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로에서 내려다 본 광주시 삼동은 미세먼지에 갇혀 버렸다.
▲조금 전에 헤어진 우회도로를 다시 만난다.
▲커다란 오동나무 두그루가 자라고 있고 14번 송전탑도 지난다.
▲송전탑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유명한 연리 소나무가 나온다.
▲연리지(連理枝)소나무: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자라면서 나뭇가지가 서로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로 엉켜져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연리지라 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효성 이 지극함을 나타내고 있으나, 현재에는 남녀간의 애뜻한 사랑을 비유하여 “사랑나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연리지에 대한 유래: 중국 춘추시대 송(宋)나라 강왕(康王)이 절세미인인 한빙(韓憑)의 부인 하씨(何氏)를 빼앗았다. 한빙이 이를 원망하자 그를 가두고 성단(城旦, 변방에서 낮에는 도 적을 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는 일을 하는 형벌)의 형벌을 내렸다. 한빙은 자살하고 말았는 데, 부인 하씨 역시 한빙과 합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왕과 함께 누대에 올랐을 때 아래 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화가 난 왕은 두 사람을 합장하지 않고 무덤을 서로 바라보 도록 만들게 했다. 그날 밤 두 그루의 개오동나무가 각각의 무덤 끝에 나더니, 열흘도 안 되어 아름드리나무로 자라 몸체가 구부러져 서로에게 다가가고 아래로는 뿌리가 서로 맞닿았다.(宿昔之間, 便有 大梓木, 生於二冢之端, 旬日而大盈抱, 屈体相就, 根交於下, 枝錯於上.) 그리고 나무 위에는 한 쌍의 원앙새가 앉아 하루 종일 떠나지 않고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울었다. 송나라 사람들 은 모두 슬퍼하며 그 나무를 상사수라고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상사수가 바로 ‘연리지’ 혹은 ‘연리목(連理木)’이다. ‘연리지’는 ‘비익연리(比 翼連理)’라고도 한다. 비익은 날개가 한쪽뿐이어서 암컷과 수컷의 날개가 결합되어야만 날 수 있다는 전설상의 새인 비익조를 말한다.
▲臨別殷勤重寄詞(임별은근 중기사):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으니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 량심지): 그 말에는 둘이서만 아는 맹서가 들어 있었지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 장생전): 칠월 칠석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 사어시):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인 말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 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 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 유시진):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 무절기):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연리지를 둘러본 다음 다시 누비길 따라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15번 송전탑
▲요곡산(幺谷山,358.5m)/요골산: 넓은공터 쉼터의자1우측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삼동 요골고 개로 내려가는 길인데, 지금은 뉴서울 골프장이 자리를 삼동에 있는 요골마을은 조선조 인 조 때 예조판서를 지낸 경주 김씨란 분이 나라에 공을 세운 대가로 남한산성에 딸린 땅을 포함한 골짜기 일부를 받았다고 하는데, '작은골'이라 하여 '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358.5m봉 이정표에서 지맥길은 좌측의 이배재로 간다.
▲송전탑을 설치한 이후 소나무를 심어 놓아 원상복구를 비교적 잘 해놓았다. ▲ NO17 송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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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조림된 어린 소나무 사이길 등로를 홀로 걷는다.
▲쉼터탁자의자. 최근에 설치한 듯한 쉼터의자도 보이고.
▲로프길, 자작나무 군락지를 지나다 보니 찻소리가 시끄럽군요.
▲제법 내리막이 이어지는 로프계단을 내려간다.
▲내리막길로 내려서니 이배재를 통과하는 육교가 나온다.
▲경기 광주시 목현동과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을 잇는 고개 이배재육교에 내려선다.
▲좌측은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방향
▲우측은 경기 광주시 목현동 방향 망덕산 가는 도로이고 이곳에서부터는 등산객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겨본이배재(二拜峙:260m)표석: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과 광주시 송정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성 남공단과 광주를 연결하는 338번지방도가 지나가며 망덕산(왕기봉)과 검단산,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로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고문헌에는 이보치(利保峙)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뜻은 조선시대에 남한산성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보장지(保障地)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라고 한다. 지명의 유래는 ‘절을 두번 하는 고개’라고 해서 이배재라 불렀다고 하는데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 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경복궁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 시 한번 절을 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조선조에 유학자로 이름을 날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서 임금이 있 는 한양 도성을 향해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두번 절을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1구간을 분기점에서 여기까지 올 계획이었는데, 사정이 생겨 2구간으로 진행하니 예전에 없 던 육교가 생겨 아주 편하다.
▲데크계단을 따라서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고가 다리로 건너와서 이배재를 뒤돌아본다.
▲로프 통나무계단으로 한참을 가파르게 올라간다.
▲이배재 고개에서 가파르게 오르니 멋진 소나무가 볼만하다.
▲이정표 계속되는 넓은 누비길 오르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