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국민학교*
1957년에 산양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마을은 학교에서 남측에 있었다.
600m 정도 산길을 걷다가 신작로길에 산을 넘어 800m, 논둑 길로 황사 내를 건너고 철뚝을 건너고 국도에 올라서면 교문이다.
베이비붐세대라서~ 교실이 모자라서 계속 신축을 해야했다.
한 반에 45~50명이고 6학년이 6반까지 있으니….전교생이 천명이 훨씬 넘었다.
(※2020년 현재 68명으로 나온다)
문화시설이 없는 시골엔 학교 운동회가 열리면 큰 잔치 마당이 된다.
우리 3남매는 내가 1학년 입학하고, 형이 4학년, 누나가 6학년이었다.
나는 누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누나 친구들의 귀여움도 독차지했다.
누나는 예쁜 외모에 공부도 잘하였다.
누나와 같이하는 학교생활이 참 즐거웠다.
내가 2학년에 올라갈 때 누나는 문경여중에 합격하였는데….
아버지가 진학을 안 시켜 주셔서 통곡했었다!
못 사는 집도 아닌데….
아버지는 남녀 차별이 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하고 어린 나이에도 생각이 들었다.
아들들에게는 너무 관대하면서….
형은 소심하고 몸도 약해서 응석받이로 큰 것 같다.
나는 막내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늘 형을 견제했다.
*용궁중학교*
중학교는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에 있습니다.
산양면(문경시)과 바로 이웃 면입니다.
남학생이 세 개 반 여학생반인 남녀공학이었습니다.
그때는 입학시험이 있을 때였죠.
나는 입학 성적이 12등, 나름 상위에 속했죠.
그런데 공부에 흥미를 두지 못해서 졸업할 때는 중하위로 쳐졌습니다.
사춘기를 심하게 알았나 봅니다.
중학교 들어와서 갑자기 찾아온 사춘기에 적응을 잘 못하고 방황했더랬습니다.
남성으로 변하는 신체, 그것을 수용하는 혼돈의 사고가 비관적이기까지 했었죠.
온몸에 여드름이나서 희던 얼굴이 검붉게 변하고 꼭 멍게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버지 면도기로 털을 밀었습니다.
혹 나르시즘 이었을까요?
하굣길에 친구도 멀리하고 강에서 혼자 수영했고 뒷산에 올라가 가곡을 읊조렸죠.
눈물도 자주 흘렸죠.
우리 마을에 사는 고현진과 도보로 등교했는데 하교는 일부러 혼자 있고 싶어서 핑계를 됐습니다.
학교길은 장자봉 고갯길(관음재)을 넘고 사린재 고개와 삼박 고개를 넘으면 금천입니다.
용궁들과 읍부리와 학교가 저 멀리 보입니다.
금천에서 발을 벗고 물을 건너서 논둑 길 지나고 철길을 건너서 읍 중앙로를 지나면 학교에 도착합니다.
그 단짝 고향 친구가 지금 같은 대구에 살고 있습니다.
*경북공업고등학교*
고향 점촌에 문경고등학교(인문계)가 있었는데 나는 성적이 안 좋으니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고로 진학해서 기술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첫 지원한 대구공고에 아쉽게 낙방하고 2차로 경북공고 전기과에 들어갔습니다.
취업을 위한 실기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3 4/4분기에 취업 담당 선생님 인솔하에 서울 구로공단 싸니 전기에 친구(윤00)가 들어갔고 나와 동기 2명이 을지로에 있는 천양전기(소형라디오 제조)에 들어갔습니다.
규모가 아주 적은 공장이었습니다.
뚝섬에서 하숙집을 구해서 을지로까지 버스 통근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1년을 근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업주)이 사적인 일을 시키더라고요.
작업이 산더미처럼 밀려서 조금 늦게 심부름했더니 다짜고짜로 뺨을 때리고 발로 차면서 쌍욕을 했습니다.
계속되는 폭행을 피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건물 밖 도로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분해했습니다.
공중전화로 역곡자형(둘째 누님 남편※인천교대 교수)에게 하소연을 했죠.
다음날 자형과 같이 사장을 만났습니다.
자형이 호통을 치면서 고발하겠다고 하니 꼬리를 내리더군요.
평소에도 직원들에게 욕하고 거만을 떠는 인성이 바닥인 인간이었습니다.
첫 직장에서 어려운 인생살이를 경험 했습니다.
그때가 초겨울이었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고향 집에 내려가 몇 달 남은 입대를 기다렸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
국민학교 1학년 담임이 노정남(여) 선생님이셨다.
당시 중년이셨고 인자한 분이셨다.
저를 유독 귀여워해 주셨다.
그때 1~4학년 교실은 나무 바닥 그대로 가부좌하고 앉아서 공부했습니다.
나는 혼자 안정 방이 책상에서 공부했다.
나는 빨간 가죽 책가방을 양어깨에 메고 신발주머니를 들고 다녔다.
예쁜 필통도 있었다.
운동회 때는 반 대표로 달리기, 단체게임 등을. 해서 상도 많이 받았다.
학예회 때도 꼭 주인공 역활을 했었다.
학년이 올라가도 여전했다.
국민학교 시절은 나름 자존감이 엄청나게 컸었다.
*고교시절*
50년도 더 묵은 사진 속
까까머리,
교복 차림 고교 친구들,
같은 고향 출신 고교 동기들!
다정한 모습 더욱 그립다!
아!
嗚呼 痛哉!
벌써 이 세상 하직한 친구들의 얼굴도 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