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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길을 가는 동료들과 함께한 초여름의 설악 산행
1. 일자 :
2. 장소 : 설악산 (1708m)
3. 행로 및 시간
[한계령(09:18, 920m) -> 매표소(09:20) -> 이정표(09:33, 한계령 0.5km, 중청 7.2km) -> 지능선 안부(10:00, 하늘 열림) -> 다리(10:32) -> (계단길) -> 서북능선 삼거리(10:44, 끝청 4.2km) -> 바위 전망대(10:55) -> (주목, 돌길) -> 이정표 09-07(11:31) -> 전망대(12:00, 1474봉?, 돌길 끝) -> 이정표(12:21, 중청 2.6km) -> 나무개선문(12:44) -> 끝청(13:03) -> (중식, -13:22) -> 봉정암 전망(13:29) -> 끝청갈림길(13:52, 소청 0.4km) -> 중청대피소(13:55) -> (휴식, -14:15) -> 대청봉(14:33, 오색 5km, 비선대 8km, 백담사 12.9km) -> (휴식, -14:45) -> 제2 쉼터(15:25) -> 설악폭포(16:04, 950m) -> 이정표(16:36, 오색 1.7km) -> 이정표(16:59, 오색 1km, 710m) -> 이정표(17:27, 오색 0.5km) -> 폭포 쉼터(17:31) -> 오색대피소(17:35)]
< 설악산 산행을 준비하여 >
어느 등산 잡지에서 인상 깊은 글을 읽은 일이 있다. “그대 아직 XX산을 가보지 않았다면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다. 아꺼둔 꿀떡처럼 달콤한 비경을 남겨 두었으므로, 그대 이미 그곳에 갔었다 해도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다. 일상이 갑갑할 때 언제든 기억 속의 비경을 되살려 미소 지을 수 있으므로”. 산에 미처 가는 사람에게는 공감이 가는 말이다. XX에 그 어느 산을 넣어도 되지만, 역시 ‘설악’이 가장 어울릴 듯하다. 흔히 일반 산과 명산을 구분할 때, ‘놓임새, 앉음새, 품새’를 말한다. 설악으로 말할 것 같으며 백두대간 중앙부에 위치를 동해를 굽어보는 그 놓임새가 예사롭지 않으며, 공룡능선, 용아장성의 암봉과 가야동, 구곡담, 수렴동 등 수 많은 계곡에 둘러 쌓인 최고의 앉음새, 그리고 인제에서 양양, 속초에 이르는 한없이 너른 품새로 명산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을 갖춘 최고의 명산이다.
지난 5년간 거의 매주 등산을 했지만, 설악의 정상 대청봉은 아직 가보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아 (대학 3학년 입대하기 직전 동기들이 날 위해 일정을 맞춘 수행여행에서 올랐던 금강굴, 지난 봄 모처럼 날 잡아 찾았지만 산불 예방기간이라 대청봉 산행은 포기하고 울산바위에만 갔다 온 경험, 또 지난 여름 휴가 시 다시 찾았으나 우연히 직장 동료(박실장)를 설악동 케이블카에서 만나 밤새 술 먹다가 또다시 오르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인연이 쉽게 닿지 않았는데, 오늘 드디어 기회가 찾아 왔다.
약 2달 전 회사 회식자리에서 등산 이야기를 하다가 박차장과 이과장과 마음이 동해 함께 설악산을 가자는 약속을 했고, 속초가 고향인 성우가 차편도 제공하고 양양에 있는 시골집으로 초대도 해 주어서 산행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으나, 날자가 회사 일로 한 번(5/23), 성우 집안 일로 또 한 번(6/6)이 연기된 끝에 오늘에야 모든 인연이 맞게 되었다. 항상 모든 이벤트의 클라이막스가 시작되기 전에는 약간 뜸을 들이는 것이 상례이니, 오히려 덕분에 설악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아볼 수 있어 좋았다.
등산 서적을 뒤적이며 인도어 클라이밍을 해 본 결과, 오늘 오를 한계령-서북능선-대청봉-오색코스는 거리로는 13.3km, 시간은 9시간 정도가 소요될 듯하다. 한계령에서 2시간여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서북능선 삼거리에 도착하고, 거기서 평탄한 서북능선을 타고 끝청, 중청을 거쳐 대청에 오르는데 점심식사 포함 4시간, 이후 오색을 향해 가파른 내리막을 3시간을 내려서면 6시 30분 정도에 오색에 도착할 것이고, 성우가 지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 설악을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 보자.
< 희망사항 >
오늘 산행이 특별한 것은 설악의 대청봉을 오른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하루 평균 10시간을 같은 사무실에서 지지고 볶으며 함께 기뻐하며 같이 걱정하면서 동일한 목표를 위해 매진하는, 그리고 매일 2끼의 식사를 함께하는 가족 같은 동료들과 동행하는 산행이라는 것이 더욱 의미 있다 하겠다.
평소 산에 오르며 등산이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정상에 서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팀을 구성하여, 힘든 오르막을 오르고, 때론 평탄하고 경치 좋은 능선을 걷고 또 위험한 암벽(난관)을 넘어 서고, 계곡 맑은 물에 시원함을 느끼며, 물가 돌부리 다치기도 하면서 힘겹게 정상에 오르고, 다시 오를 때 보다 더 힘겹게 주어진 길을 내려서는 등산의 묘미가 벤처사업의 행태와 많이 닮아 있음을 나는 안다. 함께 정상을 향해 출발했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가는 길과 방향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약속된 시간에 뒤처져 힘겨워하며, 오를 때보다 더 힘든 긴 내리막길의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음도 나는 안다. 또 하나 등산과 벤처가 갖는 공통점은 누가 시켜서 하면 이 일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을 내가 개척하면서 간다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등산이 벤처와 다른 점은 벤처로 성공 (어느 정도가 성공이냐는 잣대를 나는 아직 가지고 있고 못하다)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등산에서 계획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여 실패(물론 에베레스트 등의 고산은 예외겠지만)를 맛보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벤처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등산을 통해 작은 성공 경험들을 축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하겠다.
등산의 완결은 정상 등정이 아니라 무사히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라 한다. 초여름 마음 맞는 동료들과 함께하는 설악산 등산이 안전산행이 되기를 그리고 내 삶에 소중한 추억을 가져다 주질 바래 본다.
< 한계령 가는 길 >
이른 아침 분당 성우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은 만원이다. 일부는 간밤 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일부는 새벽부터 일터를 찾는 이들이다. 서현에 내리니 부지런한 성우 벌써 밖으로 나와 있다. 잠시 후 등산복 차림을 한 박차장과 이과장이 도착했고, 6시 20분 예정보다 조금 늦게 출발을 한다. 중간에 양평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한계령에 도착하니 9시 10분이다. 6시경에 오색에서 만나기로 하고 성우와 짧은 작별을 한다.
< 한계령에서 서북능선 삼거리 >
몇 년 만에 한계령을 다시 찾았다. 오늘은 속초를 향해 가는 길에 휴식을 위해 정차한 것이 아니라, 이곳을 들머리로 산행을 하고자 함이 새롭다. 9시 18분 대장정의 서막이 울렸다. 한계령 초입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보수 중인 설악루와 위령비가 나오고 바로 매표소다. 체 2분이 걸리지 않았다. 햇살은 강한데 산 중 공기는 서늘하다. 산행하기에 최적의 날씨다. 서북능선의 장쾌한 경관과 대청봉을 기대하며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 한계령에서 >
20여분 오르막을 오르니 이과장이 힘겨워 한다. 오랜만에 산행이니 왜 아니 힘들겠는가? 속도를 조절하며 천천히 오른다. 산길의 전경이 지난 주 지리산 과는 영 다르다. 지리 거림골이 완만하고 좁은 그리고 별 경치 없는 길이었다면, 한계령 길은 가파르지만 크고 평탄한 돌길이 잘 정비되어 있고 간간히 올려다 보는 경관이 매력적인 골산의 풍모를 풍기고 있다. 벌써 설악의 풍광에 취한다.
오름 짓을 시작한지 40분 이 과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지능선 안부에서 준비한 수박을 꺼내 먹으며 첫 휴식을 한다. 고도가 벌써 1200m 후반이다. 서북능선 삼거리까지 고도로 인한 힘겨움은 없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긴다. 이어지는 길은 평탄한 산허리 길과 내리막 오르막이 반복되는 전형적인 산길이다. (하산길 오색의 한결 같은 내리막과는 비교가 되었다.)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으니, 10시 30분경 예전에 약수터가 있었다는 다리에 도착했다. 몇 해 전 수해의 잔해가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체 남아 있다. 이곳부터 길은 가파른 나무 계단길이다. 멀리 보이는 산여울과 계단 부근의 예사롭지 않은 바위를 구경하며 10여분 오르니 서북능선 삼거리에 도착했다. 출발한지 1시간 25분, 예정보다 40여분 빠른 행보다. 길 사정도 생각보다 험하지 않았다. 힘들고 위험한 곳에 계단과 다리 등 인공 구조물이 등반 시간을 많이 단축시켜 주었다.
< 서북능선으로 향하는 길에 / 서북능선 삼거리에서 >
< 서북능선 삼거리에서 중청대피소 >
< 서북 능선에서 >
서북능선 삼거리로 향하는 계단 오르막에서 보이는 경치도 심상치 않았으나, 백두대간 능선 봉우리에서 흠뻑 취하려 슬쩍 곁눈질만하고 꾹 참고 발걸음을 재촉해 왔다. 삼거리에서 작은 언덕을 치고 오르니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고 초여름 맑은 햇살을 받은 암 봉과 멀리 헤아릴 수 없는 산들의 너울이 감동을 준다. 돌아 가며 사진을 찍고 길을 나서는데 능선 길 내내 황홀경이다. 초입부터 이리 흥분하는데 대청봉에서 바라 보는 공룡능선을 어떻게 감당할까?
서북능선 삼거리의 고도가 1320m, 끝청이 1600m이고 거리가 2시간 이상 걸릴 것이니 거리는 멀지만 고도에 대한 부담은 없다. 한참을 걷는데 길 사정이 너덜은 아니지만 울퉁불퉁하여 신경이 많이 쓰인다. 길이 좁아지며 앞사람의 행보가 우리의 속도에 영향을 미친다. 남녀 한 쌍이 앞서 간다. 처음엔 부부 혹은 연인 사이로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부녀 사이인 듯하다. 얼굴과 체형이 닮았다. 중년의 아버지와 젊은 딸의 산행이라. 흔치 않는 멋진 모습이다. 속도를 처지게 만든 것에 대한 용서가 된다. 부녀를 추월한다. 09-07 이정표에서 행동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서북능선 삼거리 출발 1km의 거리를 45분만에 왔다. 주목과 화려한 암봉이 주는 경치에 취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초콜릿 하나로 힘을 내어 다시 길을 나선다. 이과장이 다시 힘겨워한다. 길은 간간이 바위 오르막과 평지길이 반복된다. 돌아 보니 귀때기청의 전경이 점점 멀어진다. 사람의 60cm 남짓의 보폭 움직임이 산봉우리 하나를 멀리 밀어내고 있다. 등산이 주는 매력이다.
12시 정각 인도어 클라이밍에서 눈 여겨 보았던 1474봉으로 추정되는 작은 공터 전망대에 도착했다. 사방의 전경이 확 트이는 곳이다. 너울지는 산군들과 화려한 암봉들이 눈 아래 펼쳐지는데 이름이 감이 오지 않는다. 이름도 모르는 맛난 음식으로 차려진 화려한 식탁을 대하는 느낌이다. 이름을 모르면 어때 맛있게 먹어만 주면 되지 뭐!
1274봉을 지나며 길 사정이 돌길에서 흙 길로 변한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속도를 내어 본다. 12시 44분 휘어진 고목이 만들어내는 특이한 형상의, 내 나름 '나무 개선문' 이라 명명한 곳에 도착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길에 청량제 같은 곳이다. 맑은 하늘과 초록이 짙은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3명 모두 잘 나왔다. 색깔의 대비가 아름답다. 사진을 다시 보니 이과장은 키가 크고 나는 작음을 새삼 확인한다.
< 나무 개선문에서 >
13시경에 중간 정착지로 생각해 두었던 끝청에 도착했다. 끝청은 낮은 바위로 둘러 쌓인 작은 공터로 서쪽 방면의 전망이 근사하다. 완만하고 높다란 귀때기청에서 흘러 내린 서북릉의 길고 순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오고, 저 멀리 가리봉과 주걱봉이 보인다 (미리 안 것이 아니고 안내판에서 그리 설명하고 있다). 7시 30분경에 아침을 먹었으니 배꼽시계가 작동한다. 바위 한 켠에 식당을 차린다. 장소도 좁고 김밥도 차가웠지만 설악의 경관을 반찬 삼아 동료들과 맛난 식사를 한다. 두런두런 지나온 길을 복기하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매일 10시간을 넘게 생활해도 술자리가 아니면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업무 이야기가 아닌 주제로 대화를 이어 간다. 즐겁고 또 즐겁다.
< 끝청에서 >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초반은 바위 언덕 길이다. 5분여를 걸어 작은 바위를 올라서니 하얀 암벽 밑으로 조그만 암자가 보인다. 봉정암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으로 유명한 1200m 높이에 위치한 절집으로 지리산의 법계사 다음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유서 깊은 암자다. 봉정암 위로 솟은 암릉이 용아장성릉인가 보다. 그 양 옆으로 가야동계곡과 구곡담계곡이 흐를 것이다. 너무 멀어 실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 중청대피소에서 본 설악의 암봉들 >
15시 52분 끝청갈림길 이정표에 도착했다. 끝청에서 온 내 입장에서는 이정표에 ‘중청/소청 갈림길’이라 되어 있어야 타당한데, 대청봉 쪽에서 오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끝청/소청 갈림길’이 더 맞겠다 싶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물의 양면이 다르게 인식됨을 다시금 확인 한다. 언덕 위로 중청의 돔형태의 통신 구조물이 랜드마크마냥 솟아 있다. 좌측으로 내려서면 불과 0.4km 지점에 소청이 있다 한다. 한계령에서 무려 7.7km를 걸었다. 발 아래 밤색의 중청대피소 건물이 보인다. 그 위로 오매불망 그리던 대청봉이 보인다. 감격한다. 중청대피소에서 바라 보는 설악의 드넓은 전경은 황홀 그 자체다.
머리 속에 온갖 상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중청에서 바라보는 설악의 전경. 멀리 우측의 울산바위부터 공룡능선, 가야동계곡, 용아장성릉, 구곡담계곡 좌측으로 서북능선까지 내설악의 풍광이 새파란 초여름 하늘 아래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리 좋은 날씨에 설악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것도 큰 행운이다. 누구는 여러 번 대청봉에 왔어도 구름만 보고 갔다 했는데, 우리는 데뷰 첫 타석에 홈런을 친 기분이다.
< 중청에서 대청으로 >
20여분의 한가한 휴식을 마치고 대청을 향해 발걸음을 딛는다. 짧은 쉼에도 내 다리는 오르막 길에 적응하느라 다시 힘겨워 한다. 이번에는
박차장이 앞서가고 이과장이 뒤처진다. 정상에 도착하기 직전 공룡릉 쪽에서 안개를 담은 구름이 몰려 오는 것이 눈에 보인다. 구름이 이리 빨리 움직이는
것을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서두르지 않으면 대청봉에서의 경치는 꽝이겠다 싶어 피곤한 다리를 좀더 빨리
놀린다. 14시 33시 출발 5시간 15분만에 설악에 정상부에 섰다.
< 대청봉에서 >
안개가 다시 거짓말처럼 갠다. 얼핏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공룡을 배경으로 대청에서의 마지막 사진을 찍고, 조만간 다시 찾을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오색을 향해 하산길을 내려선다.
< 대청에서 오색대피소 >
14시 45분 오색으로 향한다. 이정표는 오색 5km, 비선대 8km, 백담사 12.9km를 알려 주고 있다. 마음이야 설악 최고라는 천불동 계곡으로 가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을 것 같다. 오색까지도 가파른 내리막을 3시간 가까이 가야 할 것이다. 지난 주 그 험하다는 지리산 한신계곡 6.5km도 무리없이 다녀왔는데 5km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길을 나선다.
오색으로의 하산길 초입은 가파르기는 하지만 나무테크와 계단 길이 잘 정비되어 그리 힘들지는 않다. 오히려 1700m 고지에서 내려다 보는 전경이 근사하다. 참으로 오늘은 눈이 호강하는 날이다. 이런 길을 40여분 내려 서니 제 2 쉼터라는 아주 작은 공터가 나온다. 다시 잘 닦여진 계단길을 40여분 내려 서니 설악 폭포가 나온다. 16:04분 해발 950m다. 1시간 20분 만에 고도를 무려 750m 낮추었다. 여기까지는 박차장도 이과장도 컨디션에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 설악폭포 전 계단길에서 >
설악폭포를 지나며부터 길 사정이 거칠어 진다. 이제까지가 정비된 인공 길 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자연상태의 길이다. 몇 해 전 태풍으로 오색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을 때 심하게 망가진 위쪽 부근을 더 공들여 정비한 결과일 것이다. 길 사정이 나빠지니 박차장도 몹시 힘겨워하고 이과장도 무릎 안쪽의 고통을 호소한다. 비상약으로 물 파스를 준비 안 한 것이 후회된다.
조금 걷고 쉬고 다시 걷고 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16시 36분 해발 910m, 오색 1.7km 지점에 도착했다. 해발 40m, 거리 0.8km를 줄이는데 30분 이상이 걸렸다. 잠시 후 제 1 쉼터라는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언제부턴가 다람쥐들이 주위를 맴돈다. 달콤한 사람들의 먹이유혹에 두려움을 잊어 버렸나 보다. 이과장이 초콜릿을 주니 잠시 주위를 살피다 얼른 가지고 사라진다. 나도 하나를 주위에 던지니 내 것은 찾지를 못한다. 착한 이과장 것은 받아 먹고 성질 더러운 내 것은 내치나 보다. 기다리기가 싫어 발길을 내딛는다.
긴 하산 길에 누구라 할 것 없이 힘겨워 보인다. 멀쩡한 내가 오히려 신기해 보인다. 오색 1km까지가 오늘 하산 길의 고비였다. 그 이후도 거친 내리막은 계속 되었지만 남은 거리로 인해 체감하는 힘겨움은 훨씬 덜했다. 대청봉에 오를 때까지는 어떻게 하면 집사람과 다시 대청을 찾을까를 궁리하던 박차장의 입에서 “내 이 길로 대청까지 오르는 사람은 앞으로 존경할 거야”하는 말이 나온다. 내림도 이리 힘든데 이 길로 오르는 사람의 고단함을 말함일 것이다. 그만큼 대청에서 오색으로의 내리막은 길고 멀었다.
시간이
< 오색 하산 길의 힘겨움 / 오색 매표소 앞에서 >
< 양양의 황홀한 밤 >
< 지난 밤을 보낸 성우네 시골집 >
힘겨운 8시간 20동안의 산행을 마치니 성우가 오색 매표소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내 다리가 아닌 우리 회사가 만든 차를 타니 그 편안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오색에서 양양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차로도 꽤 오래 걸렸다. 이동 중에 우측으로 얼핏 얼핏 보이는 바다가 드넓다, 화려한 산중의 밤을 위해 바다는 잠시 잊는다.
샤워를 하고 성우 시골집 평상에 앉는다. 속초 산 회를 안주 삼아 먹는 술 맛이 그만이다. 힘든 등산을 하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이 순간을 그리고 있었다.
비가 온다. 바닷가 부근 산중에서 맞는 비는 낭만 그 자체이다. 소주병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에 비례하여 술꾼들의 기분도 상승된다. 노랫가락이 절로 나온다. 밤이 깊어 간다. 시끄럽던 노래 소리도 잦아 들고, 내일을 준비하자는 성우에 말에 아쉽게 오늘을 접는다. 그렇지 내일이 있지.
< 에필로그 >
오늘 설악산에 오르며 몇 가지 희망사항을 가졌었지. 대청봉에 오르자, 동료들과 즐겁게 산행하자, 조금 욕심을 내 보면 벤처와 등산의 공통점을 다시 생각해 보자, 양양에서 흥겨운 저녁 자리를 갖자 등 등. 3가지는 완벽하게 달성하였는데, 산에서 벤처와 등산의 공통점을 찾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힘든 길을 걸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 애당초 가능한 일이 그리고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마음만 앞서나 보다. 산에서의 최고의 행위는 아무 생각 없이 자연과 호흡하며 주위 경관을 즐기며 걷는 것일 것이다. 다른 그 무엇도 산에 대한 배반이다.
짧지 않은 산행 (그래도 9시간의 산행을 계획했는데 8시간 20분 만에 완주했다)을 힘든 내색을 숨겨 가며 함께 해 준 동료들과 나를 위해 하루 반 나절을 희생해준 내 친구 성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인연의 근원이 되어 준 설악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