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산 윤선도는 천문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최고의 전문가였다.
윤선도는 풍수에 능하기도 했지만 봉림대군(효종)의 사부(師父)이기도 했다.
윤선도의 풍수(風水) 학문은 효종의 능 선정에 참여하고 나서 당시 임금인 현종에게
‘산릉의’(山陵儀 1659년)라는 저술을 통해 당대의 명묘라고 일컬어지는 묘지들에 대하여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있을 정도다.
이글은 지금도 풍수(風水) 학인(學人)들의 필독 “풍수논문”이라고 한다.
윤선도가 처음 효종의 무덤자리로 추천한 곳은 지금의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의 릉인
융릉(隆陵)터 였다.
효종은 북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졌다.
왕이 된지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효종의 귀 밑에 종기가 심각했고 이에 침의(鍼醫)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아 처음에는 고름을 조금 짜내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효종은 한마디 유언도 없이 1659년 5월 승하했다.
윤선도는 이 땅을 가리키며
“신이 이 산을 살펴보았는데 용혈사수(龍穴砂水)가 지극히 좋고
아름다워 작은 흠집 하나 없습니다. 진실로 탁월한 길지로서
천리를 살펴도 그와 같은 곳은 없으며, 천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하는 자리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당파가 달랐던 서인(西人) 송시열은 이를 다음과 같이 반대 하였다.
“수원에는 언제나 6천~7천의 병마가 주둔해 있고, 지리적 여건도 3남(三南)의
요충지대에 해당되므로 만약 변란이 있게 되면 틀림없이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수백 호의 민가를 일시에 철거하고 능을 옮겨 생업을 깨뜨린다면,
그에 따른 백성들의 원한과 한탄이 국가의 화기를 해칠 것입니다.”
결국 남인(南人) 윤선도 보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송준길의 의견이 수
용돼 동구릉 건원릉 서쪽 능선으로 최초의 효종 능이 정해진다.

윤선도는 효종의 초장지 풍수상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는 혈이 맺히지 않았으며, 둘째는 조상 무덤 근처에 장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효종의 능이 동구릉에 정해질 무렵 이미 이장을
고산 윤선도는 예언하였다고 한다.
당시 윤선도는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년이 채 안가 효종능에 큰 변고가 있어 반드시 이장을 할 것이오.
나는 이 일을 보지 못하고 죽겠지만 여러분들은 보게 될 것이오.
그 때 내 말이 생각날 것이오”(고산유고 中에서)
동구릉에 효종의 릉을 조성후 장마 때가 되면 석물에 균열이 나고
릉 주위가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이때의 임금은 효종의 아들 현종
(1641~1674)이다. 현종은 재위 15년 내내 아버지 무덤 때문에 편안하지가 않았다.
거의 해마다 아버지 무덤 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현종은 죽기 일 년 전인 1673년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여주 땅으로 이장을 하게 된다.결국 윤선도가
예언한지 15년 만에 효종의 능은 지금의 여주 영릉(寧陵)으로
천장을 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는 양주땅 배봉산 흉당에 묻혔다.
정조는 고모부 박명원과 함께 전국의 명당을 탐방하고
고산 윤선도가 효종의 왕릉으로 추천한 곳을 찾아낸다.
바로 옛 수원읍치 내 화산자락의 명당 융릉(隆陵)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셨다.
"풍수지리에 있어 신의 눈(神眼) 경지에 이르렀다."
정조는 고산 윤선도를 격찬하며 무학대사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고산 윤선도는 서울에서 윤유심의 아들로 태어났다.
종가에 손이 없어 양아들로 들어가 종가인 전남 해남군 현산면 만안리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은 뒤 이곳 현산면 금쇄동에 묻혔다.
이곳은 산줄기가 태극(太極ㆍS字形)의 형태다.
그 중심에 묘가 들어서 있다. 두륜산에서 뻗어난 주룡이 병풍산과 금쇄동을 형성하고,
현무봉을 돌아 조종산(祖宗山)을 향하고 있어 이를 회룡고조형(會龍顧祖形)이라 한다.
또한 주위 산자락이 날짐승의 날개처럼 펼쳐서 혈을 품어 준다하여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또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고도 한다. 안산자락 둥근 봉우리는 알이 되고, 그게 크면 금계이며,
용이 깊은 산줄기에 숨어 있는 형국이다. 청룡과 백호가 혈의 앞까지 완전하게 감싸고 있어
밖에서는 숨어 있는 형국이니 이를 반용은산형(盤龍隱山形)이라고 해석하는 풍수가도 있다.
그 묘자리는 그의 당고모부인 이의신이 잡아놓은 것을 그가 차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의신은 원주 이씨로 풍수지리에 통달해 마산면 맹진리에 그의 어머니묘를 썼다가 그 터가
왕후장상이 나을 터라고 알려져 조정에서 체포령이 내려지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윤씨의 사위라 마산면 맹진리에 살면서도 거의 동년배인 고산 윤선도와 같이 어울려 지내기를 좋아했다.
고산 윤선도도 주역에 통달, 풍수지리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당고모부인 이의신만은 못했던 모양이다.

윤선도와 이의신이 연동서 같이 지낼 때 이의신이 밤중이면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가 한 식경이 지나면 돌아오기를 자주했다.
이를 알아차린 윤선도는 필시 이의신이 자기가 죽은 뒤 쓸 묏자리를
구하러 나가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술을 취하게 권한 뒤
곯아떨어지게 했다. 이의신이 깊이 잠이 든 것을 살핀 윤선도는
이의신이 항상 타고 다니는 당나귀를 타고 가만히 집을 빠져나와
당나귀가 가는대로 채찍을 휘둘렀다.
당나귀는 밤이면 그의 주인이 매일처럼 다녀오는 길을 따라 내달렸다.
삼산면 목신마을을 지나 병풍산 고개를 넘더니 만안리가 내려다보이는
산중틱에 이르러 이윽고 당나귀는 발을 멈추었다.
윤고산이 이곳에 내려 주위를 살펴보니 나귀똥이 많이 널려 있고
담배를 피운 흔적이 있어 지세를 살펴보았다.
그도 풍수지리에 능한 지라 그가 이미 광양의 백운산에
자기의 뫼자리를 보아둔 명당보다도
이곳이 훨씬 좋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가표(假墓)를
해놓은 후 집으로 돌아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잠을 잤다.
다음날 당고모부에게 "제가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잡아 놓았는데 좀 보아주십시오"
라고 능청을 떨었다. 이의신이 윤선도가 인도하는 곳에 이르러 보니 자기가 잡아놓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너털 웃음을 지으며 역시 주인은 따로 있었는데
괜히 헛일을 했다면서 좌향을 바로잡아 주었다고 한다.
비간은 심장을 갈라 죽었고 比干剖心
백이는 굶어 죽었네 伯夷餓死
굴원은 강물에 빠져 죽었고 屈原沈江
고산은 궁색할수록 더욱 뜻이 굳어 翁窮且益堅
죽음에 이르도록 변치 않았으니 至死不改
의를 보고 목숨 걸기는 마찬가지였네 其見義守死一也
박석무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는 2008년 경향신문 컬럼에서
"고산의 묘소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남인의 거목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의 명문(銘文)을 읽으면서 이렇게 곧은 선비가 조선 땅에서
살았던 것이 자랑스러웠다. 천하의 의인이자 직신들인 비간·백이·굴원 등과
같은 인물이었다는 고산 윤선도에 대한 평이 얼마나 지당한가"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