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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栗谷)과 이기(理氣)를 논한 첫 번째 편지 임신년(1572)
장마가 그치지 않습니다. 도황道況이 청화淸和하신지요. 삼가 우러르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지난번에 말한 별지別紙에 대하여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성학십도聖學十圖》 심성정도心性情圖의 퇴계退溪의 입론立論을 보면 중간의 한 부분에 “사단四端의 정情은 이理가 발發함에 기氣가 따른 것理發而氣隨之으로 본래 순선純善하고 악惡이 없으니, 반드시 이理가 발하여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氣에 가려진 뒤에야 흘러가서 불선不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칠정七情의 정情은 기가 발함에 이理가 탄 것(氣發而理乘之)으로 이것 역시 불선함이 없으나 만약 기가 발하여 절도에 맞지 않아서 이理를 멸하게 되면 방종하여 악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의논을 추구해 보면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이 당초에는 모두 선하지 않음이 없고, 기가 절도에 맞지 않아야 비로소 악으로 흐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말이 이미 저와 같이 이발과 기발로 나누어졌고 예로부터 성현들이 모두 이것을 주장해 왔으니, 퇴계의 입론은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이에 대하여 통렬히 토론하여 뜻을 극진히 하고 상세함을 다하여 우둔한 저의 의혹을 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별지別紙
마음의 허령 지각虛靈知覺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란 두 가지 명목名目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이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기기도 하고 성명性命의 바른 데에 근원을 두기도 하여, 이理와 기氣의 발함이 같지 않고 위태롭고 미묘한 현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명목을 둘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인심과 도심은 사단四端, 칠정七情과 같은 것입니까? 지금 도심을 사단이라 하는 것은 옳으나 인심을 칠정이라 한다면 옳지 못합니다. 또 사단과 칠정은 성性에서 발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요, 인심과 도심은 심心에서 발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그 명목과 의미 사이에 약간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바라건대 한 말씀 하여 바른 뜻을 밝혀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심과 도심의 발함은 근본적으로 주기主氣와 주리主理의 차이가 있어서, 여러 의논이 없던 요순 시대에도 이미 이러한 말이 있었고 성현聖賢의 종지宗旨가 모두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였으니, 이제 사단과 칠정의 그림을 만들면서 이理에서 발한다거나 기氣에서 발한다고 하는 것이 어찌 불가한 일이겠습니까. 이와 기의 호발互發은 바로 천하의 정해진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퇴계의 견해는 역시 정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기가 따른다(氣隨之)’거나 ‘이가 탄다(理乘之)’는 말은 너무 장황하게 끌어대어 명분과 사리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어리석은 저의 생각에는 사단과 칠정을 대거對擧하여 말한다면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고 하는 것이 옳겠으나 성정도性情圖를 만들 때에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는 안 되고 다만 사단과 칠정을 함께 정情의 권내圈內에 두고서 “사단은 칠정 가운데 이理의 한쪽으로 발한 것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칠정 중에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은 기氣가 과過하거나 불급不及하여 악으로 흐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에 혼동되지 않고, 또한 두 갈래로 나누어질 염려도 없지 않겠습니까. 자세히 연구하여 알려 주시기를 아울러 바랍니다.
율곡의 답서答書
성현聖賢의 말씀은 횡橫으로 논하기도 하고 종縱으로 논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각기 가리키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으로 논한 것을 횡에 맞추려 하거나 횡으로 논한 것을 종에 부합시키려 하면 때로는 그 가리키는 바를 잃게 됩니다.
심心은 하나인데 도심이라고도 하고 인심이라고도 하는 것은 성명性命과 형기形氣의 구별 때문이요, 정情은 하나인데 사단이라고도 하고 칠정이라고도 하는 것은 오로지 이理만을 말한 것과 기氣를 겸하여 말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심과 도심은 서로 겸하지 못하고 서로 처음과 끝이 되며, 사단은 칠정을 겸할 수 없으나 칠정은 사단을 겸합니다. 도심의 은미함과 인심의 위태로움에 대해서는 주자朱子의 설명이 극진합니다. 사단이 칠정처럼 완전히 구비하지는 못한 반면 칠정은 사단처럼 순수하지는 못하니, 이것은 저의 어리석은 견해입니다.
인심과 도심이 서로 처음과 끝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가령 사람의 마음이 성명性命의 바른 데에서 곧바로 나왔다 하더라도 혹 이것을 순순히 따라 이루지 못하고 여기에 사의私意가 섞이게 되면 이것은 도심으로 시작되었으나 인심으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 형기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바른 이치에 위배되지 않으면 진실로 도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요, 혹 바른 이치에 위배되더라도 그른 것인 줄을 알고 제재하여 그 욕심을 따르지 않게 되면 이것은 인심으로 시작되었으나 도심으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인심과 도심은 정情과 의意를 겸하여 말한 것이니, 정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칠정은 사람 마음의 움직임이 이 일곱 가지가 있음을 통틀어 말한 것이요, 사단은 칠정 가운데에서 선한 일변一邊만을 가려 말한 것이니, 이는 본래 인심과 도심처럼 상대적으로 말한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또 정情은 마음이 발하여 나온 그대로이고 헤아리거나 비교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이니, 이는 또 인심과 도심처럼 서로 처음과 끝이 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억지로 다른 것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양변兩邊으로 말하려 한다면 마땅히 인심과 도심의 설을 따라야 할 것이고, 선한 일변을 말하려 한다면 마땅히 사단의 설을 따라야 할 것이며, 선악을 겸하여 말하려 한다면 칠정의 설을 따라야 할 것이니, 굳이 네모난 촉꽂이를 둥근 구멍에 넣는 것처럼 서로 맞지 않는 것을 분분하게 입론할 것이 없습니다.
사단과 칠정은 바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관계와 같습니다. 본연지성은 기질을 겸하지 않고 말한 것이요,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칠정을 겸할 수 없으나 칠정은 사단을 겸하는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이른바 “이理에서 발하고, 기氣에서 발한다.”는 것은 대강만을 말한 것이니, 후인들이 너무 심하게 나누어 전개시킬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배우는 자들은 본뜻을 살려 잘 살펴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또 퇴계 선생은 이미 선善을 사단에 돌리고, 또 말씀하기를, “칠정도 불선不善함이 없다.”고 하였으니, 만약 그렇다면 사단 밖에 또한 선善한 정情이 있는 것이니, 이 정은 어디로부터 발하는 것입니까? 맹자孟子는 그 대강을 들었기 때문에 측은惻隱, 수오羞惡, 공경恭敬, 시비是非만을 말하였던 것이니, 그 밖에 선한 정으로서 사단이 되는 것은 배우는 자가 마땅히 미루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정情이 어찌 인仁, 의義, 예禮, 지智에 근본하지 않고 선한 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주自註에, “이 한 단락은 깊이 연구하고 정밀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선한 정으로 이미 사단이 있는데, 또 사단 밖에 선한 정이 있다면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 두 근본이 있는 것이니, 타당하겠습니까.
대저 미발未發 상태는 성性이고 이발已發 상태는 정情이며 발하여 헤아리고 생각하는 상태는 의意이니, 심心은 성과 정과 의의 주재主宰가 됩니다. 그러므로 미발未發, 이발已發 상태와 헤아리는 상태를 모두 심心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발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하는 소이所以는 이理입니다. 발하는 것이 곧바로 정리正理에서 나오고 기氣가 용사用事하지 않았다면 이는 도심道心이니 칠정 가운데 선한 일변一邊요, 발할 즈음에 기가 이미 용사하였다면 인심이니 선과 악이 합해진 칠정입니다.
기가 용사함을 알고 정밀하게 살펴서 정리를 따른다면 인심이 도심에게 명령을 들을 것이요, 정밀하게 살피지 못하고 오직 마음이 향하는 대로 놓아둔다면 정情이 이기고 욕欲이 치성熾盛하여 인심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도심은 더욱 미미해질 것입니다. 정밀하게 살피는 것과 살피지 않는 것은 모두 의意가 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닦는 공부는 성의誠意보다 우선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사단은 이理가 발함에 기氣가 따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함에 이理가 탄다.”고 한다면, 이는 이와 기 두 물건이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여 서로 상대가 되어서 두 갈래로 제각기 나오는 것이 되니, 사람의 마음이 어찌 두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情은 비록 수만 가지라 하더라도 그 어느 것인들 이理에서 발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기氣가 가려 용사하기도 하고, 가리지 않고 이理에게 명령을 듣기도 하므로 선과 악의 다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체인體認한다면 거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별지別紙의 내용은 대개 맞는 말입니다. 다만 이른바 “사단과 칠정은 성性에서 발하고, 인심과 도심은 심心에서 발한다.”는 말은 심과 성을 두 갈래로 보는 병통이 있는 듯합니다. 성은 심 가운데의 이理이고, 심은 성을 담는 그릇이니, 어찌 성에서 발하는 것과 심에서 발하는 것이 따로 있겠습니까. 인심과 도심은 모두 성에서 발하는데, 기氣에 가려진 것은 인심이고 기에 가려지지 않은 것은 도심입니다.
[주1] 성학십도(聖學十圖) 심성정도(心性情圖) : 《성학십도》는 퇴계가 선조(宣祖) 1년(1568) 12월에 임금께 올린 열 가지 그림을 말하며, 심성정도는 그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를 말한다.
[주2] 사단(四端) : 맹자(孟子)는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을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단서라고 말하였다.
[주3] 칠정(七情) : 일곱 가지 정으로,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애(愛), 오(惡), 욕(欲)을 말하였는데, 애(哀) 대신 구(懼)를 넣기도 한다.
[주4] 미발(未發) …… 정(情)이며 : 《중용장구》 수장(首章)에, “희, 노, 애, 낙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희, 노, 애, 낙은 정(情)이니, 이것이 아직 발하지 않았으면 성(性)이다. 중(中)은 성(性)의 덕(德)이고 화(和)는 정(情)의 덕(德)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이후로 희, 노, 애, 낙은 칠정(七情)을 대표하는 말로 쓰였으며,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로 나누어 성(性)과 정(情)을 대칭하게 되었다.
與栗谷論理氣第一書 壬申
霖陰不止。想惟道況淸和否。傾仰不自已。前稟別紙乞答示何如。今看十圖。心性淸圖退翁立論。則中間一端。曰四端之情。理發而氣隨之。自純善無惡。必理發未遂而揜於氣。然後流爲不善。七者之情。氣發而理乘之。亦無有不善。若氣發不中而滅其理。則放而爲惡云。究此議論。以理氣之發當初皆無不善。而氣之不中。乃流於惡云矣。人心道心之說。旣如彼其分理氣之發。而從古聖賢皆宗之。則退翁之論。自不爲過耶。更望於此痛加血戰。極意消詳。以解鈍澁之惑。千萬至祝。
別紙
心之虛靈知覺。一而已矣。而有人心道心之二名。何歟。以其或生於形氣之私。或原於性命之正。理氣之發不同。而危微之用各異。故名不能不二也。然則與所謂四端七情者同耶。今以道心謂之四端可矣。而以人心謂之七情則不可矣。且夫四端七情。以發於性者而言也。人心道心。以發於心者而言也。其名目意味之間。有些不同焉。幸賜一言。發其直指何如。人心道心之發。其所從來固有主氣主理之不同。在唐虞無許多議論時已有此說。聖賢宗旨皆作兩下說。則今爲四端七情之圖而曰。發於理發於氣。有何不可乎。理與氣之互發。乃爲天下之定理。而退翁所見。亦自正當耶。然氣隨之理乘之之說。正自拖引太長。似失於名理也。愚意以爲四七對擧而言。則謂之四發於理。七發於氣可也。爲性情之圖。則不當分開。但以四七俱置情圈中而曰。四端指七情中理一邊發者而言也。七情不中節。是氣之過不及而流於惡云云。則不混於理氣之發。而亦無分開二岐之患否耶。竝乞詳究示喩。
答書 栗谷先生
聖賢之說。或橫或豎。各有所指。欲以豎准橫。以橫合豎則或失其指矣。心一也。而謂之道謂之人者。性命形氣之別也。情一也。而或曰四或曰七者。專言理兼言氣之不同也。是故。人心道心不能相兼。而相爲終始焉。四端不能兼七情。而七情則兼四端。道心之微。人心之危。朱子之說盡矣。四端不如七情之全。七情不如四端之粹。是則愚見也。人心道心相爲終始者何謂也。今人之心直出於性命之正。而或不能順而遂之。間之以私意。則是始以道心而終以人心也。或出於形氣。而不拂乎正理。則固不違於道心矣。或拂乎正理。而知非制伏。不從其欲。則是始以人心而終以道心也。蓋人心道心。兼情意而言也。不但指情也。七情則統言人心之動。有此七者。四端則就七情中擇其善一邊而言也。固不如人心道心之相對說下矣。且情是發出。恁地不及計較。則又不如人心道心之相爲終始矣。焉可强就而相准耶。今欲兩邊說下。則當遵人心道心之說。欲說善一邊。則當遵四端之說。欲兼善惡說。則當遵七情之說。不必將枘就鑿。紛紛立論也。四端七情。正如本然之性氣質之性。本然之性則不兼氣質而爲言也。氣質之性則却兼本然之性。故四端不能兼七情。七情則兼四端。朱子所謂發於理發於氣者。只是大綱說。豈料後人之分開太甚乎。學者活看可也。且退溪先生旣以善歸之四端而又曰。七者之情亦無有不善。若然則四端之外亦有善情也。此情從何以發哉。孟子擧其大槪。故只言惻隱,羞惡,恭敬,是非。而其他善情之爲四端。則學者當反三而知之。人情安有不本於仁義禮智而爲善情者乎。自註。此一端。當深究精思。 善情旣有四端。而又於四端之外有善情。則是人心有二本也。其可乎。大抵未發則性也。已發則情也。發而計姣商量則意也。心爲性情意之主。故未發已發及其計較。皆可謂之心也。發者氣也。所以發者理也。其發直出於正理而氣不用事則道心也。七情之善一邊也。發之之際。氣已用事則人心也。七情之合善惡也。知其氣之用事。精察而趨乎正理。則人心聽命於道心也。不能精察而惟其所向。則情勝欲熾。而人心愈危。道心愈微矣。精察與否。皆是意之所爲。故自修莫先於誠意。今若曰。四端理發而氣隨之。七情氣發而理乘之。則是理氣二物。或先或後。相對爲兩岐。各自出來矣。人心豈非二本乎。情雖萬般。夫孰非發於理乎。惟其氣或揜而用事。或不揜而聽命於理。故有善惡之異。以此體認。庶幾見之矣。
別紙之說。大槪得之。但所謂四七發於性。人心道心發於心者。似有心性二岐之病。性則心中之理也。心則盛貯性之器也。安有發於性發於心之別乎。人心道心皆發於性。而爲氣所揜者爲人心。不爲氣所揜者爲道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