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봉집 발 芝峯集跋 이식李植
지봉(芝峯) 이 선생(李先生)은 담담하고 고요하게 중(中)을 지키고 옛 전적(典籍)을 연구하면서 평소 잡다한 빈객을 끊고 지내니, 빈객 또한 예물을 들고 찾아와 명함을 내미는 경우가 드물었다. 견문이 좁고 학식이 형편없는 후배인 나로서도 다행히 한두 번 용문(龍門)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감히 받들어 모시고 가르침을 받으며 문장에 대한 오묘한 비결을 엿보지는 못하였다.
그 뒤 무진년(1628, 인조6)에 도성에 들어가 다행히 다시 당(堂)에 올라 질의할 수 있었는데, 이때 비로소 선생께서 당신이 논술한 《유설(類說)》 10책을 보여주었으며, 또 나에게 그 책에 발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나는 공손히 “예.” 하고 물러나왔는데,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선생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오호통재로다.
이번에 선생의 영윤(令胤) 두 사문(斯文)이 바야흐로 선고(先稿)의 초본(抄本) 약간 권을 간행하면서 선생께서 일찍이 《유설》에 발문을 지으라고 명하신 일을 들어 거듭 부탁하였다. 나는 이미 불민하게도 종전에 발문을 완성하지 못하여 지금까지도 선생의 정성스러운 명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송구스러운 처지이다. 따라서 이 문집에 대해 의당 한마디 말이나마 바치기를 잊어서는 안 되지만, 돌아보건대 거공(钜公)들의 서발(序跋)이 구비되어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이 또 어떻게 떠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 생각건대, 사람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왼손으로 네모를 그리면서 오른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지는 못하는 법이다. 고금의 문장가들이 정말이지 대부분 여러 가지 문체에 두루 능하기는 하지만, 문(文)에 특장인 자는 시(詩) 역시 문과 유사하고, 시에 전문인 자는 문이 혹 시와 유사하기도 하니, 어찌 공교함은 같으나 곡조는 다르기가〔同工異曲〕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 선생은 학문이 이미 풍부하고 문체가 모두 구비되어 울연(蔚然)히 한 시대의 대가(大家)라 하겠는데, 그 시로 말하면 간박(簡樸)하고 고아(古雅)하며 지극히 청아(淸雅)하여 삼당(三唐)의 영역을 드나드는 경지이니, 비록 장편이나 연작시를 짓는다 하더라도 끝내 격조를 잃지 않고 있다. 이는 참으로 옛사람들 가운데도 드물게 있는 경우이니, 혹여 담담하고 고요하게 중(中)을 지키고 옛 전적을 연구한 공효가 아닐까 싶다.
이 문집을 읽는 이들이 행여 나의 말을 바탕으로 파고들어 본다면 거의 전범으로 삼아 공부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다.
숭정 갑술년(1634, 인조12) 입춘에, 덕수(德水) 후인(後人) 이식(李植)이 삼가 쓰다.
[주1] 담담하고 …… 지키고 :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고요하게 내면으로 침잠하여 수양하였다는 말이다. 《도덕경(道德經)》 제5장에 “말을 많이 하면 자꾸 궁해지는 법, 중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왕순보(王純甫)의 주에 “‘중(中)’이라는 것은 중(中)이니, 허(虛)이고 무(無)이다.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다.〔中也者, 中也, 虛也無也. 不可言且名者也.〕”라고 하였다.
[주2] 용문(龍門)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 명망이 높은 지봉에게 접견을 받았다는 뜻으로, ‘등용문(登龍門)’의 고사를 원용하여 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이응(李膺)이 홀로 고아한 풍도를 견지하여 성망(聲望)이 대단히 높았는데, 선비들 중에 그의 접견을 받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용문(龍門)에 올랐다고 하였다. 《後漢書 卷67 李膺列傳》
[주3] 무진년에 도성에 들어가 : 이해 1월에 이식(李植)이 유효립(柳孝立)의 난으로 파직되어 지곡(砥谷)으로 돌아갔다가 9월에 다시 병조 참의가 되었는데, 이때를 가리킨다. 이 당시 지봉은 이조 판서로 재직 중이었다.
[주4] 유설(類說) :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천문, 지리, 인사 등 3400여 항목에 대해 기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저술이다. 1614년(광해군6) 지봉의 나이 52세 때 탈고하였으며, 1634년(인조12)경에 간행되었다.
[주5] 두 사문(斯文) : 지봉의 아들 이성구(李聖求)와 이민구(李敏求)를 가리킨다.
[주6] 공교함은 …… 다르기가〔同工異曲〕 : 곡조가 다른 음악에 대해서도 똑같이 뛰어난 솜씨로 연주하는 것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문(文)과 시(詩)에 모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아래로는 《장자》ㆍ《이소(離騷)》와 사마천의 《사기》와 양웅과 사마상여의 공교함은 같으나 곡조는 서로 다름에까지 미치니, 선생은 문장에 있어 그 내용을 넓히고 그 형식을 크게 했다고 이를 만합니다.〔下逮莊ㆍ騷、太史所錄、子雲ㆍ相如同工異曲, 先生之於文, 可謂閎其中而肆其外矣.〕”라고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3 進學解》
[주7] 삼당(三唐) : 초당(初唐)ㆍ성당(盛唐)ㆍ만당(晚唐)을 가리킨다. 이는 시작(詩作)이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졌던 당대(唐代)를 세 단계의 시기로 나누어 부른 데서 연유한 말이다.
[주8] 이식(李植) :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ㆍ남궁외사(南宮外史)ㆍ택구거사(澤癯居士),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610년(광해군2)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613년 설서를 거쳐 1616년 북평사(北評事)가 되고, 이듬해 선전관을 지냈다.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형조 판서, 이조 판서, 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신흠(申欽)ㆍ이정구(李廷龜)ㆍ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혔다. 저서에 《택당집》 등이 있다.
芝峯集跋[李植]
芝峯李先生恬靜守中。硏究墳籍。平居門絶雜賓。賓客亦罕贄刺。以植之孤陋晩進。雖幸一再登龍。亦未敢奉款承誨。以窺剞劂之妙。戊辰入都。幸復陞堂質疑。始蒙先生示以所論述類說十冊。且命植題跋 其後。植敬諾而退。未及卒業。而 先生遽捐館。嗚呼慟哉。今先生之胤二斯文。方梓行先稿抄本若干卷。而以先生嘗所命於類說者申之。植旣不敏于疇昔。迨無以副先生勤敎是懼。其於斯集。宜不忘一言之效。顧鉅公序述備矣。如植亦何容噍說。抑惟念人雖至巧。不能左畫方而右畫圓。古今文章家。固多兼苞衆體矣。然而長於文者詩亦類文。專於詩者文或類詩。豈非同工異曲。爲尤難哉。今先生績學旣富。文體咸備。蔚然爲一代大家。而乃其詩簡古淸絶。出入三唐。雖累韻疊篇。而終不失調格。此誠古人之所稀有者。倘非恬靜硏究之效歟。讀是集者。幸以余言求之。則庶爲模楷之一助云爾。崇禎甲戌立春日。德水後人李植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