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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2장 20-26절. 금그릇 같이 쓰임 받는 일군이 되라
20절.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in a large house there are not only gold and silver vessels, but also vessels of wood and of earthenware, and some to honor and some to dishonor.
큰 집에는
ἐν μεγάλῃ δὲ οἰκίᾳ,
in great now house,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있어
οὐκ ἔστιν μόνον σκεύη χρυσᾶ καὶ ἀργυρᾶ,
not there are only vessels gold and silver
‘있어’(ἔστιν)는 현재형으로서(there are) 언제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ἀλλὰ καὶ ξύλινα καὶ ὀστράκινα,
but also wooden and earthen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καὶ ἃ μὲν εἰς τιμὴν, ἃ δὲ εἰς ἀτιμίαν·
and some indeed unto honor, some however dishonor
동사는 없으나 좋은 번역입니다.
1. ‘큰 집’이란 교회를 가리킵니다.
큰 집에는 두 가지 그릇이 있는데, 하나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이고 다른 것은 ‘나무나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은 귀하게 쓰이고’,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은 천하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귀하게 쓰이는 그릇’은 바울이나 디모데를 따라 정통 신앙생활을 하는 사역자들을 가리키고, ‘천하게 쓰는 그릇’은 영지주의 이단자들을 추종하는 잘못된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과 디모데를 추종하는 사역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귀하게 쓰임받는 사역자들이고, 후메네오와 빌리도를 추종하는 교사들은 마귀의 인도를 받는 멸망의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지주의 이단자들은 구약의 고라당이 멸망당한 것처럼 장차 주님 재림때 지옥 멸망을 당할 저주의 자식들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9장 21-23절에도 영광 받기로 예비된 귀한 그릇이 있고, 천히 쓰이는 진노의 그릇이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영지주의적 방탕 생활을 회개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2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refore, if anyone cleanses himself from these things, he will be a vessel for honor, sanctified, useful to the Master, prepared for every good work.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ἐὰν οὖν τις ἐκκαθάρῃ ἑαυτὸν ἀπὸ τούτων,
if therefore anyone shall have cleansed himself from these
‘깨끗하게 하면’(ἐκκαθάρῃ)은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shall have cleansed) 단호하게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ἔσται σκεῦος εἰς τιμήν,
he will be vessel for honor
‘되어’(ἔσται)는 미래형으로서(he will be) 장차 될 것을 가리킵니다.
거룩하고
ἡγιασμένον,
having been sanctified
‘거룩하고’(ἡγιασμένον) 완료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sanctified) 완전히 거룩해진 것을 가리킵니다.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εὔχρηστον τῷ δεσπότῃ,
useful to the Master
‘합당하여’(εὔχρηστον)는 ‘유용하여, 매우 유용하여’(useful, very profitable)를 뜻합니다.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εἰς πᾶν ἔργον ἀγαθὸν ἡτοιμασμένον.
for every work good having been prepared
‘준비함이 되리라’(ἡτοιμασμένον)는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prepared) 이미 준비함이 된 것을 가리킵니다.
1.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란 후메네오와 빌레도가 추종한 영지주의 이단 교리 즉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잘못된 주장들과 방탕한 행실로부터 벗어나서 교리적으로나 행실도 거룩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란 아무리 영지주의 이단자들을 추종한 잘못된 교사들이라고 할지라도, 이단 사상과 죄악된 행실을 회개하고, 영육간에 깨끗하게 되면, 좋은 그릇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귀히 쓰는 그릇의 세 가지 특성이 나와 있는데요, ① 거룩하고, ②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고, ③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주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주님의 제단에 바쳐질 수 있는 흠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의 자유를 주장하여 방탕한 생활을 했고요, 오늘날 자유주의자들도 자유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나 사역자들은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져서 성령님과 동행하고, 주님께 쓰임받아야 합니다.
둘째,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다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자유를 주장하면서 주님을 버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만, 정통신앙을 가진 성도들과 사역자들은 기도와 말씀 가운데서 성령님의 인도로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쓰임받는다’는 것은 주님이 쓰시기에 유익한(useful)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종들은 칭찬을 받고, 그렇지 않는 무익한 종들은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마 24:45-51)
셋째,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된다’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의 자유주의와 방탕한 생활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한 사람은 주님이 쓰시고, 목회적인 선한 열매들과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후메네오와 빌레도 같이 진리에 그릇되고 방탕한 자들은 냄새나는 악한 열매를 맺지만, 바울과 디모데를 따라 정통신앙과 거룩한 생활을 하는 사역자들과 성도들도 선한 목회적인 열매와 아름다운 행실이란 성령의 열매들을 맺고 가정과 자손이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올바른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고, 자유주의 신앙을 잘 분별하고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22절.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flee from youthful lusts and pursue righteousness, faith, love and peace, with those who call on the Lord from a pure heart.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τὰς δὲ νεωτερικὰς ἐπιθυμίας φεῦγε,
the now youthful lusts flee
직역하면 ‘청년의 정욕들을 피하라’는 뜻입니다.
‘피하고’(φεῦγ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flee) 항상 피하라는 뜻입니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δίωκε δὲ δικαιοσύνην, πίστιν, ἀγάπην, εἰρήνην
pursue now righteousness, faith, love and peace,
‘따르라’(δίωκ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pursue) 항상 따르고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μετὰ τῶν ἐπικαλουμένων τὸν Κύριον ἐκ καθαρᾶς καρδίας.
with those calling the Lord from pure heart
‘부르는’(ἐπικαλουμένων)은 현재분사로서(calling) 언제나 부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1.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에서 정욕(ἐπιθυμίας: lusts)이란 복수형으로서 ‘청년이 갖는 여러 가지 정욕들’을 가리킵니다.
이 청년의 정욕들은 ‘청년들의 나쁜 욕망들’(the evil desires)을 가리키는데, 특히 성적인 정욕을 가리키고, 지나친 식욕과 육체적 쾌락 추구와 돈에 대한 집착과 헛된 명예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욕망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청년의 정욕들을 피하라(φεῦγε: flee)는 것은 특히 성적인 욕망과는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대적해야 하지만, 성적인 유혹은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하여, 옷을 벗고 도망했습니다. (창 39:10-12)
또한 ‘피하라’(φεῦγε)는 동사가 현재 명령형(flee)인 것은 항상 피하고 언제나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2.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란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사람들은 피하고, 교회 안에서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나 사역자들과 함께 친교하라는 뜻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교역자들 중에도 모여서 먹고 놀기를 좋아하고 정치 그룹을 형성하려는 교역자들이 있는 반면에, 기도하고 성경 연구하고 심방하기를 좋아하는 순수한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성도들이나 교역자들도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친교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순수한 목회자들과 친교하면, 목회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경험들을 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3.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에서 ‘따르라’(δίωκ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pursue) 항상 따르라는 뜻입니다.
‘의’는 불의와 반대되고, ‘믿음’은 불신앙과 반대되고, ‘사랑’은 미움과 반대되고, ‘화평’은 불화나 싸움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교역자들도 모여서 먹고 놀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반대 세력자들을 불의와 거짓으로 모함하고, 신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불신앙과 세속적인 방법으로 작당 모함하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화평을 도모하지 않고, 싸우고 분열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교역자들은 공의로운 길을 가고, 서로 신뢰하는 길을 가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화평한 길을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디모데 목사에게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에는 ‘화평’ 대신에 ‘경건과 인내와 온유’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즉 악한 교역자들과 서로 화평하게 지내지는 못할지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악한 교역자들을 온유하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23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refuse foolish and ignorant speculations, knowing that they produce quarrels.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τὰς δὲ μωρὰς καὶ ἀπαιδεύτους ζητήσεις παραιτοῦ,
the now foolish and ignorant speculations refuse
‘버리라’(παραιτοῦ)는 현재 명령형으로서(refuse) 언제나 버리고 거절하라는 뜻입니다.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εἰδὼς ὅτι γεννῶσιν μάχας·
having known that they produce quarrels
직역하면 ‘그것들이 다툼을 일으키는 것을 앎으로’란 뜻입니다.
‘나는’(γεννῶσιν)은 현재형으로서(they produce)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들은 항상 다툼을 일으키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앎이라’(εἰδὼς)는 완료 분사형으로서(having known)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는 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에베소 교회에 침투하여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일으킨 데 대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이런 헛된 변론과 언쟁에 휘말리게 되면 교회가 혼란에 빠지고 어려워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고’의 헬라어(μωρὰς)는 ‘머리가 둔한, 이해력이 둔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brainless,; dull in understanding; lacking a grip on reality) 것을 가리킵니다.
'무식한'의 헬라어(ἀπαιδεύτους)는 ‘훈련이나 교육을 받지 못한’( untrained, uneducated)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어떤 분야의 전문 교수가 무식한 사람과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면, 서로 말이 안 통하고, 시간만 낭비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런 변론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는 것은 이단과의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결국 교회에 다툼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미련하고 무식한 자와 변론과 다툼을 하는 것은 아무리 올바르고 지혜로운 답변을 해주어도 끝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29장 9절에는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목회서신에는 이단자와의 변론을 금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딤전 1:4, 4:7, 20, 딤후 2:16, 23, 딛 3:9).
그래서 디도서 3장 10절에는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24절.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 Lord's bond-servant must not be quarrelsome, but be kind to all, able to teach, patient when wronged,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δοῦλον δὲ Κυρίου οὐ δεῖ μάχεσθαι
servant but of Lord not it behooves to quarrel
직역하면 ‘그러나 주의 종은 다투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투는 것이’(μάχεσθ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quarrel) 언제나 다투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땅하지 않다’에서 동사(δεῖ)는 현재형으로서(it behooves) 언제나 마땅치 않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ἀλλὰ ἤπιον εἶναι πρὸς πάντας,
but gentle to be toward all
직역하면 ‘그러나 모든 사람에 대해 온유한 것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온유한 것이’에서 동사(εἶν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온유한 것이 언제나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διδακτικόν, ἀνεξίκακον,
able to teach, forbearing
동사가 아니고 둘 다 형용사입니다.
1. ‘주의 종’은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가리켰고(렘 7:25, 단 9:6, 암 3:7), 신약에서는 교회의 전도자와 사역자를 가리켰습니다( 롬 1:1, 갈 1:10, 빌 1:1, 딛 1:1).
원래 이 종이란 빚을 져서 남의 집에 종이 된 사람인데, 주인집에서 아내를 얻고 자녀들을 낳아서, 희년이 되어도 자유하지 않고, 주인집에서 평생 섬기며 살기로 다짐한 종을 가리킵니다.
이때 주인은 이 종의 귀를 그 집 문에 송곳으로 뚫고, 평생 그 집 몸종으로 살게 했습니다. (신 15:16-17)
이처럼 주의 종은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종이 되어서 평생 주인(주님)을 섬기고, 주인집 (교회)에서 평생 섬기는 사역자를 가리킵니다.
2. ‘마땅히 주의 종이 다투지 않는다’는 말에서 ‘다툰다’는 말은 주인에 대해 쓰인 말이 아니고, 주인 집사람들 즉 교인들과 다투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주의 종인 목회자와 사역자는 주님의 집인 교회의 사람들인 교인들과 마땅히 다투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해야 한다’는 것도 수직적으로 주인에 대한 말이 아니고, 수평적으로 모든 사람들 즉 교인들과 다투지 않고 온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천하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민 12:3)
우리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마 11:29)
그러므로 주의 종인 목회자나 전도자는 주의 집사람들인 교인들에게 주님처럼 온유한 자세로 교인들을 잘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의 종인 목회자나 교역자가 교인들을 자꾸 야단치면, 교인들이 상처를 받고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모나 유모와 유치원 교사가 어린아이를 가르칠 때, 아이가 실수해도 자꾸 용서하고, 온유한 태도로 인내하면서 잘 가르칩니다.
이와같이 교회에서 주의 종들도 교인들을 상대로 온유하고 인내하면서 잘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라’고 했습니다.
3.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섬기는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여 잘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놓고 인기 위주로 설교해서는 안 되고, 본인이 먼저 성경을 잘 연구하고, 성경의 올바른 뜻을 깨달아서, 그것을 교인들에게 잘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며,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의 종들이 때를 따라 집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45-46.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 ‘참는다’(ἀνεξίκακος)는 단어는 ‘참는다’(ἀνέχομαι)는 동사와 ‘악한’( κακός)이라는 형용사의 합성어로서 ‘악을 참는 것’(enduring evil)인데, 특별히 부당하게 취급당하고 부당하게 해를 입은 것을 참는 것을 가리킵니다. (enduring especially when treated unjustly, i.e. when inflicted with undeserved injury)
원래 종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잘 참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부당하게 다루지 않으시지만, 주의 종이 교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장로가 어떤 광고 자료를 오해하여 목사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부당하게 공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목사가 고대 나오고 목회자가 되었으나, ‘고목회’에 들지 않았는데, 신문 광고에 고목회 회원 명부에 자기 담임 목사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 목사가 고대 나온 것이 거짓말이었다고 고발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그 목사가 고대에 졸업증명서를 떼서 제출하고, 고목회에서 노회와 교회에 해명서를 제출해서 결과적으로는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 목사가 많은 고통을 당했고, 교회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의 종은 대항해서 싸우기보다는 잘 참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이 사도 된 표는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후 12:12)
심지어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라는 비난까지 받았으나, 잘 참고 자신이 참 사도인 것을 잘 설명하고, 전도와 교회 설립과 부흥의 결실도 자신이 참 사도인 것을 입증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5-6.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줄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5. 그런데 주의 종이 잘못하는 사람에게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온유함으로 훈계를 해야 합니다. (다음 절)
25절.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ith gentleness correcting those who are in opposition, if perhaps God may grant them repentance leading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ἐν πραΰτητι παιδεύοντα τοὺς ἀντιδιατιθεμένους,
in gentleness disciplining those opposing
‘거역하는’(ἀντιδιατιθεμένους)은 현재분사로서(opposing) 현재 거역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훈계할지니’(παιδεύοντα)도 현재분사로서(disciplining) ‘항상 훈계하면서’란 뜻입니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μή ποτε δώῃ αὐτοῖς ὁ Θεὸς μετάνοιαν
lest ever may give them the God repentance
‘혹’(μή ποτε)이란 ‘혹 아마도’(if perhaps)란 뜻으로서 ‘--을 바라면서’(in the hope that)이란 의미입니다.
‘주사’(δώῃ)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may give) 하나님께서 확실히 주실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εἰς ἐπίγνωσιν ἀληθείας,
unto knowledge of truth
직역하면 ‘진리의 지식으로’란 뜻인데, 한글번역은 풀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1.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란 말씀은 교회에서 주의 종이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거역하는 자에 대해서는 온유함으로 훈계(징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할아버지가 손자를 아주 예뻐하지만, 손자가 파리채로 할아버지를 때리려고 하면, 할아버지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서도 ‘이놈 할아버지 때리면 안 돼’라고 혼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이단사상에 물들었거나 잘못된 교육을 받아서 목사에게 거역하고 대항하는 경우가 혹 있는데, 이럴 때 목사는 온유함으로 훈계하고 징계해서 올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한 장로가 목사가 오면 쫓아내는 버릇을 가졌는데, 어떤 목사가 부임해서 강하게 대하니까, 그 장로가 스스로 장로직을 사표 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사표를 수리하고 목회를 잘하니까, 나중에 그 장로가 장로 복귀를 해달라고 해서, 다시는 목사에게 대항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복직을 시켜주었습니다.
2. ‘하나님이 혹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에서 ‘회개함’( μετάνοια)이란 ‘마음의 변화’(change of one's mind)를 가리키는데, ‘회개한 후에는 마음과 생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after a change of mind, "think differently afterwards").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를 이단 괴수로 생각했으나 회개하고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이 바뀐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회개는 인간의 지식이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변화를 일으켜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주의 종들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면, 혹 성령님께서 감동하셔서 하나님이 거역하는 자들에게 회개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혹’(μή ποτε)이라는 말은 주의 종들이 이런 희망을 가지고(in the hope that), 온유함으로 가르치기를 잘하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3.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란 참된 회개가 결국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서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것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이단 괴수로 알았다가,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구세주이시라고 사상과 마음이 변화된 것을 가리키고, 베드로나 야고보 같은 유대인 신자들이 유대인만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국수주의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상과 믿음을 갖게 되는 변화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이단자들이 주의 종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상적 변화를 갖는 것을 ‘회개함’이라고 했습니다.
26절.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y may come to their senses and escape from the snare of the devil, having been held captive by him to do his will.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καὶ ἀνανήψωσιν ἐκ τῆς τοῦ διαβόλου παγίδος,
and they might come to their senses from the of the devil snare
직역하면 ‘마귀의 올무로부터 그들이 깨어나서’란 뜻입니다.
‘깨어나서’(ἀνανήψωσιν)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they might come to their senses) 갑자기 깨어나서 제정신이 드는 것을 가정한 말이고, 원형(ἀνανήφω)은 ‘다시’( ἀνά)란 접두어와 ‘깨어나다, 정신이 들다’( νήφω)란 동사( be sober)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ἐζωγρημένοι ὑπ’ αὐτοῦ εἰς τὸ ἐκείνου θέλημα.
having been captured by Him for the His will
직역하면 ‘그의 뜻을 위해서 그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란 뜻인데, 한글 번역은 좋은 번역입니다.
‘사로잡힌 바 되어’(ἐζωγρημένοι)는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captured) 이미 사로잡힌 바 된 상태를 가리키고, 원형( ζωγρέω)은 산채로 포획하는 것( to catch alive)을 가리킵니다.
여기 인칭대명사 둘(αὐτοῦ, ἐκείνου)은 마귀를 지칭하는 것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러면 ‘마귀에게 사로잡혀 마귀의 뜻을 따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글 공동번역과 새번역과 현대인 성경은 본 절을 “그리고 악마에게 사로잡혀 악마의 종노릇을 하던 그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가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고 번역했습니다.
1. ‘마귀의 올무’에 빠진 자들은 이단 사상에 빠져서 목회자에게 거역하고 대항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단사상에 물든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술 취한 자들이 술이 깬 것과 같이 제정신이 드는 것(return to soberness, recover sound sense)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하노라’의 원문(ἐζωγρημένοι ὑπ’ αὐτοῦ εἰς τὸ ἐκείνου θέλημα)은 한글 개정개역처럼(
having been captured by Him for the His will) 번역할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번역들은 ‘그들은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악마의 뜻을 좇았지만, 정신을 차려서 그 악마의 올무에서 벗어날 것입니다’(and that they will come to their senses and escape from the trap of the devil, who has taken them captive to do his will)로 되어 있습니다( KJV, NASB, NIV,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이 성경 등).
이 말씀은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목회자들을 거역했지만, 목회자들의 온유한 징계를 받아,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달은 후에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성령의 감화로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갑자기 제정신이 들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종들이 깨끗해야 하고, 다투지 않아야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징계해서, 저들이 성령의 감화로 변화되고 제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변화된 삶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들도 주의 종들로서 주님의 교회에서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해서 그들이 성령의 감화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