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으로는 가야 할 명성지맥 능선에 둘러싸인 승진종합훈련장이 내려다보이며,
▲좌측으로 모래벌판으로 곳곳에 통나무계단 따라 잠시 내려섰다가, 급하지 않은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좌측으로 모래벌판으로 곳곳에 통나무계단 따라 잠시 내려섰다가, 급하지 않은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명성산헬기장. 헬기장을 지나자마자 T자 명성산 갈림길 이정표이 나온다.
▲명성산갈림길에서 죄측 삼각봉이 마루금이나 우측으로 약300m비껴있는 명성산을 왕복한다.
▲명성지맥을 대표하는 명성산을 다녀오기 위해 우측의 등산로를 따른다.
▲명성산갈림길 쉼터의자. 등산안내도
▲명성산가는 능선에서 뒤돌아본 삼각봉과 억새밭으로 이어지는 명성지맥 주능선.
▲돌아본 삼각봉 방향으로는 가야 할 명성지맥 능선의 905봉과 옛 삼각봉이 나란히 조망
▲좌측 몽베르CC 뒤편으로는 불무산이 희미하게 조망
궁예(弓裔, 857?~918, 재위 901~918): 궁예는 신라 진골 왕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나라를 망칠 놈’이라는 예언과 함께 모진 인생역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힘과 재주로 사람을 모아 드디어 후고구려를 세워 왕이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 미륵으로 자처했으며, 관심법(觀心法)이라는 특유의 술책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그것이 지나쳤을까, 포악한 성격으로 주변의 인심을 잃고 마침내 부하인 왕건에 의해 내몰려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도솔천의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를 이어 중생을 구하러 세상에 올 것이다. 석가모니 열반 후 56억 7천만 년이 되는 때이다. 사람들을 저 위의 세상으로 데리고 올라갈 때, 그는 미륵불이 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미륵 상생신앙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미륵 하생신앙이 있다.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 도탄에 빠진 중생이 56억 7천만 년을 기다릴 수 없어지면 미륵보살더러 어서 오라 탄원한다. 미륵보살은 그 간청을 저버리지 못하고 이 세상으로 내려온다. 혼란한 시기, 스스로 미륵이라 부르며 나타나는 이들은 대체로 이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우리 역사상 미륵을 자처한 두드러진 예로 궁예를 들 수 있다. 901년에 개성에서 후고구려를 연 바로 그이다. 궁예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것이 관심법(觀心法)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 이 신통력이 그의 말년에 갈수록 포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 데 쓰였으니, 그가 애써 이룬 공업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도 이 관심법이었다. 915년, 궁예의 부인 강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 하여 충언을 올렸다. 그러자 궁예는 부인더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웬일이냐?”라고 응수하였다. 부인이 어처구니없어 하자,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라며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였다. 미치광이 같은 이런 짓으로 그는 두 아이의 목숨마저 빼앗았다. 미륵이 아니라 패륜의 극치였다. 심지어 궁예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왕건(王建)에게도 예의 관심법을 들이댔다. 반역을 모의하였다고 다짜고짜 윽박지르며, “관심법으로 이 일을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왕건을 아끼던 최응이라는 사람이 귓속말로 불복하면 위태롭다고 일러주었다. 그때야 분위기를 알아챈 왕건이 반역을 꾀했다고 하며 무릎 꿇었다. 궁예는 크게 웃으며 정직하다고 칭찬하며,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까지 내려 주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왕건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미륵으로 자처하며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궁예의 최후는 이 뒤에 바로 이어 닥쳐온다. 악행의 끝은 민심의 이반을 불렀지만, 기왕 악행을 일삼자면 왕건 또한 살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궁예는 바로 그 왕건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예의 삶과 역사 또한 승자에 의해 왜곡되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이 점은 궁예와 동시대에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워 ‘가련완산아(可憐完山兒)’가 된 견훤의 경우와 유사하다. 둘 다 미륵의 나라를 표방했지만, 인간의 세상에 용화세계를 만들지 못하고 좌절한 비운의 영웅들이었는지 모른다. 박로자 교수는 왕건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궁예를 '인격살인'했다고 주장한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그려졌던, 궁예가 부석사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 경문왕 초상화를 칼로 베는 장면도 부석사(의상) 중심의 화엄종과 금산사(진표) 중심의 법상종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다.궁예와 견훤이 미륵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법상종 계열의 민중불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왕건이나 신라 귀족들은 화엄종을 그 정신적 뿌리로 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궁예의 삶과 역사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 '뿌리를 잃은 절대권력은 무너진다'는 교훈은 변하지 않을 듯하다. 패자의 역사는 늘 초라하고 옹색하기 마련인 모양이다. 지금 우리들의 왕도 예전의 선(善)한 모습은 패권을 거머쥐며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백성들을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끝없는 다툼의 세계로 몰아넣었으니 앞날이 그리 평안해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명성산 전위봉 암봉을 올랐다가 내려가면
▲산안고개: 지명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의 안쪽에 있어서 산안고개가 아닌가 생각된다.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와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를 연결하는 비포장 도로상의 고개로 산정호수로 우회할 때 주로 이용되고 있으며, 명성산 산행코스중 하나이다.
▲로프구간 암반위로 가파르게 올라가면 명성산 정상이다.
▲명성산(鳴聲山:923m.울음산):전설에 의하면 왕건(王建)에게 쫓기어 피신하던 궁예(弓裔)가 이 산에서 피살되었다고 하며, 궁예가 망국의 슬픔을 통곡하자 산도 따라 울었다고 하는 설과, 주인을 잃은 신하와 말이 산이 울릴 정도로 울었다고 하여 울음산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는데, 지금의 산이름은 울음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광주산맥에 딸린 산으로 서울특별시에서 동북쪽으로84km 떨어져 있으며, 동쪽에 박달봉(800m)과 광덕산(廣德山:1,046m), 남쪽에 여우봉(620m)이 솟아 있다. 동쪽 비탈면에서 발원(發源)하는 도평천(都坪川)은 남쪽으로 흐르다가 영평천(永平川)에 합류하고, 북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하는 수계(水系)는 한탄강으로 흘러든다. 전체적으로 암릉과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동쪽은 경사가 완만하며, 남쪽에 있는 삼각봉 동편 분지에는 억새풀이 무성하여 1997년부터 매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억새꽃축제가 열린다. 정상에서는 남쪽으로 이어진 12봉 능선과 북쪽으로 오성산, 동북쪽으로 상해봉·대성산·백암산, 동쪽으로 광덕산, 동남쪽으로 백운산·국망봉을 모두 볼 수 있다. 남서쪽 기슭에는 국민관광지인 산정호수가 있고, 북쪽 기슭에는 용화저수지가 있다. 운천리에서 산정호수까지 버스가 운행되고, 산정리에서 여우고개를 지나 장암리에 이르는 지방도(地方道)가 남쪽 계곡을 지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성산 [鳴聲山] (두산백과)
명성산(鳴聲山:923m):경기도 포천시 이동면과 영북면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에 걸려 있는 산 으로 강원도 철원군의 중남부 갈말읍 신철원리에 위치한 산이다. 한북정맥에 속하여 대성산 · 복계산 · 광덕산 등을 잇는 산으로 험준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삼부연과 같은 명승지 외에도 석천곡(石泉谷) · 등용폭포(登龍瀑布) · 비선폭포(飛仙瀑布) 등이 있는데, 특히 가을 억새로 유명한 산이다.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명성산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데,『1872년지방지도』「철원구 방지도(鐵原九坊之圖)에는 부의 남동쪽 경계에 명성산(鳴城山)이 묘사되어 있다. 이곳은 궁 예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은 곳이다. 궁예가 918년에 왕건에게 쫓겨 이 산중에서 최후의 결 전을 벌이다가 전의를 상실하고 통곡하면서 군사들을 해산하였는데, 그 후부터 산에서 울음 소리가 들려와 명성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궁예왕굴(弓裔王窟)은 상봉에 위치한 자연동굴로 궁예가 왕건에 쫓겨 은신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항서받골(降書谷)은 궁예 군사에게 항복하는 항서를 받은 곳이라고 하며, 가는골(敗走 谷)은 궁예가 단신으로이 골짜기를 지나 평강으로 도망갔다고 하여 패주골, 또는 가는 골이 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눌치(訥雉)는 궁예가 도주하면서 흐느껴 울었다는 곳으로 느치라 고도 불린다. 또 다른 설은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로 향하다 바위산에 올라 엉엉 울었더니 산도 따라 울어 명성으로 불렸다고도 한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명성천(鳴聲 川)과 명성산억새꽃축제 등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다.
▲명성산정상 1등삼각점(△갈말24/1983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