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영화와 소설 사이>는 드니 빌뢰브의 <컨택트>와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 읽기를 끝으로 마무리하였다.
<책 읽어주는 남자>로 시작한 우리의 모임은 영화와 텍스트 사이를 오가며 문자와 언어가 생산해 내는 의미가 영화라는 이미지 예술을 통해 어떻게 운동하고 그 운동을 통해 무엇을 생산하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문자와 언어, 이미지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생산하게 하는지 살펴 보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각자는 어떤 충동들, 어떤 무의식들, 어떤 정동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말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많은 것들은 자신 안에 버무려져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버무려진 것들이 언제가 다른 낯선 것들과 접속하여 자신의 언어, 자신의 말, 자신의 이미지, 자신의 신체를 갖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임이 마지막에 만난 두개의 텍스트 - <컨택트>와 < 네 인생의 이야기>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드니 빌뢰브의 <컨택트>는 원제가 <Arrival>이다. 그것은 어떤 낯설고 이질적인, 우리의 익숙한 관념과 습관화된 의미의 체계로 포섭할 수 없는 존재의 도착이라는 사건 앞에 선 인간-인류의 곤경을 드러낸다. 이 불가해한 타자, 이 의미화할 수 없는 타자와 우리는 어떻게 접속해야 하는가? <컨택트>에는 이런 불가해한 낯선 타자의 도래를 마주하면서 가지게 되는 인류의 공포와 패닉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낯선 타자를 자신의 의미망으로 포획하려는 인류의 대응 과정을 보여준다.
우선, 폭력적인 방식이 있을 것이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남편이 가지는 태도이다. 이 낯설고 공포스러운 타자의 도착에 대해 영혜의 남편은 자신의 안정되고 안온한 삶이, 그 일상이 파괴될까 노심초사한다. 그에게는 이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그는 오로지 이 낯선 타자를 자신의 의미망 속으로 포획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저 심연의 깊은 동굴 속으로 유폐시키고자 하는 마음 뿐이다. 그는 무책임하며 외면하는 주체이다. 컨택트에서 우리는 이런 주체와 마주친다.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의 도래를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는 괴물의 도래로 인식하고 파괴하려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그런 주체들이다.
다음으로 자신의 언어, 문화를 통해 그들을 해석하고, 그들을 길들이려는 대응 방식이 있다. 국가 기구의 방식일 것이다. 그들은 이 낯선 타자를 한편으로 배제하고 한편으로 포획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이용하여 이들을 포획하고 배제하려고 한다. 그들은 낯선 타자가 가지고 있는 그 무섭고 공포스러운 의미들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 포획과 배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루이스의 태도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세상에 무심하다. 햅타포드의 도착도 강의시간에 도착하여 학생들을 통해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도착에 호기심은 있으나 놀라지 않는 태도로 인지한다. 세상이 난리법석이지만 그녀는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려고 한다. 그녀는 새벽 차갑고 푸르스름한 공기와 빛처럼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놀라지 않은 차가운 냉정과 이성의 소유자이다. 어쩌면 그녀도 햅타포드들과의 애초의 만남을 냉정한 이성과 합리적인 태도로 시작했을 것이다. 햅타포드와 그들 사이에 가린 장막(스크린)은 그런 과학자 - 사물과의 섣부른 합일, 그리고 그것에 대한 도취와는 거리가 먼, 냉정하고 차가운 거리 두기, 사물에 대한 철저하게 객관화된-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낯선 존재에 대해 국가가 취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루이스는 뛰어난 언어학자답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자신이 알고 있는 표상 체계 속에서 해석해 내려고 한다. 인간에게 언어를 가르치듯 그렇게 접근하다 보면 언제가 그들과 서로 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물론 루이스는 과학자답게 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를 쉽게 단정하지 않고, 그들의 신호 하나하나를 회의의 그물망으로 들여다 본다. 그런데 햅타포드의 언어에 대한 실마리를 하나하나 풀어가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이해가 쌓여갈수록 루이스는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체험, 어떤 변화들을 겪게 된다. 그것은 처음에는 어떤 꿈과, 환영 같이 다가왔으나, 점차 그것이 자신이 살아가게될 미래임을, 아주 고통스럽지만 필연적인 미래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세 번의 낯선 존재의 도착(Arrival)을 본다. 햅타포드의 도착,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불가해한 언어의 도착, 그리고 자신이 한번도 보지 못하고 예견하지 못했던 미래의 도착- 이 미래의 도착은 곧 자신의 아이라는 존재의 도착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이해의 의미망 밖에서 도래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왜 Arrival인지 알게 된다. 당신은 파도처럼 덮쳐오는 '막을 수 없는' 타자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쩌면 그 낯선 것들은,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우리 앞에 파도처럼 덮쳐오는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과거-현재-미래로 분할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서 어느 지점을 고정하여 우리는 그것을 현재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그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영원한 현재만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세계는 무한대로 펼쳐져 있어 모든 인과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햅타포드들은 신인가? 루이스가 햅타포드와 직접 대면하는 장면에서 햅타포드는 어떤 신과 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햅타포드들은 신이 아니다. 그들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처 입고, 소멸하는 존재이다. 그들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순간을 사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햅타포드의 언어를 알아가면서 얻게 되는 미래를 바라보는 능력, 그 예지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능력일 것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길다/짧다는 의미가 없다. 인간이 느끼는 희노애락의 감정도 의미가 없거나 일시적일 뿐이며, 혹은 잘못된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 환상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존재이다.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벌 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결여했기 때문에 벌 받는 존재인 것이다.
왜 <당신 인생의 이야기 the story of your life>인가? 아이의 미래가 고통스럽게 펼쳐질거라는 것을 내가 안다고 해도 그 아이의 도래, 파도처럼 덮쳐오는 미래의 도래를 나는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래하는 미래에 대해 내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실행하는 것뿐이다. 이언과의 결혼이 파국을 맞이하고 자신의 아이가 결국 병들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더라도, 그 미래의 도래를, 그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들의 도래를 루이스가 어찌 막을 수가 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왜 도래, 도착(Arrival)인지, 소설의 제목이 왜 <네 인생의 이야기>인지 다시 한번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들의 도래, 도착은 당신의 삶을 파도처럼 덮칠 것이고 당신을 변화시키겠지만, 당신은 그들의 도래를 막을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앞에 펼쳐지는 미래를 신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자신의 삶에서 어떤 고통 - 루이스의 경우, 이언과의 파혼, 아이의 죽음-의 필연성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필연성의 그물로 얽혀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필연성의 그물을 영원의 관점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이 '자유의지'를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의지'를 마치 개인이라는 개체의 무제약적인 선택과 행위의 의지라고 말이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이 우주적 법칙으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이 우주의 필연의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란 이 필연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초한 의지이지 않은가? 이 우주의 필연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 - 이를 스피노자는 개인의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체험이 만들어내는 상상, 환상이라는 1종 인식에서 벗어난 3종 인식이라 하였다. 루이스는 햅타포드의 언어를 인식하면서 사건의 도래로서의 미래를 인식하고 그 미래로 자신을 기꺼이 접속(contact)한다.
스토아적 현자는 이 우주의 필연성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 들인다. 세계의 모든 것이 서로 섞이고 해체되고 변형되고 혼합되는 것은 우주의 필연성이다. 그 수준에서는 모든 것이 혼합물일 뿐이다. 슬픔과 기쁨 등등의 파테이아(patheia)는 우주적 필연성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관념이거나 환상일 뿐이며, 그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상처준다. 이 정념, 이 주관적 관념과 환상에서 벗어 날 것(a-patheia), 그리하여 기꺼이 우주적 필연성과 하나가 될 것, 스토아적 현자는 어떤 삶의 지혜를 말한다.
루이스는 미래에 도래하는 아이에게 '네 인생의 이야기'가 있음을, 각자의 인생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그 인생의 이야기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 인생의 이야기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단편은 장편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영원은 순간이며, 순간은 또한 영원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글을 읽으니 정리가 되는 느낌이네요. 많이 배웁니다. 1년 동안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덕분에 영화와 책을 같이 보며 알지 못하고 넘어갔던 부분들을 새롭게 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네 양선생님과 함께 해서 더 풍성한 모임이 될 수 있었습니다.
2015년에도 함께 배움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고 따스한 연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