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말이 거칠었던 것은(08)
욥기 6:1-30
로고스서원에서는 매주 책을 한 권 읽고, A4 한 장 분량의 글을 쓰는 훈련을 한다. 첫 학기 두 번째 책은 박미라의 「치유하는 글쓰기」(한겨레출판)이다. 제목 그대로 글쓰기를 통해서 마음을 치유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첫 책은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경당)이다. 우리 안에는 창조자 하나님을 닮은 창조적 예술가가 있어서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점을 격려하기 위해 제일 먼저 읽도록 한다. 반면, 이 책은 아무 것이나 생각나는 대로,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마음대로 자유롭게 쓰라고 독려하는 차원에서 「아티스트 웨이」 다음에 배치했다. 친구들 만나 수다 떨 듯이, 마구 발설하듯이 글을 쓰라는 의미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미친년 발설하기!”이다. 이 단어만 듣고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한걸음 물러설 사람이 많을 것이다. ‘미친년’이라니? 용어도 거칠고 어감은 까칠하다. 마음에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품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울부짖는 짐승이 한 마리 살고 있다. 통상적인 문법체계에 따른 문장으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내면에 숨어 있는 아픔을 그냥 그대로 묻어두다가는 큰 일 날 사람들의 언어이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무릇 주류와 다른 언어와 단어를 사용한다. 그것이 바로 미친년의 언어이다. 그래서 박미라는 이런 미친년 같은 글이 약자의 생존전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정상이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비정상적 언어로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지 않을까? 해서, 청소년들의 언어에 욕이 들어가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것도, 미칠 것 같은 가정에서, 돌아버릴 것 같은 학교에서,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고, 그저 입 닥치고 공부만 하라고 다그치지 않았던가.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회에서, 심지어 가정에서조차도 말 할 기회도, 틈도 주지 않고 부모들이,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입만 열면 욕이고, 입을 닫으면 스마트폰질 하면서 어른들의 말을 쌩까는 것이다. 우리가 미치게 만들어놓고, 욕하게 만들어놓고서는 착한 말, 고운 말 쓰라고 윽박지른다. 부모가 미친 거다, 부모가. 그러면서 아이들더러 미쳤다고 한다, 우리가.
욥의 상황이 꼭 그렇다. 욥은 마치 미친년처럼 씨불이고, 아이들처럼 욕지거리를 해댄다. 화들짝 놀란 친구들은 그런 비정상적인 언어 자체를 문제 삼고 공박한다. 왜 그 따위로 말하는 거냐고. 좀 이쁘게 말하면 안 되냐고. 굳이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 거냐고.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속에서 울화가 치미는 심사를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지 못하니 더 미치는 거다. 앞으로 보겠지만, 욥의 거친 언사는 날이 갈수록 강도가 세질 것이다. 그만큼 욥이 당하는 고통이 논리적인 언어로 차근차근 말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아무도 자기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하니 더욱 강하게 말하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말이 듣기 거북하다는 것을 잘 안다. 제 스스로 거칠었다고 실토한다.(3절) 개역에서는 ‘경솔하다’ 새번역에서는 ‘거칠다’로 번역한 이 단어는 정제되지 않고, 절제되지 않는 말들이 마구 쏟아진 것을 뜻한다. 자기 자신도 통제가 안 되는 것이다. 내 속에 그런 말이 있었나 싶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욥 자신도 당혹스러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내면이 앞서 말한 미친놈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격정적인 그의 말도 기실 그의 심한 고통과 격한 분노(2절)의 반영이다. 안 하고 싶어도 저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터져 나온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속이 터질 같아서 욥은 외친다. 허나, 그 소리는 함성이라기보다는 신음에 가깝다. 그는 한 개인이 온전히 받아내기에는 불가능한 무게의 짓눌려 끙끙거린다.
지금 욥은 내 한 몸 덮은 모래가 아니라 바닷가에 지천으로 널린 모래알 전부의 무게와 자신의 고난을 비교한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울지는 그저 상상만 해볼 따름이다. 그러니 그 엄청난 모래가 내리 누르는 힘 이상의 어떤 것이 자신의 영혼을 짓밟고 있다. 바닷가나 강가에서 누구나 한번쯤 모래찜질을 해보았을 것이다. 모래사장에 몸을 묻고 고운 모래로 온 몸을 덮는다. 햇볕을 가리는 챙이 넓은 모자를 덮어쓰고 한 잠 자고 나면 얼마나 개운한가. 그러나 친구의 도움 없이는 혼자 일어나기 쉽지 않다. 모래가 좀 무거운가. 가늘고 고운 모래가 뭉치면 태산이 되는 법이다.
욥은 말도 안 되게 그것보다 자기가 당하는 고통이 더 무겁다고 한다. 사실, 그렇다. 객관적으로 보면, 심한 몸살이라도 말기 암 환자의 고통에 비할 바 못되지만, 주관적으로 느끼는 고통의 크기와 넓이는 그저 내 고통이 가장 힘들다. 그래서 모든 고통은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이다. 그의 고통은 없다. 나의 고통만 있다. 그의 고통이 무엇이든지간에 내 고통이 가장 버겁다. 해서, 왜 내 아픔 몰라주느냐고, 알아달라고 부끄럽지도 않은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애들이 아빠, 엄마 들으라고 크게 울다가 들은 척도 않으면, 눈을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마른 울음소리를 낸다. 그러면 다시 부모는, 그렇게 운다고 머리를 쥐어박는다. 다시 울음보가 터지는 아이.
하여간에, 욥의 신음 소리 듣고 친구들이 딱딱한 교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듣지만, 기실 그 말은 지나가는 바람(26절)과 같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도 보듯이, 바람은 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그것만큼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을 또 없을 것이다. 그냥 느낄 뿐이다. 아, 바람이 부는구나, 라고 알아차릴 뿐이다. 흩날리는 낙엽을 보면서 바람이 저쪽에서 불어와 이리로 가는 것을 안다. 깨진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바람과 같다. 논리적이지 않고, 앞뒤가 안 맞다. 그냥 그 말 속에서 그가 말하려는 것보다 그가 말하고 싶은 마음을 읽으려고 애써야 할 따름이다.
허나, 욥의 사나운 말에는 분노가 실려 있다. 그 방향은 세 곳으로 흐른다. 하나님(1-7), 친구들(14-33), 그리고 자기 자신(8-13).
욥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고난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했다. 당돌하다 못해 불길하고도 불경한, 불온한 도발적인 언사가 친구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고, 독자들에게는 혼선을 조장한다. 욥은 자기의 고난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화를 낸다. 하나님이 직접 활을 당겨 쏜 화살이 욥을 정확하게 가격한 것이다. 그것을 엘리바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지만, 욥은 죄 없는 자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할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하나님을 탄핵한다. 하나님, 이러면 안 되잖아요? 욥이 알고 싶은 그것은 이것이다. 지금껏 알고 믿었던 하나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하나님의 모습에 그는 아내의 말마따나 실망하고 욕하고 떠나지는 않지만, 사탄이 바랐던 것처럼 하나님을 저주하지도 않지만, 계속해서 반항하는 길을 택한다. 이것이 욥의 신실함이고 진실함이고 의로움이다.
욥은 자신을 향한 불쾌한 시선을 잘 안다. 해서, 분노의 방향이 위로는 하나님을 향했다면, 밖으로는 친구들에게로 흘러간다. 한 마디로 말하면 친구인데 친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힘들어 죽을 판인데, 친구라는 것들이 찾아와서 위로는커녕 상처에 소금뿌리고 있다. 숫제 관에다 못을 박는다. 좋을 때 친구가 친구가 아니다. 필요할 때 곁에 있는 친구가 친구이다. 동정하지 않을 거면 쪽박도 깨지 말아야지, 침 한번 제대로 삼킬 수 없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욥을 짓뭉갠다. 팔레스타인이 위치한 중근동은 비가 오면 메말랐던 땅에 물줄기가 생겨 강이 되어 흐른다. 금세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라 버린다. 정작 물이 필요한 여름에는 바짝 마르고, 지나가던 상인들이 찾을 때는 없다.
그리고 욥이 친구들에게 바란 것은 정다운 말 한 마디이었다. 대놓고 친구들을 비판한다(22-23절). 내가 다른 것 요구했냐. 돈 달라고 했냐. 그냥 들어만 주면 그만인 것을, 뭣이라 사람을 이리 곤죽을 만드는 거냐, 너희들 정말 친구 맞아? 우리가 친구이었던 것이 맞느냐고? 말문이 트인 욥은 더욱 거세게 친구들을 몰아세운다.(29-30절) 지금껏 내가 헛소리 한 적이 있느냐. 그랬던 사람이 아닌 내가 이럴진대, 좀 이해하면 안 되냐?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라고 말이다. 아니면, 그랬던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속없이 그냥 지껄이는 말은 아닐 테고, 진실이 담겨 있을 거야, 라는 생각도 안 해보는 거냐?
그런데, 발설의 특징 중 하나가 남들이 잘 알아듣기 힘들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미친 년 발설하기인데, 논리적으로 말할 계제가 아닌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14절이다. 이 구절은 의미가 모호하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더라도 친구라면 받아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되고, 하나님을 버린 자를 낙심한 마음을 잘 위로하면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그런 친구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중적으로 해석된다. 욥의 친구들이 보기에 욥은 하나님을 버렸다. 그렇더라도 친구들이 하기에 따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고, 욥의 자리에서 본다면, 내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닌데,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 믿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도 된다.
욥의 발언이므로 후자의 해석이 옳지 싶다. 나중에 하나님도 욥의 발언을 옳다고 하셨듯이, 그는 하나님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 끈질기게 대답을 듣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질문하는 욥을 의심하는 욥으로 매도하고, 의로운 자의 고난인데도 죄지은 자의 벌로 해석하면서 옹색하게 하나님을 변명하는 짓거리에 이골이 나고 신물이 나서, 너희들이 말하는 대로의 하나님이라면, 나는 못 믿겠다, 안 믿겠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내가 바라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가장 큰 장애는 다름 아닌 교회다. 교인이다.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교회가 싫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한 말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다. Christ Ok, Church No! 존 스토트는 교회를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설득력 있게 전하려고 했다. 그래서 쓴 책이 「기독교의 기본진리」(생명의 말씀사)이다. 교회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공히 인정하고 존중하는 예수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반대로 교회가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가 예수의 증언 공동체가 되고,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아무리 예수 이야기를 해도 결국 도루묵이라고 말한다. 논리로 따지자면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허나, 우리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나는 사이더의 주장이 더 현실적인 적절한 대안이라고 본다. 욥과 같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도 또 다른 경건한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힘들다고 토로할 지경이니, 비기독교인이야 말해서 뭣하겠는가.
욥의 분노의 처음과 끝이 위에 계신 하나님과 밖에 있는 친구들을 겨냥한다면, 그것들이 감싸고 있는 부분은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이다. 욥도 서서히 소진되고 있다. 이미 1, 2장에서 말도 안 되는 고통을 당해서 그로기 상태인데, 정답던 친구들마저 등을 돌리는 마당이니 그의 내면이 온전할 리 만무하다. 핍진하다. 그가 지금 거의 미친 년 발설하기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는 것도 그만큼 그의 속이 텅 비어서 그렇다. 공허한 것이다. 허전하기 이를 데 없다. 먹어도 먹은 것이 아니고, 아무리 옷을 입어도 춥다.
욥은 자기 심정을 감추지 않는다. 그의 발설은 거침없이 이어진다. 먹을 풀과 꼴이 있는데 가축들이 울겠느냐는 것은 지금 욥의 내면이 배가 고프다는 말이다. 먹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이러는 것은 뭔가 결핍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들은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못 주면서도, 되레 엉뚱한 말로 내 허기를 더 도지게 만든다. 내가 듣기를 원하는 대답은 내가 왜 고난을 받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행하시는지, 그것이다. 그걸 알려주면 그만인데, 왜 나를 나쁜 놈 만들고, 죽을 죄인 만들고, 죄책감만 심어주느냐, 그것이 고난을 극복하는데 하등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들은 모르냐?
앞에서도 말했지만, 욥의 거침없는 분노는 같은 신자 입장에서 민망하다. 친구들이야 그렇다손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정제되지 않는 언어는 분명 도를 넘었다. 그랬기에 거푸 대답을 요구하는 하나님 앞에 두 번 모두 말에 관해 언급한다. 말을 너무 많이 했고(40:5), 함부로 말을 했다(42:3). 하지만 욥의 발설은 엘리바스가 본 것과 달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잘못되었거나, 자신의 성품이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도 아니고, 성품이 천박해서도 아니다. 한편, 바닷가 모래알같이 무거운 고통의 천만분의 일을 보여주는 증거이고, 다른 한편, 구원에 대한 갈망, 하나님의 해결을 바라는 소망이 고통의 언어로 표출된 것이다.
그러니까 엘리바스는 분노가 사람을 죽이는 어리석은 행위(5:2)로 본 반면, 욥은 분노하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테판 에셀이 말처럼, 분노는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판이자 책임지는 행위이다. 가장 나쁜 자세는 무관심이다. 즉,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욥에게서 분노는 하나님에게 성의 있는 답변을,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이다. 그리고 실제 하나님은 욥의 요청에 그분 나름의 대답을 하신다. 그리고 욥에게도 역행하는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자로 나서라고 촉구한다. 신자에게 분노는, 특히 고난 받는 자에게 분노에 찬 기도와 찬양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때문에, 욥은 이렇게 반성어린 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 자신에 관해 한 말이 옳다고 평결을 내린다.(42:7)
나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착한 신자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너무 착한 척, 거룩한 척 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져 있고, 주저앉기 직전이다. 그 마음에 쌓인 아픔을, 슬픔을, 분노를 어디에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스스로 무너지거나 타인에게 말과 힘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지 마라. 그래서는 안 된다. 욥처럼 하라. 욥처럼 하나님께 하라. 하나님께 다 말하라. 사람에게 말하지 마라. 위로는커녕 정죄만 당한다. 욥이 그러지 않았는가. 처음에 함께 울어주고, 공감해주던 친구들이 반가워 마음에 있던 바를 토로했다가 팽 당하고 하나님을 찾는다. 그 하나님께 울고, 소리 지르고, 다 말하라. 미친놈처럼 말이다. 미친년처럼 말이다. 그대의 이름은 욥이다!
첫댓글 '착한 신자 콤플렉스'가 마음에 척 와닿습니다. ^^
반대로 나쁜 신자도 참 많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