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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4장 11-16절. 교인들의 모범이 되라
11절.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Prescribe and teach these things.
Παράγγελλε ταῦτα καὶ δίδασκε.
command these things and teach
‘명하고’(Παράγγελλ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command) 항상 명하라는 것이고, ‘가르치라’(δίδασκε)도 현재 명령형으로서(teach) 항상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1. 본 절은 목회자인 디모데가 항상 잘못된 금욕주의를 경계하고(1-5절), 경건 생활에 대한 바울의 교훈을(6-10절) 명령하고 항상 잘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12절.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New American Standard Bible: Let no one look down on your youthfulness, but rather in speech, conduct, love, faith and purity, show yourself an example of those who believe.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μηδείς σου τῆς νεότητος καταφρονείτω,
no one your the youthfulness let despise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에서 동사(καταφρονείτω)는 현재 명령형으로서(let despise) 언제나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원형( καταφρονέω)은 ‘아래로’(κατά)란 접두어와 ‘생각하다’(φρονέω)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ἀλλὰ τύπος γίνου τῶν πιστῶν ἐν λόγῳ, ἐν ἀναστροφῇ, ἐν ἀγάπῃ, ἐν πίστει, ἐν ἁγνείᾳ.
but pattern be for the believers in speech, in conduct, in love, in faith, in purity
‘본이 되어’에서 동사(γίνου)는 현재 명령형으로서(be) 항상 본이 되라는 뜻입니다.
1. ‘연소함’이란 단어(νεότητος)는 군에 입대할 20세에서 40세까지를 가리키고(Irenaeus by Ramsey), 디모데가 루스드라에서 바울에게 부름받은 때가 AD 49년경이므로, 이 때 디모데는 38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연소함을 말한 이유는 디모데가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 ‘본’이란 말(τύπος: type)은 형판(型板)으로 찍어낸 도장(stamp struck by a die)을 가리키는데, 이 형판으로 진흙을 찍어내면, 수백 수천개의 동일한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디모데가 주님을 닮아서 본을 보이면, 에베소 교인들은 목회자인 디모데를 닮은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3. 모범적인 목회자는 교인들을 권위적인 말로써 강압하지 않고, 사랑으로 모범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마치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을 억압하지 않고, 사랑으로 돌보고 기르는 것과 같습니다.
선한 목자도 양들을 거칠게 대하지 않고, 푸른 풀과 맑은 시냇물로 인도하고, 악한 이리로부터 보호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잘못된 목회자는 양들을 억압하고 협박하여 노동과 물질을 착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4.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3절에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교인들을 주장하는 자세로 억압하는 리더쉽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목회자는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고 양무리의 본이 되는 지도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맥스 드 프리(Max De Pree)는 <권력 없는 리더십은 가능한가?>라는 책에서 참된 지도자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힘으로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참된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5. 바울 사도도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라고도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0:33)
우리 예수님께서도 최후의 만찬석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3:15).
즉 참된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목회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교인들을 억압하고, 협박하고, 노동과 물질을 착취하려는 사람은 악한 이리요 거짓 목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6. 말과 행실에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말로써 설교는 섬기라고 하면서 훌륭하게 잘하는데, 실제 행실로는 교만하게 억압하고 노동과 물질을 착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는 설교와 말을 은혜롭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4장 6절에서 “너의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목회자는 설교하는 말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도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어려운 교인들을 찾아가서 심방하고, 여러 면에서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만일 말은 은혜로우면서도 행실이 악하면, 디도서 1장 16절 말씀처럼 “말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 양육을 위해서 자녀 사랑 학교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노인들을 위해서 요양보호 사역을 하고, 병든 성도들을 위해서 병원과 협력하여 물리치료와 목욕 봉사를 하고, 각종 협력 기관과 함께 보일러 수리, 가전제품 수리, 빨래와 청소하기, 도배 장판 해주기 등 실제 도움이 되는 교회 사업들을 합니다.
7. ‘사랑’(ἀγάπῃ)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을 가리키고, 육정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목회자가 교인들 대하는 기본자세입니다.
실제로 목회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듯한 ‘아가페 사랑’을 목사의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8. ‘믿음’(πίστει)이란 하나님과 교인들을 대하는 신실한 태도요,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이런 신뢰를 주지 못한다면, 어떤 말이나 행동도 감화를 주지 못합니다.
9. ‘정절’(ἁγνείᾳ)이란 이성적인 면에서 순결을 가리키며, 뿐만 아니라 물질에 대해서도 깨끗한 것을 가리킵니다.
젊은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이성적으로 깨끗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물질면에서 정말 깨끗해야 합니다.
물론 교인들이 명절 같은 때나 추수 때 선물을 주는 것은 받아야 하겠지만, 장사하는 성도가 취급하는 물건에 욕심을 가지고, 장사할 물건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됩니다.
13절.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Until I come, give attention to the public reading of Scripture, to exhortation and teaching.
내가 이를 때까지
ἕως ἔρχομαι,
until I come,
동사(devote)는 현재형입니다(I come).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πρόσεχε τῇ ἀναγνώσει, τῇ παρακλήσει, τῇ διδασκαλίᾳ.
devote yourself to the public reading of Scripture, to exhortation and teaching.
‘전념하라’(πρόσεχ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devote yourself to) 계속 전념하라는 뜻이고, 원형(προσέχω)은 ‘붙들다, 돌아서다, 주의하다, 전념하다’( hold to, turn to, pay attention to, devote myself to)는 뜻입니다.
‘읽는 것’(ἀναγνώσει)이란 ‘인식하는 것, 읽는 것, 회당이나 교회에서 율법서나 선지서를 공적으로 읽는 것’(recognition, reading; public reading of the law and prophets in synagogue or church)을 가리킵니다.
1. ‘내가 이를 때까지’란 3장 14절에서 바울이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란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즉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서 풀려나서 속히 에베소 교회에 가기를 바라는데, 바울 사도가 에베소교회에 이를 때까지 그 동안에 디모데 목사가 교회에서 성경을 읽고 권면하고 가르치는 목회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읽는 것’이란 교회 공예배에서 성경을 읽는 것을 가리킵니다.
NIV, ESB, NRSB, NLT, BSB 등에는 ‘성경을 공적으로 읽는 것’(public reading of Scripture)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회당 예배에서 성경을 읽으셨고(눅 4:16), 바울 사도 당시 초대교회에서도 성경을 공적으로 읽었습니다( 골 4:16).
3. ‘권하는 것’이란 성경 말씀에 따라 믿음과 행실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권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후서 2: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고린도후서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에베소서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요한계시록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4. ‘가르치는 것’이란 성경을 원리적으로 확실하게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61장 1-3절을 읽으시고, 이 말씀을 잘 설명하시고,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눅 4:16-30)
베드로도 요엘서 2장 28-32절 말씀을 인용하고 잘 설명하고 가르치고, 권면했습니다. (사도행전 2:16-42).
바울 사도는 수많은 곳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고, 설명하고 잘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사도였습니다.
예컨대, 로마서 4장 6-8절에서 다윗의 글(시 32:1)을 인용하여, 율법 행위로 인한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경우들입니다.
5. ‘전념하라’는 것은 몰두하고 헌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pay attention to, devote myself to).
즉 목회자는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목회자는 기도하는 것과 심방하는 일에도 집중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역자들끼리 모여서 정치하고 파당을 짓고, 다른 정치 세력자를 죽이려고 하는 일이나 놀러 다니는 일에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6. 요즘 말로 ‘권하는 것’은 대중 설교나, 심방 설교를 가리키고, ‘가르치는 것’은 주일학교에서 성경공부 하는 것과 신학교육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일학교는 영아부나 유치부나 유년부나 초등부나 중등부나 고등부 뿐만 아니라, 장년부도 본예배 전에 하는 장년부 성경공부를 가리키고, 새신자부나 주간에 하는 성경공부 등을 가리킵니다.
7. ‘전념하라’는 것은 열정을 가지고 성도들을 권하고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목사에게 어떤 교회를 맡겨주시면, 꼭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는데, 목회자는 이런 부모의 심정으로 열정을 가지고, 교인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기도하고 설교로 권면하고, 가르치고, 심방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올바로 목회하려면 너무나 시간이 없기 때문에, 목사들끼리 놀러간다거나, 교인들과 놀려갈 시간이 없고, 더구나 정치하면서 반대세력을 죽이려는 일을 할 마음과 시간이 없습니다.
고흥군에서는 대 홍수로 교인들의 집과 사업체가 물에 잠겨서 목사와 교인들이 복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그 노회 목사들이 놀려가려고 회의하는 대단히 불쾌한 일도 있었습니다.
14절.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Do not neglect the spiritual gift within you, which was bestowed on you through prophetic utterance with the laying on of hands by the presbytery.
네 속에 있는 은사-- 가볍게 여기지 말며
μὴ ἀμέλει τοῦ ἐν σοὶ χαρίσματος,
not be negligent of the in you gift
‘가볍게 여기지 말라’에서 동사(ἀμέλει)는 현재 명령형으로서(be negligent) 언제나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ὃ ἐδόθη σοι διὰ προφητείας
which was given to you through prophecy
직역하면 ‘그것은 예언을 통하여 너에게 주어진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동사(ἐδόθη)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given) 과거에 확실하게 주어진 틀림없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μετὰ ἐπιθέσεως τῶν χειρῶν τοῦ πρεσβυτερίου.
with laying on of the hands of the elderhood
직역하면 ‘장로회의 안수와 함께’라는 뜻이고, 한글번역은 풀어쓴 번역입니다.
1. ‘네 속에 있는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했는데, ‘은사’(χαρίσματος)란 은혜로 주신 선물을 뜻하며, 성령께서 나누어주신 것을 가리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은사를 가리키며(로마서 5:15, 6:23), 좁은 의미에서는 방언이나 병 고치는 것 같은 특수 은사를 가리킵니다(고전 12:9-10).
디모데 목사는 장로회에서 안수받을 때 예언을 통하여 은사를 받았습니다.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직분에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 충성했다고 칭찬하셨고,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불충성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마태 25:14-30).
2. ‘장로회에서 안수받을 때’라는 것은 디모데가 에베소교회 장로회에서 안수받을 때를 가리키는데, 이때 바울 사도와 에베소교회 장로들이 디모데 목사에게 안수하여 목사로 임직한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는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 해변으로 불러서 함께 기도한 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사도행전 20:17 이하).
‘장로의 회’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오늘날의 노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수’( ἐπιθέσεως τῶν χειρῶν: laying on of the hands)란 머리에 손을 얹어서, 임직하고 축복하고 병을 고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야곱은 임종시에 자손들에게 안수하여 축복했고(창 48:14), 레위인을 임직할 때(민 8:10), 모세가 여호수아를 임직할 때(민수기 27:23, 신 34:9), 병을 고칠 때(왕하 4:34, 5:11), 속죄물에 죄를 전가할 때(레 4:29, 24, 33 등) 안수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성직자를 임직할 때(사도행전 6:6, 13:3). 축복할 때(마가 10:13), 병을 고칠 때(마가 6:3, 누가 4:40 등), 성령의 은사를 줄 때(사도행전 8:17, 19:6) 안수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 목사에게 안수하여 다시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딤후 1:6).
그러나 바울 사도는 디모데 목사에게 함부로 안수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딤전 5:22).
3. ‘예언’(προφητείας: 預言)이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 주신 말씀을 가리키는데, 그 내용은 교훈의 말씀, 경고의 말씀, 미래에 대한 예고의 말씀 등입니다.
한문 성경이나 일본어 성경도 미래에 대한 예(豫)를 쓰지 않고, 예탁하고 맡길 예(預)를 써서 예언(預言)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언이란 미래에 대한 예언을 가리키기도 했으나(사도행전 11:28, 21:10, 22:25, 27:23-24), 성령의 감동과 능력과 지혜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을 뜻했습니다. (고전 12:8-10, 14:3, 24)
15절.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ake pains with these things; be absorbed in them, so that your progress will be evident to all.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ταῦτα μελέτα, ἐν τούτοις ἴσθι,
these things ponder, in them be absorbed
직역하면 ‘이것들을 주의하고, 그것들에 열중하라’는 뜻입니다.
‘주의하고’(μελέτα)는 현재 명령형으로서(ponder) 계속 주의하고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열중하라’(ἴσθι)도 현재 명령형으로서(be absorbed) 계속 열중하라는 뜻이고, 원형(εἰμί)은 원래 ‘존재하다, 있다’(exist, I am)는 뜻인데, 특별히 ‘한계 없이 꾸준히 나가는 것’(properly "straight-forward" being without explicit limits)을 가리킵니다.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ἵνα σου ἡ προκοπὴ φανερὰ ᾖ πᾶσιν.
so that your the progress evident may be to all
직역하면 ‘너의 진보가 모두에게 나타나지게 되도록’이란 뜻입니다.
‘나타나지게 되도록’에서 동사(ᾖ) 현재 가정법 동사로서( may be) 계속 나타나지게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1. ‘이 모든 일’이란 12-14절에서 말한 대로,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고,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전심전력하라’(μελέτα, ἴσθι)는 것은 마음을 다해 집중하고(μελέτα), 전력을 다해 헌신 열중하라(ἴσθι)는 뜻입니다.
‘성숙함’(προκοπὴ)이란 ‘앞으로’(πρό)란 접두어와 ‘자르다’(κόπτω)란 동사의 합성어로서, 앞길을 막는 가시나무를 도끼로 자르면서 전진하는 것(advancement by chopping down whatever impedes progress)을 가리킵니다.
이전 한글 개역 성경에는 ‘진보’(progress, advancement)로 번역했습니다.
16절.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Pay close attention to yourself and to your teaching; persevere in these things, for as you do this you will ensure salvation both for yourself and for those who hear you.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ἔπεχε σεαυτῷ καὶ τῇ διδασκαλίᾳ,
give heed to yourself and to the teaching
직역하면 ‘네 자신과 그 가르침에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살펴’(ἔπεχ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give heed) 항상 주목하고 주의하라는 뜻이고, 원형(ἐπέχω)은 어디에 눈을 고정시키고(hold fast, hold toward), 주의 깊게 보는 것을 (pay attention, give heed)가리킵니다.
이 일을 계속하라.
ἐπίμενε αὐτοῖς·
continue in them
‘계속하라’(ἐπίμεν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continue) 항상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τοῦτο γὰρ ποιῶν, καὶ σεαυτὸν σώσεις, καὶ τοὺς ἀκούοντάς σου.
this for doing, both yourself you will save, and those hearing you
직역하면 ‘왜냐하면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네가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행함으로’(ποιῶν)는 현재분사로서(doing) 항상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듣는’(ἀκούοντάς)도 현재분사로서(hearing) 현재 듣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원하리라’(σώσεις)는 미래형으로서(you will save) 구원할 것을 가리킵니다.
1.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란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회자가 먼저 자신과 설교에 주목하여, 자기 성찰을 하라는 뜻입니다.
목사가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은 자신의 설교로 교인들만 가르치려 하고, 정작 자신의 성찰을 등한히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장 큰 죄가 백성들에게는 율법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은 율법을 범하는 데 있었습니다.
로마서 2:21-22.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예수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첫째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우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3:3-4.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고흥군에서 교인들은 홍수로 집이 잠기고, 가게가 물에 잠겨 온 교인들이 나서서 구호 활동을 하고 있는데, 노회 목사들이 구호 활동에 참여하기는커녕 모여서 놀러가는 회의를 하고 있는 파렴치한 모습도 있었습니다.
2. ‘계속하라’는 것은 목회자가 자기 성찰과 말씀 실천을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먼저 자기 성숙과 진보를 이룩할 수 있고, 그래야 교인들의 성숙과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회자가 먼저 자기 성숙과 진보를 이룩하면, 교인들이 그것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15절에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목사가 성숙하고 성장해 가는 것만큼 교인들이 그 만큼 성숙하고 성장해 간다는 뜻입니다.
3. “네 자신을 구원하고,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살아있는 생물은 성장해가고, 죽은 생물은 성장이 멈춘 것처럼, 목회자가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영적 생명이 있고, 교인들도 성장해야 영적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천국 문을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들도 못 들어가게 한다고 했는데(마태 23:13), 기독교 목사가 자신의 성찰과 성장을 하지 않으면, 교인들도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성찰과 성장이 없으면, 결국 영적으로 죽은 것이고, 천국 영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영적인 성장을 계속하면, 천국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5-11.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님의 충만한 인도를 받으시고, 날마다 성경 말씀에 은혜를 받아서 생명 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도 날마다 구원하고, 가족들과 자손들과 교인들도 날마다 구원하는 복된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