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인간>
마침내, 꿈을 향해 나아가다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나는 앞으로의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걱정과 긴장만이 있을 뿐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니 수행평가 하나하나마다 진로와 연계시켜야 하고 ‘진로’를 토대로 모든 활동들이 이루어졌다. 구체적인 진로는커녕 내가 어느 것을 잘하고 좋아하는지조차 몰랐던 나에게는 너무나 가혹했다. 진로에 대한 질문들은 계속해서 우리의 뒤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질문들을 항상 피하기 바빴다. ‘아직 1학년인데 괜찮겠지’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질문들에 답을 해야 할 때면 흥미가 있지도 않은 간호사, 공무원 같은 직업들로 답을 채워 넣었다. 동아리를 선택할 때도 이런 질문들은 계속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답을 찾기 위한 노력도 진행되지 않았다. 또 가혹한 시간이 찾아왔다. 어느 동아리를 가야 할지 고민했지만 고민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동아리 모집 포스터에 적힌 ‘면접 실시’라는 말이 빠른 포기를 도와주었다. 지원자 수에 따라 면접을 실시할지 안 할지 결정한다는 곳에도 일절 지원하지 않았다. 면접을 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면접이라는 것은 나에게 매우 큰 도전이었기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친한 언니들이 있는 역사 동아리에 가입하게 됐다. 진로에 대한 고민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언제든 진로가 생기면 관련 활동을 마련해 주겠다며 동아리 부장 언니가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이 열정에 힘입은 덕이었을까, 이쯤 되어서 나는 꿈을 하나 마련하게 되었다. ‘디자인 계열로 가야겠다.’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한 꿈은 아니었다. 옛날부터 미술 쪽에 관심을 두다가 현실을 생각하며 포기했던 꿈이었는데 다시 문뜩 떠올랐고 지금의 나로서는 이게 제일 흥미와 적성에 맞는 듯해 빠르게 결정한 진로였다. 진로에 대한 질문들에 쫓기듯 결정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계획으로 그다지 견고하지는 않은 진로설계였지만 진로를 하나 마련해두니 이제 어떠한 질문이 던져져도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고 탈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불안했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노력을 멈추었다. 매우 어설프게 정한 진로지만 어찌 됐든 정했다는 사실에만 안주하며 그 뒤로 정확히 어디 학과를 가야 할지, 어떤 전형이 있는지, 성적은 얼마나 나와야 하는지 등 진로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를 알아보지 않았다. 나의 꿈에 대한 확신 없이 학교에서 진행하는 활동들 하나하나를 이 꿈들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생기부는 채워졌지만 꿈을 향한 나의 자신감은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가진 꿈에 대해 대답하는 것이 더욱 두려워졌다. 내가 아는 얄팍한 지식으로 답을 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척들, 선생님, 친구들이 진로에 대해 질문할 때면 말을 얼버무리고 피하려 했다. 그러면서 빨리 이 질문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이 상태라면 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꿈에 대해 깊게 알아볼 필요성을 점차 느끼게 되었다.
내가 꿈을 향해 깊게 알아보아야겠다고 깨닫게 된 ‘큰 계기’는 따로 있다. 어느 날 엄마가 미술 학원에 다니며 입시미술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며 물은 것인데, 아무런 정보가 없던 나는 ‘입시미술’이라는 것을 들어보기만 했지 내가 해야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입시미술이 꼭 필요할까?라는 생각과 성적으로도 충분히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함께 단순하고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의 말을 듣고 진로에 관한 정보들을 조금씩 알아보게 되었다. 알아보니 확실히 입시미술을 하지 않고 성적으로만 좋은 대학을 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껏 디자인 계열로 진로를 정해놓고 입시미술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내가 어리석고 한심했다. 꿈이라는 내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여유롭게 뛰놀다가 현실을 마주하게 된 기분이었고 내가 진로에 대해 정말 많이 알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보고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술 학원에 다니겠다는 결정은 신중히 이루어졌다. 아무래도 시간과 돈을 들이는 과정이기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미술 학원을 다니겠다는 결정은 나에게 큰 도전이었다. 미술 학원을 다니려면 타지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살면서 혼자 타지를 나가본 적이 없던 나에게는 더욱 부담으로 다가왔다. ‘내가 입시미술에 소질이 있을까?, 지금 시작하면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금방 포기해 버리면 어쩌지?’ 갖가지 걱정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번은 내가 엄마에게 “내가 조금 다니고 학원 끊겠다고하면 어떡해? 돈 아깝잖아.”라고 말했다. 그때 엄마의 괜찮으니 안 맞으면 마음대로 그만둬도 된다는 별거 아닌 말이 든든하게 다가왔고,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 일단 다녀보자. 고민하다가 늦게 시작하면 더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부터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빨리 진로를 결정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학원을 다니게 되니 나보다 더 빠르게 꿈을 찾아서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또 다른 자극을 받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시작한 게 아닌 만큼 더욱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고삼’이라는 시기가 찾아왔고,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 오로지 꿈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이다. 하지만 학원도 계속 다니다 보니 지치기도 하고 게을러지기도 한다. 여전히 미래에 대한 확신이 안 서고 여러 가지 걱정도 든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의 걱정들이 나중의 현실이 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고자 한다. 지금의 노력이 나중에 큰 빛을 발할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계속해서 꿈을 향해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