 서문 밖 교회당서 27회 장로회 총회 때 193명 총대들 사이에 일본순사 97명이 끼어 앉아 신사참배의
건을 짜여진 각본에 따라 가결시키자 유독 장로교만이 끝까지 항거하여 투옥 2,000명, 순교성직자 50여명 그 외 200여
교회가 문을 닫자 교회당은 일본의 군수품창고가 되어 학교는 기독학교로서 이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학교문을 닫게
되고 후에 이 학교들은 민간인들에게로 넘어가는 아쉬운 역사를 잉태하게 됨.
1938년- 10월 5일-13일 감리교는 제3차 연회에서 신사참배 승인을 가결 총리사 양 주삼 박사는 [기독교회로서 정치문제 직접적으로
정당하게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회의 신자인 동시에 국가의 신민인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됨.
지금은 내선일체이다...]
1938년- 이후엔 암흑기와 같은 시대가 오고 많은 이들이 암 5:13「그러므로 이런 때에 智慧子가 잠잠하나니 이는 惡한 때문이라」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앞에 “오직 나만이 남았나이다” 라며 절규하자 왕상 19: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한국교회』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릅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폭풍의 와중 속에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上記와 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증
거니」(히 11:1) 우리에 믿음에 선진들은 미래의 실상을 위해 썩어지는 한 알의 밀이 되어 그 증거로 현재의 대한민국을 창출하지 아니하였는가?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의 꿈을 무력으로 이루려 하였지만 그 꿈은 엄청난 자국민들과 타민족 또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끝났고
1946년- 1월 그들은 그들에 몽상을 버리지 못하고
1991년- 또다시 柛의 자리로 즉위하였다. (그들은 현재는 다시 경제로 식민지를 만들며 그 꿈을 실현코자 하고 있음)
1945년- 8. 15 해방되었지만 그 기쁨은 잠깐 이미 전 세계는 이데올로기시대로 들어가 자국민으로 해방되지 못하고 두 이념으로 갈라지자 사상싸움으로 동족상잔의 아픈 고통을 치르며 교회도 예외없이 급변해 가는 사상과 이념속에 불안한 시국 속에
그들은 그들에 편견으로 전쟁의 와중 속에서
1903년- 高宗 40년 12월에 러시아는 한국을 북위 39도 선으로 분활하자고 일본에 제의 한지 40년만에
소련은 그 망상을 이루기 위해
1950년- 6.25 하수인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키자 일제가 물러난 후 또다른 적 아닌 독립을 위해 싸워온
동족을 적으로 삼아 죽이는 同族相殘 비참함이 발생되다.
우리들에 기독청년들은 나라를 위해 기독교 의용 십자군을 결성 본 C.E연합회 2대 회장 김병섭 장로와 한경직 목사 당시 국방차관 장경근씨와 혐의하고 육군본부 작전 교육과장 강문봉대령과 작전과장 이명재중령과 혐의 기독교 의용대 병력 3,000명으로 독립연대인 「십자군」을 창설 숙소 : 대구제일교회, 서문교회, 남산교회 분산수용훈련장 : 계성학교, 신명학교 교쟁을 사용 당시 전황은 공산군의 박격폭탄이 대구 시내에 떨어지는 급박한 상황에 진지를 구축하는 중 육군본부로 부터 이동명령으로 부산 서면으로 이동 7일 후 세계 기독청년 연맹 회장 다니엘 알프레드 폴링박사(투르먼 대통령종교고문)가 내한하여 8군군종감을 대동 사열하고 십자군을 고문관을 면담하고 전투 경험이 없는 십자군을 전선에 투입하면 소모전에 희생만 될 뿐이어서 육군 본부에 지시하여 카츄샤 부대와 육군 통신학교(교장 조응천장군 : 전평양기독청장년면려회 총무)에 분산되어 투수업무 수행함.
1950년- 중반에 박태선의 전도관, 문선명의 통일교라는 이질적인 씨앗이 발아되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1951년- 5. 24 고려파가 갈려져 나가고
1953년- 6.16 신학적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기독교 장로교가 갈라지는 분단에 고통을 보았다. 이 분열은
이재 한국교회의 핵분열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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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 지혜자들은 교회를 일으키고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하고자 만주로 중국으로 서구로 강제징병 갔던 자들이 하나님의 독수리 날개침 같이 엑소더스 하지만 양분에 아픔과 식민지시대보다 더 험한 동족상잔의 비운을 맛보는 가운데 우리들에 젊은이들이 다시모여 어려운 시국을 타게하고자 전국 C.E를 전쟁의 와중속에서 새롭게 창립하여 100년 대개의 돗을 올리고 출항하여 이 어려운 이웃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꺼져가는 심지의 불을 끄지 않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않도록 작은 도구가 되어 희생하는 아름다운 C.E맨들이 있었습니다.페허를 일으키고 황폐한 밭을 일구고 전쟁의 와중에서도 학교를 세우고 배울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야간 학교와 문간방에서의 가르침 이 모든 것들은 초기의 기독운동의 결과라 하겠지요.
1959년- 9. 24일 대전중앙교회당서 44회 총회서 W,C,C에 가입하고자하는 총대들이 총회서부결 되자 미국 선교부 후원으로
미래 준비한 전 세기차를 타고 한경직, 안광국, 전필순, 유호준 목사등 지지파들이 상경해 연동교회서 총회를 속개
하므로 영구 분열을 함. 이것이 통합측임, 예장이 합동, 통합으로 분열
12. 24일 서울 승동교회에 모여 속회하며 W,C,C와 영구 탈퇴 미국교회연합회와 영구단교 선언하자 선교사들은 신학교
약탈 계획으로 학적부를 약탈 불가불 저들에 불법을 선언하고 새로이 총회를 조직 초대총회장에 양 화석, 서기 :
박찬묵, 총무 : 김상권, 회계 : 곽현보 제씨로 『합동』측으로 장자의 명분으로 새롭게 출발을 안할 수 없게 된다.
◉정통 교단의 분리
대전총회에서 W,C,C문제로 통합측으로 갈려나가자 W,C,C를 후원하던 외국 선교부가 통합측으로 모든 유지재단(대학,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과 더불어 통합측으로 넘어가게 되자 그 동안 전국 C.E는 미국 선교부로부터 엄청난 재정
지원을 받아왔으나 갈려나가자 재정의 어려움 속에서 이렇다 할 구심점도 없는 가운데 전국 C.E는 다시 어려움에 봉착.
상기와 같이 분열될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들에 C.E맨들은 전국으로 뛰어다니며 바른 신학론을 제시하며 강론으로
분립을 막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대세를 막기는 역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70년대 유신 헌법등으로 외부활동은 차단되자 교회내에서 상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불운한 한때를 남기고 물질과
지방색으로 밀린 후대인들은 자기안일과 공영선거제를 도입하여 안일한, 안전과 괘도로 진입하고 미국의 SVM이 몰락
한 이유는 순수하던 기독운동이 사회 현실 참여로 몰락, 한국 C.E운동은 이 두가지 색채도 아닌 구심점 없는 부평초 분명
한 강령과 결의가 있지만 당회기 리더자의 의도에 따라 물질에 부족으로 행사에만 급급하는 부평초 운동이 되어버렸습니다
1938년- 이후엔 암흑기와 같은 시대가 오고 많은 이들이 암 5:13「그러므로 이런 때에 智慧子가 잠잠하나니 이는 惡한 때문이라」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앞에 “오직 나만이 남았나이다” 라며 절규하자 왕상 19: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한국교회』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릅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1997년 3월 4일 01시 17분 늦은시간
| 한국 기독 청장년 면려 운동 75年사 Christian Endeavor 대한예수교장로회 전국기독청․장년면려연합회 1921 - 1996 (韓國基督靑壯年 勉勵運動75年史) 편집위원장 : 김장섭 ( Kim JangSeob) E-mail : ds3jai@daum.net 기독청장년 25호 회보 올린글 P95-114 |
뒤(과거)를 살피는 것은 잘못을 되풀이 않고 앞(미래)으로 잘가기 위함이다 -김장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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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분리
1910 대한예수교 자유교회 : 전북 최중진 목사(최초) 선교사들이 조사(협력자)로 취급
1918 조선기독교회 : 황해도 김장호 목사 (진보적 성향)
1920 자치교회 : 대구 이만집 목사
1930 예수교회 백남주, 하준명
해방이후
1946 재건교회 : 신사참배 거부 출옥성도 30여명 서울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 신사참배자들이 주도
1946 재건교회 평북 선천 김린희 전도사 1948 경남 최덕지 전도사 (가미다나)
△한국 예배당 안에 일본 가미다나가 걸려있었다함
1951년 0524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 : 경남노회 신사참배로 고려파가 갈려져 나가고
1953년 0616 기독교 장로교 : 신학적 자유주의를 표방 김재준 목사 지지파 600교회
1959년 0924 합동과 통합 분리 박형룡 목사 총신대 건물구입 미국후원금3천만환 사기당한 문제와 1948년 네덜란드 수도 암스
테르담에서 결성된 WCC 초교파 기독교 단체로 중국(1949가입) 동유럽 공산 국 가들도 가입되면서 교리문제가 겹
치면서 가입하자는파 현 통합측 반대한 합동측으로 분리
232개 교단 예장177 하나님의성회6 합동계열60 개혁20 합동보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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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편집자(주☞
※편집자(주1☞가림토 문자가림토문자는 고조선 후기때 중국의 한자와 같이 쓰였고 고구려 왕인 소수림왕에 의해 불교가 유입되어 불교와 한자의 위세에 가림토 글자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사상이기 때문에 사대주의사상에의해 우리의 고유 문화들을 말살시켰다. 그 중에 가림토 글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가림토문자는 훈민정음에 흡수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편집자(주2☞한반도 가야와 인도와의 교류AD 48년 인도 아요타국 왕실 허황옥 가야국 김수로왕(김해김씨 시조)과 혼인 아들10딸2 그 중 두아들을 허씨(許) 仁川李氏로 사성하여 대를 잇게함허왕후가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중요한 증거는 신어문양이다. 2000여년 전 인도의 아요디아는 고대 코살왕국 수도로써 힌두교를 부흥시킨 라마왕의 탄생지로 두마리 물고기를 숭배하던 나라였다.
아유타국은 1세기경 북방 월지족의 지배를 받게 되자 지배층은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사천지방(촉나라)에 정착을 하게 된다.인도 출신 브라만계급의 허왕후는 미얀마,운남성을 거쳐 사천성 안악에 장착한 민족의 후손으로 15세때 출생지를 떠나 중국무안에서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황해를 건너와 서기 48년 7월 27일 김해 가락국에 도착하여 수로왕과 결혼하게 된다.
허왕후의 이동지역을 이어주는 증거가 쌍어신앙이다.인도 아요디아사원,중국의 안악(구 보주)허왕후의 오라버니 장유화상이 세운 은하사,김해 수로왕릉에도 쌍어문양이 새겨져 있다.한편 고향에서 갠지스강에 배를 띄워 동풍을 타고 바다로 이동하여 가락국으로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가야와 인도 사이의 교역으로 양국의 여러가지 문물의 교류도 있었을 것이다. 김해에 있는 김수로 왕의 왕릉 입구의 대문의 상량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목판의 문장(紋章)의 그림과 꼭 같은 것이 인도의 어느 박물관에 있는 것을 계명대학교의 한 교수가 발견했다고 한다. 이 문장의 그림에는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상징이 있는데, 그림의 맨 위 좌우편에는 새 눈처럼 작은 눈이 있고 복부 부분의 한가운데에는 밝은 등대 모양의 그림이 있고 그 양편에는 물고기 한 마리씩이 그 등대를 향해 오고 있는 모습이 있다. 물고기는 기독교에서 초대교회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됐다.
불교에는 물고기를 상징으로 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로마의 카타콤의 벽에 물고기 두 마리가 십자가를 향해 헤엄쳐 가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을 작은 도자기판에 그려서 구워 그림엽서 크기로 만든 것을 로마의 카타콤 매점에서 팔고 있다. 카타콤의 이 그림과 김수로 왕릉의 그 목판의 문장의 그림이 아주 유사하다. 기독교가 일찍 전래된 인도에서 만들어진 문장과 카타콤의 그림과 김수로 왕릉에 있는 문장이 다 같은 기독교 상징물을 그린 것이다.
경산시 자인면 일언동에 한때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높이 60cm, 폭 30cm 크기의 석상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사람이 어린 새끼 양 한 마리를 가슴에 안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두 손을 포개서 가슴에 얹고 기도하는 모습을 조각한 것인데 두상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이 두 비석은 가야동이라는 곳에서 개천공사를 하다가 묻혀 있던 것이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어린 양은 불교의 상징물이 아니며, 불교는 두 손바닥을 합장하여 기도할 뿐 두 손을 포개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이 두 석상은 그리스도교의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AD 1세기에 건국된 가야국이 로마제국과 어떤 외교와 교역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상남도에 있는 박물관 몇 군데에는 로마제국의 문화의 전래를 시사하는 물건들이 전시되고 있다.
진주박물관에는 로마제국의 군대가 사용한 마구(馬具)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동로마제국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또 술을 따라 마시는 서양의 잔 고배(高杯)가 역시 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김해에 있는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것으로 AD 1~4세기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서양에서 가톨릭교회가 성찬식 때 사용하는 성배(聖杯)와 비슷하고, 그 고배의 긴 다리 대각(臺脚)에는 십(十)자형의 구멍이 뚫린 못 형의 투창(透窓) 셋이 있다. 십자형은 다른 기물에서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부산대학교 박물관에는 물건을 얹어놓는 기대(器臺)가 도자기 제품으로 진열되어 있는데 거기에도 십자형의 투창 다섯 개가 있다.
대진국 절터에서 나온 기와로 만든 십자가등 이상의 여러가지 진술은 가야시대에 기독교가 전래된 흔적으로서 추정되는 것들인데 필자가 직접 답사한 것들이고, 가야의 기독교 전래의 흔적을 가야국에 관한 문헌과 여러가지 조각물과 기물들을 연구하여 제시하는 연구가들의 자료가 있지만 지나친 추측들도 있다.
무엇보다도 도마석상과 히브리 글자 두 개가 도마의 가야 선교를 암시하는 것이 된다. 만일 사도 도마 자신이 가야에 오지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가야에 선교하러 와서 도마의 석상을 남기고 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만일 도마가 인도에 일찍 갔다면 거기서 그가 가야국에 올 수 있는 길은 있었다.
※편집자(주3☞경북 영주 도마 분처상에 새겨진 히브리어 이 석상이 도마의 석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결정적인 흔적은 이 석상 우편에 붙어 있는 같은 높이의 돌에 깊이 파인 음각(陰刻)의 히브리어 자음(字音) 글자 두 개인데, 오른쪽의 타우(ת)와 왼쪽의 맴(ם)이다. 이 두 자음에 모음을 붙여 읽으면 “토마”가 된다. 이 두 글자는 돌에 깊이 파여서 조금도 마모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왼쪽에는 의미가 분명치 않은 두 개의 음각이 있는데 그것들도 온전하게 남아 있다. (거의 사용되지 않는 한역인 '야소화왕 (예수 그리스도) 인도자 (전도자)' 라고 쓰인 점등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 두 글자는 중동의 어느 나라나 인도의 글자와도 판이한 히브리어 글자이다. 그리고 이 석상 왼편 아랫부분에는 이 석상을 만든 사람의 이름인 듯한 한자 두 개가 음각이 아닌 방법으로 파인 것이 있는데 온전한 한자가 아닌 두 글자이다. 이 석상을 만든 사람이 아마도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도마 석상은 오늘날 근처에 있는 불교의 석상과는 다르게 예술미가 아주 없는 소박한 것이고, 이 석상이 조각된 가야시대는 아직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이었다.
※편집자(주5☞황금과 향신료(후추.정향.생강등) 13세기중반까지 유럽인은 동양을 가 본적 없고 실크로드를 통해 향신료가 수입되었다. 서아시아를 차지한 터키 이슬람 교도들이 실크로드를 차단(이것을 철의장막)이라함. 엄청난 세금으로 고통 받던 중 칭기즈 칸의 정복으로 길이 뚫렸으나 다시 닫히고 이때
마르코 폴로 1271년부터 24년간 여행한 여행기인 동방견문록을 보고 동쪽으로 가면 인도로 갈 수 있다는 시도를 하게 되고
바스코 다 가마는1497.7.8 리스본출항 1498.8월 인도 캘리커트에 도착 1499.9리스본에 돌아왔을 때는 168명의 선 원중 55명만이 생존 3만8천㎞향해함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콜롬부스 또한 인도를 찾아 떠났지만 대서양에서 무역풍을 만나 떠 밀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4천㎞향해 땅을 밟은 쿠바를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인도로 알고 있었고 지금도 지도 표기에는 서인도제도라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은 겨울이 다가오면 수많은 가축을 도축하고(먹이부족) 갈무리하여 봄에 풀이 자라기까지는 썩어가는 고기를 먹어야 했는데 여기에 향신료는 그 들에 삶에 질에 있어서 황금보다 귀한 물건이 되었다.
※편집자(주6☞죽음(암흑)의바다란☞ 아프리카 서해안 카나리아군도남쪽 툭 튀어나온 보하도르 곶 앞바다를 말함 (그 당시 사람은 땅이 수평(직각)인데 그끝의 바다가 암흑의바다로 여겼으며 그 끝의 바다는 폭포처럼 까마득한 어둠(지옥)으로 떨어진다 하여, 근처에도 가질 못함)
※편집자(주☞잠자는 해의 바다 - 태평양 서쪽에서 천주교 동쪽에서 기독교가 전래됨
※편집자(주7☞마틴 루터의 95개 조항문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루터는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와 교회제도에 대한 95개조항문을 만들어 비텐베르그 대학정문에 붙였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종교개혁은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http://cafe.daum.net/npov1/Ah2p/1
※편집자(주8☞ 당시 로마 교황청은 막강한 권력으로 종교재판으로 화형등 갖가지 잔인한 죽을을 남용하였는데 교황청에 타락으로 천주교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에 조항문을 개재하여도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자 그 동안 수면 및에서 신앙을 지켜오던 이들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게 되어 개혁하는 동기가됨 다시말해 종교개혁은 마틴루터가 한 것이 아님 루터는 그져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위해 면죄부를 팔기위한 연옥설에 대한 성서학적으로 잘못되었음을 거재한것인데 평상시 같으면 성당기사에게 잡혀가 구금내지는 화형에 처하지만 이 당시 로마 교황청의 타락으로 사법권이 미치지 않자 지하교회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게됨 우린 서양 역사를 배울때 590-1517년 을 암흑기라 배우는데 천주교가 시작되는 해에서 천주교가 패퇴하는 기간이다.
※편집자(주9☞대진경교유행중국비 [大秦景敎流行中國碑]중국에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전래한 635년부터 약 150년간 있었던 선교활동 및 교세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석비이다. 높이 2.76m, 하부의 너비 1m, 두께 0.27m이다. 경교의 존재는 중국 내에서도 오래도록 잊혀져 있다가 명(明)나라 말기 1625년에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서쪽에 있는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의 대진사(大秦寺) 유적에서 당대(唐代) 경교와 관련된 돌비석이 출토되고 그 비문[大秦景敎流行中國碑] 해독이 이루어짐으로써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627년 당 태종이 즉위하고 635년 공식적으로 경교 선교사가 당나라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미 당나라에는 장안을 중심으로 외국에서 온 경교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바로 644년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양만춘 장군이 이끄는 병사들과 안시성에서 교전을 벌여, 눈에 화살을 맞고 패한 인물이다. 그리고 당시 백제는 한때 단순히 한반도 서쪽 국가가 아닌, 중국 정사 중 하나인 양서(『梁書』)에 기록된 대로 '22개 담로'를 중심으로 중국 땅과 현 일본까지 그 영역을 지니고 있던, 반도 일부-대륙 일부-해양을 아우르는 글로벌 국가였다.
한반도에서는 이렇게 중국 대륙과 일본에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일본서기 신대(神代)에 일본의 출발이 비로소 '담로에서부터였다'는 암호가 슬쩍 기록된 것은, 훗날 누군가가 일본 기원의 진실을 밝혀 주기를 기다리는 저자의 결정적 암호처럼 느껴진다.
이 백제가 660년 멸망했을 당시 많은 피난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富山昌德의 기록(『日本史 중의 佛敎와 景敎』, 東京大出版會, 1969, 46-47)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삼국에 경교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편집자(주10☞ 아편전쟁 청나라의 아편 수입금지에 반발해 영국과 아일랜드 연합이 벌인 침략전쟁(인류역사에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전쟁) 1800년경 영국(동인도호사)은 중국으로부터 차(茶)를 수입하는데 은이 사용되었는데 은이 고갈되가자 영국 상인들은 대체용으로 양귀비에서 축출한 아편을 수출하여 무역적자를 해소키 위해 아편을 수출하자 중국대륙은 아편중독에 빠져들었다 1839년 청나라의 건륭제 말기 황제도광제는 아편을 금지시키고 (임칙서)아편단속을 시작하자. 이에 영국 상인들은 사유재산 침해 명분으로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영국정부는 1839년 10월 원정군 파견을 결정했다. 파병의 직접적 원인이 된것은 1839년 4월 청군이 아편을 몰수하기 시작한 후 청나라 주릉에서 영국인 수부와 청나라인이 충돌 청나라인 1명이 사망하면서 비롯되었다 영.국측은 범인이 인도를 거부했고 마카오를 봉쇄하는 주릉사건이 발생해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영.국원정대는 청나라 해군을 공격해 1840년 홍콩을 강점하면서 영국 영토라고 주장했다. 1841년 영국의 연승으로 홍콩의 지배권이 영국으로 넘어갔지만 민중봉기로 원정군은 위기에 처했다. 이에 영국은 더욱 공세를 감행 광저우를 포위한 후 1842년 8월 난징조약을 맺고 영국의 승리로 종전(2년)되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자주권의 대부분을 잃었고 프랑스와 미국등의 불평등조약을 받아들이고 영국은 홍콩섬을 할양받게된다, 영국은 청나라의 개방이 기대에 못 미치자 1856년(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 아일랜드와 함께 청나라를 다시 공격하여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톈진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서강의 계속되는 공격에 결국 청나라는 영국·프랑스·러시아와 베이징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이 종결되었다
※편집자(주11☞일본의 천주교 반천련 추방령 후미애 제도
○박해의 5가지의 방법
1) 테라우게 제도 : 모든 주민은 종교와 관계없이 절에 소속 되어야 했다.
등록한 절에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증명을 받아야 했다. 이 제도가 무려 30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러한 습관이 남아있다.
2) 종문 개명 : 테라우게제도와 함께 지역별로 종문개명장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여기에
기록하게 되었다. 절의 허가가 없이는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기독교 박해 정책에 의해서
불교도의 국가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3) 후미에(그림밟기) : 매년1회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초상을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을 적발 해내려는 것이였다.
이 제이처럼 잔인한 박해가 없었다. 어떤 선교사는 고문과 박해로 말미암아 신앙을 버리고 불교도가 되어버린
자들도 있었다
4) 5인조제도 : 농민들 5가구를 한조로 조직하여 세금 범죄등을 감시하고 기독교를 감 시하는 제도로 서로 감시하여 밀고와
연대책임을 지게하였다. 일본인의 심 성이 깊이 상처받은 제도였다. 일본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겟다.
혼내(마음)와 다테마에(외면)가 다르다. 희노애락의 표정이 없다고 표현되 는 것이 이로 부터 생겨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기리시단(크리스챤)류족 개명 : 만약 기리시단이 발견되었을때 그의 친족들도 기리시단과 동일하게 보고 남자의 경우 7대
까지 여자의 경우 4대까지 일반인들과 구별하여 특별감시하에 두었다. 무라하찌분 이라고해서 장례식이나 화재가 났을
경우만 제외하고 사람들과의 접근이나 교제를 금지시킨 제도이다. 사회로부터의 완전 따돌림. 이웃과 일절 교제가 단절
된다는것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에 있어서는 매우 가혹한 형벌이 아닐수 없다. 흔 히 이지메(따돌림)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형벌에서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이때의 영향으로 오늘까지 일본인의 심성에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기리시탄(일본어: 吉利支丹 (キリシタン), 切支丹, 포르투갈어: cristão(크리스탕)에서
유래)는 막부시대 일본의 크리스천 즉, 기독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기리스탄
○「村八分(무라하찌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마을에서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나 가족이 마을 사람들의 의논 하에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천련 추방령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일본은 神國(신도의 나라)이므로 기독교국에서 사법(邪法)을 전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2. 그들이 일본인을 신자로 하여 신사(神社), 불각(佛 閣 )을 파괴하는 것은 전대 미문의 일이다.
3. 반천련(파르테-신부)이 그 지혜의 법(기독교 교리)으로 자유로이 신자를 가질 수 있다 고 생각하여 일본의 불법(佛法)을
파괴하는 이상, 일본 땅에 그대로 둘 수 없다.
□다메시기리와 스지기리
에도시대 265년간 유행하다보니 그들은 이유 없이 살해하는 DNA가 되었다.
※편집자(주☞에도시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에 막부(幕府)를 열어 통치하기 시 작하여 도쿠
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기까지의 시대 (1603~1867)
○다메시기리(ためしぎり) 試し切り · 試し 斬り (새 칼을 마련하면 잘 드나 시험(試驗) 하기 위해서 볏짚, 짐승
이나 사람을 베어 보는 살인연습
○스지기리(節切り / すじきり)' 사무라이 일본도(日本刀にぱんとう) 칼날을 잘 드는지 시험하 기 위해서 지나
가는 행인을 칼로 베고 주로 밤에는 전쟁연습이나 무술 연습으로 무고 한 백성들을 죽였다.
○다메시기리와 스지기리는 일본국민들에게 절대복종 습관에 DNA가 됨
○평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비굴해야 했으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용서를 구하는
○도게자(土下座どげざ)[옛날 귀인이 행차 때 땅에 엎드려 조아림. 일본의 예법 중 하나
과도한 인사 습관과 눈만 마주치면 고개 숙이는 저자세, 정치인들에게 항의하지 못하고 위정자는 내각과 국민을 무시하는 정책을 펴는 이유가 다 잔인한 다메시기리의 습성 DNA가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외국인이나 자국인들 까지도 인권에 대한 개념이없는 이들이다. 이러한 DNA 잔인한 버릇이 중일전쟁시 난징서 100명의 목을 누가 빨리 베는지 내기하고 신문에 기사화되고 30만명을 살해하고 간토대지진시 6천여명을 학살하는 갓난아이를 끌어안고 절벽에서 옥쇄하는 DNA가 그들에 피속에 흐른다.
○후미에(일본어: 踏み絵)란 일본의 에도 시대에 에도 막부가 금지령을 내렸던 기독교 신자(기리시탄이라고 함)을 색출해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또는 거기에 사용했던 목조판 또는 금속제의 판을 말한다.
에도 막부에서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매달린 예수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목재 또는 금속 성화상을 기독교 신자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밟고 지나가게 하여, 예수나 성모마리아에 대한 신심때문에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밟지 않으면 기독교 신자로 간주하여 체포하였다. 1612년 에도 막부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리시탄 금지이 공포되었고, 1619년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하여 고사츠(법령을 민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게시판) 설치 등 거듭되는 기독교 탄 압 정책의 맥락에서 1629년 도입되었다. 1856년 나가사키 및 시모다의 개항지에서는 폐지되었으나, 1873년 메이지 정부가 고사츠 철거를 지시할 때까지 기독교 탄압은 계속 이어졌다
※엔도 슈샤쿠의(1923-1996)도쿄출생 <침묵>이라는 소설은 17세기 초 일본 기독교인들의 순교와 배교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고뇌를 처절하게 묘사했다.
※편집자(주12☞ 한반도에 표류한 하멜일행 1653년“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크리스찬)이냐?(爾是西洋吉利是段者乎)” “야!(耶) 야!(耶)”1653년(효종 4년) 8월6일 <효종실록>은 흥미로운 대화 내용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다. 제주도 해역을 항해하다가 난파돼 표착한 서양인들을 심문하고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이다. 이 서양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헨드릭 하멜(1630~1692)이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이 왜어(일본어)를 할 줄 아는 제주도 현지인의 통역으로 이 낯선 서양인들과 짧은 대화를 이어갔다. 아마 제주목사도 이미 크리스찬의 존재를 알았던 모양인지, “너희가 서양의 크리스찬이냐”고 묻자 하멜 일행이 “야!(耶·예스)”라 답한 것이다. 하멜 일행은 손짓발짓까지 동원해서 “우리는 일본 낭가삭기(郞可朔其·나가사키)로 가고 싶다”고 고집했다.그랬다. 하멜 일행을 태웠다가 난파한 스페르웨르호는 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나가사키로 가던 중이었다. <효종실록>은 배 안에는 목향(木香) 94포, 용뇌 4항, 녹비 2만 7000이 실려있었다”고 했다. 당시 조선 화폐로 30만냥에 달하는 엄청난 물품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센 풍랑을 만나 배에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선원 64명 가운데 단 36명만 살아남아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다.(1653년 8월 15~16일)
□운명적인 만남정유재란 때인 1598년 명나라군에 소속되어 참전한 포르투갈 흑인용병을 그린 작품. 몸집이 너무 커서 수레에 탔다고 한다.그런데 <실록>에 기록된 하멜 일행의 심문 보고서 말미에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다.“이전에 조선에 온 남만인(南蠻人) 가운데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있다. 박연이 (제주도에 표착한) 서양인들을 보고는 ‘과연 남만인이 맞다’고 확인시켰다. 서양인들은 대개 화포를 잘 다뤘기 때문에 훈련도감에 편입시켰다. 서양인들 가운데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효종실록>정유재란 때인 1598년 명나라군에 소속되어 참전한 포르투갈 흑인용병을 몸집이 너무 커서 수레에 탔다고 한다. 짧은 <실록>의 내용은 조선인으로 귀화한 박연(네덜란드명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과 헨드릭 하멜의 운명적인 만남을 묘사한 것이다. <실록>은 둘의 만남을 무미건조한 필치로 전했지만 <하멜 표류기>를 보면 아주 자세하게 나온다. “1653년 10월 29일, 박연은 조정을 대신해서 제주도에 파견돼 하멜 일행을 제대로 심문하러 온 것이다. 오랜 만에 만난 고향 사람들인데 얼마나 기뻤을까. 윤행임의 <석재고>는 박연은 하멜 일행이 네덜란드 사람인 것을 알고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고 전했다. 조선 조정은 그때까지 ‘남만인’으로만 알고 있던 박연이 아란타(네덜란드)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고 한다.(<석재고>) 포르투갈어인 마링예이루(Marinheiro)의 첫 두 음절을 따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흥미로운 것은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군 가운데 포르투갈 흑인용병 4명이 참전했다는 것이다. 즉 1598년 명나라 지원군 장사 팽신고는 선조 임금에게 파랑국(포르투갈) 군인들을 소개했다.“명나라 군이 4만7000여 명이었다. 해귀(海鬼)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다.”(<난중잡록> 3)이 포르투갈 흑인용병들의 존재는 왜군들에게도 알려져 적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군은 이 흑인 용병들의 재주를 제대로 쓰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포르투갈 용병이 물러난 지 8년 후인 1604년(선조 37년) 한 사람의 서양인이 조선땅을 밟는다.
□두 명은 병자호란 때 전사하고…
어쨌든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가 조선에 정착해서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산 연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남만국 혹은 아란타(포르투갈 어로 올란다), 혹은 얼굴과 수염이 붉다해서 홍이(紅夷)·홍모(紅毛)라 일컬어진 네덜란드 사람들의 기술 때문은 아닌가. 윤행임의 <석재고>는 “박연(벨테브레)이 병서에 능했고 홍이포 제작기술을 전했는데 그 기술이 뛰어났다”고 전했다.성해응의 <연경재 전집>은 “남만인들은 기술이 좋고 역법과 의술에 정통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조정은 네덜란드인들을 기술전문집단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조선 조정의 명을 받은 벨테브레이 일행은 서울로 올라와 훈련도감 군사로 편입된다. 그들은 투항한 일본인과 표류한 중국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의 장수가 됐다. “박연은 조선 글자를 몰랐다. 그 나라(네덜란드) 방언으로 박연이라 했다. 어떻게 쓰는지 정확하지 않은 데다 음도 달라서 성과 이름을 구별할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 속음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공사견문록>)벨테브레는 몸집이 컸고 살이 쪘으며 눈은 파랬다. 그는 조선여자와 결혼해서 아들과 딸까지 두었다.일행 중 두 사람 즉 하이스베르츠와 베르바스트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전사하고 만다. 결국 벨테브레이 만이 조선인 박연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마침 북벌정책을 구체화한다. 따라서 화포제작에 재능을 보인 박연은 나름 혁혁한 공을 세운다. 박연은 아예 조선의 무과에 응시해서 당당하게 급제한 뒤 정식무관으로 활동한다.(1648년) 박연은 급기야 홍이포라는 화포의 제도를 조선에 소개했다. “1652년(효종 3년) 박연은 나라를 위해 재능을 떨쳤고, 드디어 홍이포 제도를 전했다. 기이한 일이다.”(<석재고>)
□13년 만의 탈출
당시 하멜 일행을 괴롭힌 것은 조선을 강타한 기근이었다. 이에따른 식량 부족 등으로 하멜 일행은 순천 남원 좌수영에 3개 집단으로 분산 수용됐다. 하멜 일행은 결국 탈출을 감행했다. 친하게 지낸 조선인에게 ‘먼 섬에서 면화를 구입할테니 배 한 척만 사달라’고 간청했다. 주저하는 배주인에게 두배 값을 지불해서 배를 구입했다.1666년(현종 7년) 9월4일 밤 전라 좌수영에 있던 하멜 일행 5명과 순천에 있던 3명 등 8명이 탈출했다.“우리는 쌀과 물, 물병과 냄비 등을 지고 성벽을 넘었다.
□하멜표류기의 탄생
고국에 돌아간 하멜은 조선에서의 억류기간 도중 받지못한 임금을 청구하려고 보고서를 썼다. 이것이 바로 ‘하멜보고서’다. 1668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이 하멜의 보고서를 근거로 <하멜표류기>가 출판됐다. 이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가 빼어난 문필가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에서의 표류이야기가 유럽인들의 관심을 끈 것이다. 물론 부정적인 내용도 많다.“조선사람들은 매우 도둑질을 잘하며 속이거나 거짓말도 잘한다. 신뢰할 수 없다. 동시에 너무 단순해서 쉽게 속는다. 조선사람들은 유약한 민족이며 강직함이나 용기가 없다. 호전적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그렇지만 나름 정확한 시선으로 조선 사회를 바라본 측면도 많다. “청나라 황제가 자신보다 높다고 인정하지만 조선국왕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양친 중 어느 한쪽이 노비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 조선 법은 매우 엄격하다. 왕에게 반역을 하면 당사자는 물론 모든 가족과 친지를 몰살시킨다.…” “부자들은 기분전환을 위해 기생들과 여러 암자에 자주 들른다.…지체 높은 사람들이나 귀족들은 자녀의 교육에 신경을 쓴다. 제때 자녀들의 읽기와 쓰기를 지도할 스승을 붙여준다.”
※편집자(주13☞당시 한반도 정세-백제가 660년 멸망했을 당시 많은 피난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富山昌德의 기록(『日本史 중의 佛敎와 景敎』, 東京大出版會, 1969, 46-47)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삼국에 경교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고대 기록인 《續日本書記》 〈성무천황기〉에도 783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경교 선교사 밀리스(Millis)를 동반하여 천황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편집자(주14☞이질문화 양식-김양선 목사는 고든(E. A. Gordon)의 저서를 인용하여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십이지상(十二支像)이나 페르시아 무인상, 경주 석굴암 전실(前室) 양벽에 부조되어 있는 팔부신장(八部神將) 중 두 상을 페르시아 무인상으로 보았고, 석굴 내벽에 부조되어 있는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 십나한상(十羅漢像), 범천(梵天) 및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의 의문(衣紋)과 발에 신은 샌들, 손에 든 유리잔 등을 모두 경교의 영향으로 서술하였다. 195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경교식 십자가도, 불교에 흡수된 기독교 유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경교는 마리아 숭배를 반대하였으며 십자가 이외 형상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일부 변질되었다고 보아야겠다. 사실 다보탑을 비롯한 불국사 전체가 한반도 불교사에 있어 다른 유적과 구분되는 전무후무한 독특한 양식을 지니는 것은, 실제적 설계자가 불교 이외 어떤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편집자(주15☞ Ideologie : 칼 마르크스 사회주의(공산주의)
개인이나 사회 집단의 사상, 행동 따위를 이끄는 관념이나 신념의 체계
기원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유대교 분파이자 '쿰란 공동체'로 더 잘 알려진 에세네파(איסיים, Εσσηνοι), 플라톤의《국가론》, 초대 기독교의 교리, 중세 말 토머스 모어의《유토피아 Utopia》, 근세 초 톰마소 캄파넬라의《태양의 나라 Civitassolis》(1623) 등에서도 기원한다.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16세기경 개신교의 소수파인 재세례파가 초기 기독교적인 공동생활을 추구하면서 주장한 것이다.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평등을 추구하며 속세적 가치를 부정하는 등의 특징을 띤다. 그러나 주류 기독교인들에 의해 소수 재세례파가 이단으로 박해당하면서 이러한 의미의 공산주의 용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19세기 후반까지 상대적으로 낙후된 봉건제 농업국가였던 러시아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거쳐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에 의해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최초의 국가가 1922년에 수립되었고 또 중국의 경우도 농민을 중시하는 마오이즘이 등장하여 1949년 공산정권 수립에 성공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박물학자 찰스다윈의 그는 종들은 합목적적으로 환경에 적응하여 변화해나간다는 J. B. 라마르크의 진화론과 유사한 진화개념을 전개한다는 말을 인용해 환경결정론)
사회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인간에 이론과 사상은 70년이 넘지 못한다. 공산주의 쏘비에트 연방 붕괴 인간세상의 환경 존재를 바꾸기위해 종교 문화를 말살하며 사상교육을 하며 이데올로기 시대로 진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념은 70년만에 국어사전의 낱말로 돌아갑니다
1991년 12월 25일엔 소련의 대통령이자 소련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 지도부를 해체했음(1922-1991=69년)
인간에 이론과 사상은 70년이 넘지 못한다. 공산주의 쏘비에트 연방 붕괴 칼 마르크스 사회주의(공산주의)
※편집자(주16☞고래스(키루스2세) 포고령 고국귀환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을 해방 시킨 바사 나라 (페르시아) 고레스(키루스 왕 2세 )왕
이스라엘 바벨론에 멸망되어(BC605년)-포로로 끌려간지 페르시아제국 귀환령이 70년만인 BC535년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며 이사야서를 쓴 시기는 바사(페르시아)왕이였던 고레스(키루스)가 태어나기도 전의 기록입니다. 고레스왕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약 170년 전에 기록된 이사야서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정확히 기록하셨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며 바벨론 정복할 것에 대하여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손을 잡고 행한 일이라고 기록하셨습니다. 이 예언대로 바사나라에 고레스라는 왕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벨론을 정복하게 되며 70년간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을 해방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에스라1-6장)
키루스 실린더는 BC 6세기 페르시아 키루스 왕의 통치이념이 새겨진 원통 모양돌 형태의 유물로 1879년 이라크 바빌론 고대신전에서 이라크 모술 출신의 영국인 호르무즈드 라삼에 의해 출토됐다.새겨진 내용에는 피정복민에 대한 인권을 배려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세계 최초의 인권헌장이 담긴 유물로 평가받는다
※편집자(주17☞ B.C (Before Christ) 예수그리스도 이전 / B.C.E (Before Common Era) 공통연대 이전시대
※편집자(주17☞ A.D (Anno Domini) 예수그리스도 이후 / C.E (Common Era) A.C (After Christ)공통연대 이후시대
2011 0925 영국 BBC 방송이 예수의 탄생 시점을 기준으로 시대를 기원전(BC : Before Christ)과 기원후(AD : Anno Domini)로 나누는 관행 대신 BCE(Before Common Era)와 CE(Common Era)로 나눈다는 새로운 지침을 시행하기 시작, 영국 기독교 신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격분하고 있다고 영국 데일리이 보도했다.B.C.E → before common/christian era(공통 그리스도 이전시대)C.E → common/christian era(공통 그리스도 이후시대) ※어차피 기점은 예수 그리스도
※편집자(주18☞보리문동 : 조선후기 숙종때 영남(남인)은 재야세력으로 전락하자 중앙정계에 집단상소 방식으로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 등으로 한양에 상소하러온 영남 유생들을 보리문동 또 왔구나 에서 문동이 문둥이로 변이됨
※편집자(주☞보릿고개 : 지난해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보리가 여물지 않은 5-6월을 의미하며 춘궁기(春窮期).
맥령기(麥嶺期)라고도 함. 헛간에는 다음해 심을 각종 씨앗들이 가득하다. 자녀가 먹을게 없다고 씨종자를 빠아먹으면 온 가족이 굶어죽기에 아비에 고통은 글로 표현이 안된다. 살아있는 자식들이 그 씨앗으로 이듬해 농사를 지어 굶지 않고 대를 이어가도 록 함이다. 보리가 여물기전 허기를 때우기위해 벼다 뽁아서 밥(죽)을 함
조선말 이중과세 일제강점기 식량수탈 6.25전란으로 초근목피(草根木皮)1960년 후반에야 벋어남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씨앗(종자)를 배고 죽는다’
※편집자(주19☞수서령(收書令) 조선 세조3년(1457) 예종 · 성종 때 8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예로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 조선편수회 1910 역사서 강제몰수
이유 : 그대로 두면 역사관이 문제가 되고 중국에서 이의를 제기할 우려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교를 생각해서, 나라를 생각해서 이런 책을 비밀리에 가두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8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 비사 · 대변설 · 조대기 · 주남일사기 ·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 안함노원동중 삼성기… 1백여 권과 동천록 · 마슬록 · 통천록…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 세조 3년 5월 26일 (무자)
○ 세조 7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 예종 7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9월 18일(무술)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하다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 성종 원년 12월 9일(무오)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수납하는 것에 대한 글을 보내다.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 《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환단고기에 소개된 '행방불명된 사서 13종'이다.
| 1.대변경大辯經 2.표훈천사表訓天詞 3.삼성밀기三聖密記 4.고려팔관기高麗八觀記 | 5.배달유기倍達留記 6.삼한비기三韓秘記 7.신지비사神誌秘詞 8.오제설五帝說 | 9.유기留記 10.태백진훈太白眞訓 11.진역유기震域留記 12.진단구변도震檀九變圖 13.조대기朝代記 |
※편집자(주20☞금속활자 : 2015 0519 서울디지털 포럼 기조연설에서 앨 고어 전 미국 대통령은 스위스 바젤 인쇄박물관에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었다며 교황사절단이(편집자주☞1333 로마교황 요한22세 사절단 고려에 파견) 한국을 방문하면서 금속활자의 그림과 설명을 같이 가져왔는데 구텐베르크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로(1438-1448동양에파견?) 부터 정보를 얻어 1453년에 유럽에 인쇄술을 소개하면서 이 기술이 한국 것임을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은 고려말 문장가로 유명한 이규보가 저술한 <동국이상국집>에는 1234년부터 1241년 사이 <상예정문> 50권 28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해 배포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금속활자인쇄 : 직지심체요절인쇄1372-1378 구텐베르크 42행성서 1452-1455인쇄 (약200년) 앞선기술이다)
자료올림 2016.12.22 17:08 에디터 종료로 다시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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