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회 崔圭夏정부는 과도정부
군부내에 全斗煥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힘의 중심이 형성
79년 10월 26일 朴正熙정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가 곧바로 막 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군부내에 全斗煥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힘 의 중심이 형성되면서 崔圭夏정부는 과도정부로서의 역할 조차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유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13일 해직교수협의회, 동아.조선투위, 민주청년협의회, 자유 실천문인협회, 민주청년협의회등 5개단체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란 성 명을 통해 유신체제의 조속한 청산과 민주회복, 새로운 민주헌법의 3개월내 제정 등을 주장하며 국민저항의 깃발을 올렸다.
15일 기독청년협의회(EYC)는 기독청년민주화선언을 발표, 유신잔재의 일소와 거국내각 구성,종교.언론.학원 자유의 보장 등을 요구했고 , 같은날 민주주의와 학원자유화를 위한 국전 대학행협의회 학생회 부활준비위원회 도 새 헌법제정과 해직교수 복직, 학원 자율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는 성명 을 냈다. 22일과 23일에는 같은 주장으로 서울대 관악캠퍼스와 서울농대에 서 시위를 벌여 4명이 구속되고 6명이 수배됐다.
그리고 24일 오후. 재야 민주화세력들은 명동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위장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 최했다.
홍성엽군과 윤정민양이 여러 어른들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 을 알려 드립니다. 즐거운 자리에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79년 11월24일(토) 오후 5시30분 YWCA1층 강당(명동성당 앞)
5백여명의 하객들은 축의금을 전달하고 신랑은 인사하기에 바빴으나, 잠 시후 나타난 前국회의원 박종태씨는 주례사 대신 대회 인사말을 하기 시작 했다. 물론 신부는 나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잔악한 자들이 유신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마련한 비상계엄하에서 부득 이 결혼식이라는 상황을 이용,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잠시후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대회장으로 난입했고 난투극 끝에 96명이 연행됐고, 가까스로 빠져 나간 참석자들은 유신철폐를 외치며 코스 모스백화점에서 무교동쪽으로 시위를 벌여 44명이 경찰에 잡혀갔다.
YWCA위장결혼식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 았지만 재야 민주세력. 학생권에 끼친 여파는 컸다.
같은 달 26일 고려대 15개 서클의 학원민주화 선언발표, 28일 광주 신. 구교 및 재야 민주화운동 6개 단체의 민주화를 향하여 함께 나가자는 성 명발표 및 계엄군과의 충돌, 30일 전남대생 2천여명 군의 중립 요구하며 시 위, 12월 5일 전북대생 1천5백여명 유신잔당 퇴진요구 시위 등 학원가는 朴正熙 사망이후 관망태세에서 벗어나 민주화 투쟁의 불을 지피기 시작 했다.
드디어 80년 3월이 오자 대학가는 급속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79년 11 월부터 학생회 부활을 논의해오던 전국의 대학생들은 방학기간을 이용 학 생조직을 재건한다. 3월 28일 서울대가 총학생회를 출범시키고 4월초까지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학생회 구성을 완료했다.
대학가는 4월 들어 병영집체훈련 거부를 주요이슈로 유신잔재 철폐투쟁 에 나섰다.문무대 입영교육을 받게 된 성균관대생들이 맨먼저 병영집체 훈 련을 거부했고 뒤이어 서강대와 서울대가 이제도의 폐지를 결의했다.
군부정치의 연장선상에 서 있던 崔圭夏정부로선 학생들의 이같은 투쟁을 정부에 대한 정면도전으로밖에 여길수 없었고, 학생운동도 당연히 대정부 정치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학생운동권과 군부의 정면대 결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4월 14일 신군부의 핵심 全斗煥은 중정부장 서리 자리까지 차지해 군부와 행정부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권부의 핵심을 움켜잡았고 , 5월들어 학생운동권은 야권의 분열을 보면서 자제해왔던 가두진출로 방향을 선회한다.
2일 서울대생 1만여명은 민주화 촉진대토론회를 갖고 격렬한 논쟁 끝에 병영집체훈련에 일단 응소하는 대신, 계엄해제 요구등 정치투쟁에 돌입했 다.3일에도 서울대생은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6일 하루동안 충남대. 전북대. 연세대 등이 시위를 하거나 성명서을 발표하는등 계엄해제 를 요구하는 대정부 정치투쟁이 전국의 대학가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결국 13일 연대생을 주축으로 한 서울시 6개대 2천5백여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14일에는 이젠 둑이 터진듯이 서울시내 대학 생 7만여명이 교문을 박차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다음날인 15일 오후. 서울역엔 무려 35개대 10만여명의 대학생이 집결 했다. 지방에서도 24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날 오 후 3시가 넘으면서 군이 투입되고 있다는 제보가 학생 지도부에 전달되면 서 상황은 돌변한다.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 부근에 군인들을 실은 트럭 과 장갑차가 집결해 있다는 제보였다. 불안에 휩싸인 가운데 서울역 사수 를 외친 학생들이 다수였으나, 학생지도부는 심야에 군부대와 충돌은 바람 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시위중단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 이었다.
그리고 16일과 17일. 光州에서 전남대생이 주축이 돼 도청앞에서 평화적 인 횃불시위가 있었을 뿐 전국의 대학가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서울역회군이후 채 3일도 넘지 않은 운명의 5월 17일. 全斗煥을 주축으로 하는 신군부는 대반격을 시작했다.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요즘 한라당 몇놈이 눈깔 뒤집히는 헛소리에
마음 아픈 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