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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24년 12월 21일 (토)
o 날씨: 맑음
o 경로: 충렬사 - 동래부 동헌 - 동래시장 - 동래향교 - 서장대 - 북문 - 복천동고분군 - 북장대 - 인생문 - (동장대) - 충렬사
o 거리: 10.2km
o 소요시간: 3시간
o 걷기정보 및 여행포인트: 동래읍성,
o 지역: 부산시 동래구
o 트랙:
o 지도
날씨가 춥다고 방구석에 쳐박혀 있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찬바람 쌩쌩부는 산을 찾아가기는 한때의 열정이 많이 식은터라 그냥 동네마실이나 할까 합니다. 그래서 학창시절의 추억도 소환해볼겸 동래읍성을 찾았네요. 동래역에 내리니 바로 옆에 옛 동래역이 지금의 현대식 동래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엄청 초라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세월이 세상을 좋게 바꾸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반대일까요??...
동래역에서 먼저 충렬사를 찾아갑니다. 충렬사를 둘러보고 시계방향으로 동래읍성을 돌아볼 생각인데, 오전시간이라 그런지 안락로터리 주변과 충렬사 내부에는 운동하시는 어르신들만 보이고...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첨절제사 정발을 비롯해 부산에서 순절한 호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1605년(선조 38) 당시의 동래부사 윤훤이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에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를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1624년(인조 2)에 선위사 이민구의 청으로 충렬사라는 사액이 내려져 송공사에서 충렬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1652년(효종 3) 동래부사 윤문거가 송상현의 학행과 충절을 후학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지금의 충렬사 자리로 이전하면서 사당을 세운 뒤 강당과 동, 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고 하였다. 1709년(숙종 35)에는 옛 송공사 터에 별사를 지어 송상현과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동래교수 노개방, 양산군수 조영규, 향리 송백 등의 위패를 모셨다가 1736년(영조 12) 충렬사로 옮겨 함께 모셨다. 현재 충렬사에는 충렬사 본전과 의열각, 기념관, 정화기념비, 송상현공 명언비, 충렬탑 등의 유적이 있다. 지금도 해마다 5월 25일에 제사를 지내고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충렬사 안락서원에서 제향을 올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렬사 본전에 순국선열에 대한 예를 표 할수 시설이 준비되어 있어 자세를 갖추어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답니다...
충렬사 서쪽에 있는 임'란 동래 24공신 공적비' 뒤로 동장대로 올라갈 수 있는 등산로가 통제되고 있네요. '문화유산 산불피해 방지대책'의 하나로 가을부터 내년봄까지 입산을 통제한다고 하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헐~. 어쩔수 없이 후퇴하여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는데...
... 혹시나 전등사 뒷편으로 등산로가 있을까 해서 올라왔는데 헛걸음입니다. 동장대가 위치하고 있는 망월산 방향은 사방이 철조망으로 막혀있네요 휴... 올라온 김에 전등사를 둘러보고...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전등사에서 내려와 시계반대방향으로 동래읍성 유적지를 돈 다음 마지막에 동장대로 올라 가기로 했습니다. 1898년에 개교했다는 전통의 명문 동래고등학교는 신개축공사가 한창이네요. 동래고등학교 서쪽 맞은편에는 박차정 의사의 생가가 자리잡고 있는데, 박차정 의사를 비롯하여 박문희, 박문호 독립운동가 3남매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랍니다...
[박차정]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조선청년동맹과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신간회(新幹會)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반일학생운동으로 확대되도록 기여했으며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해 부녀자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주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차정 의사 생가에서 명륜로112번길을 따라오면 동래부 동헌으로 이어지는데, 동래부사의 관아로서 지금으로 보면 동래구청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동헌 안에는 충신당, 독경단, 찬주헌, 고마청, 완대헌, 약사청 등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고, 잘 정비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동래부 동헌(東萊府東軒)]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동래부의 관아 건물로서 조선 시대 동래 도호부(東萊都護府)의 부사가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장소로서 이청(吏廳), 무청(武廳), 향청(鄕廳) 등 각종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된 건물이다. 1636년(인조 14)에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창건하였다. 같은 해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동래부 동헌의 앞대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이 건립되었으며, 1700년(숙종 26)에 독진대아문을 개수하였다. 1711년(숙종 37)에는 동래부사 이정신(李正臣)에 의해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걸고 아헌으로서 개항기까지 사용되었다. 1742년(영조 18)에 망미루(望美樓)[동래부 동헌의 대문 문루,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가 독진대아문 앞쪽에 건립되었으며, 1870년(고종 7)에는 현재의 건물로 중건되었다.일제 강점기에는 동래부 동헌이 동래군청 청사로 이용되었다. 벽면과 천장, 마루 등의 개·보수를 거치면서 목재 등 재료 대부분이 교체되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서쪽 벽은 원래대로이며 문설주와 중방 등이 아직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시가지 정비라는 명분으로 망미루와 독진대아문이 금강 공원 안으로 이전되었으며, 서익랑[공물·형구 보관] 등을 포함한 많은 건물들이 철거·이전되었다. 현재 부산 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단일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헌으로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는 유형문화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래부 동헌 외대문] 원래 동래부사청 동헌(東萊府使廳東軒) 앞 대문으로 망미루 뒤쪽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리에 따라 지금의 온천동 금강공원으로 옮겼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동래부 동헌인 충신당(忠信堂)을 세울 때 함께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1700년(숙종 26)에 다시 고친 뒤 지금의 건물은 1870년(고종 7)에 중건되었다. 이 대문에는 1655년(효종6)에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의 지휘 아래 있던 경주진영(慶州鎭營)에서 독립하여 동래독진이 되었음을 알리는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라는 현판이 정면의 문 위에 걸려 있다. 또 그 아래 양쪽 기둥 왼쪽에는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 :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사의 영)', 오른쪽에는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 : 대일외교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관청)'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전형적인 관아대문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홑처마에 지붕이 좌우 협간보다 높게 꾸며진 솟을삼문이다.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 밑에 홍살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외삼문으로 보여진다. 기둥 양쪽에 걸린 현판은 동래부가 맡은 국방과 외교의 임무를 나타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래부 동헌을 돌아 나오면 뒷편으로 동래시장으로 연결됩니다. 오전시간이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네요. 대내외 악재 때문에 소상공인들의 경기가 바닥이라고 하는데 모두 잘 헤쳐 나가길...
동래시장 바로 뒷편에 송공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송공단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여러 선열을 모신 제단인데, 정절을 지켜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절비, 국난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순난비 등이 세워져 있는데 마음이 엄숙해집니다. 동시사난 부녀위, 금성 순난비, 의녀위, 동시사난 민인위, 신여로 순난비, 송백 순난비, 김상 순난비, 양조한 순난비, 송봉수 순난비, 김희수 순난비, 충렬공 송상현 순절비, 조영규 순난비, 노개방 순난비 등으로 구성되어 있네요...
[송공단]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자리에 설치한 단이다. 송상현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여러 선열을 모시고 있다. 송공단의 기원은 농주산전망제단인데, 이 제단은 1608년(선조 41)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이 송상현의 기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동래읍성 남문 밖에 있던 조그마한 야산인 농주산에 설치하였던 것이다. 1742년에 송공단이 세워지자 이곳으로 옮겨졌다. 송공단은 처음에는 동·서·남·북의 4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동래싸움에서 순절한 분들과 함께 부산진싸움, 다대포싸움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셨다. 그뒤 동래성에서 순절한 분들은 송공단에, 부산진에서 순절한 분들은 좌천동의 정공단(鄭公壇)에, 다대포에서 순절한 분들은 다대동의 윤공단(尹公壇)에 각각 따로 모시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는 해마다 음력 4월 15일 동래기영회에서 향사(享祀)를 지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공단 서쪽편에는 군관장들의 집무소였던 장관청이 자리잡고 있고...
[장관청]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조선후기 동래부사 정철이 건립한 관청으로, 정면 7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민도리집이다. 1972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동래부는 왜와 대치하는 국방상의 요충지로서 1655년(효종 6) 동래 독진(獨鎭)의 설치로 그 뒤 양산군 및 기장현(機張縣) 소속의 군병(軍兵)까지도 통합,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군사상의 지위가 강화됨에 따라 군관의 기관으로 설치된 것 같다. 장관청의 건물은 1669년(현종 10) 동래부사 정철(鄭哲)이 창건하였으며, 그 뒤 1675년(숙종 1) 부사 어진익(魚震翼)이 중창하였다. 또, 1680년 부사 조세환(趙世煥)이 중창하여 사용하다가 1706년 동래부사 황일하(黃一夏)가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 고장에 남아 있는 조선 후기의 관아건물로 당시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나, 형태는 수차에 걸친 구조의 개조로 무리한 맞춤, 또는 무리한 연결로 원상이 많이 변형된 것 같다. 건물양식은 ㄱ자집으로 공포는 무익공으로 되어 있다. 1980년 기와공사와 더불어 행랑채의 주초석을 교체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관청을 둘러보고 나온 다음 신축 동래구청을 지나 동래향교로 찾아갑니다...
동래향교는 동래읍성지 서쪽 아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명륜당, 대성전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예전에는 없었던 고층의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네요. 대략 40년전 대학 학창시절을 이곳에 보냈었는데 격세지감과 세월의 변화가 다시금 느껴집니다...
조선은 1392년(태조 1) 나라에서 교육진흥책을 위해 지방에 향교를 설립함에 따라 동래에도 [동래향교]가 설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동래성 함락과 함께 불타버렸다. 임진왜란 이후 1605년(선조 38) 동래부사 홍준이 재건한 이후 1704년(숙종 30)에 동래부 동쪽 관노산 아래로 옮겨졌다가 1813년(순조 13)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동래부가 되었을 때 동래향교에는 종6품의 교수 1명과 학생 70명이 있으며, 향교의 유지와 관리를 위해 학전 7결도 지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래향교의 건물구조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반화루, 동재, 서재로 구성된 강학공간과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 서무와 내·외삼문, 사주문으로 구성된 제향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자 이하 중국의 저명한 유현 7분과 우리나라의 유현 18분을 모시고 있는 대성전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유림들에 의해 석전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래향교 다음에는 명륜아이파크1단지 아파트와 동래복천현대아파트 사이를 지나 동래읍성으로 올라갑니다. 동래읍성에 대한 다양한 스토리들이 잘 텔링되어 있어 볼거리가 쏠쏠하네요...
서장대를 지나면 북문으로 이어지고, 북문 아래에는 장영실 과학동산과 동래읍성역사관도 둘러볼 수 있으며, 그 아래에는 복천박물관과 복천동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복천박물관은 현재 공사중...
[동래읍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년(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름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에는 애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25) 4월 13일(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서 송항현을 위시한 군,관,민이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영조7)에 동래부사 정안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중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게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 및 암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을 무우루, 암문을 은일루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시대에 시가지 정비게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는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 여장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보수중이다. (안내문)
[영보단비] 1909년 중앙정부에서 호적대장을 거두러 들이려 하자 주민들은 조상들의 성명이 적힌 호적대장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마안산 기슭에 동래지역 13개 면의 호적대장을 모아 불태우고 이 위에 단을 쌓아서 영보단이라 하였따. 이후 매년 음력 4월 23일 이 단에 모여 동래기영회 주관으로 제사를 지내며 잔치를 벌였으며 1915년 일제침탈로 부터 우리의 것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다짐하며 영비단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안내판)
[복천동(福泉洞) 고분군]은 동래 복천동 학소대(鶴巢臺)에 있는 말단 구릉부의 능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적으로 부산의 대표적인 가야 유적의 하나이며 당시 유력 정치체의 하나인 독로국(瀆盧國) 지배층이 남긴 것으로 생각된다. 문헌에서는 소략하게 다루어져 실체를 알기 어려웠던 가야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환기시킨 유적으로, 갑옷과 덩이쇠를 비롯한 수많은 철기 유물이 발견되어 주목받은 곳이다. 덧널무덤에서부터 신라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되는 시기까지의 고분이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현재는 야외 고분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고분군은 이 지역의 지배자 집단의 묘역으로 보이는데, 무덤의 형식은 크게 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방무과 독널무덤이며,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이 주를 이룬다. 대형 무덤은 구릉의 정상부를 따라 능선의 진행 방향(등고선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입지하며 중·소형 무덤은 구릉 사면에 등고선을 따라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사회적 계급에 따라 고분의 위치를 달리하여 조성된 듯하다. 발굴된 상당량의 토기는 신라, 가야 토기 편년의 기준이 되었다. 또한 특징적으로 갑옷, 투구가 많이 출토되었다... (중략) (네이버 지식백과)
복천동고분군의 야외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온 다음 복천박물관 뒷편에 있는 북장대로 향합니다. 북장대로 올라가는 길가에 늘어선 동백꽃이 처연하게 느껴지네요.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 ㅋ...
북장대에서의 뷰가 멋집니다. 동래시가지는 물론 복천동고분군이 제대로 내려다 보이네요. 박무인지 연무인지 실루엣을 두른듯 한 흐릿한 모습이 오히려 더 운치있게 느껴집니다...
북장대를 지나면 편백나무 숲길을 지나 3.1독립운동기념탑으로 연결되고,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면 인생문 방향입니다...
임진왜란때 이곳으로 피신한 사람들의 목숨을 건졌다 하여 '사람을 살리는 문'이라는 뜻의 인생문이 멋지게 세워져 있네요. 누가 이렇게 멋진 작명을 했을까요? ^^
인생문을 지나면 남쪽에 있는 동장대 방향입니다. 읍성 주변에 밀집하여 자리잡고 있는 작은 가옥들이 지난 세월을 이야기 해주는 것 같네요...
동장대 주변에는 12월 중순이 지났음에도 아직 가을의 모습이 가득하네요. 부산이라는 지리적 이유일수도 있을테고, 점점 온난해 지는 기후변화의 탓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허걱, 헐... 이곳도 동장대로 들어가는 출입문에는 산불방지 목적으로 출입을 통제한다는 안내판이 큼직하게 걸려있고 자물쇠가 야무지게 채워져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철조망을 따라 돌아봤지만 철조망을 넘지 않고는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할수 없이 철조망 넘어로 보이는 동장대의 모습을 맛만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수 밖에. 이 핑계로 다음번에 다시 한번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충렬사 방향으로 내려오면서 동장대 방향으로 혹시나 개구멍이 있지 않을까 살펴봤지만 역시나 동장대는 철조망 속에 꽁꽁 숨어있습니다. 왜, 와이 동장대만 출입을 통제할까요? 사방으로 민가들이 많아서? 아니면??...
구석구석 구경한다고 왔다 갔다 한 것 까지 포함하면 약 10km의 거리지만 생각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동래시장과 수안인정시장 등 먹거리도 많고. 중요한 문화재에는 안내판은 물론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잘 되어 있어 문화유적지 투어의 샘플로 삼을 만 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생각이지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