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동지 경천 에 대한 만시〔挽金同知 敬天〕
인간 세상 구십일 년 세월을 살다가 人間九十一星霜
선학이 날갯짓하고 하늘로 떠나갔네 仙鶴翩然下大荒
만년의 영화는 금자로 귀해졌고 暮境光華金紫貴
젊어서 명성은 장원랑 되었었지 少年聲價壯元郞
용모는 온화하여 산림의 기운 있고 鬚眉藹藹山林氣
말소리 은은하여 비단의 향기였네 咳唾霏霏錦繡香
바람과 달은 이제 누가 관장하려나 風月秖今誰管領
오동에 밤비 내리고 음악은 그치었네 梧桐夜雨九韶亡
[주1] 손와 김경천(1675~1759) : 의성의 불복호장(不服戶長) 김성단(金成丹)의 14대손으로 1675년 의성현 아전 김효약(金孝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하면 번번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전하며,『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에는 이름이 극경(克敬), 자가 경천(敬天)으로 나온다. 형제의 항렬(行列)이 克字인 것으로 보아 극경(克敬)이 초명(初名)이었거나 혹은 자(字)인 경천(敬天)을 이름으로 계속 쓴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이 집안에서 무과 급제자만 10여명이 나왔으나, 자신의 집만은 계속 향리의 일을 하며 자신의 대에까지 이어졌다고 전한다.
상주(尙州)의 향리 이진흥(李震興)이 고려말과 조선시대에 활동한 향리를 정리하여 1777년(정조 1)에 편찬한 『연조귀감(掾曹龜鑑)』속편「향리열전」에 손와 김경천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의성의 향리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현령 이익저가 공부를 시켜 마침내는 진사가 되었으며 90세가 되어서는 나이 덕분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연조귀감(掾曹龜鑑)이란 책 제목처럼 김경천이 향리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인물로 존경받았음을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동네 사족(士族) 이단분(李丹蕡)에게『통감(通鑑)』과 『사기(史記)』를 배우며 글을 깨우쳤고, 이후 신미년(1691년, 17세) 가을에 의성현령 황응일(黃應一)의 자제를 따라 학문을 시작하였다. 이후 황응일이 이임하며 김경천을 향리 명부에서 빼 주었고 을해년(1695, 21세) 봄에 이익저(李益著)가 의성현령으로 부임해 왔는데, 김경천의 시재(詩才)를 보고 탄복하여 "너는 참으로 비상한 재주를 지녔으니 오래도록 하류(下流)에 둘 수가 없다. 내가 응당 너를 유자(儒者)로 만들겠으니 보내준 베로 유의(儒衣)를 만들어 입고 오너라"고 하여 김경천은 처음 유의를 입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이익저의 책실(冊室)로, 또 자제사(子弟師)의 역할까지 맡으면서 이익저의 임지(청주, 상주)를 10년 동안 모셨으며, 1715년 이익저가 안동부사로 부임해 오자 다시 책실이 되었다. 이 해에 이익저 부사가 체직(遞職)되었다. 김경천이 1695년에서 1717년사이 15년간을 이익저를 모시고 지냈다.
이익저는 본관이 연안(延安)이고 음직(蔭職)으로 여러 고을의 원을 역임하였다. 역학, 점성술에 능통하고 선정을 베풀어 조정에서 여러차례 포상을 받고 권력에 굴복치 않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손와만록(巽窩漫錄) 자서(自序)』의 『관정(觀政)』편은 모두 이익저의 고을 원 시절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자신의 일생을 기술한 책의 한 편을 이익저에게 할애할 정도로 두 사람 관계는 절대적이었다.
이후 김경천은 의흥현감 조하성(曺夏盛), 의성현령 심위(沈瑋) 등의 책실 및 자제사 노릇을 했다. 그리고 1722년까지 향시(鄕試)에 여섯번 장원을 했으나, 나이가 쉰을 넘기면서 과거를 포기했다가 52세 때인 1726년 의성현령 이우신(李雨臣)의 강권(强勸)으로 서울에 올라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또한, 의성현령 이제상(李齊尙)의 책실로 있다가, 1730년 점술가로부터 향후 3년간 큰 액(厄)이 있으며, 당장 멀리 이사하지 않으면 곧 죽는다는 말을 듣고 울산에 이사를 했는데, 이후 점술가 말대로 조카, 동생, 누이, 아내, 장남이 연달아 죽었다.
1733년 고향인 의성으로 돌아왔다가, 1737년 울산에 서실을 짓고 이주하여 그 곳에서 후학 교육에 힘쓰다가 1747년 이후에는 귀향하여 현령 이길보(李吉輔)와 임상원(林象元)의 책실과 자제사를 지냈다.
1759년 85세의 나이로 자신의 생애를 회고를 정리한 『손와만록(巽窩漫錄)자서(自序)』를 찬술하고 1765년 91세에 졸했는데, 그는 영남지역에서 줄곧 고을 원의 책실(冊室)과 후학의 훈도(訓導)로 평생을 보냈으며, 간간이 고을 원의 공무를 돕거나 자신의 과거시험을 위해 서울도 드나들었다.
김경천은 서리직을 버리고 유자(儒子)가 될 수 있었던 것을 크나큰 행운(幸運)으로 여겼으며, 여러 사대부들의 지우(知遇)를 받은 것에 대해 고마워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특히 현령 이익저와의 교분은『염승전(廉丞傳)』에 등장하는 허상공(許相公)과 염시탁(廉時度) 처럼 그의 삶의 큰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2] 금자(金紫) : 금인자수(金印紫綬)의 약자로, 황금 인장과 그것을 매는 자색의 끈이다. 고관의 복식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