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파리의 네덜란드인
a.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1886년 5월, 반 고흐는 파리에 있는 테오에게로 가 함께 지내기 시작했고,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는 파리나 그 근교 풍경을 그렸고, 인상파와 신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렸는데, 그에게는 이 두 유파가 동일한 사조의 두 가지 경향으로 생각되었다. 초기의 어둡던 색조에서 벗어나 더 환한 색을 사용하게 되었다.
b. "뒷골목의 인상파 화가들"
반 고흐는 아직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2세대의 젊은 인상과 화가들을 '뒷골목의 인상파 화가들'이라고 불렀다. 1887년 앙케탱 등의 친구들과 함께 클리시가의 '레스토랑 뒤 샬레'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c. 일본, 고갱, 그리고 해바라기
1885년부터 일본 판화를 수집해온 반 고흐는 1887년 일본풍의 작품 3점을 완성했다. 이것은 히로시게와 에이센의 목판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원색을 사용하고 입체감을 제거한 형태는 같은 해에 제작된 <탕기 영감>에서도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1888년 2월 빈센트는 '일본만큼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아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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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아를에서 오베르까지
a. 남프랑스의 아틀리에
반 고흐는 세잔과 몽티셀리의 고향 남프랑스에서 풍경화와 인물화 그리기에 전념했다. 파란색, 노란색, 오렌지색, 녹색, 보라색 등 강렬한 색을 사용했으며 대조적인 색채를 즐겼다. 그는 '노란집'을 화가들의 근거지로 만들고자 했고, 자신과 고갱이 그 중심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고갱과의 관계는 1888년 크리스마스 무렵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났다.
b. 생레미의 정신병원
신경발작으로 시달리던 반 고흐는 1889년 5월 3일, 생폴 드 모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 거기서 처음에는 병실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그렸고, 그후 관리인 한 명과 동행하여 들판에서 작업하게 되었다. 구불구불한 그의 화필은 소용돌이 모양에 의해 입체감을 갖게 되었다. 7월에는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리는 일에 착수했다.
c. 북프랑스로의 귀환
반 고흐는 북프랑스로 가면 건강이 회복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1890년 6월 가셰 박사가 살고 있는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겨갔다. 거기서 아마추어 화가이자 판화가, 수집가이기도 했던 가셰 박사와 우정을 쌓게 되었으며, 그의 초상화도 2점 그렸다. 반 고흐는 다시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했으나,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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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와 회화적 성장 과정
DESSINER/ 반 고흐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서 데생이라는 좁은 문을 통해 회화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는 틸부르크의 고등학교에서 최초로 그림 교육을 받았고, 그후 구필 화랑에 취직해서도 계속해서 연필로 스케치하곤 했다. 데생 공부에만 전념한 것은 종교적인 사명을 포기한 1879년에서 1880년 사이였다. 보리나주에서는 바르그의 <데생교본>을 보고 혼자 데생 연습을 하면서 밀레 그림의 복제 판화를 모사했고, 광부들을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후 반 라파르트, 모베와 접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카사뉴의 <데생의 기초>는 원근법의 규칙들을 가르쳐 주었다. 헤이그에서는 삽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도시적 주제들, 시엔과 그녀의 아이들을 그리는 데 전념했다. 반면 누에넨에서는 직조공과 농부들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반 고흐는 연필은 물론이고, 펜이나 목탄, 흑연도 사용해 보았다. 분필과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을 시작했고, 1882년에는 유화를 시작했다. 앙베르의 아카데미나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도 데생은 그의 수업에서 핵심적인 것이었다. 파리 시절에는 무엇보다 유화에 집중했지만, 남프랑스로 왔을 때는 돈이 부족해서 다시 데생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갈대를 깎아 만든 펜으로 <크로 지방의 들판La Plaine de la Crau>(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생트마리 지역, 그리고 후에는 병원의 정원까지 다시 그렸다. 그 그림들은 놀랄 만큼 다채로운 필치로 원근감 있는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반 고흐는 교환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그림들을 본뜬 데생을 하기도 했고, 편지에 스케치를 그려넣기도 했다. 독립적인 작품으로든 작품의 '밑작업'으로서든 "항상 긴급히 해야 할 일은 데생을 하는 것" 이었다. M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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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미술관, 이동식 미술관
COLLECTION/ 반 고흐는 어디를 가든 주위를 이미지들로 둘러쌌다.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개선되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와 전시대의 거장들의 복제판화, <월렌슈피겔Uylenspiegel>에 실린 벨기에 석판화(롭스 Rops, 드 그루),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에 발표된 프랑스 석판화를 수집했다. 삽화가로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빈센트는 '배우기' 위해서라는 말로 목판화 매입을 정당화했고, 결국 1,500여 점의 판화를 수집했다. 헤이그에 머무는 동안 반 고흐는 <런던 일러스트레이티드 뉴스London Illustrated News>에 작품을 싣는 영국 삽화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3년에는 이미지를 찾기 편하게 하기 위해 <그래픽Graphic>지 스물한 권을 분해하기도 했다. 그 판화들은 반 고흐의 예술에서 중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파리 시절에는 앙베르에서 처음 접한 일본 판화를 열정적으로 수집했다. 테오도 1884년부터 작품 매입을 시작했는데, 어떤 그림들은 그 두 형제의 공동 소유였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몽티셀리의 그림에 대해 "우리가 5점을 가지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는 고갱, 에밀 베르나르, 라발, 피사로, 러셀, 툴루즈 로트레크, 보흐 등 친구들과 그림 교환을 함으로써 동생의 미술품 수집에 기여했다. 이렇게 해서 수집된 방대한 그림들은 오늘날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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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과 망각
ACADEMIE/ 1880년 7월 처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반 고흐는 혼자서 필요한 기술을 익히려고 했으나 차츰 누군가의 지도를 받을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원하는 소재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으려면 비례, 광선, 음영, 원근법 등에 대한 여러 규칙을 꼭 알아야만 한다."
브뤼셀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기록을 보면 1880년 7월 15일자로 그의 이름이 '고대미술 데생-흉상 및 각 부위' 과정에 등록되어 있다.
그는 "수업은 무료이고… 우리는 적절한 조명과 난방을 갖춘 곳에서 작업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브뤼셀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너무 부담이 컸다. 1881년 봄이 되자마자 에텐으로 가서 혼자 작업하다가, 헤이그에서 모베의 지도를 받으며 풀크리 스튜디오의 무료 수업을 받았다. 반 고흐는 아카데미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카데미의 수업이 일상 생활 속의 사람을 그리고자 하는 그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바넬류의 그림들'과 '들라로슈풍의 그림들'에 대해서는 경멸감밖에 가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1885년 11월에는 다시 앙베르의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지만 곧 그곳의 교육이 안고 있는 속물적인 제약들에 반항하기 시작했고, 1886년 2월 말에는 파리로 와서 한동안 코르몽의 아틀리에에 나갔다. 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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