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郭再祐)를 신구(伸救)하는 서장(書狀) 임진년(1592, 선조 25)
의령(宜寧) 사람 곽재우가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왜적을 친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미 여러 차례 계달드렸습니다. 지금 뜻밖의 변고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났으므로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알지 못하여, 몹시 걱정스럽습니다.
곽재우는 고(故) 통정대부(通政大夫) 곽월(郭越)의 아들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손자 사위로서, 중도에 무학(武學)을 일삼다가 이를 버리고 다시 글을 읽었습니다. 성질은 단순하고 꾸밈이 없으며, 거상(居喪)함에 있어 극진히 슬퍼하여 향곡(鄕曲)에서 자못 효행을 칭송하였습니다.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가 서로 잇달아 도주하고 적이 장차 밀양(密陽)을 침범하려 하였는데, 감사 김수(金睟)가 이르기를, “절제(節制)를 맡은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만 있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면서 영산(靈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곧바로 초계(草溪)로 향하자, 곽재우가 분연히 일어나서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도망하였는데도 형벌을 내리지 않더니, 지금 또 왜적이 좌도(左道)에서 나오고 있는데 초계로 퇴주하였다. 감사를 베어 죽이는 것이 옳다.” 하면서, 칼을 잡고 길목에서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향리 사람들이 힘써 말리므로 중지하였습니다.
그 뒤에 우병사(右兵使) 조대곤(曺大坤)과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수령(守令) 등이 한결같이 모두 풍문만 듣고 무너져서 달아난 탓에 수십 일 사이에 적이 대궐에까지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을 못 이겨 말하기를, “이런 무리들은 왜병을 호위하여 서울로 들어가 군부(君父)에게 화를 끼친 것이니, 모두 베어 죽여야 한다.” 하면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항상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자기 집 재산을 풀어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그의 첩이, “어찌하여 이러한 개죽음을 하려고 합니까.” 하자, 곽재우는 크게 노하여 칼을 빼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아내와 자식의 의복조차도 또한 군졸의 아내들에게 다 내주었으므로 가업(家業)이 이로 인해 탕진되어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의 집에 처자식을 맡기고 모집한 장사들을 거느리고 가면서 왜적을 치겠다고 큰소리치자, 향리 사람들이 듣고는 모두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벌써 의령과 초계 두 고을 수령이 모두 싸움에 패하여 관청은 비어 있었으며, 의령의 관고(官庫)는 이미 불에 타 버려서 곽재우의 군사는 식량이 없었습니다. 이에 초계와 신반현(新反縣)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내어 군사에게 먹였는데,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이 도둑이라고 논하여 병사에게 보고하자, 병사가 명을 내려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응모하였던 자들이 그 말을 듣고는 뿔뿔이 흩어져 가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도착한 처음에 즉시 글을 보내서 불렀으므로 군위(軍威)를 다시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줄곧 왜적을 쳤는데, 적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먼저 앞장서서 힘차게 돌진하였습니다. 이에 거느린 전사들이 용기 백배하여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당백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싸울 때에는 반드시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을 입고 당상관의 전립(氈笠) 차림을 하고 싸우면서 스스로 칭하기를 ‘홍의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하였습니다. 말을 달려 적진을 유린했는데, 오고 가는 것이 번쩍번쩍하여 왜적이 철환(鐵丸)을 일제히 쏘아도 맞히지 못하였습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서 행군하는 절도로 삼기도 하였으며,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도 불고 호루라기도 불게 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없음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산 숲 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풀어 놓고 피리도 불고 북도 치고 하면서 떠들어 댔으며, 혹은 곳곳에 복병을 숨겨 놓아 고요하기가 사람이 없는 듯하다가 적이 이르면 갑자기 쏴 죽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왜적의 배를 뒤쫓아서 해안 가를 따라가면서 활을 쏘았습니다.
어느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습니다. 이에 적의 머리를 벤 것이 모든 장수 중에 가장 많았으며, 쏴 죽인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왜적들도 또한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해안에 올라와 도둑질을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령(宜寧)과 삼가(三嘉) 두 고을의 백성들은 모두 생업에 편안하여 농사에 힘써서 오곡의 풍성함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도내의 나머지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한 것은 곽재우의 공이 아주 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삼도(三道)의 군사가 수원(水原)에서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는 미친 사람같이 위태로운 말과 망녕된 말을 수없이 지껄여 댔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비록 편지를 보내어서 공적을 표창하고 계문하여 공(功)을 아뢰었으나, 역시 그의 뜻을 돌리지는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혹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면 반드시 칼을 움켜잡고 성을 냈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갑자기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서(檄書)를 보내어 낱낱이 그 죄를 열거하고는 토벌하겠다고 떠들어 댔습니다. 그리고 또 각 고을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려 토죄하겠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 이에 순찰사가 신에게 관문(關文)을 보내어 의령의 관원을 시켜 잡아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곽재우가 실제로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한다면 현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사람의 역사(力士)로는 잡을 수가 없으며, 만약 역심을 품고 있지 않다면 편지 한 장으로도 넉넉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에 곧바로 첩자(帖子)를 곽재우에게 보내어 다방면으로 비유해 깨우쳤으며, 김면(金沔)도 또한 글을 보내서 경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재우가 곧 마음을 돌이켜 말대로 잘 따랐습니다. 진주(晉州)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기로 하여, 3일에 이미 길을 떠나 전진하였습니다.
곽재우는 일개 도민(道民)으로서 감사를 범하려고 하여 죄를 성토하고 격서를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록 스스로는 나라를 위한 마음에서 분통스러워서 이렇게까지 한 것이라고는 하나, 행적이 난민(亂民)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즉시 토죄하여 제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뒤에 능히 외로운 군사로 용감히 적을 쳤으므로, 도내의 잔민(殘民)들이 간성(干城)과 같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난폭한 말을 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베어 죽이면, 보전하고 있는 남은 성은 적을 막을 계책이 없습니다. 이에 신은 미봉책으로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하는 생각에서 재삼 경계하여 타이른 결과 곽재우도 이미 순응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죄를 졌으니,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워서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듣건대, 을묘년의 왜변(倭變)이 일어났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使) 김주(金澍)가 영암(靈巖)에서 다른 고을로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기(尹祁)가 당시에 유생으로서 포위된 성 안에 있다가 칼을 빼 가지고 베어 죽이려 하였는데, 김주는 성내지 않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여 잘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논자(論者)들이 지금까지도 윤기의 용기를 칭송하고, 김주가 능히 포용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곽재우의 일도 비록 미치고 망녕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실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만약 김주가 처리한 바와 같이 대처하면 반드시 조용해져서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수(金睟)에게 글을 보내어서 선처하도록 부탁하였으니, 걱정할 만한 변은 없을 듯합니다. 다만 김수가 이미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계문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을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로써 그를 죄준다면 그가 죄에 승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도의 인심을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몹시 마음이 아프고 절박합니다.
곽재우의 충의를 일으켜 분발한 상황과 용감히 적을 친 공은 온 도에 널리 퍼지고 드러나서 아이들이나 군졸들까지도 모두 곽 장군(郭將軍)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용병(用兵)에 뛰어나서 장수의 자격이 있습니다. 만약 그의 미치고 망녕된 데 대한 주벌을 조금만 늦추어 주시면, 끝내 공을 세워 보답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은 불행히도 명을 받든 후에 두 번이나 이런 변을 만났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湖南) 길로 가다가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렀는데, 호남 사람들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근왕(勤王)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고자 하면서 신에게 비밀히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에 신이 대의로써 그 말을 꺾었으며, 곧장 김수와 상의하여 이광에게 알려 대비하라고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근왕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려고 하는 것은 의로운 선비라고 이를 것이다. 만약 이 사람들을 베어 죽이면 한 도의 인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다. 이광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꼭 저번의 일과 같습니다. 김수가 진실로 호남 사람들을 조처한 의리로써 곽재우를 조처하면 난처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신과 김면이 곽재우에게 경계하여 신칙한 글과 곽재우가 보낸 답서를 아울러 등서(謄書)하여 올립니다.
申救郭再祐狀 壬辰
宜寧郭再祐起兵討賊事。曾已屢次啓達矣。今者意外之變。出於計慮之所不到。罔知所處之宜。極爲痛慮。再祐。乃故通政郭越之子。南冥曺植之孫壻。中間業武。去而讀書。性質朴無文。居喪致哀。鄕曲頗以孝行稱之。自變生之初。聞兵水使相繼遁走。賊之將犯密陽也。監司金睟謂節制之帥。不當在圍城中。乃退還靈山。旋向草溪。再祐奮然曰。兵水使遁走。而不爲行刑。今又賊出左道。而退走草溪。監司可斬也。乃仗劍欲要諸路。鄕人力禁乃止。厥後。右兵使曺大坤及防禦助防守令等。一皆望風奔潰。數十日間。賊犯京闕。再祐扼腕慷慨曰。此輩護倭入京。貽禍君父。皆可斬也。稠人廣坐之中。常常大言。一朝。乃散家財以募士。其妾諫曰。柰何爲此等浪死計。再祐大怒。拔劍欲斬之。妻子衣服。亦給戰士之妻。家業因此蕩盡。不免飢餓。乃託其妻子於其妹夫許彦深家。率所募壯士。聲言擊賊。鄕人聞之。皆以爲發狂。其時宜寧,草溪兩邑守令。皆戰敗空官。而宜寧官庫。則已經焚蕩。再祐兵無見糧。乃發草溪及新反縣倉穀以餉軍。陜川郡守田見龍以賊論報兵使。下令捕之。應募者聞之。皆有散去之意。臣到界之初。卽貽書招之。軍乃再振。自是一向擊賊。不問賊之衆寡。必先登馳突。故所率戰士。勇氣百倍。無不一當百。戰時必著紅絹帖裏。具堂上笠飾。自號紅衣天降將軍。馳馬掠陣。往來倏忽。賊雖齊放鐵丸。亦不能中。或於馬上擊鼓徐行。以爲行軍節度。或令人吹笛鳴笳。示無懼意。或於山藪中。多設疑兵。吹角鼓譟。或處處設伏。寂若無人。賊至輒射殺之。或逐倭船。臨岸追射。無日不戰。戰必獲勝。斬馘之多。最於諸將。射殪者不知其數。賊亦謂之紅衣將軍。不敢登岸作賊。宜寧,三嘉兩邑人民。皆安業力農。五穀之盛。無異平日。道內餘城至今保存者。再祐之功居多。忽聞三道之師。潰於水原。有似發狂之人。危言妄語。無數發說。巡察雖貽書褒美。啓聞上功。亦不回意。人或以取禍戒之。則必按劍而怒。今忽再度移檄于巡察營門。歷數其罪。聲言欲討。且通文各邑義兵將。諭以討罪之意。巡察移關於臣。令宜寧官捉囚。臣竊念再祐若實有逆心。則方握精兵。非一力士之所捕。若無逆心。則一書足以開悟。卽下帖于再祐。譬曉多方。金沔亦貽書戒之。再祐卽翻然聽順。聞晉州危急。乃提兵馳援。初三日。已爲發去向前。郭再祐以一介道民。欲犯道主。至於聲罪移檄。雖自謂爲國憤憤。以至於此。跡涉亂民。卽爲討除爲當。而再祐當擧國陷沒之餘。能以孤軍奮勇擊賊。道內殘民。倚爲干城。今以亂言。卽加誅戮。則保存餘城。禦賊無計。臣欲爲彌縫鎭定之計。再三戒勅。再祐已爲從順。而得罪於都巡察使。恐難相容。惹起他變。臣聞乙卯年倭變時。全羅監司金澍。自靈巖郡出走他邑。水原前府使尹祁。時以儒生在圍城中。欲拔劍斬之。澍不爲怒。談笑處之。論者至今稱祁之勇。而多澍之能容。再祐之事。雖甚狂妄。心
實無他。監司若如澍之所處。則便帖然無事。故貽書金睟。使之善處。則無可虞之變。而但金睟以叛賊已爲啓聞。又以他人指嗾爲言。若果以此加罪。則非但渠不服罪。一道人心。恐難收拾。極爲痛迫。渠之忠義憤發之狀。奮勇擊賊之功。布著於一道。兒童走卒。皆稱郭將軍。且聞其善於用兵。有將帥之才。若少寬狂妄之誅。則慮或終有成效。臣不幸受命之後。再逢此變。臣四月中取路湖南。到雲峯縣。湖南之人。以巡察使李洸緩於勤王。欲討之。或有密言於臣者。臣以大義折之。卽議于睟。欲通于李洸以備之。睟曰。彼以勤王之緩。欲討之。可謂義士也。若誅此人。則一道人心益激。李洸處不可通也。臣從其言而止。今玆再祐之事。政類於彼。睟苟以處湖南之義處再祐。則事無難處者矣。臣及金沔戒勅再祐之書及渠答書。竝謄書上送。
[주1] 을묘년의 왜변(倭變) : 명종 10년(1555) 5월에 왜구가 전라도에 침입한 변란을 말한다. 이해에 왜구들이 배 60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하여 먼저 영암(靈巖), 달량(達梁)을 점령하고 어란포(於蘭浦), 강진(康津), 진도(珍島) 등을 잇달아 점령하여 갖은 만행을 다 부렸는데, 조정에서는 이윤경(李潤慶), 김경석(金慶錫), 남치훈(南致勳) 등을 파견하여 영암에서 이들을 크게 격파하여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