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삼성그룹은 사무직, 소프트웨어직 등 다양한 직무에 200여명의 고졸 신입사원을 공개 채용하여 우리들의 학벌주의 고정 관념을 깨는데 일조했다. 다른 대기업들도 학력보다는 능력이 우수한 고졸 출신들에 대한 채용 규모를 늘리려고 한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야 지독한 대학 서열화 구조와 학벌주의 풍토의 틀에 갇혀 인성 교육보다는 입시 경쟁 교육만 강요하는 우리의 전근대적이고 비효율적인 교육 체제에 파열구가 생기고 있는 가 싶다.
대학 서열을 그대로 두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나라의 다른 기업들도 일본의 도요타나 소니, 삼성처럼 학벌 대신 실력만으로 직원을 선발하는 등 범국민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인 학벌 철폐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대학 서열을 그대로 두고서 학벌 철폐를 운운한다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교육 제도를 그대로 두고 국민들의 의식 개혁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한 발상을 토대로 필자는 1995년에 프랑스식 평준화 체제(파리 1대학부터 13대학까지 평준화 되어 있음)를 모델로 한 대학입시 평준화를 주장한바 있다. 주홍글씨처럼 철없던 고교시절의 성적에 따라 결정된 인간 등급을 평생 동안 달고 다녀야 하는 가혹한 현대판 신분제를 철폐하고, 대학에서 본격적인 학문 경쟁을 하게 한 뒤 창의적 인재를 선발하는 후기 선발와 패자부활전을 허용하는 평생 학습 체제가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대학입시제도의 절대적 영향을 받는 초․중등학교 교육도 입시 교육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덕․체를 조화롭게 기르는 인간 교육과 탐구․체험 학습 중심으로 정상화될 것으로 보이며, 학생들은 입시 지옥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인격완성이나 자아실현에 몰두하게 될 것이고, 학부모들도 등골이 휠 지경인 사교육비 부담과 촌지, 치맛바람의 유혹에서 해방될 수 있다.
대학들은 무사안일과 자포자기에서 벗어나 동등한 조건하에서 학문 경쟁을 하는데 전념하게 되어 세계적인 명문 대학들이 많이 나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국가적으로도 신자유주의자들이 부르짖는 국가경쟁력도 향상될 것이다.
당시 나의 유토피아적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혁명적 발상이라고 치부했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명문 대학 출신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저항할 것이므로 실패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북대 강준만, 국민대 김동훈 교수가 서울대 폐교론을, 고려대학교 김경근 교수(서울대 출신)는 대학 서열 철폐를 주장했고, 드디어 학벌없는 사회 등 시민단체도 결성되었으며, 사립대학 국공립화론, 국․공립대 통합 법인화론(무상화론) 등 많은 논의의 진척이 있었다.
최근에는 경상대 정진상 교수와 진보적 시민단체들의 연대단체인 교육혁명 공동행동이 주장하는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론(공동학위제)이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 진일보한 것으로서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처럼 학벌 문제는 그동안 꾸준히 담론을 형성해 와서 이제는 진보 정당들이 공약으로 채택할 만큼 하나의 사회적 의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00년 이후 필자는 주변의 비판을 수용하여 소위 수준별 대학평준화를 주장하고 있다. 즉 교육의 평등성만을 중시하여 전체적으로 학력을 하향평준화 시키고, 교육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수월성주의자들의 비판을 수용하는 한편, 한 줄로 고정된 서열을 누그려 뜨려 과열 입시 경쟁을 완화시키고, 대학에는 공정 경쟁의 여건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다.
예컨대, 일정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대학들을 3 - 4등급 정도로 나누어 공동 입시 전형을 하고 교수․학생 교류를 원활하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결 조건이 대단히 많을 것이다. 공정한 대학 평가 및 합리적인 수준별 리그 편성, 대학 간 교육 환경의 격차 해소, 교수의 순환근무제 도입, 기숙사 확충 등 무수히 많은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장애물은 세칭 명문대학을 졸업한 학벌 기득권자들과 명문대학을 가거나 보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강고한 저항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한해에 성적 때문에 30명 이상씩 자살하고 학교 폭력과 왕따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언제까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더 이상 이 땅에 실력이 아닌 간판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 진정으로 국가 백년대계인 우리 교육의 앞날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유․불리를 떠나 대승적으로 판단하는 결단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
“혼자 꿈을 꾸면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는 백범 김구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겨, 처음부터 안 된다고 지레 포기하지 말자.
지금이 바로 비교적 장애물이 적어 정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실현 가능성이 높은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체제(공동 학위제)’부터 시작할 때인 것 같다. 유력한 대선 후보와 정당들이 기득권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수시는 내신 중심으로, 정시는 수능 중심으로’한다는 등 ‘대입 전형 방법 개선’을 통한 ‘지엽적 땜질 처방’에 매달리지 않고, 진보 정당 후보들이 이미 공약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체제’를 ‘통 크게’ 수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