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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 천태산(天台山)
- 위 치 :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 높 이 : 714,7m
<단체기념사진>
Ⅰ. 개황(槪況)
1. 일 시 : 2014. 4. 3. 07:00
2. 장 소 : 천태산
3. 참석인원 : 25명
4. 등산코스 : 영국사주차장 - 삼단폭포 - 영국사일주문(매표소) - 은행나무 - A코스입구 암릉 - 삼거리 - 정상 - 삼거리 - D코스 - 남고개 - 영국사 - 매표소 - 망탑봉3층석탑 - 진주폭포 - 영국사주차장 (A코스 ⇨ D코스)
5. 교통정보
- 빠른 길 찾기 정보
▶ 검 색 지 : KBS춘천방송총국 ⇨ 영국사 ▶ 거 리 : 268km ▶ 소요시간 : 3시간22분
- 다녀온길 : 중앙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 중부고속도로 - 경부소속도로 옥천IC - 향수공원사거리 - 옥천역삼거리 - 이원삼거리 - 대흥사거리 - 영국사주차장
- 동원차량 : 강원 70바 1727 김 갑 생
6. 날씨예보상황
- 기 준 : 2014. 4. 3. 05:00기준 - 개 황 : 오전 구름 많음, 오후 흐림
▶ 비 올 확 률 : 오전 20%, 오후 30% ▶ 기 온 : 4 ~ 17℃
7. 활동상황
○ 07:00 --- KBS춘천방송총국앞 출발(음성휴게소 경유) ○ 09:31 --- ○ 09:40 --- ○ 09:42 --- ○ 10:12 --- ○ 10:13 --- ○ 10:14 --- ○ 10:17 --- ○ 10:35 --- ○ 10:28 --- ○ 10:41 --- ○ 11:04 --- ○ 11:31 --- ○ 11:53 --- ○ 12:03 --- ○ 13:09 --- ○ 14:23 --- ○ 14:43 --- ○ 15:26 --- ○ 16:10 --- ○ 17:45 ---
Ⅱ. 지역특성
<영국사경내 원경>
1. 지역유래
- 양산면은 원래 마한(馬韓)지역으로서 삼국시대에 신라가 차지하여 조비천현(助比川縣)으로 부르다가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양산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관성군(옥천)의 영현으로 상주(尙州)에 소속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 소속이 충청도로 옮겨지면서 옥천군에 편입된 후 옥천군 양내면(陽內面)과 양남면(陽南面)에 소속되다가 양내면과 양남일소면(陽南一所面), 양남이소면(陽南二所面)의 3개면에 편입되는 등의 변화를 거쳐, 1906년 지방행정구역 정리에 의해 영동군에 소속되었다. 1914년 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 령에 따라 양남일소면의 모리(毛里) 일부와 남이면의 중심동(中深洞)을 병합하여 전 양산현의 이름을 따서 양산면이라 하고 원당리, 봉곡리, 송호리, 수두리, 누교리, 가선리, 가곡리, 호탄리, 죽산리 등 9개리로 개편하여 관할하였다. 1984년 가곡리를 가곡1구, 2구, 3구로 분리하여 12개 행정리가 되었고, 1986년에는 송호리(松湖里) 일대가 관광사업법에 의해 국민관광지로 지정됨에 따라 예부터 유명한 양산가(陽山歌)와 더불어 양산팔경(陽山八景)이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 누교리는 본래 양산현 지역으로 옥천군 양내면에 속하였고, 고종 광무 10년(19駱)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누다리가 있었으므로 누다리, 누교리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덕동(道德洞)을 병합하여 누교리라 하고, 영동군 양산면에 편입 하였다. 행정리로 누교리(누교, 누다리), 영국동(寧國洞), 지력동(智力洞)과 명덕리(明德里 명덕),안내(安內 안내골, 도가실 : 道加 . 上道加,下道加), 산지촌, 구수굴 등이 있다.
2. 천태산 살펴보기
<천태산 등산안내도>
-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 인기명산 100중 39위
- 천태산은 아기자기한 암반과 암릉, 4시간정도의 산행시간으로 초심자나 가족산행지로 이상적인 산행지이다. 암릉을 타고(A코스) 바위 맛을 즐기며 올라 시원한 조망의 능선을 탄 뒤 울창한 수림의 하산길(D코스)등 산행의 재미를 즐길 수 있다. 천태산 입구 천태동천의 청아한 물소리를 들으며 진주폭포와 삼단폭포를 지나면 영국사 입구가 나온다.둘레가 6m 정도 되고 가지 하나가 땅에 뿌리를 내린 은행나무 아래에서 등산로가 갈린다. 정상을 오르는 길은 세 코스이다. 오른쪽 능선 코스를 타고 오르는 길은 천태산 정상으로 가는 가장 가깝고 재미있는 길이다. 경사가 70도 정도 되는 바위코스도 있어 짜릿하다.영국사에서 1시간30분 정도 오르면 정상에 도착한다. 서쪽으로 서대산이, 남쪽으로는 성주산과 그 너머 덕유산이 보인다. 충북 영동에 있지만 고속도로와 국도로 바로 연결돼 한나절 여행코스로 손색이 없다. 영국사 일대의 단풍은 영국사 주차장에서 산사로 이어지는 1㎞남짓한 오솔길에서 절정을 이룬다. 멋들어진 3단폭포와 함께 개암나무, 때죽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고로쇠나무, 검팽나무 등으로 에워싸인 울창한 단풍 숲이 이어진다. 특히 고개를 하나 넘으면 나타나는 수령 600년된 은행나무는 가을이면 샛노랗게 물이 들며 고즈넉한 절집 분위기를 한층 화려하게 가꿔 놓는다. 영국사는 분명치는 않으나 신라문무왕 때 세워졌다는 설이 있다. 보물 532호로 지정된 보리수 아래 이끼 낀 3층 석탑을 비롯하여 원각국사비(보물 534호) 부도(보물 532호) 망탑봉3층석탑(보물536호) 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절집을 대숲이 둘러싸고 있다.
인기명산 100중 39위
- 등산로가 잘 다듬어져 있어 아기자기한 암릉을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암릉산행으로 인기 있다. 3-4월 봄 산행지 선정이 마땅치 않을 때 많이 찾지만 사계절 두루 즐길 수 있는 산행지이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 충북의 설악산으로 불려질 만큼 경관이 아름다운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창건한 영국사와 수령이 약 500년 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 3층석탑(보물 제533호), 원각국사비(보물 제534호) 등이 유명하다
<천태산 등산지도>
- 천태산의 등산코스는 모두 4코스로 이곳 양산면에서 약방을 경영하는 배상우씨가 다듬어 놓았다고 한다. 코스 구간마다 그 흔적이 역역하다. 천태산은 우리 모두산악회에서 2008. 11. 27 다녀온 산이다. 5년4개월여 만에 다시 찾은 셈이다. 본인으로서는 모두산악회 입문 첫 해에 다녀온 산 중 의미가 깊었던 산으로 기억에 남는 산이다. 그 당시 기억이 가물가물하였지만 비가 내렸던 사실과 A코스 중반쯤 70여m 암벽에 깔린 로프를 힘겹게 올랐던 기억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대부분 우회코스로 올라가셨지만 당시 산악대장님이셨던 박 복 록님, 오 향 기(산바다)님, 본인만이 고집을 부리고 암벽을 탔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 인터넷에 천태산을 치고 들어가면 경남 밀양 금오산 천태산(730), 경남 밀양 비석봉 천태산, 충북 영동 양산 천태산(715), 전남 화순 도암 춘양 천태산 개천산(497), 경남 밀양 삼랑진 천태산(630.9), 전남 화순 도암면 화학산 천태산(613.8) 등이 검색된다. 이중 접근성이 가장 좋은 산이 오늘 일정에 잡힌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천태산이다. 그래도 춘천에서 약 3시간30여분가량 소요된다. 요즘은 버스운행시간 3시간을 넘기면 지루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니다. 그래서 산행지 선정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영동의 천태산을 제외한 나머지 산들 대부분은 경남, 전남지역에 분포되어있기 때문에 접근성면에서 부담스러움을 감수해야만 했기 때문에 산행지 선정에서 멀어만 갔다.
- 천태산을 오르는 길은 영국사에서 정면으로 산을 바라보아 오른쪽부터 A, B, C, D 4개의 코스가 있다. 이 중 A코스와 D코스를 연계하여 일정을 잡는 것이 산행환경이나 소요제원면에서가장 이상적이다. B코스의 경우 미정비구간이 있고, C코스는 2,8km로서 다소 짧은 편이기 때문이다.
Ⅲ. 산길여정
<정상 단체기념 사진>
- 요즘 급변하는 날씨 변화에 개인이나 기관단체의 행사 일정이 오락가락하면서 헷갈린다. 연이은 고온현상에 무려 10여일 이상 개화시기가 앞당겨지는 바람에 갑자기 온통 꽃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평년기온에 맞춰져 있던 각종 꽃 축제행사가 시기를 앞당겨 치러지기 이수이었다. 남쪽지방부터 기온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차츰차츰 올라오던 꽃 소식이 전국 동시다발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올 3월 서울의 평균기온이 106년 만에 가장 높았다고 한다. 기상청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의 평균기온은 평년(5.7도)보다 2.2도 높은 7.9도로 1908년 이래 역대 3월 중 최고치라고 밝혔다. 지난 2일 서울을 비롯한 춘천의 낮 최고기온이 영상 20도를 오르내리는 등 전국적으로 한낮에는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이상 고온 현상이 이어졌다. 오늘 춘천의 날씨는 오후 늦은 시간대에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하였다. 그러나 충북 영동지역 날씨예보는 오전 구름 많고, 오후 흐리겠다고 예보하였다. 예상기온도 4 ~ 17℃분포 보였기 때문에 좋은 산행환경을 예고할 수 있었다.
- 오늘은 청명을 이틀 앞둔 시점의 정기산행일 이었다. 세시풍속 중의 하나인 청명에 대해 공부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청명은 음력 3월에 드는 24절기의 다섯 번째 절기이다. 청명(淸明)이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청명은 음력으로는 3월에, 양력으로는 4월 5~6일 무렵에 든다. 태양의 황경(黃經)이 15도에 있을 때이다. 이날은 한식(寒食) 하루 전날이거나 같은 날일 수 있으며, 춘분(春分)과 곡우(穀雨) 사이에 있다. 중국에서는 청명 15일 동안을 5일씩 3후(候)로 나누어 초후(初候)에는 오동나무의 꽃이 피기 시작하고, 중후(中候)에는 들쥐 대신 종달새가 나타나며, 말후(末候)에는 무지개가 처음으로 보인다고 하였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청명조(淸明條)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치며, 임금은 이 불을 정승과 판서를 비롯한 문무백관 그리고 3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사화(賜火)’라 한다. 수령들은 한식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이라고 한다.『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는 불을 나누어주는 일을 한식조(寒食條)에 기록하고, 청명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다. 청명과 한식은 흔히 같은 날이 되기 때문에 뒤섞이는 경우가 많아 오늘날 민간에서도 뚜렷한 구분 없이 전해지고 있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 작업이 된다. 청명이 되면 비로소 봄밭갈이를 한다. 청명은 농사력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하나로 날씨와 관련된 속신이 많다. 청명이나 한식에 날씨가 좋으면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좋지 않으면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점친다. 바닷가에서는 청명과 한식에 날씨가 좋으면 어종이 많아져서 어획량이 증가한다고 하여 날씨가 좋기를 기대한다. 반면에 이날 바람이 불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파도가 세게 치면 물고기가 흔하고, 날씨가 맑아도 물밑에서 파도가 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경남 사천에서는 청명날의 날씨가 좀 어두워야 그 해 농작물(農作物)에 풍년(豊年)이 들고, 너무 맑으면 농사(農事)에 시원치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청명에 나무를 심는데, 특히 ‘내 나무’라 하여 아이가 혼인할 때 농을 만들어줄 재목감으로 나무를 심었다. 이날 성묘(省墓)를 가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청명이나 한식은 지상에 있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 날이어서 특별히 택일(擇日)을 하지 않고도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移葬)을 해도 좋다고 믿는다. 또 이날은 손이 없기 때문에 묘자리 고치기, 비석 세우기, 집 고치기를 비롯해 아무 일이나 해도 좋다고 한다.
- 또한 이날은 식목일이다. 식목일의 제정유래는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로부터 몰아내고, 삼국통일의 성업을 완수한 677년(문무왕 17) 2월 25일에 해당되는 날이며, 또한 조선 성종이 세자·문무백관과 함께 동대문밖의 선농단에 나아가 몸소 제를 지낸 뒤 적전(籍田)을 친경(親耕)한 날인 1343년(성종 24) 3월 10일에 해당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이 날은 통일성업을 완수하고, 왕이 친경의 성전(盛典)을 거행한 민족사와 농림사상에 매우 뜻있는 날일 뿐만 아니라, 계절적으로 청명(淸明)을 전후하여 나무 심기에 좋은 시기이므로, 1949년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이 날을 식목일로 지정하였다. 그 뒤 1960년에 식목일을 공휴일에서 폐지하고, 3월 15일을 ‘사방(砂防)의 날’로 대체 지정하였으며, 1961년에 식목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되어 공휴일로 부활되었다. 1982년에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나 2006년부터 다시 공휴일에서 폐지되었다.
- 어제 오후 내내 겨우 20명 선 초반에서 맴돌던 목요산행방 신청인원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바람에 애를 태웠다. 오늘 천태산 정기산행은 춘천에서 거리가 멀다거나, 산행환경이 나빠서는 결코 아닌 듯 싶었다. 오로지 비 소식에 미리 질겁한 분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고 위안을 삼았다.
- 버스 내비게이션에 오늘 등산기점인 영국사를 검색지로 입력하고 도착예정시간을 확인해 보니 무려 4시간 정도 소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1:00무렵이 도착예정시간이었던 것이다. 빠른 길 찾기 정보에 따라 소요시간을 3시간20분대로 알고 있었는데 상당시간 격차를 보이는 바람에 한동안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출발시간을 너무 늦게 잡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서면서부터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지는 바람에 혹시나 충북 영동군 양산면일원 날씨예보가 빗나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머리에서 쥐가 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빗방울이 멈춰주는 바람에 안도의 한숨을 삼켰지만 춘천을 출발하여 원창고개를 넘으면서 버스차장을 때리는 빗방울 때문에 또 다시 우려의 분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나 춘천권을 벗어나면서부터 기상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 지금까지 모든 염려사항은 영국사주차장에 도착하면서 뚝 이었다. 도착예정시간대에 무사히 도착하였고, 날씨 역시 오늘 날씨가 어때서? 산행하기 딱 좋은 날씨인데 이었다. 날씨예보가 딱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비 소식 때문에 참가신청을 미루신 분들의 섣부른 판단이 무색할 정도이었다. 넓은 공영주차장 한편 천태산문화재탐방 및 등산안내도 앞에는 고양에서 오신 단체산객들이 먼저 선점하고 입산 준비 중이었다. 곧이어 일산에서 오신 단체산객들이 도착하면서 장내 분위기가 어수선해 졌다. 일정안내와 더불어 오늘 운영시간을 4시간30분으로 여유 있게 잡고 15:00까지 현 위치 하산을 예고하고 서둘러 들머리에 들었다.
<천태산계곡 표석>
- 10:43 천태산계곡표석 경유
- 주차장에서 영국사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굳었던 몸을 자연스럽게 풀기에 안성맞춤이다. 들머리에 진입하자마자 급사면으로 시작되는 산행에서는 현지 적응하는데 애를 먹어야했지만 오늘은 첫 걸음부터 평지나 다름없는 완만한 오름길에서 세월아 네월아 태평성세(太平聖歲)를 누릴 조짐이 보였다. 오름 구간 내내 계곡과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수려한 천태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곡이 깊지 않아 평소에는 수량이 그리 많지 않은 계곡이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눈에 들어오는 바위들이 생김새가 범상치가 않았다. 주차장에서 8분정도 올라가면서 진행방향 왼쪽에 있는 천태산계곡표석이 일행 분들을 반겼다. 이 표석이 오늘 첫 번째 포토 존으로 기능하였다. 표석에는 “기암절벽과 태고의 자연숲이 심산유곡의 맑은물과 장엄한 산세를 이루고 주위에는 서기668년 문무왕 때 세운 영국사와 천연기념물 제223호인 은행나무가 있으며 원각국사비, 3층석탑 등 많은 보물과 함께 자연경광과 동.식물 서식환경이 우수하여 충북의 자연환경명소로 지정된 곳입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표석은 1001. 12. 14 충청북도지사와 영동군수가 함께 세웠다.
<천태동천(天台洞天)>
- 천태산계곡 입구에는 천태동천(天台洞天)이라 음각된 암반이 있다. 동천(洞天)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간다. 동천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산과 내로 둘러싸인,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좋은 곳이라고 풀이한다. 우리 땅 한반도가 금수강산(錦繡江山)이나 화려강산(花麗江山)으로 표현을 할 만큼 경치가 빼어나고 아름다운 곳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동천(洞天)의 의미는 통천(通天)의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하늘과 통한다는 것은 신선이 많은 나라라 해서 붙여진 것만이 아니라 천손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단군조선에서 선도를 수련했으나 호위의 성격이 강하였던 천지화랑이 삼국으로 계승되어 고구려의 조의선인(선배), 백제의 무절, 신라의 화랑 제도를 통해 인재양성에 기여하였으며 그들이 수련하던 곳이 동천(洞天)이라 불린 곳이 많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숭유의 정책으로 선도와 불도가 많은 압박을 받았으며, 그로 인하여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선인과 수행자들이 공부를 하던 심산유곡의 사는 곳을 동천이라 불렀으며, 실제로 기거하거나 수행하였던 동굴(토굴)에 ○○동천이라 음각을 하였다. 다만 조선의 선비들이 자신들의 풍류를 자랑 삼아 경치 좋은 폭포나 너럭바위가 있는 곳에, 혹은 대체로 경치가 좋은 승지이거나 명산의 사찰 입구에 ○○동천이라 이름을 지어준 곳이 많아 도사나 신선이 사는 곳의 동천과 같이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 널리 알려진 주요 동천으로 충북 천태산 영국사 천태동천(天台洞天), 하동 쌍계사 화개동천(花開洞天), 미륵산 사자사 사자동천(獅子洞天), 강화도 전등사 함허동천(函虛洞天), 영축산 통도사 자장암 자장동천(慈藏洞天), 치악산 구룡사 구룡동천(龜龍洞天)이 있다. 그밖에 영남 지역의 3대 동천으로 칠곡 북삼읍 대실마을 선봉사 금오동천(金烏洞天), 울산, 양산에 걸쳐 있는 정족산 운흥사 계곡에 자리한 운흥동천(雲興洞天), 가야산 합천 해인사의 홍류동천(紅流洞天)이 있다. 기장군 철마면 거문사와 정관면 문래봉 사이에 있는 계곡도 홍류동천 안동지방 마고동천(麻姑洞天), 운안동천(雲安洞天), 도화동천(桃花洞天), 석류동천(石榴洞天) 용암동천(龍巖洞天), 봉강동천(鳳岡洞天) 경주 남산 와룡암 와룡동천(臥龍洞天),울산 발리동천(鉢里洞天)이 있으며, 지리산 산청 웅석봉 백운동 계곡 용문동천(龍門洞天)과 김천 수도산 청암사계곡 불령동천(佛靈洞天)이 있다. 서울 지역의 수락동천(水落洞天) 서울 수락산 석림사 계곡, 금류동천(金流洞天) 서울 청학동 수락산 금류폭포 청계동천(靑溪洞天) 서울 세검정일대 무계정사 근처바위 백석동천(白石洞天) 서울 북악산 부암동이 있다. 호남 지역은 전주시 남노송동 일대 적취정 골짜기 간납대(諫納臺) 동천, 광주 어등산 광산구 3대 동천 대명동천, 석문동천, 용진동천이 있으며, 전남 장흥 천관산 6개 동천(소재 불분명)이 있으며, 진안 마이산 마이동천(馬耳洞天),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보길도 동천석실이 있다. 충청지역에는태안 백화산 태을동천(太乙洞天) 속리산 뒷자락 청화산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에 있는 우복동 바위에도 양사언의 것이 라기도 하고, 182세까지 살았다는 전설적인 도인 개운조사가 경지에 올라 맨주먹으로 새긴 것이라고도 전하는 愚山洞天과 속리산 앞자락 쌍용계곡과 선유동 계곡을 동천으로 표현한 곳도 있다. 강원지역은 동해 무릉계곡 바위에도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院 中坮泉石 頭陀洞天), 강원도 인제 내린천 상류 미산계곡 미산동천(美山洞天), 비조불통계곡 강릉 백운사의 백운동천(白雲洞天) 그 외로 풍류의 잔취가 남아 있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 함양 용유담(龍遊潭),함양 서하면 화림동 거연정 일원 밀양 월연정 일원은 밀양강과 동천이 합류되는 지점, 강변 풍경과 보름달 원주경이 매우 아름답다.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쳤던 안의삼동인 남계천 화림동(花林洞)의 농월정, 지우천 수진동(수眞洞)의 용추사(함양 심진동 용추폭포)위천 원악동(遠樂洞)의 수승대(거창)가 있다.
<삼단폭포(용추폭포)>
- 10:47 삼단폭포(용추폭포) 경유
- '天台洞天(천태동천)'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바위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 지류를 따라 올라가는 길은 진주폭포를 경유하여 망탑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여기서 영국사 진입로로 곧바로 올라가면 길 왼쪽에 삼신바위가 있다. 굴곡진 바위의 옆모습이 영락없이 삼신할머니의 얼굴이다. 삼신바위를 지나면서 진행방향 왼쪽으로 시원한 폭포가 나온다. 이 폭포가 바로 삼단폭포이다. 예전에는 용추폭포라고 불렸다고 한다. 삼단폭포는 이름 그대로 삼단을 이뤄 떨어지는 폭포이기 때문에 단폭에 비하여 볼거리 면에서 선호도가 높다. 수석취미분야에서도 삼단폭포가 희귀성이 높기 때문에 보다 더 대우를 받고 있다. 갈수기이기 때문에 폭포의 웅장한 맛은 볼 수 없었지만 한여름 장마철에는 삼단폭포라는 이름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음이 있을 듯 싶었다. 영국사 경내로 진입하면서 부담 없이 눈요기를 한 셈이다. 폭포 상단 시작지점에는 망탑봉3층석탑으로 이어지는 목재교량이 눈의 가시로 기능한다. 편의성면에서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있겠지만 자연경관보호차원에서는 아니지 싶었다.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
- 11:14 은행나무 경유
- 천태산영국사일주문을 지나면서 곧바로 매표소가 나왔다. 여기서 일인당 1,000원씩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한다. 들머리에 들기 전 주차장에서 현지 주민으로부터 입장료 징수에 관한 정보를 들은바 있다. 그 분 왈 입장료를 내지 말라는 입장이었다. 입장료를 내지 않고 통과하기는 하였지만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본인은 경로우대를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었지만 왠지 변소 갔다 밑 안 닦고 그냥 나온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의견이 대립되면서 신경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곧이어 영국사 경내에 접어들면서 은행나무를 경유하였다.
- 영국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223호로 지정되었다. 보는 순간 용문사 은행나무가 기억에 떠오르면서 비교되었다. 수세는 유사하였지만 수형에서 우위를 보였다. 이 은행나무 수령(樹齡)은 1000년을 넘었다고 한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31.4m, 가슴높이의 둘레가 11.54m이고, 가지는 동서 21.2m, 남북 26.7m로 퍼져있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무과의 낙엽교목(落葉喬木)이며 높이 61m, 지름이 4m 이상 자란다. 잎은 호생(互生)하고, 부채형 혹은 도삼각형(倒三角形)이며 엽맥(葉脈)이 2개씩 갈라진다. 나무는 불에 잘 타지 않으며 가을철 황색(黃色) 단풍이 들고 열매는 식용(食用) 또는 다용(茶用)으로 하며 잎도 약용으로 하고 있다. 벌레의 해가 없고 목재(木材)는 귀중한 가구재로 한다.
- 천태산 모든 등산코스는 영국사 경내를 경유해야만 한다. 그래서 항상 등산객과 사찰측 사이에 문화재관람료 징수와 관련하여 마찰이 빈번하다고 한다. 은행나무 지점에서 영국사 경내로 접어들지 않고 진행방향 오른쪽 포장길을 3 ~ 4분 정도 올라가면 공터에 이른다. 이 지점이 A코스 입구이다. 이 지점이 사실상 들머리인 셈이다. 여기에 간이화장실 0,2동이 있어 편의를 제공한다. 진행방향 왼쪽으로 ‘A코스 입구·정상 1,370m’를 안내하는 스테인리스로 만든 팻말이 있다. 은행나무 밑에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본인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후미대열에 머물게 되었다.
- 탐방로는 많은 등산객들이 발길 한 흔적으로 진로선도의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S코스의 사면 길에는 철도 침목을 잘라 계단을 정교하게 설치한 모습에서 개척하신 분의 지극정성이 엿보였다. 능선 안부에 이르면서 이 코스의 개척자인 배상우씨가 만들어 놓은 등산로 안내도 함에서 안내도 한 장을 꺼냈다. 대충 살펴보니 오늘 아침 버스에서 배부한 등산지도와 동일한 등산지도 이었다. 공교롭게도 안내준비를 하면서 이분께서 제작하여 인터넷에 탑재한 등산지도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 곧이어 로프가 설치된 완경사 30여m 암릉길이 나타났다. 이것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총무님의 암릉 타기 실력을 확인해 볼 요량으로 총무님의 행적을 확인해 본즉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암릉 직전까지 동행하시던 총무님께서는 컨디션 난조로 하살길에 오르셨다는 전갈이었다. 이 암릉을 통과하고 나면 숲길로 이어진다. 좌.우로 진달래가 만개하여 길손을 맞이하였다. 예쁜 포즈로 기념을 남기는 여유도 잠시뿐이었다. 곧이어 마의 암릉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암릉 왼쪽으로 노약자 우회로가 나 있는 이 암릉 구간을 지나고 나면 비로소 천태산 최난이도를 자랑하는 암릉이 기다리고 있다.
- 75m 암릉길 직전 오른쪽으로 눈길을 끄는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상단 모퉁이에는 암벽코스 정상 620m, 안전코스 정상 720m임을 동시에 안내하고 있다. 이곳은 대단해 위험한 75m 암벽등산로입니다. 급경사이므로 부녀자, 초보자는 우측 안전등산로를 이용하시기 바라며 암벽등산시는 안전시설물 “로프, 철주”를 확인하고 안전사고 예방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위험” 로프는 1명씩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영동군수의 경고문이 있다. 우리 일행 분들도 예외일수는 없었다. 자신이 없으신 분들은 무리하지 마시고 안전등산로로 우회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후미팀 9명 모두 암벽코스를 선택하는 용기를 보였다. 모두산악회 여전사님들의 용기있는 선택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 75m에 이르는 암벽코스는 시작점 약 20m까지가 급사면을 이뤄 까다롭다. 굵은 와이어로프가 함께 묶여 있어 안전에는 이상 없다. 로프 중간중간에는 잡기 좋게 매듭이 지어져 있어 설치하신 분의 꼼꼼함이 돋보였다. 또한 착지가 어려운 곳은 홈을 파 놓아 편의성이 엿보였다. 75m 암릉길은 세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구간마다 반드시 한 사람씩 올라가는 것이 안전하다. 암릉길이 끝난 후 절벽 오른쪽 옆으로 돌면 안전등산로와 만난다. 이후 다시 10여m 길이의 로프가 있는 암릉길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곳은 부담 없이 통과할 수 있다. 이미 난이도 높은 구간에서 현지 적응훈련이 끝난 후이기 때문이다.
- 로프가 설치된 암릉길이 모두 끝난 후에는 암반 지대로 이어진다. 이곳은 조망이 좋아서 쉼터로 기능하기도 한다. 오름구간 내내 영국사 경내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이곳에서 천태산 주능선까지는 완경사로 이어진다. 이 지점에서 앞서 올라가셨던 회장님 일행 분들과 합류하였다. 마지막 깔닥을 오르고 나면 능선안부에 이른다. 이 지점이 정상과 D코스 능선 하산길 분기점이다. 분기점 정상 안부에 정상 0,2km, 남고개 1,6km, C. D코스하산로, A코스 하산로 안내판이 있다. 여기서 정상은 오른쪽으로 능선길을 따라 가야 한다. 정상 100m 지점을 지나면서 정상에서 하산하시는 일행 분들과 교행하였다. 정상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발길을 되돌리는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해 주셨다.
<천태산정상석>
- 12:27 정상도착
- 정상에서의 조망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바위위에 우뚝 솟은 정상석이 기품이 있었다. 충남 금산군 연합산악회에서 세웠다. 전면에는 한자로 뒷면에는 한글로 天台山이 음각되었다. 하단부에 해발 714,7m와 충남 금산군 연합산악회가 새겨져있지만 왠지 도색되어 있었다. 그러나 뒷면은 깨끗하였다.
- 정상안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등산로개설자가 스테인리스로 제작하여 설치한 방문록 설치함이다. 본인을 비롯한 몇 몇 분들이 기록을 나겼다. 그 외 삼각점 1기, 한 창 쌓여가는 돌탑 1기와 주차장하산로, 영국사, 대성산종주코스, 화원동, 화원동사방댐, 군북산벗꽃축제장 등을 안내하는 이정표 2기가 있다.
- 방문록 설치함에 부착된 물같이 바람같이 제하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란 글귀가 아직도 기억에 아련히 남는다.
- 정상 단체기념을 남긴 후 하산길을 서둘렀다. 올라오는 길에 자리 잡아 놓은 분기점 안부 밥자리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점심식사 후 분기점에서 시작된 하산길 부터는 선발팀 맨 앞에 자리 잡았다. 하산길은 흙길과 암릉 돌길이 교차하였다. 능선안부에서 흙길로 시작하여 내리구간 암릉 바위 길은 헬기장과 C코스 하산길 분기점을 전.후하여 매력포인트로 작용한다. 시원한 조망은 기본이고 일부 암릉구간은 오름구간 암벽코스와 비교되기도 한다. 유연하면서도 아찔함을 맛 볼 수 있는 환상코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지점과 더불어 전망석이란 명패가 붙은 암반이 하산구간 제일의 포토 존으로 기능한다. 암릉길은 남고개 직전 영국사1km, 주차장 2km를 안내하는 안내판설치지점에 이르러 다시 흙길로 이어졌다. 여기서 완만한 흙길로 0,1km정도 오르면 남고개 마루에 이른다.
<남고개>
- 13:51 남고개 경유
- 남고개 정상에는 영국사 0,9km, 주차장하산로 2,1km, D코스 등산로 1,8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고개의 유래나 고개에 얽힌 얘기를 찾아보려하였지만 관련 자료를 검색할 수 없었다. 이 고개에서 내려오면서 S구간 오른쪽으로 걸린 산악회 리본행렬이 장관이었다. 산악회리본 전시장을 방불케 하였다. 약50여m를 가득 메운 각종 리본 행렬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 중 단연 으뜸이었다. 그 만큼 이 산을 찾는 산객이 많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영국사(寧國寺)대웅전>
- 14:05 영국사 경내 경유
- 문화재관람료도 내지 아니하고 경내를 둘러보자니 쑥스럽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기왕 내친 김에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 부속사 이모저모를 대충 눈 팅 하고 경내를 빠져나왔다. 영국사는 양산팔경 중 제1경이다. 천태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말엽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빌어 국난을 극복해 절 이름도 영국사라 고쳤다.
- 영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고려 문종 때 원각국사(圓覺國師)가 창건한 절로 당시에는 국청사(國淸寺)라고 했다. 그 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원(伊院) 마니산성(馬尼山城)에 머물 때 이 절에 와서 기도를 드린 뒤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가 평온하게 되었다 해서 영국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조선 태조 때 세사(洗師)국사가 영국사로 바꾸었다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현재 대웅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1호)과 요사채만 남아 있고, 중요문화재로는 부도(보물 제532호)· 3층석탑(보물 제533호)· 원각국사비(보물 제534호)· 망탑봉3층석탑(보물 제535호) 등이 있다. 이밖에 절 입구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 대웅전은 주존불로 석가여래좌상을 모신 불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건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1호. 3출목(三出目) 7포작(七包作) 집이다. 대웅전은 목조의 와즙(瓦葺 : 기와잇기)이고 천태산(天台山)을 배경으로 해서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되어 있다. 130㎝ 높이의 석축 위에 여러 차례 불타고 허물어져서 중창한 나머지, 신라·고려시대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조선 중기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대웅전 안은 정면에 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중앙이 석가여래좌상이고, 좌우 양쪽이 관음보살좌상이다. 삼존불 뒷벽에는 후불탱화(後佛幀畫)가 걸려 있다. 서쪽 벽에는 신장탱화(神將幀畫), 동쪽 벽에는 삼장탱화(三壯幀畫), 뒤쪽에는 칠성(七星)·독성(獨聖)·상단정신조성탱화(上壇精神造成幀畫)가 걸려 있고, 동쪽 앞편에 동종(銅鐘)이 놓여 있다. 이 건물은 1980년 해체, 복원되었다.
<영국사(寧國寺)와 공민왕(恭懲王)의 전설 및 설화>
- 양산면 서북쪽 지점에 영국사(寧國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는데 이 절에는 고려조의 공민왕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서기 공민왕 10년(1361) 11월 원(元)나라의 한산동(韓山童)을 두목으로 하여 일어났던 흥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공민왕은 노국(魯國)공주와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의 길을 떠났다. 남으로 길을 재촉하던 공민왕은 영동 양산면 지금의 누교리(樓橋里)에 머물게 되었다. 영국사의 그 당시 이름은 극칭사(國譯줬곶이기 때문에 왕이 부처넘 앞에 나가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의 평안을 빌려고 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내린 폭우로 도무지 내를 건너갈 수가 없었다. 개경(開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가슴 아픈 일들뿐이었다. 성 안의 부녀자와 노인과 어린이들은 성을 빠져 나갔다지만 그나마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홍건적의 무리에 짓밟혀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킨다는 소식 이 었다. 공민왕이 이곳 양산이 아니라 이천(利川)을 지날 때 이미 흥건적은 개경(開京)을 함락했고 그 뒤 수개월 동안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왕궁을 불사르는 등 잔학한 행동이 그칠 사이가 없이 일어났다고 한다. 때마침 개울 건너 천태산(天含山) 쪽에서종소리가 울려 왔다. 공민왕은 깜짝 놀라 좌우를 돌아다보았다. "이 부근에 절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종소리가 아름다운 절인 줄은 몰랐구나. "왕비와 왕자 그리고 대신들은 하나같이 공민왕의 눈치만을 살됐다. 대신 한 사람이 설명하기를, "저 절은 일찍이 신라 때 원각국사(圓覺國師)께서 세운 절로써 처음에는 만월사(滿月寺)라 하였다가 문종대왕(文宗大王) 당시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주지로 온 뒤 국청사(國淸寺)라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옵니다. " 하고 아뢰었다. 공민왕은 눈이 번적 꼭었다 대각극사 의천(義天)은 문종(文宗)의 아들로 천태종(天法宗)을 일으킨 분이 아닌가. 의천(義天」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저 국청사에 올라 국태민안(나라와 백성이 평안함)을 빌어 보고 싶었다. 공민왕의 뜻을 알아 채린 대신들은 산에 올라 칡넝쿨을 걷어 오라 일했다. 그들은 수행원과 인근 마을 주민들이 걷어온 칡넝쿨로 '칡넝쿨다리'를 가설하기 시작하였다. 칡넝쿨을 새끼줄처럼 꼬아서 이를테면 구름다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완성된 다리를 짧고 국청사 부처님 앞에 나아갔다. 왕비, 왕자 그리고 대신을 데리고 공민왕은 국청사에 올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었다. '그래서 국청사는 공민왕이 다녀간 뒤 왕이 나라 안 백성들의 편안함을 빌었다하여 편안할 영(寧)자 나라 국(國)자를 써서 영국사(寧國寺)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으며, 공민왕이 칡넝쿨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간 마을을 누교리(樓橋里)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국사망탑봉삼층석탑(寧國寺 望塔峰 三層石塔)>
- 14:17 망탑봉삼층석탑 경유
- 이 코스는 들머리에 들기 전 일정안내시간을 통하여 경유할 것을 권고한바 있다. 오늘 기본코스에서 완전히 벗어난 지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코스에서 3층석탑과 더불어 기묘한 형상을 한 흔들바위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의 보너스 코스로 염두에 뒀던 코스이었다. 망탑봉삼층석탑은 영국사에서 500여m 앞에 있다.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은 보물 제535호로 지정되었다. 영국사 동남쪽, 경내를 완전히 벗어나 망탑봉이란 작은 봉우리 꼭대기에 있는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은 좁지 않은 망탑봉 암릉 위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제법 너른 터다. 고래 얼굴의 커다란 바위를 하층 기단부 삼아, 영국사에 오르내리는 길목을 지키는 등대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이 탑 역시 높이 3m 정도의 여리고 가는, 그리고 삼단 몸돌이 완전히 사다리꼴을 갖춘 작은 석탑이다. 이렇게 원시적인 형상의 사다리꼴 석탑으로 만들 생각은 누가했을까? 가느다란 몸매에 굳센 기운과 당당함은 없어도 그 너른 공간을 호위하는데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 3층석탑은 영국사 매표소에서 진입한다. 3층석탑을 경유하여 진주폭포를 거쳐 하산할 수 있다. 매표소에서 동쪽으로 약 250m 되는 곳에 속칭 망탑봉이라는 작은 봉우리가 있고, 이 정상에 삼층석탑 1기가 건립되어 있다. 망탑봉이라는 이름은 사찰이나 동네에서 모두 똑같이 부르고 있는데 언제부터 호칭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봉우리에 석탑이 건립된 뒤부터 탑을 바라본다는 연유에서 붙여진 것 같다. 거대한 화강암반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암석 상면을 평평히 다듬고 자연암을 그대로 이용하여 기단을 조성하였다. 즉, 암반 상면 중앙에 돌출된 형태의 네모난 기단부가 마련되었는데, 다듬은 암상(巖床)에 2단의 높직한 각형받침을 각출(刻出)하고 그 위에 면석을 조성하였다. 단층기단으로서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를 각출하고 중앙의 1탱주(撑柱)로 양쪽으로 나눈 구간에 안상(眼象) 1구씩을 조각한 통형(通型)으로, 상단 둘레에 갑석의 표현이 뚜렷하며 상면에는 아무런 받침이 없고 그대로 탑신이 놓였다. 탑신은 신(身)·개(蓋)가 별석(別石)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층의 옥신석(屋身石)에는 양 우주가 정연히 각출되었고, 특히 층마다 상부가 하단부보다 약간씩 좁혀져서 주목된다. 초층옥신 하단에 1단의 각형굄이 조출되었는데, 이것은 기단부 갑석 상면에 탑신받침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신으로 새긴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초층옥신 각 면에는 중심 하부에 동일한 규격으로 문비(門扉)가 돋을새김되었는데 그 형태는 일반적 양식이 아니고 상·하부의 양단이 돌출된 액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면은 문양이 없어서 흥미롭다. 초층옥개석은 옥개받침이 5단인데 하부 3단은 별석으로 조성하였다. 추녀가 직선이고 낙수면(落水面)이 평박한 편이며, 전각에 반전(反轉)이 있으나 풍경공(風磬孔)은 없다. 정면(頂面)에는 각형 1단의 옥신받침이 각출되었는데, 그 위의 2층 옥신 하단에 새겨진 1단의 각형받침과 겹쳐져 마치 2단의 받침을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2층옥개석은 받침이 4단이며 정면에 옥신굄 1단이 각형으로 조출되었고, 그 위의 3층옥신에는 양 우주 외에 아무런 조식이 없다. 3층옥개석은 옥개받침이 4단이고 정면에 각형(角形)의 노반(露盤)받침이 1단 각출되었으며, 그 상면 중앙에는 지름 4.5㎝, 깊이 3㎝의 둥근 찰주공(擦柱孔)이 만들어져 있다. 현재 노반석은 결실되고, 다만 1석으로 조성된 연봉형의 보주(寶珠)가 놓여 있을 뿐이다. 각 층 옥개석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네 귀퉁이의 전각에도 반전이 뚜렷하여 경쾌하다. 한편, 각 옥신의 상부가 좁혀졌으므로 석탑 전체의 형태는 안정감이 있으며 더욱 단정하고 아름답다고 하겠다. 그러나 석탑의 조성양식으로는 정형(定型)의 규범에서 약간씩 벗어남을 보이고 있다. 곧 단층기단인 것과 그 갑석의 수법이 약화된 점, 그리고 옥개받침과 옥신굄의 각출이 정연하지 않으며 각 옥신석의 비율이 같지 않은 것 등이다.
- 영국사와 망탑봉 사이에는 능선 하나가 가로 막고 있어 영국사에서는 직접 조망할 수 없다. 망탑봉 정상은 바위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풍경 좋은 전망점이 된다. 탑은 반석으로 이루어진 망탑봉 정상의 한쪽 끝에 솟은 높이 3m 정도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바위를 지반으로 삼고 그 상부에 기단을 조출한 후 별도의 석재로 석탑을 세웠다. 이처럼 천연의 바위 위에 세운 석탑은 9세기경에 조영된 경주 남산의 용장사곡 삼층석탑에서 시원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신라 하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이러한 형식의 탑이 조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것이 대부분으로 풍수도참설과 연관하여 불력(佛力)에 의지한 산천비보(山川裨補) 사상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된다. 천연의 바위와 그 바위에 새긴 기단을 제외하면 그 상부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신라계의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따르고 있다. 바위 위에 조출한 기단은 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그 하부에 두 단의 쇠시리를 두고 있다. 또한 이 방형기단은 상면을 하면에 비해 줄임으로서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한편 풍화가 심해 확실하지는 않으나 두 단의 쇠시리 위에는 기둥형과 안상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조출된 기단부를 포함한 현존 탑의 높이는 약 2.8m이다. 3층의 탑신과 옥개는 각각 1개씩의 석재를 사용해 만들었다. 석재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이다. 탑신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높이와 폭을 줄였는데, 2층 탑신은 1층에 비해 높이를, 3층 탑신은 2층에 비해 폭을 많이 줄이고 있음이 특징이다. 높은 바위 위에 세웠기 때문에 탑은 하늘을 배경으로 올려다보게 되는 모습인데, 이에 따른 착시현상을 고려한 체감수법이라 생각된다. 1층 탑신은 하부에 비해 상부의 폭을 많이 줄인 민흘림 수법을 보이고 있음이 특징이다. 2층과 3층 탑신에도 동일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곳이 봉우리 정상으로 바람을 많이 타는 곳이므로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형으로 인해 탑은 시각적으로도 더욱 안정되어 보인다. 특히 각층 탑신의 가장 아래는 쇠시리를 한 단 두어 탑신 바깥으로 돌출한 받침을 만들고 있는데, 이로 인해 시각적 안정성이 도모됨은 물론 구조적으로도 더욱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각층 탑신은 아래와 양 측면을 일정한 폭으로 돋을새김 하였다. 양 측면과 하면을 잇는 윤곽선을 새긴 것인데, 하부는 탑신받침을 양 측면은 우주(隅柱)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1층 탑신에서는 이 윤곽 안쪽으로 세로로 긴 장방형의 면을 돋을새김 하였다. 여기에는 아무런 조각을 새기지 않았으나 생략적인 수법에 의해 문비(門扉)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옥개석은 1층 옥개석의 하부와 모서리 부분이 약간 파괴되었고, 그 위치가 약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옥개석 하부에는 네 단의 층급받침을 두었으나 물끊기는 만들지 않았다. 처마는 아래 면을 직선으로 하고, 윗면은 직선의 양쪽 끝만 약간 반곡시켰다. 지붕면은 약간 오목한 곡선을 이룬다. 상륜은 소실되었다. 탑신석 자체에 민흘림을 두고 구조 및 시각적 안정성을 고려한 탑신의 체감방법은 이 탑이 지닌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자연 암반을 제외하면 탑은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또한 탑의 형태와 조각수법은 정연하지 못하고 생략적이며, 단순한 편에 속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신라계 석탑의 기본 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그 규모와 수법이 상당히 약화된 시기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사가 원각국사의 하산처가 되는 시점과 연관된 고려 중엽 12세기경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충청대학박물관, 영동군, 영동영국사에서도 이 탑을 12세기경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주폭포>
- 14:31 진주폭포 경유
- 삼단폭포직전 갈림길에서 진행방향 왼쪽 계곡 상류 100여m 지점에 진주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진주폭포를 거쳐 망탑봉3층석탑을 경유하여 영국사 경내로 진입하거나, 3층석탑 직전 계곡으로 올라가면 D코스 남고개 방향으로 이어진다. 숲이 우거지면 진입로에서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오늘은 나목사이로 어렴풋이 눈에 잡혔다. 하산길에 망탑봉3층석탑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경유할 요량이었으므로 눈길만 주고 그냥 지나쳤었다. 진주폭포의 한자표기는 차치하더라도 진주(眞珠/珍珠)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어감에서 기대에 부풀게 하는 폭포이었다. 본인의 수석취미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폭포를 워낙 좋아하는 탓에 폭포만 보면 한마디로 사족을 못 쓴다고 표현할 정도이다. 진주는 조개, 대합, 전복 등의 조가비나 살 속에 생긴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는 구슬 또는 반구상(半球狀)의 광택 물질이다. 조개의 체내에 침입한 모래알 등의 이물(異物)을 외투막에서 분비된 진주질(眞珠質)이 에워싸서 생긴다고 한다. 진주(眞珠/珍珠)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주만큼 아름다운 폭포일 것이라고 마음속에 그렸던 폭포이었다. 폭포는 강물이 수직으로 흐르는 상태로서 유년곡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침식이 진행되면 폭포는 후퇴하여 결국 없어지고 경암이 침식되지 않고 남아서 급사면이 되어 폭포를 이루거나, 본류와 지류의 합류점에서 형성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남. 북한을 통틀어 3대 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九龍瀑布), 개성의 박연폭포(朴淵瀑布), 설악산의 대승폭포(大乘瀑布)를 꼽는다. 3대폭포나 지금까지 보아 온 폭포와 단순 비교할 수 없지만 보면서 만족하고, 발길을 돌리면서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폭포이기를 은근히 기대해 마지않았었는데 결코 후회는 없었다. 한여름 수량이 많아지면 품격을 갖춘 진면모를 여실히 증명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오늘은 하산예정시간을 20여분 상당 넘기면서 마무리 되었다. 일정안내시간을 통하여 하산예정시간을 15:00으로 예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5:30으로 의사 전달되는 바람에 소통장애가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현장에서 간단히 하산행사를 치른 후 귀로에 오르면서 변덕스런 날씨 변화를 실감하였다. 신탄진휴게소를 경유하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음성휴게소에 이르러 제법 많은 량의 비가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비는 춘천에 도착한 이후에도 쭉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비를 피해 다닌 격이었다. 오늘도 날씨 덕을 톡톡히 본 일상으로 오래 기억되리라 본다.
Ⅳ. 특기사항
<삼월삼짇날 큰잔치>
- 어제 삼월삼짇날이 지났다. 이 날은 본인의 귀빠진 날이기에 전날부터 가족모임, 친목단체모임으로 연일 주연이 베풀어진 관계로 심신이 지쳐있었는데 오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춘천에 안착한 후 뜻을 함께하시는 분들께서 한 자리에 모여 축하연을 베풀어 주신 관계로 몸 둘 바를 몰랐다. 귀한시간 내시어 분에 넘치는 성찬을 베풀어 주신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린다.
- 차제에 삼월 삼짇날 세시풍속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간다. 삼월 삼짇날의 어원은 음력 3월 3일을 삼월 삼짇날이라고 한다. 옛말에 '삼질'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상사(上巳)·원 사(元巳)·중삼(重三)·상제(上除)·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쓴다. 삼짇날은 삼(三)의 양(陽)이 겹친다는 의미이다. 최남선에 의하면 삼질은 삼일의 자음(字音)에서 변질되어 파생된 것이며, 상사는 삼월의 첫 뱀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 삼월 삼짇날의 유래는 삼짇날이 언제부터 유래하였는지 자세히 전하는 바는 없다. 최남선에 의하면 신라 이래로 이날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으며, 이 풍속은 조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또 옛사람들은 3월의 첫 뱀날[巳日]을 상사(上巳)라 하여 명일(名日)로 여겼으나, 그후 상사일이 들쭉날쭉함을 불편히 여겨 마침내 3월 3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 삼월 삼짇날의 풍속은 삼짇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이다. 이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며, 뱀이 동면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라고도 한다. 또한 나비나 새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경북 지방에서는 이날 뱀을 보면 운수가 좋다고 하고, 또 흰나비를 보면 그 해 상을 당하고 노랑나비를 보면 길하다고 한다. 이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며, 집안 수리를 한다. 아울러 농경제(農耕祭)를 행함으로써 풍년을 기원하기도 한다. 전국 각처에서는 한량들이 모여 편을 짜 활쏘기를 하기도 하며, 닭싸움을 즐기기도 한다. 사내 아이들은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놀이를 즐기고, 계집아이들은 대나무쪽에다 풀을 뜯어 각시인형을 만들어 각시놀음을 즐기기도 한다.
- 삼월 삼짇날의 시절음식은 이날 각 가정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시절음식을 즐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 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이날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 둥근 떡을 만들고, 또 그것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또 진달래 꽃을 녹두 가루에 반죽하여 만들기도 한다. 혹은 녹두로 국수를 만들기도 한다. 혹은 녹두가루에 붉은색 물을 들여 그것을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고 하며 이것들은 시절음식으로 젯상에도 오른다."라고 하여 화전과 국수를 시절음식으로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시절음식으로 흰떡을 하여 방울모양으로 만들어 속에 팥을 넣고, 떡에다 다섯 가지 색깔을 들여, 다섯개를 이어서 구슬을 꿴 것같이 하는데, 작은 것은 다섯개씩이고, 큰 것은 세 개씩으로 하는데, 이것을 산떡이라고 한다. 또 찹쌀과 송기와 쑥을 넣은 고리떡이 있다. 또한 이날에는 부드러운 쑥잎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 쪄서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쑥떡이라 한다. <국립민속박물관>
Ⅵ. 산행을 마치고
- 오락가락 하는 비 소식에 썰렁한 일상이었지만 오늘의 산행환경은 정말 좋았다. 우선 기대이상의 날씨에 만족하였고, 적당한 산행거리와 난이도가 조합된 산행코스에서 모두가 만족감을 누렸다. 언제나 목요산행신청방에 이름을 올리면서 기대를 걸고, 산행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귀가하면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산행이 되기를 염원해 왔다. 이것이 평소의 소박한 소망이자 바램이었다. 아마도 오늘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서 평소 쌓으신 덕행이 많으셨던 것으로 치부하고자 한다. 오늘 결코 만만치 않은 등산코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방 안 오르면 언제 또 다시 여기에 오겠어?” 라는 각오로 75m암벽코스를 오르셨다는 노익장의 후문을 들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바람에 후미 모든 분들이 암벽코스를 통과하는 개가를 올렸다. 안산, 즐산해 주시고 일정운영에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리면서 천태산 일상정리를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